이승만 오명 바로잡기, 건국이념과 정체성 세우는 일
성령체험 통한 기독교 귀의, ‘최초’ 가득한 생애 관통
정읍 연설, 공자유민주주의 국가 필생의 신념 승부수
한강다리 폭파? 전시 상황에서 계획대로 수행된 작전
건국의 아버지, 그러나 6.25 전쟁 통에 한강다리를 끊고 홀로 도망친 대통령, 미국의 앞잡이. 고백컨대 이승만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다였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의에 거부감을 가진다. 전시에 한강다리를 끊고 홀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이승만이 국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했다. 나중에서야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됐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간 양상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은 위대한 민족적 양상을 보인다. 가슴 속에 불이 있다. 정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뜨거운 양심을 따라 행동한다. 나라의 안위에 가슴이 끓은 이들, 불의에 맞서고자 광화문에 나섰던 이들은 공감하리라.
나라의 정체성은 건국이념에서 나온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세운 이름, 이승만이다. 두 번은 알고 싶지 않았던 그를 통해, 그 이름이 새겨진 대한민국의 시작을 다시 보고자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인식은 필자가 서두에서 밝힌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나는 그가 받는 평들이 가진 모욕성과 나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후대가 함부로 재단하고 왜곡한 그의 생의 업적에 통탄한다. 그의 폭발적인 생애는 나와 같은 범인(凡人)이 열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따라갈 수 없을 가슴 벅찬 발자취로 가득하다.
그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남긴 건국이념이란 과연 무엇인지, 더 알고, 배우고 싶게 만드는 참으로 강렬한 생이다. 건국의 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유산, 대한민국에 대한 존경과 자긍이 가슴에서 우러난다. 이승만의 누명을 벗기는 데 이 한 조각 글이 하나의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은 떼어 놓고 논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이제 결코 그를 ‘독재자’, ‘한강다리 끊고 도망친 지도자’, ‘미국의 앞잡이’ 정도로 오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와 같은 위인의 헌신과 사랑으로 이 나라가 시작됐다는 것을 크게 감사하고 자부심을 느껴야 마땅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느 한 사람의 공헌과 업적을 찬양하는 것을 결코 즐기지 않는다. 한 사람의 위대한 성취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도움들로 이뤄지는 ‘하모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나라 건국 대통령의 오명을 바로잡는 것”,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지기까지 어떠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도움과 희생들이 있었는지, 인정하며 감사히 받게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 불이 이 나라를 태우는 데 감히 악용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구한말, 일제시대, 임시정부수립, 독립, 건국, 6.25, 4.19의 굵직한 역사를 지나왔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후대로서 감히 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전쟁 전에도 시력을 잃을 위기, 천재로 불렸으나 수없는 과거낙방, 투옥, 고문, 콜레라, 역병 환자와 시신들 틈에서의 생활, 나라 잃은 설움, 간단히 나열해도 진저리나는 경험들이 그에게 있었다.
그를 수식하는 말 또한 한 단어로 끝낼 수 없다. 외교가,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전도자, 국제법 박사, 독립과 나라를 위한 삶의 발자취가 그를 나타내는 말에 녹아있다.
이승만의 업적에는 유독 ‘최초’가 많다. 대한민국을 시작하는 역사의 부름을 받은 그답다. 한국 최초 일간신문 창간, 영한사전 편찬 최초 시도, 조선 최초 영어 연설,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 추진, 조선 왕족 최초의 개신교 신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 최초의 자유선거 당선 등등.
동·서양사를 통틀어 이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 수식어가 많은 인물이 또 있을까. 6살에 천자문을 떼고 6개월 만에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마스터하여 교사로 활약한 천재성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의 발자취는 집요할 정도로 나라와 민족을 향한 시작에 서 있었다.
최초의 수식어로 장식된 그의 생을 관통한 사건에 ‘성령체험’이 있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접했고, 한성감옥에서 만난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사로잡았다.
성령체험을 통한 기독교로의 귀의는 구한말 당시에는 파격적인 사상이었던 인권존중과 남녀평등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실천하는 기틀이 되었다.
이제 이승만의 오명을 하나씩 바로잡아 보자. 역사에 무지하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이다.
독립 이후 한반도는 세계 강대국들의 장기판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통치 안의 치욕이 바로 그 핵심이었다.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소련은 북한을 차지하여 공산화에 성공했고, 당시 세계에서 공산주의의 입지는 드높았다.
소련 장교 출신 김일성은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시켰다. 그는 소련 스탈린에게 충성함으로써 권력을 부여받았다. 북한 주민을 억압했으며, 북한 땅과 주권을 제 손으로 소련에 바쳤다.
일제에서 갓 벗어난 동포와 민족의 영지를 사욕과 이념을 따라 소련에 팔아넘긴 매국노였다. 외세 앞잡이라 불려 마땅한 것은, 미제 앞잡이라는 오명을 쓴 이승만이 아닌 바로 김일성이었다.
당시 남한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있었다. 갓 전쟁을 치르고 아직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 그 시대의 백성들은 국민의 개념도 몰랐고, 공산주의 이념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때였다.
북한과 남한 내 공산 세력은 국민들을 선전선동하며 한반도 적화를 획책했다. 이승만은 안으로는 공산 세력과 싸우고 밖으로는 외세에 맞서며, 한국의 자유와 독립, 주권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발언으로 인해 그가 받은 분단 획책의 오명 또한 살펴보자. 역사적 사실은 1945년 9월 20일 김일성에게 신탁통치를 지지하라 전달한 스탈린의 지령과, 소련에 나라를 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이북 지역에 공산 정권이 수립돼 있었다는 것이다.
정읍 발언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고, 외세의 입김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이승만 필생의 신념이 탁월한 정세 판단을 통해서 드러난 승부수였던 것이다.
끝으로 그 유명한 한강다리 폭파 일화는 전시 상황에서 계획대로 수행된 폭파 작전이었으며, 이승만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친 뒤 폭파시켰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전시 상황의 전략적 관점으로 볼 때 오히려 늦은 결정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피하지 못할 결정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좌경화된 정세와 이승만 대통령이 받는 누명은 실로 우리 가슴에 멍으로 남은 아픔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와 자유통일을 향한 사명감을 일깨운다.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자유를 위한 나라였다. 세월이 지나며 흐려진 나라의 근본과 정신을 이제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선대의 무수한 피와 눈물, 그리고 기도로 누리는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지키고 가꾸는 것은 후대의 사명인 것이다.
평생 자주독립과 대한민국, 국민을 위했던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2020년 대한민국, 자유를 향해 다시 굳세게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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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평생을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헌신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민족이 종의 멍에를 다시 메지 않기를 간구했다. |
곽예진 리박스쿨 청년 회원 리박스쿨은 이승만-박정희 스쿨의 약자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을 만든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를 연구하는 아카데미 모임이다.책 속으로
이승만은 영어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단다. 바로 기독교 사상이 바탕이 된 서양 국가에서는 개개인의 자유가 보호된다는 사실이었어. 또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와 ‘국민은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라는 민주주의를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지.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와 같은 사상을 채택한다면,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큰 축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 32쪽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18년 1월, ‘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발표했어. 이승만은 그 발표문 에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라는 주장이 포함된 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강력한 독립 의지를 보이면 국제 사회가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게 돼. 그래서 독립 운동가들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대규모 집회를 열도록 건의하게 됐고,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 운동의 시작이었지. - 76쪽
5·10 자유 총선거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어. 전 세계 가운데, 한 나라를 세우면서 자유 총선거를 통해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거든. 또 만 21세 이상의 한국 국민이면 성별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투표권을 줬어. 단순히 투표권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균등한 자유와 권한을 주었으니 엄청난 개혁이었던 셈이야.
우리 역사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어 자유를 누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신분제라는 굴레 속에 살아야 했던 국민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 선거권을 부여한 대사건이 바로 1948년 5월 10일에 있었던 자유 총선거였단다. - 119쪽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국민의 재산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출발했어. 이 같은 건국의 방향을 둘러싸고 당시 한국인의 생각이 다 같지는 않았지.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는 인간의 물질적 복지를 늘리고, 정신적 행복을 가져다주는 올바른 방향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단다.
이것이 이승만의 가장 큰 공적이라 할 수 있어. 국제 정세를 보는 눈과 올바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 그리고 미국을 설득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전략적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 - 125쪽
이승만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을 시행했어. 국민에게 땅을 주고, 교육을 함으로써 일부 계층만 갖고 있던 특권을 전 국민에게 나눠주었지. 이것이 성공하면서 차별이 없어졌고, 양반이라는 단어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어. 옛날에 양반은 특권 계층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이 양반, 저 양반’ 이런 식으로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됐지. 글자 그대로 보통 사람이 모두 양반이 된 평등 국가, 대한민국이 되었단다. - 148쪽
북한의 남침으로 군사 한계선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미국은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권유했어. 하지만 이승만은 절대 한반도를 떠날 수 없다며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끝까지 싸웠지. 그는 전쟁 내내 우리 영토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단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이승만이 ‘거짓 방송으로 국민을 속이고, 혼자 살려고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갔다’거나 ‘일본으로 몰래 망명하려 했다’라고 주장하지. 무척 악의적인 거짓말이지만, 전쟁 초기 열악한 안보 속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고, 미국과 강력한 군사 동맹까지 맺었던 이승만에게 국내외에 많은 적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된단다. -165쪽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휴전 협정을 맺고 떠나야 하는 상황인데, 이승만이 반공 포로 석방 건으로 판 자체를 깨버렸지. 이렇게 되면 휴전 협정이 어려워지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인기는 계속 떨어져 그의 정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것을 알았던 거야. 미국의 약점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을 받아내려 했던 고단수 외교였지. 결국 이승만은 휴전 협정 체결 조 건으로 미국으로부터 3가지 약속을 받아냈단다.
첫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야. 한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미국과 맺은 군사 동맹이지. 미군을 최전방에 배치하여 북한이 남침할 수 있는 24개 길목을 지키게 했어. 미국은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해외에 주둔한 미군이 공격당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지. 북한과 남한의 전쟁이 아니라 북한과 미국의 전쟁으로 생각하고 싸운다는 거야. - 179쪽
태평양전쟁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 어선 활동 구역’ 을 제한하는 ‘맥아더 라인’을 발표했어. 하지만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 무효화 될 예정이었고, 얼마 후면 동해는 일본 어민들의 텃밭이 될 판이었지.
그런데 이승만은 1952년 1월에 이미 미국과 일본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도를 포함하는 해양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그어버렸단다. 그리고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에 한발 먼저 등대를 세우고 군부대를 주둔시켰어. - 221쪽
사람들은 이승만의 계획을 처음부터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 그래서 국가 발전에 꼭 필요한 체제를 지키기 위해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사사오입 개헌으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거야.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유시장 경제의 열매를 마음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 열매를 맺게 한 장본인인 이승만의 부정적인 면만 보고 비난하고 있는 셈이지. - 231쪽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전쟁 중에 앉아 있는 거 같아. 사람들이 나를 나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순순히 좋게 내주려고 해. 하지만 나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똑똑히 알았으면 해. 뭣인지 까닭을 알아야 해결할 것 아냐.”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호소하면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전국이 시위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던 4월 19일까지도 간신배들은 허위 보고를 하고 있었어. 많은 업적을 이룬 건국 대통령의 마지막을 얼룩지게 만들었지.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의 부정선거였고,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 이승만의 지시가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건 국민과 소통하지 못한 것은 잘못한 일이야. - 235쪽
4월 26일 오전 9시, 송요찬 계엄 사령관이 대통령에게 “발포를 안 하면 수습이 안 됩니다”라고 했을 때 이승만은 “발포는 안 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라고 물었고, 이에 송요찬 사령관이 “하야하시랍니다”라고 하자 “그럼 하야하지”라고 했단다.
그러고는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라며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 대답을 독촉했어. 김정렬 장관은 “각하, 저희가 보좌를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했지.
이승만은 이것을 속히 사람들에게 알리자며, 하야 성명을 받아쓰게 했어.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해. 그게 우리 민주주의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하야했단다.
퇴임 후, 각국 대표들로부터 위로 편지를 많이 받았어. 이승만은 “나를 위로하는 편지는 안 받겠소.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하다오. 부정을 보고 궐기하는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니, 이런 날 을 평생 기다렸기 때문이오”라고 답장했지.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 238쪽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나 국방에서나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유언이야.
반드시 자유를 지켜야 해. - 이승만의 유언 - 250쪽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