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뜨 꾸띄르의 대명사 샤넬은 고아원 출신 우리에게 ‘코코 샤넬’로 알려진가브리엘 보네르 샤넬이 수 십 년 동안집처럼 지냈던 파리의 리츠호텔에서 83세의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샤넬 브랜드는 ‘단순한 화려함’으로 대표되지만샤넬의 어린시절은 결코 화려하지않았습니다. 그는 떠돌이 장사꾼이 시골 아가씨를건드리는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노숙자 숙소 비슷한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 직원 2명이 출생신고를 했지만둘 다 문맹이어서 시장이 ‘Chasnel’로잘못 적은 것을 몰라봤습니다.그래서 상당 기간 샤넬의 출생 기록을 찾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샤넬은 12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고,아버지가 5남매를 버리고 집을 나가는 바람에고아원에서 지냅니다. 이곳에서 재봉(裁縫)을 배워 18세 때의상실 견습공으로 나섭니다. 요즘 조폭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시다바리’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의상실 견습공을 뜻했습니다. 일본어로는 ‘조수’를 낮추는 말이죠.샤넬은 낮에는 시다바리,밤에는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다‘한량’ 에티엔 발상의 눈에 들어 살림을 차립니다. 이때 취미로 만든 모자가파리지앵의 눈길을 끌었고, 발상과 사펠 등연인들의 도움으로 파리와 도빌에부티크를 엽니다.
당시 패션은 암흑기였습니다.사람들은 공연장의 피아노 다리도음심(淫心)을 유발한다며 주름장식이 있는‘바지’를 입힐 정도였습니다. 이때 샤넬은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치마를 선보여 파리지앵을 경악하게 합니다.이른바 ‘샤넬 라인’(무릎 바로 아래 길이의 치마선)이등장한 것입니다. 샤넬은 작은 검정 드레스,실용적인 포켓의 재킷, 저지 소재의 드레스등을 통해 ‘활동하는 여성의 패션’을창조했습니다. 그는 이들 옷을 직접 입고 다녀샤넬의 홍보실장 겸 모델 역을 자임했습니다. 그는 옷에서부터 향수(마릴런 먼로가 뭘 입고 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샤넬 넘버 5 향수’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하죠),숄더백 등 토털패션의 개념도도입합니다. 샤넬은 리츠호텔을 집 삼아 지냈는데,나치 치하에 독일 장교와의 염문 때문에종전 후 스위스로 쫓겨납니다. 1995년 샤넬이 2차 대전 중‘모델의 모자’라는 암호명으로 나치첩보원으로활동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죠. 하지만 샤넬은 좌절한 채로 있지 않았습니다.그는 71세의 나이로 파리에 부티크를 열고‘제2의 전성기’를 펼칩니다. ‘코코’와 ‘가브리엘’의 앞 글자를 따서‘COGA 재단’이라는 자선재단을 만들기도 합니다. 샤넬은 37년 전 오늘 호텔에서 쓸쓸히 숨졌지만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단순한 것이 진짜 화려하다”는그의 패션철학은 초일류 브랜드를통해 살아있습니다. 샤넬이라는 브랜드에서궁핍과 역경, 슬픔이 어떻게 이렇게 화려하게승화할 수 있는지를 곱씹게 됩니다. 슬픔이 깊을수록, 아픔과 좌절이 클수록 화려함은 더욱 빛이 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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