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봉길 의사 [1908∼1932] 마지막 유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너이도 만일 피가 잇고 뼈가 잇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여라
태극에 기발을 높피 드날니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져와
한 잔 술을 부어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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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파평(坡平). 호 매헌(梅軒). 본명 우의(禹儀). 1908년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출생하였다.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부흥원(復興院),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