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사회학
- 이명숙
무작위로 복용한 날빛 나를 가둔다
독성 강한 말비침
이따금 치명이라
간단히 추락하는 건 이 세계의 불문율
나는 나를 증명할 면허를 포기한 채 나를 믿지 못하고
순한 불구가 되어
먼 지하 주차장 안쪽 재배치 된 민들레
신 없이 완성되는 신화를 상상한들
신불이나 신불자나
그럭저럭 다를 뿐
내부의 초라한 환호 첫눈처럼 사라질
세상이 요리하다 망쳐버린 신도여
신용 제로 무담보 달아나는 나비여
아픔이 흐드러져도 잊지 말라, 사람은
― 『시조시학』, 202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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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흐드러져도 사람은 잊지 말라는 작가의 전언이 마음에 오래 남는 이유는
그만큼 어둡고 열악한 그늘에 내몰린 존재들의 절망과 슬픔이 크고 깊기 때문이다.
빛으로부터 소외되고 출구로부터 먼 지하 주차장 안쪽에 재배치된 민들레는 제대로 피지 못하고
그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순한 불구가 되고 말았다.
지하 주차장 안쪽에 핀 민들레처럼 사회에서 그늘진 곳에 유폐된 존재들은,
그 쓸모를 잃어버린 잉여 인간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독성 강한 말비침”은 “이따금 치명이라”서 “간단히 추락하는 건 이 세계의 불문율”이다.
상대방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넌지시 말로 추락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면 자신을 “증명할 면허를 포기한 채 나를 믿지 못하고” 순한 불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진실을 밝혀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쉽게 뛰어들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더 이상의 신용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낙인찍어 버리는 사회는 영원히 이들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
이들은 무언가 갖춰지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살아간다.
신령이나 부처도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며 신불자도 마찬가지로 크게 다르지 않다.
신용불량자의 삶은 부처도 신령도 구제해 주지 못한다.
주체는 “세상이 요리하다 망쳐버린 신도여”, “신용 제로 무담보 달아나는 나비여”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자본의 노예로 살다가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픔이 흐드러져도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펼치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늘이 졌다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시인의 전언이 씁쓸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조건, 즉 겉으로 드러난 면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접하는 경향이 많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도 하지만 부득이하게 신용불량이 되었거나 실직을 했다고 하여
그 사람의 사람으로서의 존재 가치까지 추락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권리가 없다.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