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1019호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민왕기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영하를 부드럽게 감싸는 눈이, 함박눈 같은 눈이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눈싸움을, 오랜만의 눈싸움을 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 눈싸움은 눈을 처음 본다는 남미 아이와의 새로운 눈싸움, 생경한 눈싸움
그 아이는 눈은 싫은데 눈싸움은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처음 보는 찬 것이 싫었으니까 그래도 친구니까
악의 없이 떨어지는 포물선을 아이들은 사랑했으니까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나는 누구에게 눈싸움을 걸어야 할까
이봐요 마담, 눈이 와요, 눈 오는 날에는 눈싸움을 해야죠 허공을 던지던 놀이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삼십 년 만에 처음 쏟아진 눈
눈싸움을 해야 해 눈싸움을, 하는 생각이 잊힐 만큼 오랜만에 내렸던 눈
지구에서 언제부터 내렸던 건지 알 수 없는 눈, 내력을 모르는 함박눈
이름도 아름다운 뮤하 가에,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고 돌아와 저녁부터 자고 그날 밤 늦도록 눈이 풍풍 내렸다
라지에이터 밸브를 한껏 올렸다 펄펄 끓는 물이 돌고 서늘하고 찬 눈이 오래 쌓였다
쪽창을 열고 밤을 올려다보면 지구가 나를 잊겠다는 듯이 눈을 뿌리고
아이들은 지구를 잊겠다는 듯 꿈 없이도 잠들어 다음 저녁까지 잘 것 같았다
이봐요 이봐, 눈 속에서 우린 뭘 해야 하나요, 백년인 것처럼 천년인 것처럼 눈이 내렸다
- 민왕기 페이스북, 2026년 1월 7일
*
파리에 임시 체류 중인 아니 정주 중인 민왕기 시인의 신작 시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민왕기 시인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그의 페북에서 훔쳐 왔습니다.
시 도둑질인 셈입니다.
그를 세상에 처음(?) 알렸던 시, <곁>(시편지 236호)과 <아늑>(248호)도 알고 보면
제가 도둑질해서 시편지로 옮겼던 것이니,
나의 시 도둑질이 민왕기 시인에게는 그다지 손해는 아니었을 겁니다.
춘천의 공지천에서는 아주 먼 곳이지만
센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민왕기 시인에게 카톡으로 물었습니다.
'뮤하 街'(Boulevard Murat)가 어디 쯤에 있는 거리냐고?
다음날 답변이 왔더군요.
집에서 센강 반대편으로 1km 쯤 걸어가면 나온답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면 언젠가 저도 그 거리를 한 번쯤 걸었던 것 같습니다.
출장으로 여행으로 파리를 여러 번 갔었는데,
왜 제 기억에 "이름도 아름다운 뮤하"는 없는 것일까요?
아무튼 저는 첫 문장에 한참 머물렀더랫습니다.
"뮤하 가에 눈이 내렸다 영하를 부드럽게 감싸는 눈이, 함박눈 같은 눈이"
함박눈은 아니지만, "이름도 아름다운 뮤하"에 "함박눈 같은 눈이"이 내리고 있는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백년이 것처럼 천년인 것처럼 눈이 내"리고 있는 뮤하를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눈 내리는 뮤하게 가보고 싶은 겁니다.
파리는,
뮤하는,
좋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문 하나를 가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눈싸움하는 아이들도 없이
이름도 아름답지 않은
춘천로에 눈이 눈 같지도 않는 눈이 내리는 아침입니다.
2026. 1. 12.
달아실 문장수선소
문장수선공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