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eouledu2012/110134421249
동물의 세계, 인간 세계를 비추는 거울?
<조선유학자들의 동물원> 연재를 시작하며
사자와 얼룩말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마다가스카』라는 만화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사자, 얼룩말, 하마, 기린 네 명의 동물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다. 뉴욕시의 동물원에서 사람들을 위해 재롱을 부리며 안락하게 살던 동물들은 어느 날 동물원을 탈출해 작은 일탈을 벌이게 된다. 도심으로 뛰쳐나와 물의를 빚은 동물들은 야생의 섬 마다가스카로 추방된다.
동물원에서 위생적이고 편안한 삶을 누리던 네 마리 동물들이 갑자기 야생에 방생되었으니 온갖 고생을 할 만하다.
일단 먹는 것이 문제다. 초식동물인 얼룩말, 하마, 기린은 그나마 풀이라도 뜯어먹으며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사자는 쫄쫄 굶는다. 동물원에서 편하게 고깃덩이를 받아먹고 살아서 몰랐던 것이다. 고깃덩이는 누군가의 살이고, 그 고깃덩이는 바로 사자의 친구들인 초식동물들의 살이라는 것을. 사자는 배를 주리며 친구들을 잡아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밥 앞에 장사 없다고 일단 내가 굶어죽겠는데 친구고 뭐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정신을 잃고 친구들을 먹으려는 사자로부터 다들 도망치기 바쁜데, 결국 사자는 우정의 힘으로 본능을 극복한다.
펭귄들의 도움으로 고깃덩이 대신 생선으로 연명하는 대안까지 찾아낸다. 다행히 생선 맛도 꽤 괜찮다. 어쨌든 단백질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만화영화는 이렇게 다른 종의 동물들을 한데 묶어 인간사회처럼 그려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만화영화 속 동물들이 야생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곰돌이 푸우만 해도 그렇다. 사람도 때려잡는 흉악한 곰과 초식동물 당나귀가 친구가 되어 뛰노는 세상이 곰돌이 푸우의 배경이다. 아마 『마다가스카』의 제작자들 중 누군가는 그러한 만화영화의 관행을 비틀어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약육강식의 야생섬 마다가스카는 동물원에서만 살던 동물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다.
이국적인 야생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동물들은 점차 동물원 밖의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된다.
귀엽고 작은 아기오리는 악어에게 먹히는 세상, 아니 그보다 먼저 본인들이 친구인 사자에게 먹힐지도 모르는 세상이 무섭다. 그냥 헛소리로 이루어진 만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종과 종 사이의 약육강식은 인간이라는 같은 종 사이의 약육강식과는 비교하지 않는도 될까?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인권을 존중하는 인간이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니까?
사자는 얼룩말보다 우월한가?
사람과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 상식인 세상이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누구는 사자이고 누구는 얼룩말이다. 누구는 열등하게 태어나고 누구는 우월하게 태어난다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며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열등함과 우월함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만든 인위적 기준에 따라 임의로 해석한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임의로 해석한 이야기는 그저 비과학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목이 긴 기린은 목 짧은 기린에 비해 우월한가? 아니다. 나무들이 넝쿨처럼 자라지 않고 위로 자랐기 때문에 목이 긴 기린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을 뿐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환경에 적응했다는 어떤 능력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이 있다.
하지만 사자 개체들 중 수컷 사자들은 몸이 무거워서 사냥도 못 한다. 한 마디로 혼자서 제 밥벌이도 못하는 못난 것들이란 얘기다. 이에 비해 얼룩말은 힘들게 체력을 소모하며 육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단순한 이야기를 만들고 열렬히 믿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광경을 이야기하며 사자의 우월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사자는 분명 얼룩말보다 육체적으로 강하다.
좀 더 다른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사자를 찬양하는 사자 부족 사람들이 얼룩말을 숭배하는 부족과의 싸움에서 이겨 얼룩말 부족을 지배했다고 치자. 사자 부족은 최초의 승리 때문에 사자에 대한 자신감이 더욱 커진다. 최초의 승리는 이야기로 구전된다. 사자 부족의 권력은 커져만 갈 것이고 얼룩말 부족 사람들은 점점 열등감에 젖어갈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 안돼, 혁명을 일으키자! 언제까지 착취당하며 살래? 얼룩말 부족이건 사자 부족이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 인간이란 얼마나 똑똑한 동물인데, 이래저래 궁리하면 얼룩말 가지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니까? 그래서 평등한 세상이 도래했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지 못하다.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라 함은 두 개 이상의 대상을 놓고 그 대상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그 대상들의 가치가 평등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고, 역설적으로 생존조차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 각자가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도 참 다양해서 서로 서로 자신의 기준이 고매하다고 우기지만, 허벅지 근육이나 뇌하수체나 둘 다 물리적 제한 속에 있는 단백질인 주제에 전자는 천박하고 후자는 고상하다는 소위 문명인들의 미신은 종교에 대한 광신만큼 유해하다.
우리의 기준이 개인적인 믿음이든 전통적인 믿음이든, 미신이든 과학이든, 인종이든 국적이든 간에, 우리의 다양한 기준들 때문에 결국 우리는 사자와 얼룩말과 하마일수 밖에 없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 사자라고? 혁명이 일어나 모든 것이 전복되어도 이번에 우리는 고양이와 개와 악어가 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세상은 동물원도 아니다.
조선의 유학자, 동물을 말하다!
서구 모더니티를 촉발한 계몽주의 정신은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이 모두 평등하게 되기 위한 노력도 해왔다. 서구 계몽주의는 그들의 정신사적 필요성으로 인해 모더니즘을 낳기도 했지만 반면 그들의 물질주의적 필요성으로 이해 제국주의를 낳았다. 제국주의를 거치며 평등한 인간의 범주의 아시아 인구 등 비유럽 인구가 포함되지 않았던 점은 유감이지만, 어쨌든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더니즘이 기여한 바는 크다.
서구정신사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 왔던 아시아 학자들은 이러한 모더니즘을 동양학에서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학자들이라 하면 적어도 학생들에게 패배의 역사가 아니라 패배주의를 가르치는 일부 교사들보다는 나아야 한다. 그러나 인권이라든가 과학적 사고방식 등등 모더니즘에 엇비슷하게 끼워 맞출 수 있는 단서를 동양학에서 발견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학술작업은 동양학 연구라기보다는 단순히 서양정신사 연구에 가깝지 않을까?
모더니즘과 비슷한 논리를 찾는 게 아니면, 모더니즘의 병폐를 치유하는 동양학은 어떨까? 미국에서 인기 있는 중국계 동양학자 뚜 웨이밍은 모더니즘의 부작용을 유교정신으로 치유하자는 논리로 유명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의 짝궁에 불과하다고 욕먹는 마당에 유교정신을 치료제로 보는 담론은 무슨 뉴에이지 서적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 같다.
동양학의 독자 및 일부 동양학 학자들은 동양학에서 모더니즘과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만을 찾아낸 후에 모더니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전통 담론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봉건적이라고 비판한다. 전통담론의 불평등한 인간관계, 비민주적 군주론, 비과학성이라는 특성을 이유로 전근대적적이라고 단정을 짓는 것이다. 그렇게 단정 지어지고 크게 연구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유학자들의 동물관을 담아낸 저술이다.
그동안 무시 받아온 유학자들의 동물저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유일한 학자는 동물분류학자인 김훈수 선생이다. 김훈수 선생이 신석기 시대부터 식민지 시대까지 한반도에서 축적된 생물학적 지식을 총망라하여 정리한 두 권의 논문(1995년, 2003년)은 한국의 ‘생물사’가 아닌 ‘생물학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유일한 연구가 아닐까 싶다. 그 동안 조선유학자들의 동물연구는 동물의 실용적인 쓰임새를 열거한 생물학적인 측면, 그리고 우화적 특성을 지닌 문학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부분만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유학자들의 동물저술은 생물학적인 측면과 철학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생물학적인 저술과 인문학적인 저술로 나누어서 따로 따로 연구하기가 힘들다. 김훈수 선생은 이러한 유학자들의 저술특징을 간파하고 실용서, 철학서, 유서, 한의학서,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양의 책들을 오직 동식물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정리하였다. 생물학적 연구이든 동물에 관한 인문학적인 연구이든, 동식물과 관련된 조상들의 연구를 찾아보고 싶다면 김훈수 선생의 논문을 꼭 찾아보시기를 바란다.
앞으로 연재하게 될 이 글도 김훈수 선생의 논문 중 조선의 생물학사 부분을 참고하며 시작한 것이다. 문학이 생활에 베어있던 조선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책을 남겼다. 전통을 공부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조선의 수많은 서책들에서 오직 동물에 관한 내용만 분류한 선행 작업이 우리 시대에 있다는 것은 과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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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지 원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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