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는 왜관이 네군데나 있었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조선 세종때 삼포를 개관하여 왜관을 열고 교역과 접대 등의 일을 하게 하였다. 삼포중 부산에는 부산포왜관이 있었다.
그후 임난후에는 절영도왜관, 두모포왜관, 초량왜관이 생겼다 .
그곳에는 오일장이 개장되었으며 상인들이 인삼으로써 倭銀을 무역하여 이득을 많이 취하였으나 한말에는 인삼 산출량이 적고, 또 일본이 청과의 무역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체소, 소금 따위만 매매되어 몹시 한산하여졌다.
이곳에서는 밀거래가 많이 이루어 지졌다. 또 왜관에는 금녀구역 주로 일본남자들이 거주하는데 이들에 의하여 간음이나 매음 등의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삼포왜란 이후 중중 7년 임신약조에 의해서 웅천의 내이포에만 왜관을 두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관병과 츠시마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중종 39년에 부산포로 왜관을 옮겼다. 그러니까 부산포왜관이 두번이나 개설 된 것이다.
부산포왜관 위치는 지금 부산진시장(주차빌딩)이다. 향토사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눈여겨 볼 장소이다. 표지석은 좌천전철역(8번 출구 노변공원)에 있다.
임진왜란후에는 절영도에 왜관을 두었다. 지금의 남항자리로 주민들은 흔히 掘江이라고 부른다. 절영도는 그곳의 말이 빨라서 그림자가 안보인다는 의미이다.
이곳은 임난시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수군이 군선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사츠마보리(薩摩堀)란 선착장이다. 그래서 일본의 사절이나 상인들이 심리적으로 편안 곳이다. 그런 이유로 임란후 왜관을 이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전의 부산포왜관은 자성대 부근이라서 군사기밀상 사용하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절영도왜관은 영도의 대평동 2가 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표지석이 없다. 아마 STX해양조선이나 깡깡이마을박물관 부근일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는 선조 34년에서 40년 간 7년간 존속하다 선조 40년 지금 수정동의 두모포왜관으로 옮겨졌다.
두모포왜관은 광해군 1년 한성의 동평관이 없어지면서 유일하게 대일 외교와 교역을 전담하였다.
당시 수정동 일대를 두모포 마을이라고 하였다. 두모포왜관 앞쪽은 바다이고 동쪽인 東館쪽으로는 佐自川(佐川)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 지도상에는 이 佐川을 찾을 수 없으나 좌천인 지명은 나온다. 그러므로 이곳이 옛날 나루터임을 알 수 있다. 기장의 左川과 혼동하기 쉽다.
豆毛浦란 지명은 다른 곳에서도 보게 된다.
그런데 부산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를 두모포라 하는지? 왜 두모포라 하는지? 궁긍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두모포에는 수군의 첨사영과 만호영이 있었다.
수정동 두모포에는 만호영이 있었다. 만호영은 수군만호의 진영이다. 그 만호는 절도사, 첨절사 아래의 벼슬이다.
부산에는 세군데의 두모포가 있는데 여기에는 만호영이 있었다. 부산에 만호영은 본래 8개있었는데 현재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지명이 3군데다.
그 첫째가 기장 죽성리의 두호마을이다. 그 두호마을은 두모포마을이란 뜻이다.
그 두번째가 바로 현 수정동의 두모포왜관이 있던 곳이다. 그 위치는 동구청 정문 동쪽 골목길이다. 옛날 동향사란 절이 있었다.
여기에는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우물이 복개되어 남아 있다. 이 우물이 유일한 흔적이나 복개가 되어 찾기가 쉽지 않다.
그 표지석은 고관입구 도로변(부산진지하철 1번 출구 건느편)에 세워져 있다.
古館은 舊倭館을 말하는 것으로 나중에 옮겨진 新倭館인 草梁倭館에 대칭되는 말이다.
그후 숙종 4년에는 훨씬 넓은 초량으로 옮겨 갔는데 이곳 부산 마지막의 왜관인 초량왜관이다.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 지속되었다. 건물 배치는 다소 번잡하다. 卞撲의 왜관도을 보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표지석이 서있는 곳에 館守家가 있었는데 그 북쪽인 뒷쪽이 용두산이다. 지금 초량왜관 표지석이 있는 곳이 바로 관수가가 있었던 곳이다. 이 동남쪽 바닷가에는 龍尾山있고, 선창이 그 북쪽에 있었다.
守門은 정문이며 동쪽에서 올라간다. 현재 중앙동 쪽에서 오르는 계단의 중간쯤된다. 여기에는 約條制札碑가 있었는데 현제는 부산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있고 그자리에는 표지판만 서있다.
수문을 들어서면 동관인데 판매장인 開市大廳과 왜관의 우두머리가 있는 館守家가 있다.
관수가는 현재 용두산 남면계단으로 올라가서 끝나는 부분에 있었다. 당시에는 광복동에서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없었다. 관수가를 지나야 서관으로 들어간다. 이 서관은 용두산 서편인 대청동 쪽에 있었다.
동관은 대마도 무역상들이 이용했고, 서관은 일본에서 온 사절단들이 이용했다.
부산포왜관 134년간 존속되었다. 처음 85년간 계속되가 삼포왜란으로 중단되고 그후 다시 개설되어 임난까지 49년간 계속되어 134년간 존속하였다.
임난 후 생긴 절영도왜관은 7년간, 두모포왜관은 72년간 그리고 초량왜관은 199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니까 부산은 최초의 부산포왜관을 비롯하여 절영도왜관, 두모포왜관, 초량왜관 등 4개의 왜관이 있던 고장이 된다. 한 지역에 왜관이 네번이나 개설된 곳은 없으므로 부산은 왜관의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왜관은 임난후 중기 낙동강변에는 중간 到泊場으로 10여군데 개관되었다. 지금까지 그 명칭이 남아있는 곳이 경부선철도의 왜관역이 있는 곳이다. 마치 왜관의 대명사처럼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이곳에는 왜관이 없었다.
원래의 구왜관은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으나
1904년 일본인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서 경부선이 부설되고 칠곡군 파미면 석전리 회동마을에 역사를 설치하고 왜관이라 한데서 그 명칭이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파미면은 왜관면으로 바뀌고 나중에 왜관읍으로 승격되 오늘에 이른다.
어쨌든 일본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왜관의 설치와 존속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서지학회 명예회장 孤亭 金致雨 제공>
첫댓글 <왜관의 고장인 부산>은 필자의 부주의로 삭제되었다. 그래서 다시 실렸다. 이달인 10월 5일자로 올린 글인데 자구수정하려고 하다가 실수로 삭제하여 버렸다. 독자가 200명이 넘고, 뎃글이 3개가 달린 것으로 아는데 다시 올려 독자들께 혼란을 주워 죄송하다. 양해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