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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나
조미경
우리 집 거실 중앙에는 그림 대신 가족사진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사진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빠, 엄마 그리고 큰언니 작은 언니, 나 이렇게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을 중심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큰 언니는 서울의 모 약대를 졸업하고 서울의 종합병원 페이약사로 일하고 있는데, 언니는 늘 작은 상자 같은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가슴이 땅 한 평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언니에게 말했다. "큰 언니는 욕심도 많아 약대 나와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족 못하면 어떡해?" "너는 말이야, 지금처럼 그렇게 미래가 없는 회사에서 일하다, 너를 구원해 주는 싹수 있는 놈 만나서 떠나면 되는데, 이제라도 공부해서 성공이라도 하려고 그러냐?"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때마다 친언니가 맞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해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일이며, 아빠의 월급 대신 내 월급을 엄마에게 바치고 생활비를 버느라 허리가 휘는데, 언니들은 월급 받으면 명품 가방과 신발에 돈을 처발라도 데이트하자는 남자 하나 없는 모태 솔로다.
엄마와 언니들의 눈에 나는 미운 오리 새끼다.
저녁 11시까지 식당에서 서빙 하다 퇴근, 언니들이 먹다 남긴 음식쓰레기와 주방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언제나 12시가 넘었다. 엄마의 돈타령에 용돈이 궁해 주말과 휴일까지 반납하고 알바까지 뛰느라, 대상포진에 걸려, 회사에 병가를 내고 쉬었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은 대상포진에 걸려 통증에 아파 비명을 지르는데도 본체만체하면서, 마치 꾀병을 부리는 것처럼 나를 대했다.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하니 집안은 그야말로 쓰레기장이 되어 가고,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는 음식은 먹지 않고 술과 담배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경은아? 너 진짜 많이 아파? 꾀병 아니지…" 큰언니의 싸늘한 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자신들의 몸이 아프지 않다고 동생에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회사 대표가 전화해서 몸이 나아질 때까지 집에서 요양하라는 전화에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뻔했다. 가족도 아닌 남인 사장님의 배려가 고마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둘째 언니는 대기업 관리부 대리다. 회사에서 단체 회식이 있는 날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대리 기사 불러서 상사들 집까지 모두 보내고 혼자 남은 언니는, 그때부터 혼자 술을 마시며 자정에 집에 들어온다. 그런데 문제는 술을 마시면 술주정이 심해서, 언니에게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이 모두 도망을 칠 정도로 주사가 심했다. 얼마 전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언니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 혼자 잘난 척하는 언니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말았다. 아침이면 몰래 내 옷을 입고 출근하는 작은언니 때문에 막상 출근할 때 입을 옷이 없어 쩔쩔맬 때도 많은데, 그동안 단 한 번도 나에게 사과 한마디가 없다.
하루는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 그동안 아껴 두었던 원피스를 고이 모셔 두었는데, 잠깐 부엌에서 설거지할 때 작은 언니가 나에게 말도 없이 옷을 입고 출근을 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회사에서 눈치도 없고 예의도 없는 직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내가 속한 부서 얼굴에 먹칠했다는 팀장님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이경은씨는 그렇게 돈이 없어요? 돈이 없을 수 있지만, 우리 부서 중요한 미팅에 참석할 때는 옷차림에 신경 좀 쓰라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신경 쓰고 나오겠습니다. 그렇게 팀장님께 꾸중을 듣고 나니 괜히 눈물이 나고 속이 상했다. 월급을 받으면 대체 어디다 쓰는지, 구질구질한 옷만 입고 출근하냐는 우리 부서 강 팀장의 힐난을 듣고 있자니,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다. 나도 다른 직원들처럼 멋지게 입고 싶고 꾸미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없다. 다음날 회사에서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식에 주자도 모르는 나에게 주식 투자하다 망했다는 소문에 망연자실, 할 말이 없었다. 이 모든 일이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의 우울증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 회사에서는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낮은 연봉과 잦은 야근 강 팀장과의 마찰, 그리고 승진할 기회조차 없어, 3개월 전 B 시행사로 이직했다. 내가 하는 업무는 회계 업무로 공사비와 자재비 계산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회사는 요즘 광주에 분양 중인 아파트 입주로 무척이나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처음 사업지를 물색하고 첫 삽을 뜰 때는, 아파트 시세가 비록 지방이지만 서울 못지않게 오르는 추세여서, 모델하우스 오픈을 앞두고, 대박을 터트릴 것으로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기도 전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철강과 시멘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고물가 행진으로 인해 공사비 인상 문제로 시공사 대표와 살벌한 논쟁이 있었다 들었다. 모델하우스에는 구경꾼들만 북적거리고, 대신 사은품 증정에 목을 매는 주부들의 발길만 꾸준히 이어지고, 정작 찾아 주어야 할 실수요자의 발길이 뜸했다. 사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심초사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연 회사 분위기는 무겁게 흘러갔고, 사무실에 비치하는 직원들에게 제공되는 커피, 차 종류도 가장 저렴한 것만 사다 놓았다. 그럴 때마다 차 대리인, 사장 딸에게 아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차 대리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취업이 되지 않자 집에서 놀기 지겨워 회사에 나와서 시간 때우고 있다.
며칠 전에는 우체국에 등기 우편을 보낼 일이 있었는데, 사장 인맥으로 들어온 신참이 광주 현장 출장을 가고 없어, 무거운 전단지를 낑낑거리고 우체국까지 걸어서 다녀왔다. 지금 회사로 이직한 것은 조금 더 편하게 직장 생활하려고 했는데, 일은 더 많고 눈치 볼 일이 많아 마음이 답답하다.
아빠와 엄마는 은행에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사내 커플이었다. 그 당시 아빠는 출납 담당을 맡아 창구에서 고객들에게 예금 통장을 신규 발행하는 엄마의 친절한 마음씨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한 사람은 다른 지점이나 타 은행으로 이직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어,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은행으로 이직했고 아빠는 다니던 은행에서
승진을 거듭해서 나중에는 지점장까지 고속 승진 엄마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본점에서는 각 지점 간의 통폐합으로 인해 인원이 남아돌자, 명예퇴직자 신청받았다.
아빠는 끝까지 정년을 맞이하려 했지만, 상부 무언의 압력으로 인해 퇴직금을 받고
회사에서 나왔다. 아빠와 엄마는 퇴직금으로 새로운 일을 찾으려 했지만, 은행 업무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아빠는, 새벽에 일어나 집 근처 공원에서 운동하고 엄마가 차려 주는 아침을 먹고 출근하던 아빠는, 더 이상 양복을 입고 출근할 직장이 없자, 종일 벽만 바라보고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엄마는 아빠에게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기를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아빠는 평생 은행에서 돈 만지는 일을 하다, 명예퇴직했기에, 현실 세계에는 문외한이었다. 친구 중에 집을 지어서 파는 건축업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실리에 밝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 다녀온 아빠는 들떠 있었다. 생전 가족들에게 무심한 아빠 손에 치킨 상자가 들려 있었고, 다음 날부터 아빠는 은행에 출근하시는 것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엄마는 내심 불안했는지,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아빠는 더 이상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은행 인맥을 활용한 아빠는, 금리가 싼 대출 상품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후배 지점장에게 부탁해서 퇴직금 받은 돈과 가족이 사는 아파트를 담보로, 여주에 땅 5,000평을 계약했다. 건축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는 친구 말을 믿고 땅을 시세보다 평당 2만 원 더 비싼 값에 매입했다. 잔금을 치를 때까지는 땅이 주택을 지을 수 없는 농업 용지라는 것을 몰랐던 아빠는 시청에 용도 변경하느라 공무원들을 만났지만, 처음부터 농업 용지로 묶인 땅의 용도를 변경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아빠는 퇴직금과 아파트 담보로 대출받은 땅은 팔리지도 않고 다달이 대출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은 시세보다 싼값에, 현지인에게 되팔고 나서 아빠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때 나는 한창 예민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평상시에도 딸들에게 무뚝뚝한 아빠였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아빠는 나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격렬해졌고, 모든 화살이 나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 60이 넘은 아빠는 새로운 직장에 취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집에서 엄마의 눈총을 받던 아빠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집을 나갔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빠는 달리는 버스에 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날은 거래처가 마침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주소를 찾는데, 어려움이 없어 여유롭게 일했다. 일찍 일이 끝난 나는 버스를 타고 회사로 가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내가 풍겨 두리번거리다. 그리 멀리 않은 곳, 리어커에서 딸기를 팔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 먹음직스러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좌판으로 달려갔다. 딸기를 무척 좋아하는 엄마 생각에 덥석 한 팩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빨간 딸기를 드시면, 행복해할 엄마를 떠올리자 갑자기 기분이 좋았다. 마당에 걸린 빨래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놀래 켜 주고 싶어, 엄마를 부르지 않고 살금살금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다음 순간 기분 좋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 것인지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고, 간간이 웃음꽃이 피었다.
'엄마도 웃을 때가 있구나' ‘저렇게 건강하게 웃을 때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방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 그만 숨이 턱 멎는 줄 알았다. 순간 하마터면 들고 있던 딸기를 놓칠 뻔했다. 엄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나를 그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경은이 년은 사실 우리 집 핏줄이 아니에요.'
언니도 아시잖아요? 오래된 이야기인데, 처녀가 애를 낳아서 우리 집 앞에 버린 것을 주워 키웠어요.' 다음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이 조용히 집을 나왔다.
어떻게 회사로 돌아왔는지 기억에 없다.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본 회사 사장님이
오히려 나에게 거래처에서 무슨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냐고 추궁했지만
집안일이라 말 못하고 허공을 걷듯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했다.
퇴근 후 혼자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을 마셨다.
독한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자, 속에서는 불이 난 듯이 활활 타올랐지만, 개념치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될 것을.
새삼 고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24년을 부모님이라 알고 살았는데, 내 친부모가 아니라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다니…나는 단 한 번도 부모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구박당해 왔지만 내가 못나서 다른 형제들과 달리, 머리가 나빠 공부도 못하고
운동 신경 또한 굼떠서 뭐 하나 잘하는 게 없어 매질을 당하는 줄 알고 살아왔다.
언니들이 나를 놀릴 때 ’너는 우리와 엄마가 달라 그러니까 너는 친동생이 아니야‘ 하는 말은
나를 겁주고 놀리려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기구한 나의 운명에
통곡하고 싶었다.
희철 오빠가 회사로 나를 찾아왔다. 며칠씩 연락이 없자 직접 회사로 찾아왔다.
오빠에게는 미안했지만, 엄마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며칠 동안 집에 가 있을 테니 회사로 찾아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돌려보냈다.
다음 날부터 저녁 알바를 시작했다. 홀로서기 위해, 꼭 돈이 필요했다.
몸이 피곤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기에 종일 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하는 중간중간 엄마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끝없는 복수심에 불탔다.
'어느 이름 모를 처녀애가 낳은 애가 나라니' 그러면 생물학적 엄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하지도 않은 아이를 낳고 버리는 그런 무정한 엄마가 있단 말인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고 난 다음부터, 가슴에 돌덩이가 얹혀서 밥을 먹어도 소화도 되지 않고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생각에 하루하루 말랐다.
지금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가 핏덩이를 키웠는데, 자신이 업둥이인 것을 모른 체, 구박당하고 살고 있다. 처음부터 키우기 힘들었으면 차라리 파양을 신청했더라면,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 기가 막힌다. 나는 결국은 이런 운명이었는데,
부모와 형제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람 구실을 하려고 하니
못살게 굴고 학대해 왔다는 거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받은 서러움이 고통이 서서히 밀려온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손찌검하고 툭 하면 밥을 굶겼다.
중학교 때 수학 여행비를 내지 못했을 때 담임 선생님이 대납했을 때, 선생님께
자신들을 창피하게 했다 해서, 온몸이 피멍이 들게 맞아서 학교를 결석 해야 했다.
옆집 하은이 피아노 배우는 게 부러워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 달라고 말했다
다리에 피가 나게 맞았다.
언니들은 대놓고 나를 무시하고 놀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겨야 하지만
이대로 운명에만 맡기고 가만히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버려진 아이로 알고 살았더라면 이런 배신감은 들지도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희생만 하고 살았는지 분통이 터진다.
그동안 당한 설움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며칠을 고민했지만,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효녀 딸처럼 행동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쉬는 날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사서 엄마를 드리면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잠깐은 미안해하면서 맛있게 먹곤 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엄마 등산복과 신발을 사면서 언니들 등산복과 등산화를 샀다.
내가 등산복을 선물하자마자 언니들은 등산 한번 가자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경은아? 이 옷 정말 이쁘다."
"어쩜 네가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니?"
큰 언니는 등산복 잠바를 입어 보면서 기분이 좋은지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 보면서
한바탕 난리를 친다.
언니들의 호들갑에도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엄마는 겨우 한마디를 한다.
"그래, 고맙다 경은아."
엄마의 반응을 보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
언니들이 등산복을 선물 받고 좋아하자 엄마도 언니들처럼 들뜨는지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가족 여행을 겸해서, 나들이하자고 한다.
나는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
다음 날부터 인터넷을 뒤져서 어디가 경치가 좋은지 검색했다.
서울은 아무래도 나들이 기분이 나지 않으니, 멀지만 지방으로 산행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김밥을 싸고 간식 준비했다.
월악산으로 떠나기 하루 전 나는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렸다.
다음 날 아침 언니들과 엄마는 두 눈이 휘둥그래 진다.
버스를 타고 월악산으로 갈 줄 알았던 언니와 엄마는 편안하게 월악산으로 산행하게 되었다며
어린애처럼 들뜬 표정이다. 운전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차 안에는 미리 준비한 음료와 간식을 싣고 달리는데,
고속도로는 나들이를 떠나는 행락객들로 정체가 이어진다. 가슴은 복수심으로 불꽃이 활활 타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짐짓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 했다.,
그래도 모처럼 서울을 떠난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자동차는 달려 어느새 충청도로 향한다.
도중에 휴게소에 들러서 엄마가 좋아하는 호두과자 한 봉지 사고, 구운 감자도 샀다.
월악산 입구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우리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산행을 시작했다.
등산로를 따라 걷자 4월의 봄을 알려 주듯이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산에서는 뻐꾸기가 노래하고, 사람들은 꽃향기에 취해 한잔 술에 취해 얼굴이 발그레하다.
나는 앞장서서 걸으며, 카메라로 엄마와 언니들의 모습을 수시로 찍었다.
월악산은 산세가 험했다. 나무들은 기분 좋게 싱그러움을 뿜어내는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에 파묻히고 싶었다. 경치에 취해 엄마를 괴롭히는 일을 중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받았던 설움이 떠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우리는 도중에 쉬면서 정상으로 향했다.
목이 말라 음료수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걸었다. 산에서 먹는 음식은 달고 맛있었다.
등산로에는 지난가을의 낙엽이 수북이 쌓여서 바스락 소리가 난다.
낙엽을 잘못 밟으면 미끄러웠지만, 그래도 집을 떠나 산행하니 기분은 날아갈 것 만 같다.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바위에 올라앉아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었는데, 평평해서 여러 사람이 앉을 만큼 넓었다.
엄마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다음에 다시 오기 힘들다는 엄마의 말에 가장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드렸다. 얼마쯤 걸었을까 엄마는 아까부터 배가 아프다며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신다.
엄마를 위해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화장실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높은 산에 공중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엄마는 복통이 시작된다며 울상을 짓는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으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엄마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큰언니가 엄마 손을 잡고 비교적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맨 뒤에서 언니들의 뒷모습을 찍었다.
언니들과 엄마는 낙엽을 밟으며 나무들을 붙잡고 걸었다.
풍경 사진을 찍느라 언니들 한참 뒤에서 걷던 나는 언니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거 같아 속으로는 기뻤지만, 겉으로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했다. 하늘에 죄를 짓는 것 같아, 수없이 기도를 올렸지만, 이젠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다.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 그들이 있다.
아빠의 실직 후 엄마의 이상 행동은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날도 희철 오빠가 빌려준 소설책을 가지고 토론하고 있는데, 갑자기 뺨을 때리며, 계집애가 책은 읽어서 뭐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밤늦게 공부하고 있으면, 방에 들어와 형광등을 끄는 등 공부를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나는 골목에 이불 속에 숨어서 후레쉬 불빛에 책을 놓고 본 적도 있었다. 아마 나는 희철 오빠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등록금이 아깝다며 대학에 가지 못하게 막은 것도 엄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밉고 또 미운 감정이 스멀거렸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은? 어디 있어 빨리 와 봐 …”
나는 정신 없이 뛰다시피 나무들을 피해서 걸음을 옮겼다.
언니들은 나를 보자 망연자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제야 사태를 짐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미끄러진 곳을 따라 내려갔다.
내 발은 낙엽과 함께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다.
언니들도 덩달아 나와 함께 미끄러졌지만, 중간에 멈췄다. 내리막길이 험해서 나무를 붙잡고 걸었다.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가니 그곳에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얼른 엄마를 일으켜 세웠지만, 엄마는 의식이 없이 누워 있다. 언니들은 당황한 나머지 혼비백산해서 엄마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어서 헬기를 불러야 해."
큰 언니에게 소리치자 언니도 "알았어…어떻게 전화하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엄마를 손발을 주무르면서 엄마를 외쳐 불렀다.
"엄마?…죽으면 안 돼… 엄마? 엄마…" 어서 일어나."
옆에서 작은 언니가 말했다. 엄마는 그동안 심장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어떤 충격이 생기면 심장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 했다고 한다.
언니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신이 멍했다.
엄마의 옷을 열어서 가슴이 답답하지 않게 하고 손발을 주물렀다.
그러나 엄마는 곧바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지만, 응급치료를 배우지 않은 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약 20분 후 헬기가 도착했다.
헬기에서 내린 응급 구조요원들이 엄마를 들것에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큰언니와 작은 언니와 함께 헬기에 탑승했다.
헬기는 서울의 종합병원에 내려 주었다.
엄마는 중환자실로 실려 가고 언니들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우리 자매는 엄마 걱정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특히 큰 언니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크나큰 재앙 앞에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고 흰 가운을 걸친 의사가 나와서
우리를 부른다. 순간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리라 생각 못했던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의사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었다. 엄마가 고혈압 약을 복용했는지 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고혈압 약을 복용 하고 있었다. 고혈압 환자에게 그리고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를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의문 사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큰언니는 엄마와 함께했고, 직업 특성상 엄마가 어떤 약을 복용 하는지 아는 사람이 왜, 무모한 나의 행동에 대해 제지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그러나 나는 엄마의 건강 상태를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미움과 원망이 교차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남기고, 자신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뇌졸증으로 쓰러져, 결국은 아빠 곁으로 떠난 흰 천에 쌓인 엄마를 보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슬퍼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 되었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동안 나를 못살게 굴었던 분풀이를 하려고, 엄마의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권했던 나. 죽도록 미워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앉아 속죄의 눈물을 흘리며 비통에 젖어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앉아 있으니, 비로소 나의 고단하게 한 원인이 사라진 것 같아 홀가분하다. 엄마를 알고 지내던 엄마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위로를 건넸다.
손님들이 뜸한 늦은 저녁 희철 오빠가 친척들의 눈을 피해 빈소를 찾아 엄마의 영정에 인사했다. 그런 희철 오빠를 측은 하게 바라보던 큰 언니는 이제 서운한 일은 모두 잊으라고 한다. 희철 오빠는 구박받는 나를 옆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참고서를 빌려주고 공부를 가르쳐 준 고마운 오빠다. 그런데 엄마와 언니들은 그런 나를 질투해서 더욱 나를 못살게 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희철 오빠는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경은아? 너…왜 그러는 거야? 말까지 더듬으면서 나를 말리려 한다.
"내가 뭘 어쨌는데…사실 오빠와 나는 고종사촌이 아니란 말야. 알아 실제로는 남남이야."
"뭐라고, 경은아 방금 너 뭐라고 그랬어?"
"우리가 사촌이 아니면 무슨 관계란 말이냐?"
옆에서 듣고 있던 언니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아빠의 여동생 곧 나의 고모가 되는 분은 시골로 시집을 가서 그곳에서 희철 오빠를 낳았다.
고모의 표현에 의하면 희철 오빠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다. 그런 아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자신의 오빠인, 아빠 부부에게 아들을 맡겼다. 아들이 없는 엄마는 조카를 살뜰히 챙겼다. 내가 엄마에게 쫓겨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을 때면, 엄마 몰래 먹을 것을 건네준 이가 희철 오빠였다.
그런 오빠가 나에게는 다른 어느 누구 보다도 듬직하고 좋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자 동네 오빠들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가끔 선물을 사서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나를 마치 징그러운 뱀을 보듯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등,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사내들에게 꼬리를 친다고 난리를 치면서, 등짝을 때렸다.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데 이때 의외로 엄마는 나의 행실을 나무라는 패착을 불렀다.
동네 불량배 오빠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언제 나타났는지 든든한 희철 오빠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나의 구원 투수가 되었다.
엄마를 보내 드리고, 가슴에 남아 있던 원망을 하나씩 풀어 헤치고 나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빈껍데기만 붙잡고 살아가는 날이 계속되었다.
잠이 들면 엄마가 나를 찾아와 눈을 부라리며 손찌검했다.
잠들지 않으려 날마다 진한 커피를 타서 밤을 새우다 새벽에 깜빡 잠이 들면 악몽에 시달렸다. 엄마가 없는 집은 무섭기만 했다. 갈 곳이 없는 나는 보증금 500에 월 40만의 원룸을 얻어 독립했다. 엄마의 영혼이 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잠을 자려 자리에 누우면 방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는 환청에 시달리다 보니,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기를 여러 번. 잠을 못 자는 날이 계속되자 입안은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 음식을 넘기기도 어렵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 누구에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결국 엄마를 죽게 한 장본인은 나라고 원인 제공자가 나 자신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말았다.
조금만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이리 쉽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수 없이 생각했지만 뒤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엄마의 지병을 알게 된 후 엄마를 괴롭히려 꾸민 일이 결국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줄은 몰랐다.
엄마의 49재가 다가오자 큰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함께 제사를 지내자 한다. 아픈 몸을 이끌고 월계동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니 대문 앞마당에는 낯익은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언니들이 그동안 안방에 있던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종량제 봉투를 가지고 와서 정리하고 있었다. 언니들은 행여 엄마의 유품 중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아빠가 객지를 떠돌다, 비명횡사하기 전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아, 이 집도 월세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엄마는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것을 알고 나 자신,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것을 언니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큰 언니는 이미 엄마의 사망 보험금을 작은 언니와 나누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통보하면서, 적반하장으로 양육비를 운운하는 것이다. 엄마의 유품 중에서 생전에 착용하시던 반지와 살림살이는 언니들이 챙기고 손때묻은 가계부와 엄마가 남긴 사소한 물건을 손에 넣고 나의 남루한 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잠이 깨면
아침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불면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부터 엄마가 남긴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 읽어 내려가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다. 그동안 늘 궁금했던 것은 엄마는 평상시 명품에 관심이 없어 늘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모임에는 자주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쓰는 장롱에서는 명품 가방이 여러 개 있었고 명품 가방은 하나 같이 오늘 막 산 것처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니들은 엄마의 장로에서 나온 명품 가방을 발견하자마자 서로 좋은 것을 갖기 위해 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혹시 모를 엄마의 숨겨둔 비자금을 찾기 위해 통장을 찾았지만, 통장은 잔액이 거의 없는
빈 통장이었다. 그리고 49재에 마지막 물건을 정리하면서 나를 불러 자신들이 찾지 못한 물건 중에 새로운 것이 없는지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의 성격이 이렇게 꼼꼼한 사람인 줄은 그동안 몰랐는데, 일기장에 자신의 행적을 기록해 놓을 줄은 몰랐다.
엄마의 가계부에 쓰인 내용은 남들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었지만, 작년 아빠가 객지를 떠돌다, 버스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던 날의 일이 궁금했다. 왜 아빠는 무일푼으로 집을 나가 사고를 당했는지 지갑에 돈 한 푼 없이 집을 나갔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충격적인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대응이었다. 친척들 아버지의 형제들 즉 나에게는 큰아버지 삼촌들, 그리고 고모들 앞에서는 아빠를 따라 곧 세상을 하직할 것처럼 슬피 울던 엄마는 장례식이 끝나자 버스 회사에 찾아가, 사망 보험금을 더 받아 내기 위해 악을 쓰고 다녔고, 생명 보험금을 받은 후에는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에 다니면서 얼굴을 뜯어고쳤다. 마치 새 인생을 살 것처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장롱에 숨겨두었던 명품백도 아빠의 사망 보험금으로 사치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무섭고 싫었다. 또 하나 나의 부도덕한 행동에도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악몽도 차츰 꾸지 않았다.
평상시 무뚝뚝했지만, 남들에게는 싫은 소리 한번 못하시던 아빠가 비명횡사 이유를 자세 하게 알기 위해 가계부에 기록된 내용을 알게 되자 나를 키워준 엄마의 이중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엄마는 은행에 재직할 엄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 사업자금 보증을 서게 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엄마는 친구들에게 높은 이자를 주면서 고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친정 부모의 빚을 떠안은 엄마는 결국은 도박에 손을 대게 되었고, 사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빚 때문에 은행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자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던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공장에 경리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작은 중소기업 경리 직원의 월급으로는 이자 갚기도 벅차게 되자 공장 직원들과 계를 만들었다. 계주가 된 엄마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돈에 길들여진 엄마의 인생은 순탄하게 살 수 없는 인생이었는지, 돈만 생기면 도박장에 가게 되었고 엄마의 도박 중독에 지친 아빠는 더 이상 엄마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 이혼할 결심을 했다. 서울가정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한 그 날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직장 후배이자, 동료 직원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점차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아빠보다 10년 이상 연하였고, 당시 직장에서 업무 스트레스와 여동료 간의 승진 다툼에 그녀가 개입되어 하소연을 주로 하고, 아빠는 이혼에 대한 스트레스를 터놓게 되면서 자주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두 분의 이혼은 엄마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 달 동안 별거하게 되었다. 이혼 꼬리표는 아빠에게 있어 승진에 방해가 되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금방 들통나게 되면 아빠는 승진에서 뒤처지게 된다. 이혼 대신, 별거를 무늬만 부부인 윈도우부부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단숨에 읽어가던 나는 눈이 피곤하고 어깨가 아파 더 이상 읽어 내려가는 것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생각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동사무소로 향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아서 엄마의 가계부에 적힌 날짜와 대조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가족관계증명서에 나의 출생 날짜가 있었는데, 주민등록부상에 태어난 날짜와 일치하지 않았다. 행정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 당시 아빠가 실수로 나중 등재를 한 것이 맞는지 정확하게 알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시간이 흐르고 아빠가 더 이상 엄마의 도박 중독을 끊지 못하고 은행에서 퇴직하게 되자, 엄마는 아빠에게 돈을 벌 것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큰돈을 벌려다, 반대로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빠와 엄마는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견디기 힘든 아빠는 집을 나갔다. 여기까지 읽게 되었을 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동안 회사 일이 바빠서 엄마의 유산인 가계부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 회사 일도 바빴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가 고아 된 기념으로 술 한잔 마시자는 전화에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 놓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 외로움이 뼛속같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친구들은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슴에 한기가 들지 않으니,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늦게까지 수다 떨자던 친구들이 밤 10시가 되자, 부모님 걱정한다는 말로 자리를 파하고 나자, 혼자된 외로움이 사무치게 다가온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니 컴컴한 어둠에 묻혀 있던 집안에서 누군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가 넘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음에도 혼자 깜짝 놀라 현관문을 확인했다.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할 법도 한데 아직도 혼자 집안에 앉아 있으면 무섭다. 누군가와 함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오늘따라 조용함이 무섭다. 어둠이 무서워 밤새 불을 켜 둔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술기운 탓인지 늦잠을 잤다. 정신없이 양치만 하고 지하철로 뛰었다.
오늘 또 하루가 평범한 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원룸 계약 기간이 끝나 시설이 좋은 근처 오피스텔로 이사하기로 하고, 부동산에서 계약했다. 이삿짐을 싸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작은 원룸 이사라 트럭 1톤이면 될 것 같아 미리 용달차를 부르기로 하고 우체국에서 빈 박스를 샀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쓸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동안 내 눈에 띄지 않아 몰랐던 것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수첩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은 다이어리가 책꽃이 에서 툭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으로 버리려 미뤄 두었던 것인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은 메모지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익숙한 글씨였다. 엄마가 생전에 자주 쓰던 글씨로 쓰인 메모가 날짜와 함께 쓰여 있었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가 이제야 풀리는 것을 다이어리를 보면서,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건이었다. 맨 첫 장을 넘기자,
나의 생일과 일치하는 날짜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소상하게 기록한 엄마의
기분까지도 알 수 있었다.
1999년 7월 20일 날씨 맑음
그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묘하게 답답했다.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씨에 내 심사가 뒤틀린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모두 유치원에 보내고 나니 집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나서도 기분이 상쾌해야 하는데도 몹시 우울했다. 나의 기질은 원래 부모님이 물려 주신 탓에 신경이 예민해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알았기에, 또 나를 괴롭히려 찾아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마당이 있는 작은 집에 살았는데 젊고 예쁜 여자가 우리집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왜 그렇게 서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결국 결심이 섰는지, 내가 앉아 있는 마루를 향해 초인종을 누르는 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나에게 다짜고짜 아이를 맡아 길러 달라는 말을 남겼다. 나는 처음에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고 물었지만, 여자는 금방 알 것이라는 말과 함께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기는 6개월 정도 되었고 이름은 경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포대기 안에는 통장과 비밀번호가 적인 쪽지가 있었다. 그리고 부디 잘 키워 달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비로소 나의 출생에 비밀에 관한 것을 이제야 풀리나 싶어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은 원룸과 달리 방범이 잘 되어 있어 밤마다 불을 켜 놓고 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흉몽에 시달리지 않고 아침까지 단잠을 잘 수가 있었다. 덕분에 회사에서 업무 효율도 높아, 승진하게 되었다. 말단 사원에서 주임으로 호봉이 올라가면서, 괜히 혼자 으쓱한 기분으로 일하니 친구들이 좋은 일 있느냐 물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이제야 자립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일상을 이어 갔다. 엄마의 다이어리를 읽으며 왜 나를 그토록 구박과 학대했는지 궁금증은 깊어만 갔고, 비밀의 열쇠를 찾기 위해 나는 밤마다 학창 시절 하지 못했던 공부를 늦게 하는 기분으로, 하나씩 수수께끼를 풀 듯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몇 달 뒤 의문이 풀렸다. 결국 엄마는 아빠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게 되었고, 자신이 뿌린 씨앗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나를 키워준 엄마를 용서했다. 밖에서 낳은 시앗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왜 아빠는 나를 마치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대하듯이 대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려는 아빠와 엄마의 빚을 감당하기 어려워 이혼을 결심하고 두 사람이 별거하는 과정에서 생긴 아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깊은 허탈감이 밀려왔지만 그래서 지금 나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가족들에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해도 의례 그러려니 하고 살았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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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 단편 소설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대청 마루에 들어서면 큰 가족 사진이 집집마다 있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탄생의 비밀을 지닌
복잡한 가정사에서
여린여인의 현실을
보여 주어서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이헌 조미경
방장님....^^
2022년도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