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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장
남패천의 여덟 장로는 남패천을 떠받치고 있는 실질적인 힘이었다.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한가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오래 전, 남패천이 중원 각파와의 패권다툼을 벌일 때는
뛰어난 무공과 지략으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남패천을 중원사패 중 하나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도 수석장로 노원중은 무공 면에서나 지략 면에서나 천주 구양천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인품 또한 온화하고 포용력이 강해 남패천 무인들은 물론, 정파무림에서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중원무림에서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젊은 시절 그는 각파의 고수들과 많은 비무도 치렀고, 술자리에서 논검으로 숱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무공에 대한 식견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스스로도 잘 모른다고 했다.
“ 어떻더이까?”
제일 먼저 진우청과 열흘 동안 자신의 숙소에서 같이 지내다 다른 장로에게 보낸 노원중을 향해 구양천이 물었다.
노원중은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왜 그러시는지요?”
나유백도 궁금한 표정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닷새만 더 같이 있어봐야겠소. 그때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노원중은 무척 난해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 그건.....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는 말인가요?”
구양혜림도 눈을 반짝이며 얼른 질문을 던졌다. 신중한 노원중의 성격으로 봐서 이렇게 다그치지 않으면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질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글쎄다......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어찌 보면 열흘 동안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아무것도 못가르친 것도 같구나.”
노원중은 여전히 말을 아꼈다.
“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노 장로님. 궁금해 죽겠어요.”
구양혜림은 끈질기게 졸랐다.
“ 어쩌면 그 열흘 동안은 내가 그 아이에게 뭘 가르친 기간이 아니라 그 아이의 움직임을 풀어내지 못해 고민한 기간 같구나.
중원의 그 어떤 무리로도 파헤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 아이의 몸놀림은.”
노원중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구양혜림은 답변을 듣기 전보다 더 많은 궁금증에 휘말렸다.
“ 그런 무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는데..... 희열이자 두려움이었단다.”
노원중은 깊은 눈으로 말을 맺었다. 그 눈빛을 본 구양혜림은 더 이상 질문하지 못했다.
“ 이젠 천주의 부탁대로 정파무림을 준동하러 나서야겠소. 그동안 워낙 격조했던 터라 내 얼굴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좋은 술을 준비해 가야겠소.”
“ 노 장로님께서 나서주신다면야 이 일은 반쯤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나유백이 만면 가득 웃음과 함께 말했다.
“ 자네는 이 늙은이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걱정스럽지도 않은가 보구먼. 쯧쯧!”
노원중이 나유백을 보며 혀를 찼다.
“ 얘기가 또 그렇게 됩니까? 하하!”
나유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진우청과 처음으로 열흘을 지낸 노원중은 노구를 이끌고 중원으로 나갔다.
그 뒤로 다른 장로들도 차레로 진우청을 불러 구양천의 부탁대로 가르칠 만한 것이 있으면 가르치고, 없으면 옛날예기라도 하며 지내게 되었다.
두 번째 서열의 장로 전국산만이 주어진 기간 열흘을 채웠다. 다른 장로들은 길어야 칠일이었다.
수석 장로 노원중처럼 중원 무림을 움직이는데 힘을 쏟아야 할 바쁜 일이 있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도저히 같이 지내기 힘든 놈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열흘을 다 채우지 못하고 쫓아 보냈다.
“ 어떻게 된 놈이 배워할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기에는 눈을 반짝거리며 온통 관심을 쏟는단 말이오.”
세 번째 서열의 장로 원사동의 넋두리였다.
“ 이놈은 강호의 무공이 무슨 춤을 추듯 몇 번 흉내 내보더니 시시하다고 그걸로 끝이오. 그리고는 뭐 색다른 것 없느냐고 이 책, 저 책 빼냈다가는 다시 꽂아 놓기를 반복합디다.
하루종일 내 서재만 왕창 어질러 놓아 더 이상은 못 데리고 있겠소.”
넷째 서열의 장로도 이런 이유로 이레 만에 쫓아 보냈다.
그 이후로는 닷새가 한계였다.
사흘 동안 뭔가 조금은 관심이 가는 것이 있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이것저것 따라해 보기도 하고 귀를 기울이기도 하더니 나머지 이틀은 지루하다고 퍼질러 잠만 잤다고 했다.
신경이 둔해서 웬만한 고함 소리로는 깨울 수도 없어 돌려보낸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세 달 가까이 배울 수 있는 기간이 두 달도 되기 전에 끝나 버렸다. 장로들의 그런 결정에 나유백과 구양혜림은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무공에 있어서는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늘 나유백이라도 남패천 여덟 장로와 함께 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온다면 절대로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루라도 더 늘려 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손에 들어온 떡도 시사하다며 던져 버렸으니 애통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 남패천의 장로들이 손을 들었단 말인가, 하하하!”
구양천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손을 든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잖아요?”
구양혜림이 뾰족한 소리르 질렀다.
“ 포기야 내가 먼저 했지요. 그냥 내 사부님처럼 자연스레 보여주고 스스로 느끼게 해주면 될 것을 음양오행이니, 구궁팔괘니... 뭔 쓸데없는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원.......”
구양혜림의 말에 진우청은 즉각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아무도 수긍하는 빛을 보이지 않앗다. 진우청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 거창하고 복잡한 말들이 결국은 우주의 호흡과 나 자신의 호흡...... 그러니까...... 노인네들의 말대로 하자면,
외기의 흐름과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내기의 흐름을 일치시켜 최대한의 기운을 이끌어내는 것이던데,
그런 것이야 내 사부께서는 차를 마시면서나 말씀을 하시면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자연스럽게 가르쳐 주신 것을 천인합일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말로 떠들어대니 지루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 하하하!”
진우청의 말에 구양천이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복잡한 것일수록 돌고 돌아 종국에는 가장 간단한 원리로 귀결되는 것! 오히려 확실히 배우고 온 것 같구먼.”
“ 하긴, 가장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 가장 완전한 것일지도 모르지.”
어이없는 표정을 하던 나유백도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진우청을 구슬렀다. 자신 역시 나름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 어쨌든 오늘은 전음을 익히도록 하자. 어떻게 된 놈이 그런 것도 하나 배우지 않았단 말이냐?”
나유백은 그동은 수십 번도 더한 푸념을 다시 토했다.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도, 특히 남패천주 구양천을 상대로 오십 합을 막고서도 손목을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너무 모르고 있는 진우청이 어이없는 것이다.
“ 가르치기야 잘 가르쳤지만 제자 놈이 우둔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고 하지 않았소!”
진우청은 사부를 두둔하는 볼멘소리를 질렀다.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이상한 춤만 추게 했다고 황산 쪽을 쳐다보며 볼멘소리를 칠 것이지만 이젠 나유백을 향해 고함을 치고 있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재검법이 뭔지도 모르고, 전음에 대해서도 지식이 거의 전무하단 말이냐?”
나유백이 혀를 차며 소리를 높였다.
전음에 대해 진우청이 아는 것이라고는 강서지부에서 구양혜림을 처음 만난 날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들려줄 때 고막 속에서 곧바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 노인장...... 배고픈데 밥 먹고 합시다!”
진우청은 구양천에 대한 노인장이란 호칭을 여전히 바꾸지 않고 있었다.
“ 허허, 이놈이!”
나유백이 눈을 부릅떴다.
“ 먹어야 힘이 나서 공부도 잘될 것 아니오. 난 속이 비면 내 이름도 까먹는 체질이오. 그러니 어서 점심부터 먹읍시다.”
점심때가 되려면 좀 멀었지만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빠져나갈까 기회만 노리던 진우청은 점심 핑계를 대며 고집을 부렸다.
“ 킥킥!”
옆에서 지켜보던 구양혜림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소를 토했다. 현 강호에서 남패천주 구양천과 태상호법 나유백을 이렇게 곤란에 빠뜨릴 사람은 없었다.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나선다면 황제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근 한 달 동안 진우청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 그래, 이놈아! 관두어라. 못 배우면 네놈이 답답하지 내가 답답할 것이더냐.”
마침내 나유백이 뒤로 나자빠졌다.
“ 좀 이른 감이 있지만 점심을 들기로 하세.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하게나.”
구양천이 옅은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을 달랬다.
“ 역시 주인장의 도량이 훨씬 넓으시오. 애초부터 쉬엄쉬엄 했으면 나도 이러지 않을 것이오.”
진우청은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은 후 진우청은 얼른 천주전을 빠져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 지독한 노인네들!”
처소에 도착한 진우청은 머리를 흔든 후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동안 머리 아픈 공부를 하며 쏟아지는 졸음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오늘 오후는 만사를 제쳐놓고 낮잠을 즐길 생각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진우청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진우청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이 깨었다. 구양혜림과 함께 비원각주 원다영이 찾아왔다.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연 진우청은 의혹어린 눈으로 원다영을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천주전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구양혜림이 도맡았다. 구양혜림에게 다른 일이 있을 때는 운지라는 시녀가 전했다.
천주의 큰 며느리이자 비원각주의 방문은 그만큼 특별한 일이 있다는 말이었다. 특히 그녀는 시녀들도 대동하지 않고 구양혜리만 대동했다.
“ 쉬지도 못하게 해서 미안해요. 우리를 따라가야겠어요.”
원다영은 빠르게 말했다.
“ 무슨 일인지요?”
모처럼 만의 휴식을 빼앗긴 진우청은 입맛을 다신 후 물었다.
“ 북제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 북제성?”
진우청은 잠이 싹 달아나는 느낌을 받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 그래요. 그곳에서 사람들이 왔어요.”
구양혜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청은 눈을 끔뻑거렸다. 조만간 북제성과 연락이 닿으면 장소를 정하고 그곳으로 가야 할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왔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뒤이어 대체 어떤 인간들일지 구름 같은 궁금증이 함께 일었다.
얼마 전에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눈썹 없는 노인!
그리고 사부!
모두 북제성과 관련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같은 곳의 사람들이 이곳 남패천에 왔다는 말이다.
“ 고, 공자!”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진우청이 원다영보다 한 발 앞서 문을 빠져나가자 원다영과 구양혜림은 멍하니 진우청을 쳐다보다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 그런데 천주전이 아니라 왜 내성이오?”
북제성에서 온 중요한 사람들이 천주전에 있을 줄 알았던 진우청은 본당도 아닌 내성으로 안내하는 원다영 모녀를 보며 물었다.
“ 그건 가 보면 알아요.”
구양혜림은 짧게 대답한 후 내성의 한 접객실로 진우청을 안내했다.
크르르-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선 진우청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소리에 흠칫 신형을 굳혔다.
소리의 근원지는 넓은 접견실 한쪽에 버티고 선 세 마리의 동물에게서였다.
두 마라의 흰 늑대와 한 마리의 검은 표범이었다.
진우청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세 마리의 짐승을 살펴보았다. 야수의 기질을 조금도 잃지 않은 눈에, 희고 긴 털이 온 몸을 뒤덮은 두 마리의 백랑은 하나같이 덩치가 송아지만 했다.
그것도 갓 태어난 송아지가 아니라 일 년쯤 자란 송아지만 했다.
반면, 표범은 늑대와는 반대로 온몸에 먹칠을 칠한 듯 잡티 하나 없는 검은 색이었다. 덩치는 오히려 늑대보다 작았다. 그건 늑대들이 워낙 커서 그런 느낌을 준 것이다.
그러나 떡 벌어진 가슴과 커다란 앞발은 늑대 두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도 단번에 날려 버릴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이런 괴물 같은 짐승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진우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남패천주 구양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태상호법 나유백과 몇몇 장로들의 모습도.
그 옆으로 이남 일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청은 북제성에서 왔다는 인물들이 이들임을 직감했다.
또한 그들이 이 짐승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도. 이런 짐승들을 데리고 왔기에 천주전까지 오지 못하고 내성 접견실에서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옆에 궤짝 세 개가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짐승들을 그곳에 넣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숨긴 채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진우청은 비원각주 원다영을 쳐다보았다. 진우청의 심중을 읽은 원다영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르르-
진우청의 덩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늑대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시 으르렁거렸다.
포효하는 것도 아닌 낮은 소리였지만 웬만한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오금이 얼어붙고 혼백이 달아날 만했다.
“ 가만 있어, 설아.”
가운데 있던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던 늑대가 강아지처럼 꼬리를 들썩거리며 눈을 내렸다.
진우청은 그제야 짐승들을 끌고 온 인간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방금 낮은 소리로 늑대를 진정시킨 여인은 이십대를 갓 넘긴 나이쯤 되어 보였다.
표범의 털 색깔만큼 짙은 흑색의 경장을 차려입은 그녀는 군살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한 몸매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쌓았는지는 그 몸매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 역시 세필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한 호흡에 그린 것처럼 몸매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단지 눈꼬리가 북방 여인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위로 치켜져 있어 자신이 고삐를 잡고 있는 표범 못지 않게 사나운 느낌을 주었다.
여인 양쪽에 앉아 있는 사내 둘은 모두 삼십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두 사람 모두 짙은 회의 차림에 평범한 용모였지만 북제성이란 단어로 인해 그들을 절대로 평범하게 느낄 수 없었다.
그들 역시 처음 들어오는 순간부터 뚫어져라 진우청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진우청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을 것이니 그건 당연한 반응이리라.
진우청은 그들에게서 호감과 반감을 같이 느꼈다.
사부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면 더없이 반가운 사람들이겠지만 자신을 기필코 죽이려 했던 눈썹 없는 노인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반감이 뒤따랐다.
그런 마음이 진우청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며 세 사람의 시선과 얽혔다.
제일 먼저 여인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진우청의 눈에서 무공의 깊이는 물론이고 한 조각의 내심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상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여인은 공력을 돋우며 진우청의 시선을 붙잡아갔다. 여인의 아미가 좀 더 찌푸려졌다.
어느새 진우청의 시선은 여인의 도발을 무시하며 사내들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뚱하게 세 사람을 일견한 진우청은 구양천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 이분들이오, 북제성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진우청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 그, 그렇네. 실례했구먼 우선 앉게나.”
진우청과 세 사람의 대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던 구양천이 움찔하며 진우청에게 자리를 건넸다.
“ 먼저 인사....”
“ 창룡금시를 가지고 있나요?”
나유백의 말을 가로막으며 여인이 진우청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우청은 속으로 울컥하고 반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사부의 그림자를, 사부의 체취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이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들은 오로지 창룡금시인지 뭔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 우선 인사부터 나누는 게 순서가 아니오?”
진우청은 창룡금시에 대한 대답 대신 그렇게 대꾸했다.
“ 창룡금시를 모른다면 우린 인사를 나눌 필요도, 더더구나 이렇게 마주할 이유조차 없어요.”
여인은 매몰차게 말하며 말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우청의 대답을 재촉했다. 진우청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술을 움직였다.
“ 금시라면 황금으로 만들어진 열쇠를 말하는 모양인데......”
“ 헛수고했어요, 돌아가요!”
진우청의 말을 끊으며 여인이 발딱 일어섰다. 그러자 양옆에 앉아 있던 중년인들도 끈이라도 묶인 듯 동시에 일어섰다.
진우청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진우청의 설명은 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 이, 이보시오!”
한기가 온 사방으로 뻗어나갈 듯 휑하니 일어서고, 서자마자 등을 돌리는 이남일녀의 모습에 나유백이 당황한 얼굴로 신형을 움직였다.
크아앙-
나유백이 앞을 막아서자 여인이 몰고 있던 흑표범이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아가리를 벌렸다.
용암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붉은 입속과 단검 같은 송곳니를 보며 산전수전 다 겪은 나유백도 일순 온몸이 경직되었다.
“ 앞을 막는다면 모조리 베겠어요.”
여인이 표독스런 눈으로 나유백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롭게 느껴지던 눈에서 얼음장 같은 한기가 뻗어 나오자 아가리를 벌리고 위협하는 표범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여인이라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단 백명만으로도 천하사패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북제성의 힘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성질 참 고약하군!”
일촉즉발의 순간 진우청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거침없이 걸어나가던 여인이 문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굳은 듯이 서 있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미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는 여인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달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파앗-
파공은 한 줄기가 정적을 사정없이 깨뜨렸다. 동시에 희뿌연 섬광 한 가닥이 허공을 쪼개 나갔다.
여인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여인의 오른손에 감아 쥐고 있던 표범의 목줄이 어느새 풀어지고 기다린 채찍으로 변해 진우청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을 몇 개로 쪼갤 만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진우청의 목을 향해 영사의 혀처럼 뻗어나가는 채찍 끝은 중원 그 어느 문파의 쾌검보다 빨랐다.
북제성의 무공은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채찍의 공격을 받는 진우청의 대응은 전혀 반대였다. 두꺼비처럼 느릿한 움직임!
진우청의 상체는 그렇게 느리게 느껴지며 한 뼘쯤 뒤로 젖혀졌다.
휘리릭-
진우청의 목을 꿰뚫을 듯 날아온 채찍은 스치듯이 진우청의 목을 비껴나며 여인의 손으로 감겨들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마른 침을 삼켰다. 등 뒤에 있는 목표물을 보지도 않고 섬전같이 빠르게 채찍을 날리는 여인의 편법이나,
그런 채찍을 권태롭게 느껴질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내는 진우청의 동작은 하나같이 전율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여인의 어깨가 다시 한 번 미세하게 움직였다.
쌔액-
혼백을 끊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채찍이 종횡으로 흔들리며 그물처럼 진우청의 몸을 휘감아갔다.
언제 회수되고 언제 출수되었는지 보지도 못했지만 채찍은 어느새 진우청의 몸 한 치 앞에서 그물이 되어 진우청의 전신을 난자해 갔다.
스스스-
이번에도 진우청의 손이 느린 듯 뻗어 나왔다. 그러나 그물망을 만든 채찍과 마주하는 순간, 진우청의 손은 폭발하듯 움직였다.
짜자자작-
가슴이 뻥 뚫릴 듯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진우청의 몸을 뒤덮어가던 채찍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얼음장 같은 여인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자신의 공격을 두 번이나 무위로 돌린 것도 모자라, 난무하는 채찍 끝을 때려 똑같이 날아오게 만들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여인이 이번에는 손목을 크게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서지 않은 채였다. 그것은 북제성이라는 이름,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확신하는 자존심 같았다.
파아앙-
대기를 두드린 채찍에서 가죽 북이 터지는 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채찍에 실린 힘이 막대하는 말이었다. 그런 힘을 실은 채찍이 회초리처럼 곧게 뻗어 진우청의 허리를 쓸어갔다.
이번에는 피하거나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본신의 내력으로 상대를 하려는 수법이었다. 채찍이 날아들기 전에 진우청은 한 발 앞서 발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상체가 흐릿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진우청의 신형은 어느새 쓸어오는 채찍을 향해 마주쳐 가고 있었다.
피해도 위험할 판국에 곰처럼 막무가내로 부딪쳐 가는 진우청의 움직임을 보고 구양혜림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태상호법 나유백도 곧 출수라도 할 듯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만큼 두 사람의 대결이 살벌했다.
파앙-
채찍과 진우청의 양 손바닥이 마주치며 폭발음에 가까운 파공음이 울렸다. 뒤이어 진우청은 손바닥을 움직여 여인의 채찍을 감아쥐었다.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으로서 그 끝이 누군가에 잡힌다는 것은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 검을 빼앗기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
“ 하앗-”
날카로운 일성과 함께 여인은 손목을 어지럽게 흔들었다. 긴 회초리 같던 채찍이 다시 파도처럼 물결을 치며 그 파도가 진우청의 손을 향해 뻗어나갔다.
부드럽게 굴곡지며 뻗어나가는 파도였지만 그 속에는 거석을 부러뜨릴 힘이 담겨 있었다.
그대로 채찍 끝을 잡고 있으면 그 파동이 고스란히 손목을 두드릴 것이다.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우청은 그것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여인보다 더 세게 흔들어버렸다. 작은 파도가 더 큰 파도에 밀려 되돌아갔다.
아울러 북제성이라는 이름의 자존심도 진우청의 손목에 막혀 튕겨나가는 상황이었다.
순간!
크아앙-
주인의 불리를 느꼈는지 검은색의 표범이 포효를 토하며 도약했다.
“ 안 돼!”
여인이 마침내 돌아서서 소리를 질렀지만 표범은 이미 진우청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 엇!”
다급한 고함을 토한 진우청은 급히 채찍을놓으며 상체를 뒤로 뺐다. 인간의 움직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빠르기였다.
여인의 채찍보다 오히려 빠르게 느껴지는 도약이었다. 특히, 도약하며 짓쳐드는 순간의 이글거리는 그 눈빛은 인간의 심혼을 얼릴 만큼 흉맹했다.
순간적으로 두 자 가까이 상체를 뒤로 젖혀 벽에 등을 부딪친 진우청은 그 탄력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졌다. 그곳은 표범의 아가리 앞이었다.
퍼억-
뭔가 이질감이 섞인 파육음이 터졌다.
“ 아악!”
구양혜림이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진우청의 오른팔이 표범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들어 팔꿈치까지 먹혀 있었다. 그녀가 보기엔 그랬다.
그러나 표범의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다.
캐에액-
포효와는 전혀 다른 괴성을 지른 표범이 진우청의 팔을 토해내며 바닥을 구르다 뛰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마치 사냥꾼의 화살을 맞은 맹수의 몸짓 같았다.
“ 흑풍!”
여인이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표범에게로 달려갔다.
크앙!
크르르-
크르르!
몇 번 괴로운 몸짓을 하던 표범이 다시 도약할 자세를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함부로 도약은 하지 못했다.
대신 두 마리의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앞으로 나섰다.
“ 이 못된 짐승들을 물리지 않으면 주먹 대신 이걸 아가리 속으로 처박아 버리겠소.”
등 뒤에서 용곤과 호곤을 뽑아든 진우청이 표범과 늑대들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여인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진우청과 아직도 괴로운 몸짓을 하고 있는 표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표범이 도약하며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 유일한 허점인 아가리 속으로 진우청은 주먹을 뻗어 넣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파탄이 드러난 초식의 허점 속으로 주먹을 쑤셔 넣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입 속으로 굴러들어 온 먹이라 할지라도 그게 목구멍 끝까지 쑤셔들고, 목젖을 세차게 강타하면 절대로 씹어 먹을 수 없다. 본능적으로 토해내기 마련이다.
흑표범은 그래서 진우청의 팔을 토해낸 후, 목젖과 목이 강타당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며 튕겨 오르기를 반복한 것이다.
“ 이....이!”
분기를 참지 못한 여인이 발작적으로 채찍을 끌어당겼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채찍을 당겨서 다시 공격할 태세였다.
여인의 손이 한층 더 빠르게 움직이려는 찰나!
“ 마름모꼴의 옥패 말이오?”
진우청이 자신의 동작만큼이나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익-
다시 미세한 파공음이 울렸다.
그러나 이번의 것은 여인이 채찍을 휘둘러서 생긴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출수할 태세를 잡은 사내들이 신형을 움직이며 생기는 소리였다.
“ 자세히 설명해 봐요!”
분노와 어처구니 없는 감정이 뒤섞인 표정의 여인이 잠시 진우청을 쳐다보다가 빠르게 말했다.
“ 황금으로 만든 열쇠란 말과는 달리, 어린애 손바닥만 한 옥패에, 한 쪽에는 비상하는 용무늬가 그려져 있고, 다른 한 쪽에는 황금빛 열쇠 무늬가 양각되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오랜 기억을 떠올리는 듯 진우청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설명했다.
“ 마, 맞아요. 그런데 왜?”
“ 뭐 말이요?”
“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여인은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 차근차근 말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여유도 주지않고 성질부터 부렸잖소?”
진우청이 대꾸하자 여인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잠시 동안 말문을 닫았다.
“ 잠시 오해가 있던 모양이구려. 그러니 다시 앉으시오. 차근차근 얘기하도록 합시다.”
다짜고짜 일어선 여인이 방문을 향해 나갈 때는 자신드링 헛짚고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던 나유백은 가슴을 쓸며 여인과 두 사내에게 다시 자리를 권했다.
“ 미안해요!”
잠시 망설이던 여인은 사과의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 사과도 할 줄 아는 것을 보니 얼음마녀는 아닌 모양이군!’
내심 중얼거린 진우청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 당신들을 어떻게 믿소?”
진우청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자신의 존재는 이들에게 확인되었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북제성에서 온 사람들이 맞는지도 몰랐고, 그렇다 하더라도 눈썹 없는 노인과 같은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 이들의 신분은 내가 보장하네. 북제성주의 친필 서신과 수결이 있네.”
구양천이 나서서 진우청의 말에 답했다.
“ 그야 노인장 입장이지, 내 입장이 아니지요. 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도 않소!”
잘라 말한 뒤 이번에는 진우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난 을지소소예요!”
여인이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을지?”
진우청은 여인의 성을 되뇌었다.
복성에다 중원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이었다.
“ 뭐, 잘못 됐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우청을 보며 여인이 쏘아붙엿다.
“ 아, 아니오. 그런데 다른 두 분은 벙어리요?”
진우청은 여인 양옆에 있는 사내들을 보며 물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은 벙어리로 오해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 두 분은 중원 말이 서툴러요. 그래서.....”
“ 그럼 벙어리나 마찬가지군.”
진우청은 입맛을 다시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마도 앞으로 이들과 같이 북제성주를 만나러 가며 긴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두사람이 중원 말을 모른다면 성질 고약한 이 여인하고만 계속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건 정말 피곤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 죽... 는다!”
한 사내가 진우청을 매섭게 노려보며 서투른 중원 말을 했다. 아무래도 벙어리란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 말은 서툴러도 알아듣는 것은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러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을지소소가 매서운 눈초리로 진우청을 쏘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진우청은 피식 웃음을 흘린 후 다시 을지소소를 쳐다보았다.
“ 북제성주와는 어떤 사이시오?”
진우청의 질문에 을지소소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그리고 알려줄 수도 없어요.” 을지소소가 냉랭하게 답했다.
“ 그렇다면 나 역시 창룡금시를 보여줄 수 없소. 충분히 설명했으니 그것으로 확인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오.”
“ 그건.....”
진우청의 말에 을지소소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일행인 두 사내를 쳐다보았다.
두 사내들 역시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좋아요. 하지만 한 가지 시험은 더 해야겠어요. 이건 우리 의견이 아니라 성주님 지시예요.”
을지소소는 딱 부러지는 소리로 말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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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햐였습니다.
ㅈㄷㄳ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