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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소년이 나오길래 사진교체..>
1992년 모 대학 운동장에서는 용병 테스트를 위시한 연습경기가 있었읍니다. 늦봄의 쌀쌀한 날씨속에 스탠드에는 각 구단의 관계자들이 모여 이들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중 이날 경기를 체크하던 포항쪽 프런트가 당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안양의 박병주 감독님에게 2명의 선수를 지목하며 ' 감독님'...감독님이 보시기에는 어떤 선수가 더 괜찮은거 같읍니까?'...라며 슬쩍 넌지시 물어보자 운동장의 주시하던 박감독님 고의성 반칙을 당하자 바로 보복태클을 하고 엘로우 카드를 받아드는 한 성깔있어 보이는 젊은 선수를 지목하며 ' 저놈아...근성도 있구... 거..괜찮네...' 라며 말을 합니다.
이것 때문이였는지는 몰라도 포항에서는 당시 이 어설퍼만 보였던 22살의 보스니아 출신의 어린 왜국인 선수와 단돈 8만달러라는 헐값에 계약을 하게됍니다. 그 당시 포항으로써는 거의 줍다시피한 이 선수가 바로 92-96년까지 K-리그를 뛰며 147게임에 출장해 44골.35도움을 기록하면서 그 당시 한국팬들에게는 거의 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직도 많은분들이 잊지못하는 K-리그 20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외국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1970년 5월 21일생의 라데 보그다노비치(Rade Bogdanovic) 입니다.
당시 구 유고상황은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 같은 연방 국가들은 민족 분규로 내전이 터져 그들이 가진 모든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희망이 없는 암울한 시절에 국내리그에서 뛰던 유능한 선수들은 자의반 타의반 유니폼을 벗고 군복을 입어야 했던 그들로써는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수없이 해외로 나가야만 했던 고달픈 시절이였읍니다.
흐리스토 비다코비치.페르데락 미야토비치.시니사 미하일로비치 같은 어느정도의 네임벨류가 있는 선수들은 바로 빅리그로 갔지만 청소년 대표팀등을 거치며 기량면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이들보다는 경력이 모자랐던 라데는 조국의 내전으로 모든것을 버린채 단지 꿈을찾아 돌고돌아 지구 정반대에 위치해 있던 한국까지 오게됍니다.그런 라데의 꿈은 다행히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는지 한국 관계자들에 눈이뛰며 모든것이 낯설었던 대한민국에 맨몸 하나로 뛰어들게 됍니다.
그후 라데의 험난한 프로생활이 이어지는데 그는 이런 용병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이 모든걸 극복하고 대한민국 프로축구사에 엄청난 자취를 남기게 됍니다. 동유럽 선수들의 특기중? 하나인 다혈질적인 성격때문에 문제도 많이 일으키며 소속팀 감독들 골치깨나 아프게 했지만 그 누구보다 팀을 사랑했고 일단 그라운드에 나서면 온몸을 내던지는 모습에 투지와 근성의 화신이란 찬사를 받으며 한국에서 첫 딸을 낳아서 그런지 본인 스스로도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 말하며 적응력 면에서도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는 외국인들도 손사래 치던 됀장국.청국장등도 거침없이 먹을정도로 완벽했읍니다.
이러한 모습과 94년도에 득점왕과 mvp를 거머쥐는 실력이 뒤받침돼 인기면에서도 단지 포항의 스타를 넘어서 외국인으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전국구 스타로 발돗음 하게됍니다.후에 유고 대표로 한국을 찾을당시 관중들이 라데를 소개하자 기립박수를 쳤을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읍니다.이러한 면은 그의 화끈한 성격이 의외로 한국정서와 궁합이 잘맞았던 모앙입니다.
포항-브레멘간의 친선경기후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장면
특히 라데를 말하면 결코 빼놓을수 없는 골을 넣으면 유니폼을 뒤집어쓰며 기뻐하던 골 세레머니와 뭐니뭐니 해도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불리던 황선홍 선수와 투톱을 이루며 활약했던 모습은 포항팬들을 넘어 일반 축구팬들에게도 결코 잊을수없는 기억을 남김니다.당시 포항에는 황선홍선수 외에 우리의 영원한 캡틴 홍명보선수가 수비진을 조율하는 지금으로썬 전설이 돼어버린 H-H 라인과 서효원.박태하.노태경.김기남.이영상 등이 있었던 이 때가 인기나.실력면에서나 포항 최고의 전성기가 아니였나 생각해봅니다.
흔히 축구의 투톱을 이야기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조합을 타켓형과 포워드를 같이쓰는 빅 AND 스몰을 꼽는데 라데나 황선홍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 체격이나 스타일등 모든면이 상당히 흡사했읍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런 발군의 활약을 펼칠수 있었던건 두 선수 모두 미들진의 도움없이 혼자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고 비슷하지만 어찌보면 다른 황선홍 선수의 세련돼면서 감각적인 움직임에 때에 따라서는 쉐도우까지 볼수있었던 능력과 라데의 저돌적이고 파이팅이 넘치는 스타일이 서로의 부족했던 부분을 절묘하게 메꾸어주며 K-리그 최강의 투톱이란 별칭을 얻게됍니다.올해 전북에서 활약했던 마그노와 에드밀손이 이들과 많이 비교돼는데 개인적으로는 황선홍-라데 투톱이 파괴력이나 상대 수비수들에게 주는 위압감에서는 월등했다고 봅니다.
당시 황선홍 선수는 예전의 악법중 하나였던 드레프트제에 반발해 그의 소망이기도 했던 유럽진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독일로 진출 했읍니다.하지만 아쉽게도 치명적인 부상으로 꿈을 접은채 결국은 쓸쓸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돼는데 훗날 독일에서의 시간들은 고통 그 자체였다는 황선수의 회고가 당시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갑니다.이러한 고난속에서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준 소속팀 포항에 대한 배려인지 그는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한 1995년 라데와 함께 20년 K-리그 역사상 최고의 투톱이란 명성과 함께 그에 걸맞는 기록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특히 라데선수 황선홍 선수를 무지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다른 선수랑 같을 뛸때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 구겨가며 툴툴 거리다가도 황선수가 나오면 어린애처럼 싱글벙글 웃어가며 좋아라 경기를 했는데 동대문에서 라데의 도움으로 황선수가 골을 넣고 서로 상대방에 볼에 입을 마추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 장면 당시 좀 화제였죠.=.=:) 이렇게 서로 죽이 척척 맞아서인지 황선홍 선수는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리그 8경기 연속골의 신화를 라데는 K-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골과 도움의 두자리수를 기록하는 10-10 클럽을 기록하게 됍니다.당시 경기수가 팀당 36경기 정도인걸 생각하면 그 당시 이들의 기록은 엄청났었고 상대팀 감독들까지도 두선수 막는거 자체가 불가능 하다며 푸념을 할정도였읍니다.
1995년 리그는 지금과 달리 전.후반기 양대리그로 진행됐고 1995년 전반기는 리그3연패를 노리는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일화천마가 후반기에는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포항이 우승을 하는데 포항에서는 홍명보 선수가 우승후 해외진출을 하겠다며 인터뷰를 하는등 양팀모두 우승에 대한 집념이 그 어느때보다 남달랐읍니다.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떠오르는게 지금도 K-리그가 거칠지만 그 당시는 살인태클이 난무하는등 말도 못했읍니다.특히 일화의 수비진들은 안익수.박광현을 위시해 악명이 자자했죠.라데도 일화 수비진에 (안익수 선수로 기억합니다만) 맞아 눈썹이 찢어지는등 많이 당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골을 넣으면 일화 벤치앞으로 달려가 천하의 박종환 감독 앞에서 옷을 디집어 입고 춤을추며 약을 올렸고 어시스트를 하면 엄지손가락을 척! 하니 위에서 밑으로 내리는 ㅡ,ㅡ: 좀 거시기한 행동을 많이했읍니다.
서로에 관한 이러한 의식들과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포항과.최고의 골리 사리체프를 위시해 탄탄한 수비를 자랑하던 일화의 수비진이 대결했던 1995년 챔피언 결정전은 결국 K-리그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꼽히는 경기를 낳읍니다.1차전은 일화 홈에서 1:1로 비긴후 포항전용 경기장에서 2차전이 열렸는데 당시 친구놈의 도움으로 운좋게도 직접 경기장에서 관람하는 행운을 얻었읍니다.그 당시 포항의 축구열기야 대전 안부러울 만큼 엄청났었고 2차전 표를 못구해 돌아가신분들만 1000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관심속에 경기가 열렸읍니다.
브레멘의 한국에서 친선 경기중 한 장면
그 당시 가물가물한 기억속에서 전반전에만 황선홍 선수가 2골을 넣으며 2:0으로 앞서가는데 황선홍 선수 골을 넣고 포항에서나 볼수있었던 쇠창살에 매달리는 골 세레머니를 보여주며 거의 완승과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역시 리그 2연패가 그냥 한게 아니라는듯 성남일화는 고정운.신태용을 앞세워 기어코 3:2로 경기를 뒤집읍니다.후반이 끝나갈수록 그토록 꿈에 그리던 우승은 멀어져만가고 관중석 여기 저기서는 C8 . JOT8 찾아가며 -_-: 경기장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경기 자체도 좀 살벌해 집니다.(친구랑 둘이 같이않아 보면서 참 몸둘바를 몰랐다는..)
그러던 와중 후반 40분이 넘은 상황에 프리킥 찬스를 얻고 포항으로써는 마지막 기회속에 골에어리로 감아찬 공을 ( 당시 같이본 친구는 훗날 이 광경을 과자 부스러기에 몰려든 개미때라고 표현해 절 웃겼읍니다.^^:) 대략 10댓명이 넘은 선수들이 뒤엉킨 혼전속에 기어코 라데가 헤딩 동점골을 뽑아내며 경기장을 광란과 열광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읍니다.
이런 경기는 서울까지 이어져 마지막 경기를 가지지만 아쉽게 황선홍 선수의 경고누적으로 인한 결장과 박종환 감독의 노림수 때문인지 라데는 사고를 치고 퇴장당해 결국 경기는 0:0으로 비긴후 벌어진 연장 전반전에 이상윤의 헤딩슛으로 1:0 일화의 3연패를 이루는 승리로 포항으로써는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게 됍니다.
후문에는 일화의 스토퍼 박광현을 일등공신(?)으로 뽑았는데 2차전에서 황선홍을 끈질기게 괴롭히다 열받은 황선홍 선수에게 얼굴을 강타당하는 오노 비스므리한 분위기를 연출^^: 결국 황선홍을 경고 누적으로 3차전에 못나오게 하더니만 3차전에서는 라데마저 유니폼 하의를 찢는등 경기내내 끊임 없이 괴롭히다 결국엔 퇴장을 유도해내는 혁혁한(?) 전과를 세웁니다.
이런 라데의 발군의 활약으로 한때 한국 귀화설까지 나왔고 축구계 쪽에서도 작업을 많이 한걸로 아는데 본인 스스로가 유고 대표팀에 대한 소망이 너무 간절했고 해외진출을 원해 한국을 떠나게 됍니다.당시 포항과 네덜란드의 아약스간에 계약이 이루어져 성사직전 까지 갔지만 그전의 일본의 제프 이치하라의 구두 계약건이 문제가 돼 잠시 일본에서 뛰게됍니다.일본에서도 나바노스컵 득정왕과 22게임에서 12골을 넣을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뽑내다가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을 합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에서도 그 당시 괴물로 진화중이였던 비에리의 교체선수로 후반전에만 헤트트릭을 기록하는등 꽤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7명이 넘는 비유럽 출신의 부담과 결정적으로 심각한 부상을 격으며 선수생명에 위기도 맞읍니다.후에 NAC 브래다(네덜란드)에서 노정윤 선수와 잠시 같이 뛰기도 했고 독일의 베르더 브레멘 과 빌레펠트를 거쳐 현재는 카타르 리그에서 뛰는걸로 들었읍니다.
브레멘 하면 생각나는 선수가 하나있죠. 한때 한국 축구계의 총아로 떠올랐던 이동국 선수 입니다.당시 이동국 선수의 임대는 한국에서 청대.올대.국대.그외 소속팀의 경기까지 지금으로썬 도저히 이해가 안돼는 혹사와 언론의 시달림을 받아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됀 상태에서 치료차 독일로 왔던 이 한국의 어린 청년을 브레멘 구단 관계자들이 가능성을 보고서 임대를 제의한걸로 압니다.
- 아시안 컵때 이란전의 이 동국 선수 -
이때 이리도 좋아했지만 실제로는 걷기도 힘들정도로 몸 상태가 안좋았다는군요..
라데를 이야기하면서 이동국 선수를 꺼내는건 독일에서 이동국 선수가 많이 힘들어할때 라데가 룸에이트를 자청하며 친형이상으로 감싸며 보살펴 주었다는군요.자신의 축구인생을 꽃피운 한국에서 그것도 자신의 전 소속팀에서 날아온 막내 동생뻘의 어린선수였으니 아무래도 관심이 많이 갔나봅니다.이런 부분은 이동국 선수가 아직까지도 기억하며 고마워 한다는군요.
브레멘 시절 이동국 과 라데
후에 빌레벨트에선 어릴적 자신의 팬이였다던 차두리 선수와도 만나는걸 보니 그와 한국의 인연은 상당히 끈질기다는 생각도 듭니다.이런것 때문인지 몰라도 마치 연어가 자신이 죽을때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어오듯 그 스스로도 자신의 마지막 축구 인생은 한국에서 마무리 하고 싶다며 여러번 말한걸로 기억이 납니다.유고 대표팀이나 브레멘의 친선경기등으로 한국에 왔을때 자신이 한국을 떠난 날로부터 현재의 기간을 정확히 알고 있을정도로 용병으로써는 좀 특이하게(?) 대한민국을 사랑했덨 선수였읍니다.
후에 수원이 창단을 하면서 라데와 어느정도 조율이돼 영입직전까지 갔었지만 당시 한국에는 외국인 선수는 원 소속구단의 동의없이 3년이내에는 다른팀으로 이적이 불가능 하게끔 만든 법률때문에 아쉽게도 불발 됍니다.이 법은 후에 철페됐지만 라데가 외국으로 이적후 라데의 다른팀 이적을 막을려고 만든 법이였는데 어찌보면 그런 상황이 아이러니 하기도 합니다.그후에도 여러팀에서 말이오간 걸로 아는데 몸값등 여러문제도 무산이 됍니다.
빌레벨트 팀에서 차두리 와 라데
( 이 당시 차두리 근황을 취재차 찾아온 한국 기자들과 이야기 도중 아직까지도 한국말과 특히 구수한 전라도 욕들을 기억하고 있어 기자들을 깜짝 놀랐게 만들었다는군요..^^: )
한국 프로축구가 20년의 역사를 쌓아가는 동안 매해 수많은 외국인들이 용병이란 고달픈 이름으로 대한민국에 꿈을안고 들어왔읍니다. 그중 일부분은 성공이란 이름의 부와 명예를 혹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읍니다.그중 1990년대 척박하기만 했던 K-리그에 나타난 파란눈의 용병 라데 보그나노비치는 지금은 추억의 일부분이 돼어서인지 그는 용병이란 존재를 넘어선 조금은 특별했던 존재같읍니다.한때 그와 같이 그라운드를 누비던 황선홍 선수는 이미 은퇴해 지도자를 준비하고 있고 그 자신도 이제 선수생활의 종착점에 다다른걸 생각하면 세월의 무상함과 더불어 시간이 참 빠르다는게 느껴지는군요.부디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선수생활 잘 마무리 했으면 합니다.
from : 라데에 관한 글을 한번 정도는 쓰고 싶었고 막상 그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예전 멋모르고 축구장을 찾아 그들의 플레이에 환호하고 기뻐하던 철없었던 소년이 어느새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컴퓨터 앞에 자리잡고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여러번 미소를 지었읍니다
첫댓글 네이버 미소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알수없는 외계인과 물음표.
94년 득점왕은 윤상철 선수였죠. 라데와 끝까지 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 ^^
글로만 읽는 라데지만...K리그에 미쳤던 영향력을 실로 느낄 수 있는;;;
몇번 읽어본글이지만 다시 읽어봐도 왠지모를 감동이 밀려온다는...;;
나바노스컵... 이 아니라 나비스코컵 같은데...
라데와 황선홍의 투톱은 정말 가공했다는..
좋은 글이네요.. 라데..저는 지금은 대전 팬이지만 당시는 황선홍 선수와 라데가 뛰는 포항을 좋아했다는..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알수없는 x. 설에는 외계인이 문양을 남겼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