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TV 2018. 1. 15일 23시부터 방영한 “특집다큐 기록의 가치 편액”에서 보백당 편액을 보면서 과거 하정공 유훈시가 생각나서 “惟淸白”을 정리한다. 1.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택 寶白堂 安東金係行 ①경력 : 대사간 청백리 ②요약 1431(세종 13)∼1517(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③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④생애 및 활동사항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⑤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외 다수 ⑥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보백당 시 출처 : http://blog.daum.net/hanbaek10/2352
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은 거유(巨儒)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교사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된다. 문장과 시에 자신만만했던 하도(下道)의 이모선비가 실력을 겨루고 싶어 상도(上道)의 문향 안동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안동에서 은거하며 청백한 자세를 고고하게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그 때 국사(國師)로 있던 장질(長姪:맏조카)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다만 청백이 있을 뿐... 寶白堂 金係字行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씀
3. 하정공 유훈시 하정공은 62세(1407년) 조카 사눌이 32세 되던 해의 故事 태종(太宗) 7년 丁亥(1407) 4월 사눌(思訥)은 이조정량(吏曹正郞)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에 급제 즉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특제되었을 때 예문각 대제학 하정공이 조카 사눌과 나눈 시가 유훈(遺訓)으로 전해 오고 있다.
조카 사눌에게 보임(示姪思訥) 차야등전주수순(此夜燈前酒數巡) 여년삼십이청춘(汝年三十二靑春) 오가장물유청백(吾家長物惟淸白) 세세상전무한인(世世相傳無限人) 이 밤 등불 앞에 술을 주고받으니 너의 나이 32세 청춘이로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것은 오직 청백(淸白)이니 대대(代代)로 서로이어 끝없이 사람에게 전하라. (3, 4행은 하정공의 유훈(遺訓) 시로 자주 사용 함) 4. 일부 후손들이 3행 吾家長物惟淸白을 吾家長物唯淸白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정파보 1권 64페이지에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으며 묘비 뒷면에도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다. 唯(오직유)는 틀리고 惟(생각할 유)자가 맞다. 옥편에 보면 惟은 오직, 오로지라는 뜻이 있다는데 惟 글자를 생각할 유자로만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앞으로는 각종 사이트에 유통되는 것을 吾家長物惟淸白로 정정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한다. 특히 2013년 11월 12일 하정종보에 모 종원이 “惟(생각할 유)자가 틀리고 唯(오직유)자가 맞다” 라고 제시한 ①보백당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는 것이 KBS 편액 방송을 보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로 되어 있고 ② 박원형 민사평시에 唯淸白도 후세인이 인터넷에 쓴글이기에 실물을 보기전에는 인정할 수 없다.
하정종보
하정종보에서 보백당글씨라고 주장한 부분(편액 사진과 다름)
박원형시가 길어 합번에 캡첩할 수 없어 2번 하여 겹친부분잇음
박원형 후손이 쓴 교훈시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 唯淸白이라쓴 시가 돌아 다닌다.
5. 결론 하정공은 한시 작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吾家長物惟淸白”한시를 쓰셨는데 일후 후손들이 한시작법에 맞지 않고 “하정집과 하정유집”을 편찬하신 선조들이 唯(오직유)를 惟(생각할 유)로 잘 못 기록했다라고 선조를 모독하기에 하정공 이후에 청백리가 되신 안동김계행선생 한시를 근거로 제시하니 종중 출입한다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종원을 혼란하게 만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 KBS TV 2018. 1. 15일 23시부터 방영한 “특집다큐 기록의 가치 편액”에서 보백당 편액을 보면서 과거 하정공 유훈시가 생각나서 “惟淸白”을 정리한다. 1.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택 寶白堂 安東金係行 ①경력 : 대사간 청백리 ②요약 1431(세종 13)∼1517(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③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④생애 및 활동사항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⑤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외 다수 ⑥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보백당 시 출처 : http://blog.daum.net/hanbaek10/2352
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은 거유(巨儒)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교사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된다. 문장과 시에 자신만만했던 하도(下道)의 이모선비가 실력을 겨루고 싶어 상도(上道)의 문향 안동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안동에서 은거하며 청백한 자세를 고고하게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그 때 국사(國師)로 있던 장질(長姪:맏조카)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다만 청백이 있을 뿐... 寶白堂 金係字行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씀
3. 하정공 유훈시 하정공은 62세(1407년) 조카 사눌이 32세 되던 해의 故事 태종(太宗) 7년 丁亥(1407) 4월 사눌(思訥)은 이조정량(吏曹正郞)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에 급제 즉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특제되었을 때 예문각 대제학 하정공이 조카 사눌과 나눈 시가 유훈(遺訓)으로 전해 오고 있다.
조카 사눌에게 보임(示姪思訥) 차야등전주수순(此夜燈前酒數巡) 여년삼십이청춘(汝年三十二靑春) 오가장물유청백(吾家長物惟淸白) 세세상전무한인(世世相傳無限人) 이 밤 등불 앞에 술을 주고받으니 너의 나이 32세 청춘이로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것은 오직 청백(淸白)이니 대대(代代)로 서로이어 끝없이 사람에게 전하라. (3, 4행은 하정공의 유훈(遺訓) 시로 자주 사용 함) 4. 일부 후손들이 3행 吾家長物惟淸白을 吾家長物唯淸白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정파보 1권 64페이지에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으며 묘비 뒷면에도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다. 唯(오직유)는 틀리고 惟(생각할 유)자가 맞다. 옥편에 보면 惟은 오직, 오로지라는 뜻이 있다는데 惟 글자를 생각할 유자로만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앞으로는 각종 사이트에 유통되는 것을 吾家長物惟淸白로 정정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한다. 특히 2013년 11월 12일 하정종보에 모 종원이 “惟(생각할 유)자가 틀리고 唯(오직유)자가 맞다” 라고 제시한 ①보백당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는 것이 KBS 편액 방송을 보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로 되어 있고 ② 박원형 민사평시에 唯淸白도 후세인이 인터넷에 쓴글이기에 실물을 보기전에는 인정할 수 없다.
하정종보
하정종보에서 보백당글씨라고 주장한 부분(편액 사진과 다름)
박원형시가 길어 합번에 캡첩할 수 없어 2번 하여 겹친부분잇음
박원형 후손이 쓴 교훈시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터넷에 唯淸白이라쓴 시가 돌아 다닌다.
5. 결론 하정공은 한시 작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吾家長物惟淸白”한시를 쓰셨는데 일후 후손들이 한시작법에 맞지 않고 “하정집과 하정유집”을 편찬하신 선조들이 唯(오직유)를 惟(생각할 유)로 잘 못 기록했다라고 선조를 모독하기에 하정공 이후에 청백리가 되신 안동김계행선생 한시를 근거로 제시하니 종중 출입한다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종원을 혼란하게 만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첫댓글 夏亭遺集(하정유집)은 10세손 류상재(대사간)이 집록(集錄)한 것을 정조 24(서기 1800)년 15세손 류순(柳詢)이 간행하고 이기양 박규순 이가환이 서(序)하고 최정현이 발문하였고, 夏亭集(하정집)은 조선 고종 31(1894)년에 12세손(世孫) 류명원이 집록하여 서(序)하고 류진규가 발문, 추발은 18세손 류기연, 16세손 류석룡이 도유사는 17세손 류병준이 서(序)는 이건창이 하였다. 류상재선조가 시 8수 소차 10편 제문 1편 부록으로 연보 행장 사제문 묘표 사실 녹패 공신도감녹권 전의 정계서원사액사실 각 1편 등을 집록했다는데 후세 자손이 대사간 류상재선조와 류명원선조에게 唯淸白을 오기(誤記)하여 惟淸白로 썼다고하면 모산 선조를 능
夏亭遺集(하정유집)을 집록한 류상재(대사간)선조와 류순(柳詢)선조, 夏亭集(하정집)을 집록한 류명원선조와 발문한 류진규선조 추발한 류기연선조와 류석룡선조 도유사는 류병준선조는 모두 신북면 모산에 선조로 모산 선조를 능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