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원을 가진 보드게임. 체스. 그 기원은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게임은 여전히 거대한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행사는 평범하지 않다. 10년 마다 개최되는 이 체스 대회의 체스 말은―――――
다름아닌 '인간'이었다.
머리가 어지럽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것 같다. 천천히 기억을 되돌려보자. 그래, 어떤 여자애를 만났고 육교가 무너져서―― 그래! 어떤 여자가 나를 구해줬지! 그 사람 목소리가 꽤나 감미로웠었는데…
"어이, 빨리 일어나."
그래! 바로 이 목소리였어. 지금 깨달은건데, 내 기억력은 정말 대단한 모양이다.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시간이 없다니까? 일어나라고!"
짝!
"앗!"
아윽,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볼이 얼얼한 것이 뺨을 맞아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푹신푹신한 침대가 느껴졌다. 눈을 비비고 맑은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니 흰 방에 들어와있었다. 어떤 병원의 병실같은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침대의 바로 옆에는 나를 구해주었던 금발의 여성이 있었다.
"일어났다."
"뭐, 뭐에요?"
다시 깜짝 놀란다. 그건 둘째치고 다시 보니까 더 예쁜 것 같다. 그런 그녀는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굳게 닫혀있는 문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런 행동에 의아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저기, 당신 누구세요?"
"아직 모르나?"
당연히 내가 알고있을 것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알 리가 없지. 휴학해서 아르바이트나 간간히 하면서 쉬고 있었고, 조만간 바다에라도 놀러 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테러라던가 일어나버리는데 그런 상황을 쉽게 이해한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네. 잘 모르겠는데요."
"아이, 쯧. 조금 이따가 설명해줄게. 우선 간단히 얘기하면, 넌 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어."
"위험이요?"
위험? 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데, 스스로도. 딱히 위험한 녀석들이랑 어울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고라고 해봤자 교통사고같은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딱히 한국에서 위험할 일이 별로……."
"목숨이 위험하다고. 우선은 그것만 명심하고 있어. 넌 지금 꽤나 위험한 녀석들한테 노려지고 있다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가 않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가 위험한건지 원. 그럼 다음엔 이걸 물어볼 차례다.
"저기, 그럼 당신은 누구죠?"
"난, 음…… 뭐라고 해야 될까. 우선은 니 경호원 정도로 생각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기도 하니까."
"이름은요?"
"아리엘. 성이 있기는 한데 꽤 길거든. 그리고 넌 모르겠지만, 나이는 얼마 차이 안나니까 편하게 불러."
"음, 그렇다면야…."
아리엘. 마치 지구 이름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외국이름이라기에는 뭔가 색다르고……. 이름에 대해서 딱히 뭐라 지적할 만한 위인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아리엘은 손가락을 좍 펴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었다. 옆에 놓인 테이블을 보니 미지근해 보이는 물 한 잔과 내가 챙긴 우리집의 식칼과 은으로 만든 검에 보석을 박아 장식한 듯한 세이버(Saber)가 테이블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리엘은 시계를 꺼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세이버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서 침대에서 일어서 신발의 끈을 조였다.
"슬슬 시간이야. 가야겠어."
"어딜?"
"차가 도착했어. 우린 지금 떠나야 해."
그녀는 문고리를 붙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빨리 가방을 등에 매고 신문지에 싸인 식칼을 움켜쥐었다. 이것이라도 있어야 할 것같다. 아리엘이 문을 열고 나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나갔다. 깨끗한 병실에 비해서 밖은 완전히 폐허였다. 벽은 낡아서 금이 가 있었고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삐걱거리며 내 마음을 졸이게 했다. 계단을 내려가고 긴 복도를 통과해서 중앙 홀로 나오니 거대한 철문이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리엘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조심."
"응?"
쾅!!
아리엘은 지체없이 발로 거대한 문을 걷어차 버렸다. 그러자 굉음을 내며 철문이 일그러지면서 앞으로 나자빠졌다. 먼지가 날리며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걸어나갔다.
"터, 터프하네."
"뭐라고?"
"아, 아냐."
그녀는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어 나갔다. 골목을 돌고 돌다보니 어느새 걷기 시작한 지 10분 쯤 된 것같다. 아리엘을 따라 걸어서 도착한 곳은―――
"우리 집이네?"
"응. 다른 사람들이 짐은 대충 챙겼을거야. 우린 몸만 가면 돼."
우리 집까지 알고 있다니! 아니, 번호에다가 이름까지 알고 있으니 그정도는 일도 아닌가. 아리엘은 성큼성큼 우리 집의 건물 앞에 서 있는 흰 승용차를 향해 걸어갔다. 승용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던 어떤 남자는 창문을 열고 아리엘과 나를 쳐다보았다.
"왔냐. 신입도. 힘들텐데 얼른 타라."
"아, 음."
남자는 흰색의 짧은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였다. 옷차림은 깨끗한 정장 차림에 눈동자는 검은 빛을 띄고 있었다. 나이는 나와 많이 차이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아리엘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타서 안전벨트를 메고 세이버를 문짝에 세워두었다.
"아, 한세훈이라고 했지? 반갑다. 설명은 가면서 해줄게."
"응. 설명을 해준다니 다행이네."
그는 곧 시동을 걸고는 출발했다. 차가 움직이며 고속도로에 들어갔다. 우리 동네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설명이나 듣자.
"내 이름은 이서진이라고 하고, 이쪽은 아리엘. 나랑 아리엘은 체스 경기에 소속되어있는 상태지."
"체스?"
"네가 알고 있는 체스가 아니야. 룰도 전혀 다르고, 체스 말의 갯수나 종류도 달라. 하지만 현존하는 체스 대회중 가장 스릴있고, 위험한 게임이지. 하지만 보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큰 행복이 될거야."
체스가 위험하다니. 다들 개그맨인건가?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음, 그게. 너도 체스 말 중 한 명이야."
"내가?"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가 안된다. 두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왠 체스이야기가 나오고, 저 녀석은 도대체 뭐고, 이 여자는 도대체 뭐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해가 안가겠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리가 될거야."
"그 체스 말은 도대체 누가 뽑는거지?"
서진은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짜 의외다. 그런 질문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 사실 그건 아무도 몰라. 누가 뽑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선택 되었는지는 알 수가 있거든. 우리에게는 각자 예언자(Prophet)이 있거든."
"예언자?"
"응. 흑팀과 백팀 각각 한 명이 있지. 그들은 공식적인 체스 클래스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게임에 참가할 수 없는 건 아니야. 예언자이면서 아쳐인 사람이 한 분 계시거든."
아쳐? 체스에 아쳐가 있다고? 맞다. 확실히 룰이 다르다고 했지.
"그럼 그 예언자들은 어디서 온거야?"
"그게… 밝혀진 바가 없어. 그들은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지도 않아."
"그럼, 이 게임에는 클래스가 어떤 것들이 있지?"
서진은 또 한 번 웃었다. 내가 또 의외의 질문이라도 던졌나보군.
"너는 정말로 다른 녀석들이랑은 다르네. 그래, 알려줄게. 총 인원은 10명 까지 가능해. 선택만 되면 어떠한 조건도 필요 없지. 클래스는 킹, 퀸, 나이트, 아쳐, 비숍, 매지션, 디펜더가 있어. 각 클래스에 필요한 인원은 없고, 한 쪽에만 치중되어도 상관없지. 사실 치중시키는건 자살 행위지만."
"그럼 나는?"
빨간 신호가 켜진다. 어느새 고속도로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주변에는 넓은 논과 밭이 펼쳐져있고, 높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작은 집이나 5층 정도 높이의 상가 뿐.
"가장 중요한 클래스 중 한 명이지. 네 클래스는―――――"
"디펜더(Defender)야."
첫댓글 왠지 좋은 소설이 나올거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잘 읽었고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접하지만 노력하겠습니다 !
원래 체스 게임이랑 다르네요. 디펜더는 뭘까 영어 단어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ㅋㅋ
ㅎㅎ; 기존 체스와는 많이 다르죠.
딱히 표현할 제목이 없다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