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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산돌이의 여정 (현종식 시집)
시인의 개성과 현실 수용
해설 : 최철훈(시인)
현종식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산돌이의 여정’에 담긴 작품을 읽어 내려가면서 방하착放下着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다 보면 번뇌와 갈등 질병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세상에 그 무엇이 두려우랴. 말 그대로 모두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현종식 시인은 팔십이 넘은 연세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화목한 가정과 온화한 성품으로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위치에 계신 분이다. 2018년 식도암으로 일 년 가까이 병마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러한 아픔을 잘 이겨내시고 계신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십 년 세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시고 꾸준히 시를 써 오시면서 방하착 이라는 말의 의미를 무수히 되새기신 것 같다.
이번 시조시집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말처럼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흙탕물 속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깨끗한 마음과 생각이 건져 올린 순수의 결정체이다. 3장 6구의 틀 속에 갇혀 있는듯하면서도 시공을 넘나드는 여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내공을 단련하는 땅속의 삼 년 세월
빈속에 마디마디 하나로 곧게 자라
칼바람 휘몰아쳐도 댓잎 소리 흥겹다
- <대나무(竹)> 전문
현종식 시인은 평생을 교직에서 학생을 가르쳐 오신 분이다. 성품 또한 선비(지조의 상징)의 기개가 넘치는 분이시다. <빈속에 마디마디 하나로 곧게 자라/ 칼바람 휘몰아쳐도 댓잎 소리 흥겹다>라는 구절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가운 날씨에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시인이 바라본 죽竹은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면서 시류에 야합하지 않고 올곧아야 된다고 말 하고 있다. 죽竹 하면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를 생각나게 한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듯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또 삼국지연의에서 <옥은 부서져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불에 탈지언정 그 마디가 휘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竹은 선비의 기상을 그대로 닮아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입에 회자하곤 하였다. 10여 년을 현종식 시인을 가까이해 온 필자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다. 따뜻함과 인자함이 몸에 배어 있으면서도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시인의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 같았다.
혼탁한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세상
수라에 내린 뿌리 수면으로 감아올려
허공에 멋과 향기를 내 뿜는 순결함이여
- <연(蓮)> 전문
<수라에 내린 뿌리 수면으로 감아올려/ 허공에 멋과 향기를 내 뿜는 순결함이여>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변의 부조리한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사람 또한 악과 거리가 먼 사람 나쁜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연꽃 같은 사람이라 이른다. 연꽃을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염화시중
의 미소’ 부처님이 연꽃을 들고 설법하실 때 ‘마하가섭’만이 그 참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말이나 글에 의존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현종식 시인이 바라보는 연꽃도 <혼탁한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세상> 삼라만상이 부처란 말을 실감하게 하는 시구이다.
천자 봉 높이 솟아 산 구름 감싸 안고
설한풍 이겨내는 의젓한 기암창송(奇巖蒼松)
천년의 기(氣)를 품고 선 성현의 푸른 기상
-<소나무(松)> 전문
소나무 하면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가 먼저 떠오른다. <설한풍 이겨내는 의젓한 기암창송/ 천년의 기를 품고 선 성현의 푸른 기상> 독야청청獨也靑靑한 소나무의 모습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격은 줄기와 푸른 솔잎, 우리 애국가에서 보듯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의 기상이라 했다. 현종식 시인의 시 소나무 <설한풍 이겨내는 의젓한 기암창송>에서 보듯이 설한풍 이겨내고 늘 푸르다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천년의 기를 품고 선 소나무를 닮고 싶다는 현종식 시인이 한그루 소나무가 아닐까?
낙엽 진 돌담 아래 쓸쓸히 돌아앉아
단발머리 소녀로 고개 내민 순이야
지금도 시오리 학교 길에 들국화 만발할까
- <들국화> 전문
들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산과 들에 저절로 나는 꽃으로 고상함, 밝음. 순수, 우아한 자태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다. 시인의 눈에 비친 들국화는 꽃으로서의 들국화가 아닌 어릴 적 추억이다. 낙엽 진 돌담 아래 쓸쓸히 핀 들국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 속엔 학창 시절 시오리 학교 길을 오가던 단발머리 순이의 모습으로 살아 아직 서성이고 있는 듯 오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언 듯 고개만 돌려봐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평생의 기억들,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 들국화 꽃길을 잊지 못하고 있는 풍경의 시이다.
오늘 난 하루 내 아무것도 본 게 없다
나뭇잎이 보채고 바람 봄비 스쳐 갈 뿐
창밖엔 바다 건너온 안개만 자욱하다
- <삶>전문
백 년을 살아도 하루를 살아 온 것 같은 삶이 있고 하루를 살아도 백 년을 살아 온 것 같은 삶이 있을 수 있다. 불가에서는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 시공의 삶을 찰라 라고 하였다. 눈만 감았다 떠도 지난 세월이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나뭇잎이 보채고 바람 봄비 스쳐 갈 뿐/창밖엔 바다 건너온 안개만 자욱하다> 팔십여 성상星霜을 살아오시면서 좋은 일 궂은일, 볼 것 못 볼 것 모두 겪고 지난 삶이 안개 속에 묻혀 있음을 보고 있다. <오늘 난 하루 내 아무것도 본 게 없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등 굽은 지팡이를 힘겹게 움켜쥐고
길 따라 세월 따라 두 몸이 한 몸으로
맨땅을 딛고 다니는 다정한 지팡이 둘
나 일찍 너를 안고 나설 줄 뉘 알았으랴
탄탄한 두 다리로 마음대로 다녔는데
우직한 뼈가 다 녹은 등 굽은 지팡이 둘
여로에 해바라기 한 포기 심어놓고
갈림길 잘못 들면 환한 얼굴 등대 삼아
우중에 젖은 몸뚱이 하나 되는 지팡이 둘
- <지팡이 둘> 전문
태어나서는 네발로 기다가, 돌이 지나면 두 발로 걷고, 나이 들어 다리에 힘이 없어지면 지팡이가 두발이 되어 네발로 걷는 것이 사람에 따라 정도는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밟는 과정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현 시인의 두 지팡이는 어찌 보면 한평생 살아오시면서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부지런히 살아온 훈장이리라.
화목한 가정은 가족의 보금자리 그곳엔 해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나 불만은 없다 오직 가족의 사랑과 이해가 있을 뿐
우리 집 거실에 가훈 하나 걸려있다
일 년 전 식도암으로 생사의 바닥을 넘나들 때
네 자녀의 지성으로 암을 잠재우고 깨어났다
떠나지 않는 암과는 마음 편한 친구로 지내며
꽃 피고 새 우는 어머니의 고향 땅이 그립다
내일이 생의 마지막이 될지라도 웃으며 가련다
- <화목한 가정> 전문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다. 자애로운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며 사랑과 이해로서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우리네 가족들의 모습이다. 현종식 시인 댁의 가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추측컨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아닐까? 현시인은 작년(2018년) 식도암 판정을 받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 가족이 보여준 아버지에 대한 지극정성이 암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고 현시인은 술회하였다. 생, 노, 병, 사의 일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특히 아플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회복될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현시인은 <떠나지 않는 암과는 마음 편한 친구로 지내며/ –중략- /내일이 생의 마지막이 될지라도 웃으면서 가련다.>이 정도의 달관된 마음이라면 암도 감히 어쩌지 못하리라. 이 시 한 편으로 가족들의 정성과 사랑에 대한 위로가 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팔순에 가신 어머니 장수하셨다고 했다
세월 속에 성장한 자식 팔순의 발자국들
손자들 선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즐긴다
- <남아 있는 나날> 전문
한밤에 웅크리고 누운 아내를 내려다본다
낙원을 찾아 거친 산과 들을 헤치며 달려왔다
큰 행복 하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만
모두가 허공의 뜬구름이요 흘러간 강물이어라
한껏 멋을 내던 산과 들이 옷을 벗고 누웠다
산들바람과 눈 부신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당신과 함께 고향 같은 소확행을 누리고 싶다
노을 속 당신과 함께 소풍을 즐길 수 있다면
- <당신과 함께라면> 전문
누구나 젊을 적에는 자신과 가족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희생이라 생각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삶의 목표이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평범한 대다수의 젊은이들과 허황된 꿈에 사로잡힌 젊은이들 또한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현종식 시인도 젊을 적에는 진정한 행복을 위해 질곡의 세월을 헤쳐 나온 한 시대를 이끌어온 산 증인이다. 하지만 세월 앞에는 장사壯士가 없다 한다. 찬란하던 봄, 여름, 가을을 다 보내고 함지咸池를 향해 달려가는 저녁노을 앞에서 다시 되돌아보는 지난 세월 <모두가 허공의 뜬구름이요 흘러간 강물이어라>, <당신과 함께 고향 같은 소확행을 누리고 싶다>, <노을 속/ 당신과 함께/ 소풍을 즐길 수 있다면> 한번 왔다 때가 되면 가는 인생, 그래도 <팔순에 가신 어머니 장수하셨다고 했다> 시절이 좋아 지금은 팔순은 아직 젊었다고들 하지만 현 시인이 느끼는 세월은 팔순의 발자국을 지나 손자들 앞에서 시 한 수를 즐길 수 있는 낭만이 부럽다. 부창부수라 했다. 산들바람 눈 부신 햇살 아직 곁에 있답니다.
청학동 넘어가는 아리랑 고갯길은
물고기 이고 지고 넘나들던 열두 고비
민초들 애잔한 혼이 꼬불꼬불 넘어간다
해녀들 바다에서 물질하다 지친 몸
때가 되면 허기를 고오매로 달래고
반바지 내복 바람으로 선들선들 넘어간다
영도 섬 오고가는 자갈치 아지매들
맛 좋고 싱싱한 놈 골라잡아 사이소
어무이 고된 숨결이 난장판을 넘어간다
- <절영도 아리랑> 전문
어릴 적 영도에 사셨나 봅니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고 어디를 가나 사통팔달이지만 현종식 시인의 어릴 적 영도는 그렇지 못했다. 해안선을 따라 꾸불꾸불 열두 고비는 더 넘어야 했던 동네였다. 먹거리조차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오직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민초들의 애환이 시 전편에 남아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신작로 길을 따라 삶의 틈바구니를 비집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현 시인의 눈에 비친 오래전 삶의 모습이 한 편의 시<어무이 고된 숨결이 난장판을 넘어간다>로 남아 아리랑 고갯길을 넘고 있다
고샅길 담장 위로 수줍게 얼굴 내민
새하얀 털옷 입고 하늘하늘 춤추던
철없는 막내딸 같은 신부를 닮았다
개나리 노란 방울 방실방실 웃음 띠고
진양조장단 맞춰 봉긋봉긋 피어나
가마 탄 웨딩드레서 고샅길이 삼삼하다
- <목련 1> 전문
행운의 낭보를 고이 접어 간직하고
새하얀 알몸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가문에 가화만사성 빌고 있는 엄니 마음
- <목련 2> 전문
목련꽃을 보면 학창 시절 부르던 ‘사월의 노래’가 생각난다. 고샅길 담장 너머로 <철없는 막내딸 같은 신부를 닮았다> 목련꽃이 하얗게 물들면 봄이 무르익어 간다. 현종식 시인의 눈에 비친 목련꽃의 이미지는 가마 탄 신부의 웨딩드레서이기도 하고 <가문에 가화만사성 빌고 있는 엄니 마음>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화신이 되어 가정의 화목을 비는 봄의 전령이기도 하다. 또 목련꽃은 가지에 핀 연꽃이라 하여 ‘자비’ ‘은혜’라는 꽃말도 가지고 있다. 고샅길 돌담 너머로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선 목련은 화사한 그 자태만큼이나 개나리와 더불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흥얼거리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 목련꽃 그늘 아래 ----
어디쯤 가다가 뒤돌아본 여정
잡초밭 진흙탕에 난행의 요철 발길
산 돌이 능선을 타고 태백산을 넘는다
- <산돌이의 여정> 전문
인간은 자신을 알기 위해 평생을 방황하는 나그네다. <잡초밭 진흙탕에 난행의 요철 발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항상 평탄하고 여유로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일생을 살아가는 길이 잡초밭이나 진흙탕 길이 될 수도 있고, 희망찬 꽃길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의 언어 속에 과거의 족적이 남아있고, 현재가 살아 숨 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예감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디쯤 가다가 뒤돌아본 여정> 로버트 프러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처음부터 두 길을 함께 갈 수는 없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의 삶이 그러하다. ‘어디쯤 가다가’ 이 어디쯤이 인생의 초년일 수도 있고, 중년 또는 장년, 노년일 수도 있다. 거친 삶의 능선을 한발 한발 태백준령을 넘다 보면 어느덧 노을이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이게 바로 삶의 모습이라 해도 그리 아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뒷 강물이 앞 강물을 밀어내듯 지극히 평범한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생활 속에서 시의 싹을 키우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속에서 자신의 개성과 모든 것을 만든다. 짧은 한 편의 시조 속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정수를 담은 것 같다.
100여 편의 작품 중에서 무작위로 10여 편을 선정하여 시인의 작품세계를 유영해 보았다.
현종식 시인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 정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가족애 그리고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깊은 성찰 등 다양한 모습으로 회자 되고 있다. 많은 독자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편들이었다. 현종식 시인의 시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받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한 어조로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시조라는 그릇 속에 담아내고 있다.
제목 - 카르페 디엠 (현종길 시집)
최철훈 (시인)
시를 빚는다는 것은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다. 시를 마음의 그림이라 하지만 그 그림의 모습은 어떤 시각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감동의 진폭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시 전반에 바슐라르의 공간론에 보이는 사 원소 지수화풍地水 火風의 네 범주 안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시라는 그릇에 담아내고 있다.
현종길 시인은 2013년<문장21>로 등단을 하면서 세상에 소개된 분이다. 춘천에 사시면서 첫 시집 ‘한 알의 포도가 풀무를 돌린다’를 상재한 후 춘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다. 현종길 시인은 시 105편을 4부로 나누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역사의식을 담은 시, 특히 1부는 한영 대역으로 시 전반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그려 내고 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참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시인의 시 속에 녹아 출렁이는 삶의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희망찬 모습이었다. 건강한 생각이 건져 올린 시편들은 많은 독자의 눈길과 마음을 적셔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 같다.
대청마루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나란하다/ 환히 열어 놓은 마루 뒷문 저쪽으로 가신 듯/ 꿈속인 양 꽃길 같은 어둠이 깊다// 오래 걸었던 길처럼 저만치에서 바람이 분다// - <중략> - // 어디쯤에서 만나야 할 그 문일까/ 발을 탁탁 털고 문턱을 새처럼 넘어가/ 흰 고무신을 신은 아버지 뒷모습/ 달 꽃에 가려져 차가운 그 어깨// 늘 등 뒤로만 보이던 또 하나의 얼굴/ 장서(長書) 같은 뒷모습에 등 기대고 앉아/ 그 페이지 넘길 때마다/ 흰 고무신 그 그림자에 달빛 담긴다
- <뒷모습> 일부
시간, 시간이란 무엇인가? 댓돌 위에 놓인 한 켤레의 흰 고무신 -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진 세월의 시간 앞에 안타까움을 회고하는 시인의 표정은 그리움이다. 이처럼 시는 인간의 표정을 그려낸다. <흰 고무신을 신은 아버지의 뒷모습/ 달빛에 가려져 차가웠던 어깨> 시인은 가슴에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가셨지만, 결코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시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얼굴이며 인격이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끝없이 반복되는 되풀이 속에서 자기 존재의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며 자화상의 실체를 찾아가는 작업이 아닐까? 시인은 지나온 세월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록새록 살아오는 과거의 잔영을 현재와 미래를 담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시의 집을 짓고 있다.
별꽃 같은 꽃들이 반짝 인다/ 그 꽃 무리 사이 길로 샘물 길어 오시던 어머니/어머니 붉은 손이 내 눈에 겹쳐온다// 은하수 같은 꽃잎에서 엄마의 맥박 소리 들린다// -<중략>- //말동무가 멀어진 내 철없던 날/ 그날 어머니 목소리 메밀꽃밭 속에서 들린다// 그 꽃밭에서 메아리 없는 어머니를 불러본다/ 흰 꽃잎처럼 피었다 지워지는 얼굴/ 꽃밭 저 산비탈에 동그란 집을 짓고 누우신 어머니/ 오늘 나는 몸을 낮춰 어머니를 만난다
- <메밀꽃 환한 날> 일부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하고/불러 보면/ 금시로 따스해 오는/ 내 마음> 향파 이주홍 선생님의 시다. 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치밀하게 계산된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구조적으로 배치하고 적절한 공간적 배경과 향토적 어휘를 구사하면서 갈등을 해소 하고 있는 작품으로 배경 묘사와 문체가 조화를 이루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현종길 시인의 ‘메밀꽃 환한 날’도 두 분의 작품못 지 않는 감동으로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준다. <꽃 무리 사이로 샘물을 길어 오시든 어머니/ 은하수 같은 꽃잎에서 엄마의 맥박 소리가 들린다> 메밀꽃이 피면 천지 사방이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뿌려 놓은 듯, 그 메밀꽃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의 맥박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인의 마음이 아프다. 메밀꽃 무리 져 핀 산등성이에 메밀꽃으로 누워 자신의 맥박 소리를 듣고 있을 현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인의 오랜 말동무로 서성이고 계실 현 시인의 어머니, 오늘은 바지랑대 위에서 그네를 타는 흰옷 입은 메밀꽃으로 현 시인의 꿈속을 찾아올 것만 같은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햇살이 겨눈 댓잎 파리들 파도치는 소리 /온음이 속 텅텅 비우고 반음을 채운다/ 초록 정맥으로 흘러 다니는 생의 음표들/ 한 곡조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화음/ 부르지 않아도 메아리로 와 안긴다// 둥근 마디마다 청운을 한 둘레 두르고/ 하늘을 품을 줄도 내어 줄 줄도 아는 곧은 몸/ 공명처럼 빠져나가는 우주의 음계들/ 그 음계를 넘어서는 무언 합주의 대 숲길/ 저 홀로 맑은소리 퉁소를 불고 있다// 하늘의 동굴 같은 대나무 숲속에서/ 선계의 악기를 다 연주하듯 음악회를 한다/ 나는 죽녹원 삽화처럼/ 댓잎 파리 위에 앉아 우는 새 한 마리/ 카르페 디엠,
- <죽녹원 카르페 디엠> 전문
카르페 디엠 (Carpe diem) - 현재를 즐기라 (즐기다)는 이 시의 제목이다.
시는 그 어떤 그림이나 양식으로도 그려 낼 수 없는 시인의 폭넓고 다양한 울림을 담고 있을 때 그 시가 가지는 감동의 사이클이 커지면서 이미지 또한 다양해진다. 대숲에서 바람을 읽고 싶은 시인 현종길, 부르지 않아도 메아리로 와 안길 생의 음표를 온음으로 혹은 반음으로 초록으로 채우는 ‘죽녹원’에서 한발만 들어서도 온통 초록으로 물 들 것만 같은 온몸으로 시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다. 댓잎 위에 앉아 우는 한 마리 새가 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드러내고자하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일까. 천상과 지상의 일을 이원대립 시키면서 그 중간에 서고 싶다는 마음으로 건져 올린 시 한 편 속에 인생의 숱한 이야기가 높낮이를 가늠치 못할 음표를 그리고 있다.
하늘에 파란 피가 흐르는 봄날/ 섬진강 팔 백 리 산수유 길을 걷는다/ 노랑 날개가 돋아 나비처럼 날고 싶은 봄날// -<중략>- //꽃잎을 문 노랑나비 떼 연인같이 왈츠를 춘다/ 한낮 내 가슴 저쪽 너머에 그대를 두고/ 햇살 비친 유리구슬처럼 눈부신 나의 봄
- <봄의 음계> 일부
디스 파냐 소노라벨 라 (스파뇨라 아름답구나. 꽃같이 아름답구나) 봄날 들길을 걸으면서 흥에 겨워 부르는 왈츠 곡 ‘에스파냐의 처녀‘ 첫 구절이다. 겨울의
껍질을 뚫고 고개를 내민 봄의 정령 < 섬진강 팔 백 리 산수유 길/ 노랑 날개가 돋아 나비처럼 날고 싶은 봄날/ 꽃을 문 노랑나비 떼 연인 같이 왈츠를 춘다> 봄, 봄은 사랑이다. 희망이다. 꿈이다. 섬진강 강둑을 걸으며 눈부신 봄을 만끽하는 시인의 눈빛에 비친 햇살의 술렁임, 시인의 가슴도 노랑나비가 되어 왈츠를 춘다. 흥겹다.
민들레꽃 한 송이가 거울 속에 서 있다/ 파란 꿈을 먹던 그 소녀/ 비바람에 부서진 시간이 소녀를 지운다/ 지운 상처는 가장 아름다운 옹이/ 옹이가 감정을 툭 건드린다/ 수없이 많은 시간의 감정들/ 샤프란 색 꽃잎처럼 흔들린다// - <중략> - // 지구별 어디든 초록 물감으로 /엎질러질 홀씨 하나 거울 속에 있다
- <거울> 일부
민들레의 꽃말은 사랑의 신탁, 불사신이다. 꽃말과는 달리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꽃이다. 그러나 이 시 속에서 거울에 비친 민들레는, 봄과 희망 그리고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미지가 원형질을 구성하고 있다. 한세상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비친 것만 믿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가슴속에 담고 있는 선과 악의 이미지는 쉽게 들어내 보이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흔히들 민들레를 민초의 모습으로 포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민들레의 강인한 생명력에서 기인한다. 민들레는 우리 산야 어디를 가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시인이 바라보고 느끼는 민들레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모습인 것 같다. 이 시에서 보이는 민들레의 이미지는 화자인 시인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시를 읽을 청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치유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상처의 옹이가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 이런 시인의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 되는 것 같다. 봄날 아침 민들레가 들여다본 거울의 이중성을 밀치고 떠날 민들레 홀씨의 여행 더욱 따사롭다.
스물한 살의 웃음이 매달린 편지를 본다// -<중략>- //그날 받은 편지에는/ 아직도 하얀 꽃향기가 피어나는데/ 마른 풀꽃반지처럼 사랑이 눈부실까/ 금이 간 물 항아리가 흘린 물방울들처럼/ 그 시간이 흐른 길 위로/ 풀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지렁이가 살고/ 이제 그 사랑은 / 마른 풀꽃 무게만큼 가벼워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풀꽃반지가 기쁨으로 뛰어오네
- <풀꽃 편지> 일부
타임머신을 타고 스물의 기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한다. <포도알 같은 눈을 마주 보며/ 꽃반지를 끼고/ 꽃처럼 부풀어 받은 편지/아직 하얀 꽃향기가 피어나는데> 시인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이십 대 시절의 청춘 이야기,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제는 눈을 씻어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시인은 도시의 메커니즘에서 지난 시절 순수의 아늑함을 그리워하고 삶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하는 순례자의 역할을 한다. <이제 그 사랑은/ 마른 풀잎의 무게만큼 가벼워졌지만> 지난 시절의 순수했던 감정은 세월이 흐름 따라 마른 풀잎의 무게만큼 가벼워졌지만, 빛바랜 기억의 편린은 지워질 수 없는 기쁨으로 살아온다는 시인의 가슴을 움직인 풀꽃 편지 한 통 그 자체로 우주가 되고 시의 세계를 유영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이처럼 시가 상징의 옷을 입을 때 독자들의 가슴에 감동으로 살아 숨 쉴 것이다.
시간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렀지/ 한 생은 길지만, 가을의 한 날 햇살 같다// - <중략> - // 늘 엇박자를 치며 삐걱거리던 시간이/ 툭 치면 깨질 듯 한 유리그릇 안에서/ 모래 같은 눈물이 녹아 밥풀 꽃이 피었지 //가을 강가의 마른풀 잎처럼 누워 노을을 본다 / 이제 노을빛으로 그는 내 등골을 다독이며/ 한 걸음 다가서는 듯 멀어지는 생의 가을/ 그 속에는 사과 꽃 피고 지던 시간의 집이 있다
- <부부> 전문
생각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완성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부부라는 이름이다. 그 부부라는 지도 속에는 험난한 산도 있고 밀밭을 스쳐 지나는 바람 시원한 평원도 있다. <늘 엇박자를 치며 삐꺽거리든 시간/ 툭 치면 깨질 듯한 유리그릇 안에서/모래 같은 눈물이 녹아 밥풀 꽃이 피었지> 불가에서는 부부는 칠천 겁劫의 인연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관계라 한다. 인因은 씨앗이고, 연緣 조건이다. 인생은 눈 깜빡할 사이 스쳐 지나는 세월, 남남이 서로 만나 살아가는 한 생,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기 마련이다. 손만 대어도 깨질 듯한 유리그릇 속의 삶과 같다는 시인의 조심스러움이 부부의 모습이다. 때로는 엇박자를 치며 삐꺽 일 때도 있겠지만, 그게 바로 사람 사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부부는 평생을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살아왔다며 자랑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참 재미없는 한생을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생은 유한하다. 세월이 흘러 몸도 마음도 가을 햇살에 야위어 가도, 사과 꽃 피고 지든 시간의 집에서 비워야 채워지고 채움은 비어 있는 것을 아는 현종길 시인의 정실 질감의 여백 속에 함축된 시의 숨소리가 천지사방 가득 찬다.
강물은 신들이 길을 내는 트릭아트/ 슬픔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 같은 것/ 그 물속을 읽듯 젖은 날개로 음영을 떨구는/ 흰 물새 한 마리// -<중략>- // 겨울 호수는 한 장의 그림엽서다/ 그 맑고 깊은 울림이 강을 건너간 뒤에야 알았지/ 등 굽은 갈대의 어깨에 몸을 누이는 노을처럼/ 짧은 생을 마치고 겨울날 안식에 든 고향 친구/ 고향의 강을 보고 싶다고 너의 눈에서 강물이 흘렀지/ 너의 재가 바람의 포자처럼 날아 고향으로 가는구나
- <노스탤지어의 슬픔> 일부
죽음이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인간의 운명 또한 사계의 순환처럼 불씨 한 점 묻고 마지막엔 트릭 아트로 남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허무를 본 시인의 눈빛에 담겨져 있는 고향은? <짧은 생을 마치고 안식에든 친구/ 고향의 강을 보고 싶다고 너의 눈에서 강물이 흘렀지> 호사수구狐死首丘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거나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고향의 강을 보고 싶다든 친구의 눈물은 모태의식이다. 한줌 재가 되어도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친구의 눈물 속에서 향수의 슬픔을 본 현종길 시인이 건저 올리는 애틋함이 삶과 죽음의 경계이리라.
땡볕을 퍼 나르는 보리밭/ 그 밭이랑 너머 살구 알들이/ 봄 내내 먹은 태양을 노랗게 쏟아낸다/ 종달새는 햇살을 쪼아대며
호르르 날고/ 이별은 종달새가 날아간 허공의 길/ 그 길에서는 초록 향내가 난다/ 진흙 덩이 부수던 벼린 호미 끝소리/ 숨찬 엄마의 얼굴 도랑물 소리로 살아온다/ 그 밭이랑에 새겨진 삶의 무늬처럼/ 보리밭 풍경 속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보리 이삭도 혼자서 패는 것이 아니지/ 가시 꽃밥에 맺히는 눈물방울/ 땡볕보다 따갑다고 뻐꾸기가 운다
- <가시 꽃밥> 전문
언젠가 경주 남산을 간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불국이다. 여울목 돌아내리는 도랑물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 가슴 뭉클할 수가 없었다. <진흙 덩이 부수던 벼린 호미 끝소리/ 숨찬 엄마의 얼굴 도랑물 소리로 살아온다> 한평생을 가족을 위해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으시던 어머니들, 호미로 밭을 매시는 것이 아니라 밭이랑에 삶을 쪼고 계셨다. 그렇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리 이삭도 혼자 패는 것이 아니듯이, 땡볕이 가시 꽃밥에 맺히는 눈물보다 더 따갑다는 보리누름의 하루해가 어머니의 지나온 생과 클로즈업되어 아직 초록의 향내가 나는 것 같다는 시인의 그리움, 먼 산 뻐꾸기 울음이 잠긴 눈빛처럼 따스하다. 이처럼 현종길 시인의 시는 그리움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다.
하늘을 지나온 겁(劫)이거나 찰나 거나/ 우주의 언어들은 연꽃 속에서 햇살이 되고/ 초록 옥쟁반에 수정 구슬을 담아 굴리는 아침/ 순한 발 진흙에 묻고 수레바퀴들이 돌고 있다/ 여름 산 같은 큰 귀 활짝 열어 놓고/ 이슬방울에 붉은 제 혼을 비춰보는 꽃/ 꽃잎 위에서 참선하는 그분의 말씀인가/ 입술 한 번 열지 않고 우주를 들어 올린다/ 연잎을 지나는 바람이 설법같이 들리는 날/ 꽃잎 같던 발이 내게도 있었나. /물 흐르는 소리/ 진흙 벌에서 맑은 혼을 걸러내는 그분의 물소리/그 물소리 우주로 들어 연꽃잎처럼 하늘 환하다
- <연꽃> 전문
진흙 속에 살면서도 진흙의 더러움에 섞이지 않는 연꽃, ‘겁劫이거나 찰나刹那거나’
‘연좌 위에 발돋움하고 서서/ 속 눈섭 조으는 듯/ 그 무슨 연유 깊은 일 하마 말씀하실까’ 현종길 시인이 빚어내는 언어들이 초정의 시구처럼 연꽃 속에서 햇살이 되고, 옥쟁반(연잎)에 구르는 수정 구슬이 되어 구르는 듯하다. 연화대 위에 앉아 <입술 한번 열지 않으시고 우주를 들어 올리시는> 부처의 염화시중의 미소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연꽃을 바라보면서 우주의 언어를 읽어내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오묘한 진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시의 행간마다 고여 흐르는 물소리처럼 현종길 시인의 맑고 깨끗한 마음이 피워 낸 연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일 것이다.
햇덩이 같은 백자 항아리가/ 귀 네 개를 열고 세상을 듣는다/ 하늘에 큰 생명을 담아 내린 듯 / 붉은 매화가 피고/ 난초꽃이 하얗게 피고/ 은하수 흐르는 하늘에
꽃구름이 피어난다/ 툭툭 끊기다 떨어지는 메아리를 담아/ 별 무리 같은 달 꽃이 환하다/ 마음에서 욕심을 썰물처럼 밀어내며/ 네 개의 귀는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 잡아둘 수 없는 신을 본 듯/ 그분인가요, 당신은
- <항아리> 전문
백자(달항아리) 끈으로 묶을 수 있게 만든 네 개의 귀, 하늘의 말씀을 듣고, 땅의 말씀을 듣고, 세상의 이야기, 천지사방의 모든 말씀을 듣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그 속에 <붉은 매화가 피고/ 난초꽃이 하얗게 피고/ 은하수 흐르는 하늘에 꽃구름이 피어난다> 떨어지는 메아리도 담고, 달 꽃이 피면 욕심을 썰물처럼 밀어내고픈 현종길 시인의 마음에 쫑긋 귀를 세우게 하는 달항아리 언제 봐도 눈이 부시다. 백자를 바라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고 깨끗한 마음을 생각하는 현종길 시인 내면의 얼굴이 달항아리일 것 같다.
봄날 멀리서 바라보는 아지랑이 같은 사랑/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 돌려 돌아보면/ 강물 저편 언덕에 그 사람이/ 노란 꽃등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듯 서 있네// 꽃무늬 구름 위에 바람은 나비잠이 들고/ 물 위로 물 아래로 꽃잎 띄우던 사람/ 강물 저편 언덕에 그 사람이/ 금잔 같은 꽃으로 피워 내 마음을 흔드네// 물 향기 꽃잎으로 날아오르는 물 저편 나르시스/ 그의 향기로 초록 물결처럼 흔들리는 나의 봄날
- <수선화> 전문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하여 물에 빠져 죽어 핀 꽃이 수선화란다. 많은 시인이 쓴 수선화 시를 읽어보았지만 대부분이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었다. 나르시스의 사랑이 담긴 노란 꽃등을 켜고 선 수선화, 나비 잠든 바람의 속삭임이 초록향기로 스멀스멀 아지랑이 피어나듯 흔들리고 싶다는 현종길 시인의 순수한 마음에 노랗게 물이 들어 하늘거리는 수선화를 본다. 손에 잡일 듯 말 듯 강 언덕너머 기다리고 섰을 사람을 위해 이 시를 권해보고 싶다. 아직 수선화를 가슴에 품을 수 있는 현종길 시인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시향을 보는 것 같아 참 다행스럽다.
한편의 시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시인의 표정에서 시인이 지닌 상상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고, 한권의 시집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서고자하는 시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흔히들 시를 정신의 그림이라고 한다. 언 듯 스쳐 지나는 바람, 함지를 향해 달려가는 저녁노을, 점에서 선으로 이어지는 어둠의 실체는 밝음이다. 여명 사이로 고개를 내밀 햇덩이가 그리워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시인의 고뇌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 설 때 무한한 희열을 느낄 수 있다. 현종길 시인의 시 105편의 시 중에서 10여 편의 시를 무작위로 선정하여 몇 번이고 정독하면서 시인의 시향에 흠뻑 젖어 보았다. 참 다행인 것은 시의 흐름이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기도하고, 자연이면 자연, 세상사는 이야기, 또는 일상사 이야기 특히 역사의식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았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다양하게 다루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도시의 메카니즘 속에서 따뜻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창작의 자세가 사회를 따뜻하게 하고,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줄 수 있다. 앞으로 더 깊이 천착하여 좋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회자되기를 바란다.
제목 – 꽃비가 내리네 (구숙희 시집)
< 시인의 상상력이 건져 올린 삶의 풍경 >
최철훈(시인)
시조의 맛과 멋은 3장 6구 정형의 틀에 있다. 시인의 생각이 정형의 틀 속에 갇혀있는 듯하면서도 무한한 상상력과 긴장과 여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장르이다. 시는 개인의 생각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살아가는 삶의 풍경을 그리는 작업이다. 구숙희 시인이 보내온 130여 편의 시조 속에 담긴 상상력의 깊이와 내면에 잠재한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진실을 만나보자.
하늘하늘 나비춤 추다 떨어져 누운 감꽃
기 싸움에 밀린 꽃잎 힘없이 드러눕고
서러운 꽃 이파리는 내 마음을 닮았네
- <감꽃 지다> 전문
감꽃이 함박눈처럼 떨어져 쌓인 감나무에 얽힌 유년의 추억은 시골이 고향인 사람들의 공통 된 정서일 것이다. 툇마루에 앉아 나비춤 추며 떨어지는 감꽃을 바라보았을 구숙희 시인의 눈빛에 잠긴 그리움의 이야기 <서러운 꽃 이파리는 내 마음을 닮았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 보기마련이다. <기 싸움에 밀린 꽃잎 힘없이 드러눕고> 기 싸움에 밀려 떨어져 누운 감꽃 이파리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고 살아온 지난날을 반추하는 시인의 마음이 애잔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찬바람 옷섶 들추어 속살 만지고 멀어지는
봄날 이 봄날 아침 부모 생각 간절하다
사진 속 따뜻한 눈길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 <흑백사진> 전문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옛말에 자식을 낳아 길러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했다. 구숙희 시인의 눈에 아직 살아계신 부모님의 모습은 <사진 속 따뜻한 눈길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하고 불러보면‘오오’하고 바라보실 것만 같고, 어머니하고 불러보면 살포시 안아 주실 것 같은 인자하신 모습이다. 그 인자하시고 따뜻한 눈길이 지금은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았지만 그리움만은 어쩔 수 없다는 구숙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오래전 돌아가신 필자의 아버지가 생각남은 구 시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수욕 정이 풍부지 자욕양이 친부대 樹欲靜而 風不止 子欲養而 親不待 나무가 고요 하고자 하나 바람이 멎지를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다. 구숙희 시인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바람의 허리춤 안고 학교 가던 설사당 꽃길
오래전 오래전에 아버지 오가던 그 길
오늘은 코스모스 닮은 딸아이가 걷고 있다
- <설사당 꽃길> 전문
<바람의 허리춤 안고 학교 가던 설사당 꽃길> 설사당 꽃은 청마 유치환 선생이 지은 코스모스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바람이 불면 가녀린 허리로 하늘을 떠받히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그 꽃길을 오랜 그리움을 더듬어 아버지가 오가시던 시간을 거슬러 <오늘은 코스모스 닮은 딸아이가 걷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걷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이 내려앉은 코스모스 꽃길 사이로 바람 함께 달리던 구숙희 시인의 어릴 적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이 가을 들녘의 풍경 함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멀고 먼 인생 여정 되돌아 갈길 없어
후회스런 지난 세월 그 흔적 지우려 해도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삶이었다
-<흔적> 전문
불가에서는‘인생은 고통의 바다(苦海)’라 말한다. 이는 욕심을 자제하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좋은 일, 궂은 일등 온갖 일을 겪는다. 삶과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어떤 때는 모두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고 살아온 한 생이 후회스럽고, 지나온 과거(흔적)도 말끔히 지우고 싶을 때도 있다. 구숙희 시인은 오랜 세월 공직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잘 관리해 오신 분이다. 달리 말하면 성공한 삶을 사셨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삶이었다.> 법구경에 따르면‘지혜로운 이는 몸과 마음을 잘 다루어 허무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때로는 내려놓을 줄도 알면서 지난 흔적을 조금씩은 지워가면서 다시 흔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이젠 시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흔적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요.
상상 속 세필로 그린 내 마음은 어떨까
- <마음의 붓> 일부
어느 시인의 마음이 원고지 가득 불붙였나
어느 화공의 손길이 화판 가득 물감 뿌렸나
이 보소 저 모습 좀 보소 人紅 山紅 水紅 이라오
- <가을 산> 전문
시인은 원고지에 시를 쓰고, 화공은 화판에 그림을 그린다.<어느 시인의 마음이 원고지 가득 불붙였나/ 어느 화공의 손길이 화판 가득 물감 뿌렸나> 가을 산 전체가 시인의 원고지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시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그 모습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가을 산 전체가 화가의 화판이다. 헝클어진 오색실을 푸는 사람은 화공이다. 화공의 손끝에서 점점이 번져나는 산 울음이 붓을 놀릴 적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영롱한 색깔로 모두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눈에 비친 가을 산의 모습이다. 그렇다. 사람도 붉게 물들고, 산도 붉게 물들고, 물도 붉게 물드는 가을 이 가을에 <상상 속 세필로 그린 내 마음은 어떨까> 시인은 시인만의 상상 속 세필로 물들여 가는 가을 산의 모습은 한 폭의 시이고, 한 폭의 그림이다. 구숙희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가는 시속에 온 산과 들이 울긋불긋 그 산과 들에 드는 사람들의 가슴도 물을 들인다.
가슴 속에 품은 시심 달아날까 안절부절
한시도 놓지 않는 보물 중 보물 애장품
언제나 애인 다루듯 가슴에 품고 산다네
- <만년필> 전문
만년필, 요즘같이 컴퓨터가 발달한 시절에는 뭔가 조금은 구시대적인 필기구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쓰는 시와 만년필로 시를 쓰는 차이는 사뭇 다를 수 있다. <한시도 놓지 않는 보물 중의 보물 애장품/ 언제나 애인 다루듯 가슴에 품고 산다네> 만년필은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메모할 수 있고, 그 메모장은 버리지 않는 한 오래 보존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바로바로 수정과 완성도를 높일 수는 있고 편리하기는 하지만 장소의 제약과 낭만과 멋은 조금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효용 가치에 대한 장단점은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시인과 한 몸 같은 애장품, 만년필을 애인 다루듯 가슴에 품고 산다는 구숙희 시인은 진정 시를 쓰는 마음이 어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시인이라 말하고 싶다.
스승 없이 독학으로 말과 글을 깨우치고
동네잔치 만장 지방 군인간 아들 편지까지
온 동네 필요한 곳엔 밤잠 설쳐 봉사활동
- <선친> 전문
해방 후 글이 참 귀한 시절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문을 깨우친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특히 농촌지역은 동내에서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특히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아는 사람은 冠, 婚, 喪, 祭 등 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단골로 글 봉사를 하는 것이 덕목처럼 되어있었다. 구숙희 시인의 선친의 경우도 그러하셨던 모양이다. 그러한 봉사가 자녀들의 눈에는 그렇게 나쁘게 비치지는 않은 것 같다 은근히 자랑스러웠을 것 같다. 구숙희 시인이 시를 쓸 수 있는 소양이나 능력은 선친의 문창성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때문이 아닐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은 아닌 것 같다.
자식 바라지 위해 힘든 일 내색 않고
물 뿌리고 거름 주고 정성으로 가꾼 상추
윤기가 자르르 흐른 잎잎이 자식 사랑
- <꽃상추> 전문
도심에서 채소를 가꿀 수 있는 텃밭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봄에 씨를 뿌려 새싹이 나면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정성으로 가꾼다. 여기서 구숙희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디 텃밭에 심은 상추뿐이겠는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을 기르는 과정이 텃밭을 가꾸는 과정과 그리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실은 가족 공동체라는 의미마저 퇴색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변하지 않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있는 것 없는 것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까울 것 없는 부모의 마음 텃밭 모롱이에 서서 행여 벌레나 먹지 않을까 바람에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문득 두보의 시 한 편이 생각난다.‘어머님은 손에 실올을 잡고 길 떠날 아들의 옷을 깁는다/ 나그네 길에서 헤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 봄날 햇볕 같은 모정 헤아릴 길 없구나.’예나 지금이나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꽃상추를 바라보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은 구숙희 시인의 마음, 천상 시인이다.
손윗동서 음식 손맛 좋다며 여럿 모여
상차림 가담하고 설거지 담당은 나
사흘간 온종일 서서 쉴 틈 없어 기진맥진
- <손맛 자랑> 전문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는 날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지금은 핵가족화의 영향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유교전통에 물들어 있는 우리네 현실은 여성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남자와 여자의 도리를 강요해온 것이 사실이 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예가 그 하나다. 세상이 바뀌고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바뀌지 않는 현실이 문제다. 층층시하가 어디 그뿐이랴. <사흘간 온종일 서서 쉴 틈 없이 기진맥진> 이 시의 종장에서 보듯이 당시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안의 명절 풍경이 손에 잡힐 듯하다.
부릅튼 살결 곳곳 여린 손 내미는 새싹
시린 발 동동거리며 봄을 기다린 그 마음
분분설 꽃으로 맺힌 매화 그 입술이 붉다
- <매화> 전문
‘매 일생 한불 매향梅 一生 寒不 賣香 매화는 일평생을 얼어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매화가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피어나는 그 모습이 의리와 지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군자, 선비들에게는 그 마음을 닮고 싶은 꽃이기 때문이다. 매화는 꽃을 먼저 피우고 그다음에 잎을 피운다. <부릅튼 살결 곳곳 여린 손 내미는 새싹> 거친 매화 등걸을 비집어 여린 손을 내미는 새싹은 < 시린 발 동동거리며 봄을 기다린 그 마음>이 구절에서 구숙희 시인은 폭풍 한설 헤치고 피어난 매화를 보며 우리네 인생도 넘어지고, 부딪고, 깨어져도 다시 일어나 꽃으로 맺힌 그 붉은 입술처럼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솔숲 그늘 아래 하늘 받혀 앉은 모습
백자 허리춤 그쯤 가녀린 팔을 뻗어
한두 촉 꽃눈을 틔울 숨소리가 들린다
- < 난 > 전문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푸르른 기상을 내뿜는 선비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난초 < 백자 허리춤 그쯤 가녀린 팔을 뻗어/ 한두 촉 꽃눈을 틔울 숨소리가 들린다.> 솔숲 그늘아래 주로 자생하는 난초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결코 부러지지 않는 높고 깨끗한 인격과 고고한 선비의 표상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난 꽃이 피면 그윽한 향기가 머리를 맑게 한다. 가람 이병기님의 난시를 한번 새겨보자.‘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중략 -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 받아 사느니라’ 백자 허리춤에 자리한 난을 바라보며 꽃눈을 틔울 숨소리를 들을 줄 아는 구 시인의 마음 또한 이에 못지않다.
국향에 물든 가슴 가을볕에 시려도
형형색색 옷을 입고 벌 나비 불러들이는
그대는 가을을 닮은 향기로운 여인일레
- <국화> 전문
문인 화에서 사군자 중 하나인 국화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다. 많은 시인 묵객들이 국화의 청결, 정조, 순결을 노래하였다. 미당 서정주의‘국화 옆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대표적인 시로 불리어져왔다. < 국향에 물든 가슴 가을볕에 시려도/ - 중략 - / 그대는 가을을 닮은 향기로운 여인일레 > 구숙희 시인의‘국화’시도 이에 못지않다. 국화 향기에 물든 가슴 - 가을이 지나는 길목에 서서 그윽이 향기를 내뿜고 선 국화를 보며 화려하지도 않고 그저 함초롬히 피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순결한 여인 같은 가을을 닮은 향기로운 여인을 닮은 꽃, 어찌 보면 구숙희 시인 자신이야말로 가을을 닮은 들국화같이 향기로운 여인이 아닐까?
왕대 숲 날 선 바람 선비의 기상 닮아
한 획 한 획 그릴 때마다 속 빈 울음 우는 그대
오늘은 어느 가슴에 지조를 가르치는 가
- <죽竹> 전문
竹의 청아하고 고고함은 짙푸른 기개와 깨끗하게 안을 비워두는 결백함은 우리 옛 선비의 청렴함을 보는 것 같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잎과 잎이 서로 몸을 비비며 맑고 청아한 소리는 시류에 물들지 않는 선비의 꼿꼿한 기개를 닮았다. <한 획 한 획 그릴 때마다 속 빈 울음 우는 그대/ 오늘은 어느 가슴에 지조를 가르치는 가 > 구숙희 시인은 날 선 바람 부는 날 마음속의 화선지를 펼쳐 놓고 죽竹을 친다. 붓이 지날 때마다 울려오는 대숲의 바람 소리는 속이 빈 대나무의 공명共鳴을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울림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바람 부는 날 대숲에 들어 대나무의 올곧은 지조를 배워봄이 어떤가.
구숙희 시인의 많은 시조 중에서 십여 편을 선정하여 시인의 상상력의 깊이와 시조 전반에 흐르는 시향을 음미해 보았다. 그의 시조에 보이는 특성은 어느 한쪽에도 편중되지 않는 담담한 어조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고 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시를 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한다. 구숙희 시인은 이번 시조집을 내기 전 벌써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바 있다. 이것은 그만큼 시인의 정신세계가 맑고 깊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특히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넉넉함을 다지는 결정체를 시조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고 있다. 많은 독자의 입에 회자되는 시집이기를 기대해 본다.
제목 - 동행 (김은식 시집)
< 시간과 존재 그리고 진실의 얼굴그리기 >
최철훈(시인)
한 권의 시집에서 만날 수 있는 시인의 표정은 천차만별이다. 자신이 창조하는 시속에 녹아 있는 정신 질감의 의미역意味域이 유채색이냐 무채색이냐에 따라 많은 사람의 가슴에 살아 꿈틀거리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감동을 주기도 한다. 특히 드러내고 싶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감동의 진폭이 사뭇 달라질 수 있다. 김은식 시인은 2012년<문장 21>로 등단을 하면서 시인으로 세상에 소개된 분이다. 김은식 시인은 자신만의 언어를 자신의 문학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 전반에 地水火風(땅, 물, 불, 공기)의 네 범주 안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통하여 상상의 힘을 발휘, 시에 접목시키고 있다.
김은식 시인의 시 130여 편을 5부로 나누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다.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가슴이 참 따뜻한 시인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인의 시속에 녹아 출렁이는 삶의 모습은 담백하면서 희망찬 모습이었다. 혹자는 ‘시를 정신의 그림’이라고 말을 한다. 김은식 시인의 정신의 그림 속에 담긴 건강함이 건져 올린 시편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머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봄은 작은 풀씨를 깨우기 위해/ 간밤에 비를 내렸다// 생명인 양 묻어 두면 싹을 틔우는 봄/ 가슴에 묻어 둔 것들을 틔우려 하네/ 담장 옆에/ 번지듯 돋아나는 새싹들// 언 땅을 녹이고/ 근심의 돌을 밀치고/ 아침 햇살 앞에 기지개를 켠다// 봄은 일제히 돋아나, 번지는/ 희망, 그리움, 기다림의 씨앗들로// 우리 가슴에 묻어 둔/ 해묵은 풀씨의 이름들을 깨우려 하네.
- <봄의 기상(起床)> 전문
봄은 가을에 묻은 불씨를 꽁꽁 동인 겨울의 긴 터널 속에서 생명의 싹을 틔울 수많은 날을 기다린다. 사람 사는 일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각박하고 메마른 삶이 우리네 앞에 가로 놓여 희망의 불꽃이 사위어가도 다시 활활 타오를 것임을 아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봄날 아침 언 땅을 녹이고 고개를 내미는 새싹들의 함성처럼 기지개를 켤 희망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봄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향기롭고 풍요롭게 할 ‘우리 가슴에 묻어 둔/해묵은 풀씨의 이름을 깨우려하네’긴 동면의 어둠을 깨우려는 시인의 긍정적이고 따뜻한 마음이 따뜻한 햇볕 앞에 기지개를 켜는 모습으로 봄을 기상起床 시키고 있다.
오월엔 시를 쓰지 않으리/ 연초록 잎새, 반짝이는 노래/ 그 햇살들의 속삭임만으로 충분한/ 시를 엿듣는 바람이 되지
- 중략 -
내 마음 전할 그 사람/ 오월에는 꼭 온다 했으니/ 창가에 설레는 마음만으로 충분한/ 밤새, 시를 쓰지 않아도 되지/ 근심의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지.
- <오월의 詩> 일부
시인은 자신의 심정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시점으로부터 그 시가 갖는 상징성을 드러낸다. 오월엔 시를 쓰지 않으리’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시를 쓰지 않아도 오월의 연초록 잎새와 햇살의 속삭임만으로도 오월의 자연이 가져다주는 시의 언어를 엿들을 수 있다는 김은식 시인의 감성과 상상력의 결합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는 시의 실체 속에 시인의 체험이 담긴 진실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많은 시인에게 시는 왜 쓰는가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지 않지만, 그리움은 설렘이라는 등식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자연의 경이로움에 동화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신 향기 그윽한 옷/ 가슴에 꽃잎 수 놓인 옷/ 입어도 떨어지지 않는 옷/ 빨아도 줄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는 옷/ 철 지나도 버리지 않는 옷/ 해마다 다시 꺼내 입고 싶은 옷/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옷/ 예쁜 새들이 지저귀는 옷/ 포근하고 따사로운 옷/ 당신이 내게 선물로 주신 옷/ 봄은 한평생 입어도 새뜻한 새 옷/ 새 옷인 걸 이제 알았네.
- <새봄> 전문
시는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진실함과 생生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우러질 때 상징의 옷을 입는다. 시인은 두터운 겨울의 옷을 벗고 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다. 3월의 햇살 아래 골목마다 집집마다 개나리, 목련, 복사꽃 등등 수많은 꽃이 저마다의 옷(향기로운 옷, 꽃을 수놓은 옷, 빨아도 줄지 않고 바래지 않는 옷, 철 지나도 버리지 않고, 새의 노래가 담긴 옷, 입고 또 입어도 산뜻한 옷, 등)으로 갈아입고 자신을 보러 와서 함박웃음을 머금을 뭇 생명을 기다린다. 정말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초들의 옷은 어떤 옷이 어울릴까?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들이 한 땀 한 땀 기워 오래도록 버리고 싶지 않은 자유라는 옷은 어떨까? 첩첩이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설 새봄 같은 옷 그 옷이 바로 새 옷이라는 것을 아는 김은식 시인의 정신세계, 이 봄 천지 사방이 푸르다.
홀로 가는 길/ 달빛처럼 함께 걷는 동행이 있다// 누구신가/ 물어볼 양 하면/ 벌써 내 어깨에 손을 얹는// 뒤를 돌아보아/ 반가이 웃으면/ 그도 달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어디에서 오신 누구신가/ 알고자 함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사람// 인사차 물어보는 내게/ 알면서 묻는다는 듯/ 빙그레 웃는 표정, 만월이라 한다// 그날 밤/ 고갯마루 언덕길 넘을 때/ 초승달 눈썹으로 웃어주던 달빛//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마음속 시나브로/ 만월의 밝은 정겨움으로 다가와// 세월 가면 기울어도/ 다시 차오를 달빛 동행/ 그가 함께 길을 가고 있다.
- <달빛 동행> 전문
불가에서는 사람의 한 생을 찰라 라고 한다. 맨몸으로 와서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로 들어서는 것이 일생의 순환 과정이다.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동행은 아무도 없다. “차창 밖 내다볼 땐/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둘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나니/ 인생인가 하노라” 노산 이은상 시인의 <동행>이란 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빛 함께 달려온 동행’만월이란다. 만월 그는 과연 누구일까? 평생을 함께 살아오고 또 살아갈 반려자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자식들, 부모 형제, 친구일 수도 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 숱한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 <세월 가면 기울어도/ 다시 차오를 달빛 동행> 그런 동행이 있다는 것은 정말 복된 삶이 아닐까?
너의 생각이/ 내 안을 걷고 있을 때 생겨난 길이 있다// 예전엔 낯설었던/ 세상길에서// 너로 하여 생겨난/ 그 길은/ 바라보아 찾을 수 없어// 상념으로/ 가슴으로/그리움이 오가며 생겨난 길
–<중략> -
이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꽃이라 얘기하며//그리운 것들을 별이라/ 얘기하며 걷던 길/ 너의 생각이 내 안을 걷고 있을 때 생겨난 길이 있다.
- <길> 일부
인간은 자신이 걸어오고 앞으로 걸어갈 숙명의 길을 찾아 방황하는 나그네다. 너와 나라는 이분법적 현실 속에서 생각의 합일을 이루어 하나가 될 때 같이 지향하는 길이 있다는 것은 복 중의 복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길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여러 갈래의 길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시 속에 나타나 보이는 길은 아름다움만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이 그리움으로 변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 고뇌하고 아파했을까? 문득 프러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중략-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처럼 두 길을 한꺼번에 택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김은식 시인의 시 말미에 <너의 생각이 내 안을 걷고 있을 때 생겨 난 길> 이라고 했다. 김은식 시인이 길의 끝자락에 서서 반추하는 그 길은 과연 어디로 통하고 있을까?
저무는 여름 자락/ 해거름에/ 풀벌레울음/ 긴 여운 툇마루에 젖는다
-<중략>-
붉은 연정을 싣고 떠내려오다/ 불씨를 안고 난파하는 배/ 이산, 저산/ 불붙는 가을빛 꿈을 꾼다// 어찌할 수 없이/ 바라만 보아/ 만산을 다 태우고 저절로 사위어갈/ 말릴 수 없는 붉은 연정/ 가을빛 꿈을 꾼다.
- <이른 秋想> 일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어느 쪽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각의 깊이는 사뭇 달라진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사계四季를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 인간은 한낱 그 속에 속한 하나의 일부일 뿐이다. 조물주의 손길은 변화무쌍하다. 원형이정元亨利貞 가을은 이利의 계절이다. 한여름 햇볕이 달구어 놓은 산야山野에 형형색색의 물감을 섞어 붓칠을 해나가는 화가(조물주)의 눈길에 따라 그려나가는 한 폭의 추상秋想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더욱더 고조시키기도 한다. 김은식 시인이 느끼는 가을 풍경은 아마 시인의 자라 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모캣불 피는 마당 가 툇마루에 둘러앉아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별을 헤이든 그리움의 고향일 수도 있고,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억일 수도 있다. 만산홍엽이 품은 붉은 연정이 가져다줄 가을빛을 꿈꾸는 시인의 간절한 속내가 뀌뚜리 울음을 재촉하는 것 같다.
공단의 휴일 아침/ 간밤 내린 가을비에/ 순리의 시간을/ 노랗게 떨구어낸 은행나무 가로수// 기계음의 무력시위 앞에/ 계절은 모처럼 한산한 공단 길로/ 가을을 수복하고/ 노오란 국기를 내건다
- <중략> -
정작 소중한 것은/ 얻는 것보다/ 가지는 것보다 떨어내고, 흩어내는 것의 아름다움//
우리 인생도 그들처럼 흐를 수 있기를
- < 가을 수복(收復)> 일부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길, 가을비를 맞으며 걷는 시인이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있다. 그냥 지나치면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하나의 자연현상이지만 삭막하기만 한 공단 길과 공단의 기계음이 쌓여나는 공간을 조금이나마 사람이 살아가는 따뜻한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소멸한다는 것은 또 다른 생성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시다. <정작 소중한 것은/ 얻는 것보다/ 가지는 것보다/떨어내고 흩어내는 것의 아름다움// -중 략- //우리 인생도 그들처럼 흐를 수 있기를>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계산된 이유와 조건보다 항상 따뜻이 배려하고 이기는 것보다 지면서도 여유로울 수 있는 인간성을 수복하는 것이라는 김은식 시인의 마음이 아름답다.
평생 짊어지고 가는/ 내가 주인이 아닌 등짝// 때론 누군가의 위로를 받아야 하는/
스스로 어루만질 수 없는/ 마음의 등도 있다// 그 손길을 기다려/ 기대고 싶은/ 우리는,/ 보이지 않는 등을 가졌기에/ 사랑할 수 있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이 세상일들 앞에서/행복해한다.
- <마음의 등> 전문
살아가는 동안/ 길가에 서 있을 때 행복하다// 길옆에 서서/ 나무인 양/ 너를 손짓할 때// 무성한 잎은/ 밤길을 걸어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 길가에 서서/ 먼 데 너를 볼 수 있는/ 나무가 되면/ 바람으로 오는 너의 향기// 살아가면서/ 오직 그 하나의 이유로/ 흔들릴 때 기다림은 행복하다.
- <살며 행복할 때> 전문
조금은 바보스럽고 조금은 어눌한 모습을 보이며 남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을 내어 줄 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 수 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평범하다. 비가 올 때 우산을 받쳐주고, 목이 마를 때 물 한잔을 나누어 마시는 작은 보시를 실천하는 사람, 스스로 어루만질 수 없는 마음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작은 일이 쌓일 때 행복은 찾아온다. 평범함이 행복의 조건이라며, 흔들리며 기다리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행복의 전도사가 아닐까?
문에는 귀가 있어/ 제 말 하기 무섭게 찾아오는 이를 반기게 하고// 문에는 눈이 있어/ 언제나 기다림의 시선을 떼지 못해 그를 보게 한다// 문에는 손이 있어/ 반가운 이가 늘 잡아주던 온기가 있고// 문에는 발이 있어/ 먼데 소식을 앞서 마중하고픈 설렘이 있다.
- <문에는> 전문
문에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온기가 있다는 시인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 같다. 시인이 느끼는 세상은 그래서 더 따뜻하고,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인가 보다. 아,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설렘을 간직하고 사는 모양이다.
내 친구 푸른 소년 소나무에게/ 늙은 어머니 편지 부탁하고/ 작은 냇가 개울물 소리에겐/ 고향 소식 부탁했었지// 떠나올 적 살구나무 아래/ 술래로 묻어둔 유리구슬은/ 까만 눈을 가리고 별에게 소원을 빌며/ 아직도 작은 소년, 고사리 흙손을/ 눈 비비며 찾는다하네 -<중략>- // 유리구슬이 눈물을 글썽이고/ 별들도 눈 가리던 그 밤/ 비에 젖은 내 친구 푸른 소나무/ 우정의 비 같은 눈물, 젖은 무게에/ 솔가지 부러져 울었다 하네.
- < 고향 전보> 일부
“함동선 시인은 고향은 단순한 향수의 대상이라기보다 하나의 감각, 페르낭데스가 말한 구체 감각이라는 원형으로 재현되는 방위 감각이라고 말했다.” 김은식 시인의 고향은 그리움의 회귀 공간이다. 이 시의 시간적 시점은 과거이다. 과거의 공간으로 투영되는 고향의 모습은 유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시작하여 아직 현재 머물러 서성이고 있다. <채수영>평론가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이타적 심리행위라고 했다. 김은식 시인의 시에는 (어머니, 소꼽친구, 유리구슬, 푸른 소년, 등) 원형회귀의식이 항상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순수와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는 인간존재의 단절이 아니라 자아의 본류를 찾고자 하는 사향 의식의 연속성이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리움과 설렘이 머무는 곳이다.
이 가을에/ 그리운 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노라/ 대답 없는 하늘을 향해// 오지 않는 당신의/ 막연한 뒷모습을 붙잡고/ 탄식과 절규의 나날들이/ 낙엽 되는 이 가을// 이 계절이 지나면/ 영영 오지 않을 예감 앞에/ 마지막 남은 인간다운 수단/간절한 그리움을 앓는 일이다// 당신을 꼭 빼닮은/ 그리움을/ 당신인 양 붙잡고/ 한평생 그를 위해 사는 일이다// 그리움의 습성을 외우고/ 그리움을 의지하며/ 그리움의 모습을 닮아// 그의 발을 씻기고/ 그의 이부자리를 봐온 세월// 이 가을엔/ 정녕 오지 않는/ 당신은 가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을 이 사람/ 고마운 사람./ 당신을 꼭 닮은/ 이 사람의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 <이 사람의 사람으로 사는 일이다> 전문
김은식 시인은 이 시를 홀로 되신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쓴다고 했다. 예전엔 세상에서 여인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희생과 눈물과 그리움이 점철된 삶이었다. 삼종지도 三從之道, 여필종부 女必從夫 라는 도덕률을 정해 굴레를 씌웠다. 이 시속에는 떠나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대신해서 쓴 시이다. 그리움을 앓는다는 것은 애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어머니의 그리움을 한평생 지켜보고 살아온 시인의 마음이 어머니의 마음보다 더 애절해 보인다.
김은식 시인의 시 130여 편 중에서 13편의 시를 선정하여 시인의 시향에 젖어보았다 시 전반에 녹아 흐르는 정서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인간애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숱한 질곡의 시간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녹여내었다. 이러한 다양성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설 것이다. 세상 어떤 권력이나 물질적인 풍류보다도 도시의 메커니즘 속에서 따뜻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참 나를 찾아가는 창조의 작업이야말로 창조의 또 다른 문학의 본질이다.
제목 - 인생은 들풀과 같더라 (김달현 시집)
최철훈(시인)
시인은 마음속에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라는 보석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 보석을 상상력이라는 바구니에 담아 편편이 간절함으로 건져 올린 결정체이다. 시는 개개인의 생각과 그 생각이 지닌 인간의 풍경을 그리는 작업이다. 김달현 시인이 보내 온 100여 편의 시속에 담긴 상상력의 깊이를 음미해 보면서 김달현 시인의 내면에 잠재한 시인의 진실을 만나 보고자한다.
산이 노래 부른다// 계곡 물소리에/ 발걸음을 멈춰서니/명경유수다 //
세상사에 / 찌들은 내 모습 / 물위에 비쳐보니 / 부끄러워 //물은
낮은 곳으로 / 흐르고 또 흘러서 / 점점 맑아지는데 /왜 사람들은 저렇게 /
높은 곳만 찾을까 // 내가 낮아지면 / 더 커 보인다는데
-<명경유수 明鏡流水>전문
仁者樂山이요. 知者樂水라 했다. 김달현 시인의 넉넉한 품성을 나타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산처럼 듬직한 품성과 물처럼 유유자적한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산을 오르다보면 흠뻑 땀에 젖어 산 고개를 넘어오는 바람이 그리울 쯤 졸졸졸 귀를 맑히는 계곡 물소리를 듣는다면 그 또한 즐거움 아닌가. 한세상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으리. 계곡 물소리에서 자신이 살아 온 세월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한 일이다. 특히 물처럼 사는 삶, 喜壽를 지나 傘壽를 바라보는 세월이 그냥 지나친 것은 아니리. 낮아지면 더 높아질 수 있고 이기지 않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생각하며 빚은 ‘명경유수’ 이 한편의 시 속에서 시인의 속 깊은 마음을 읽는 것 같다.
바람도 쉬어가는 / 황령산 바람고개 / 선풍정仙風亭오르면서 흘린 /
땀을 말리고 잠시 쉬었다가 / 자운紫雲 감도는 / 정상을 오른다. //
봉수대 올라서니 / 발아래 펼쳐지는 세상 / 얼마나 역동적이고 /
아름답게 펼쳐지는가 // 화이팅 한번 외치고 / 작은 내 모습에서 /
더 큰 나를 / 발견하자
-<황령산 바람고개>전문
황령산에 가면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던 바람이 쉬어가는 고개, 바람 고개가 있다. 그 고개 위 작은 봉우리 정상에 仙風亭 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선풍정의 이름은 다름 아닌 김달현 시인이 명명 하였단다. 시인이 이 정자에 오를 때마다 느끼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 만큼 훈훈하고 어짐을 추구하는 발걸음이다. 그 산정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사에 찌들은 모습이 아닌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을 볼 줄 아는 그게 바로 시인의 마음인가보다.
각박한 세상 / 훈훈한 사랑이 있기에 /아직은 발 딛고 /살만 합니다 /
어머님 계신 천당은 / 너무 멀어 보여요 // 주님 말씀 잡고 /만나 뵐
날 까지 / 열심히 살렵니다 // 오늘도 아이처럼 / 그리운 이름/ 불러
봅니다. / 어머니!
-<그리운 이름>전문
김달현 시인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신앙의 테두리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김달현 시인은 평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삶을 살아 왔다. 이러한 삶을 살아 온 시인의 마음속을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이란 두 글자, 그래서 이세상이 발 딛고 살만 하다는 순수한 마음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의 저변에는 어머니라는 그리운 이름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서면 어린애가 되는 것은 만고의 불변의 진리다. 시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리 오래지 않을 인생을 생각하며 더욱 더 밝고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거창하게 세상의 담론을 나누지 않아도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여름 언덕빼기에 / 하얗게 눈이 왔다 / 마치 천사들이 /군무의 향연을 /
펼치는 것 같다 // 어머님 마음 따라 / 못다 한 사랑 아릿한 / 향기로
산화되어 / 하얀 찔레꽃으로 / 피었는가 // 먼 기억이 살아난다. /찔레
순 / 꺾어 주며 / 칭얼대는 아들 / 손을 잡고 언덕길을 / 걸어주시던/
유년시절이 / 그립다
-<하얀 찔레꽃>전문
어젠가 봉평을 다녀 온 적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메밀 꽃 밭을 바라보면서 마치 봄날 천지를 덮는 분분설을 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시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시인은 하얀 찔레꽃을 바라보면서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그때 그 시절을 회상 하고 있다. 요즘은 먹거리도 풍부하고 교통의 발달로 옛사람들의 삶이 담긴 들길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어머니와 함께 들길을 걸으며 찔레꽃 순을 따 주시던 그때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시인의 유년이 아련한 기억으로 살아온다. 그 어머니와 찔레꽃 그리고 오랜 따뜻한 기억들이 사랑의 향기로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 시가 되고 시인의 눈가에 눈물을 맺게 하는 그리움으로 각인 되었나 보다. 마치 천사들의 군무를 닮은 찔레꽃 향기가.
어버이날이면 / 빨간 카네이션 / 가슴에 달아드리지요 // 아무리
불러 봐도 / 가신님은 대답 없고 / 허공만 메아리칩니다. // 부모님
생전에 / 불효한 일들만 생각이 나서 / 오늘도 저며 오는 /가슴만
치고 있습니다
- <어버이날>전문
해마다 오월이 오면 생각나는 사람 바로 부모님이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살아 계신대로 돌아가셨으면 돌아 가신대로 그리움의 대상이다. 육적의 회귤 고사를 생각하며 쓴 조선시대 박인로 시인의 시 ‘반중 조홍감이’를 읽다 보면 더욱 그러하다. 김달현 시인은 흔하디흔한 카네이션조차 달아 드릴 수 없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지난 회한에 가슴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빚은 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사람보다 찾아 갈 곳이 더 적어지는 것이 아픔이라는 것을 느껴본 필자의 경험, 이것이 바로 김달현 시인이 느끼는 아픔과 다름 아닐 것이다.
김달현 시인의 많은 시 중에서 다섯 편의 시를 선정하여 시인의 시향을 맡아 보았다. 이 시들 전반에 녹아 흐르는 정서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인간애 그리고 신앙의 깊이 등 다양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인간이 느끼는 그리움의 대상은 바로 시인의 시속에 잠재한 자아의 본류이다. 세상 그 어떤 권력이나 물질적인 풍요보다 도시의 메카니즘 속에서 따뜻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랑과 참된 나를 찾는 창조의 또 다른 문학세계다.
제목 – 칡꽃 향기 그리운 날 (김회성 시집)
시인의 순수와 그리움으로 다가간 시
최철훈(시인. 부산 남구문인협회장)
시는 개개인이 느끼고 체험한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와 개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개성과 향기는 바라보는 개개인의 시각과 평가의 잣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김회성 시인의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시인의 가슴속에 잠재해 있는 사향思鄕의식과 배려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시를 쓸 수 있게 한 근간이 되었으리라 싶다.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 이전에 시인이 느끼고 드러내고자 하는 이미지가 밝고 건강하다. 이는 김회성 시인의 정신 질감이 그만큼 순수하고 따뜻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오랜 세월 공직에 있으면서 삶의 의미를 곱씹고 곱씹었을 것 같은 숱한 시간이 건져 올린 한 권의 시집,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치면 치는 대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회자 될 것 같다.
아침 햇살 다정하게 반겨주는/ 두메산골 가시덤불 아래에/ 새벽의 추념은 사위어 가고/ 밤새 속삭이던 별들의 밀어에/ 보랏빛 칡꽃에 이슬이 맺혔다// 옴팡지게 네가 그리운 날에/ 온 세상을 휘감을 듯/ 넉넉한 시간을 풀어놓고/ 순백의 구름만 불러 모아/ 초록 영역에 똬리를 틀었구나// 초록 바람이 지나가고/ 달빛 휘영청 밝은 밤이 오면/ 고요의 빗장을 풀어놓고/ 지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언어로/ 네게로 보낼 향기를 빚는다
-<칡꽃 향기 그리운 날 > 전문
시는 정신의 그림이다.‘칡꽃 향기 그리운 날’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가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두메산골 가시덤불 아래에/ 새벽의 추념은 사위어가고/ 밤새 속삭이던 별들의 밀어에/ 보랏빛 칡꽃에 이슬이 맺혔다> 오래전 우리 농촌의 순박한 사람들이 별같이 달 같이 살아가던 정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지금은 칡이나 산야초가 건강식품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예전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칡이 양식의 대용이든 때도 있었다. 한입 성큼 베어 물고 오래도록 씹든 그 기억, 보랏빛 칡꽃에 맺힌 영롱한 이슬을 기억하는 김회성 시인의 그리움이 질겅질겅 씹어 입안 가득 채우던 칡 물의 향기로움이 오늘은 한 편의 시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칡 물을 들일 것 같다.
여명에 놀라 깬 산새 울음소리에/ 노루와 다람쥐가 어둠을 밀어낸다//총명한 햇살이 풀잎이슬 지우면 / 연분홍 진달래 아우성에 하루가 열렸다 //보드라운 계집아이의 솜털 같이 /순결로 핀 할미꽃 한 송이 꺾어 /말없이 건네는 마음을 소녀는 몰랐었지// 들꽃향기 산꽃향기 책 보따리에 담아 /네 개의 돌다리를 건너 등굣길에 오르면 /도란도란 물소리도 함께 가는 길 //그곳은 내 고향 옥종면 무시골 점터
- <옥종 무시골> 일부
들길을 달리던 아이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살아오는 풍경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경남 하동 옥종면 무시 골이 고향이라는 김회성 시인, <순결로 핀 할미꽃 한 송이 꺾어/ 말없이 건네는 마음을 소녀는 몰랐었지> 요즘처럼 문명의 혜택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애틋함이 오히려 더 그리워지는 것은 각박하고 메마른 현실이 안타까워서 이리라. 먼 하늘 바라보는 눈가에 흰 구름이 더욱 더 정겨워 보이는 것은 세월의 탓만은 아닐 것 같다.
밤새 신록을 부르는 비가 내리고/ 여문 햇살이 보리밭 틈새 채울 즈음/세상은 다투어 고운 풀꽃을 보듬었지/ 기도로 내내 마음 졸이던 지난밤/ 산 까치 한 마리가 제 살점 떼어내듯/ 통곡하며 신열로 피 토하던 날 /오색 종이꽃에 싸여 사월에 가신님/ 핏줄 속 그 따스하던 정겨움을/ 한으로 남기시고/ 남새밭 이랑에 적신 땀도 채 마르지 않고/ 정화수 담긴 놋그릇엔 / 자식 위한 기도 소리 맴돌고 있건만/ 비탈진 산허리를 쓸고 가는 봄바람에/ 말없이 하얀 싸리꽃이 지고 있었다
- <사모곡> 전문
향파 이주홍 님의 시‘해같이 달 같이만’에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하고 불러 보면/ 금시로 따스해 오는 내 마음>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이 땅의 어머니들은 평생을 살아오시면서 그저 자식 잘되기만 기원하시는 분들이었다. 박인로 님의‘반중 조홍감이’에 나오는 육적의‘회귤 고사’까지는 아니라도 어머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김회성 시인이 부르는‘사모곡’은 위 두 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 못하지 않다. <비탈진 산허리를 쓸고 가는 봄바람에/ 말없이 하얀 싸리꽃이 지고 있었다> 남새밭 이랑을 적신 땀이 마를 새 없이 정화수 떠다 놓고 자식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오래도록 많은 사람의 가슴에 효의 의미를 새길 수 있게 할 것 같다.
아들의 300원 배고픔 거두려/ 이른 아침 주저함 가득/ 옆집 사립문에 얹히는 손/ 산비둘기 구성진 울음에/ 토란잎 위를 구르는 햇살/ 상처 난 마음에 내려앉는다 / 오직 헌신과 사랑뿐인/ 목적 없는 당신의 지난 삶/ 그 사랑은 가을밤 별만큼/ 영롱함으로 향기 빚어내다/ 무심한 30년의 세월이 지나/ 낡은 무덤에서 눈물로의 재회
뭉개진 잔디를 여미며 / 문득 그때는 몰랐던 지난날의/ 묵은 아버지 내음 향기롭다
- <아버지의 사랑> 전문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다는 데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먼발치에서 속으로 울음을 삼키면서 묵묵히 헛기침을 삼키시든 이 땅의 아버지들 <아버지하고 불러보면 오오 하고 들려오는 듯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름이다.>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 깊은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할까.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은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김회성 시인의 속 깊은 마음이 무덤가에 파릇이 돋는 아버지의 향기가 향기롭다는 시인의 마음이 더욱더 향기롭다.
너는 참/ 아장아장/ 조신하게/ 설렘 가득/ 꽃신을 신은 듯/ 이쁘게 이쁘게 오는구나
- <봄> 전문
옹이처럼 단단하던/ 상실의 아픔을 뒤로하고/ 고통스럽게 길었던/ 화사한 기다림으로/ 고운 햇살 두드림에/ 다시 한번/ 고운 삶 조각하러/ 빈 가슴에 피어나는/ 여린 그리움
- <새싹> 전문
‘봄 처녀 제 오시네’지난겨울 불씨 한 점 묻어두고 새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새싹의 함성은 <옹이처럼 단단하던/ 상실의 아픔을 뒤로하고// 화사한 기다림으로/ 빈 가슴에 피어나는/ 여린 그리움> 우리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장아장/ 조신하게/ 이쁘게 올> 꽃 피고 새우는 봄이 그리운 것은 아직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봄 햇살 같이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꽃다운 이십 대 젊은 나이에/ 천둥 같은 그림자로 다가와 / 그대는 나의 울타리 되었다// 고독한 날에 다시 읽어보는/ 그 옛날 편지처럼 편안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나도 그대의 울타리가 되었다// 사랑이 녹은 잔이 넘쳐/ 가끔은 사랑이 애증 되어/ 조용한 기도가 필요해도/ 우리는 서로의 울타리가 되었다
- <아내 그리고 울타리> 전문
한없이 내게로 향하는/ 어머니의 크신 사랑/ 당연한 듯 언제까지나/ 그 자리인 줄 알았지만/ 어느 날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나를 돌아 다 본다// 흐르던 눈물이 그치고/ 여명이 없는 아침을 맞을 때/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타다 남은 서러움에/ 혼이 얼고 생각이 녹아/ 그 냄새 희미해질 때/ 어머니 같은 여인과 동행하는/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 <세월> 전문
부부, 문화가 다르고 자란 환경이 다른 남남이 만나 서로 의지하고 아껴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부부라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한 생을 살아간다. 남편과 아내, 어떤 때는 친구같이 어떤 때는 어머니 같은 아내, 어떤 때는 아버지같이 어떤 때는 철부지 같은 남편 오래 같이 살다 보면 생각도 모습도 서로 닮아 간다는 말이 있다. 문을 열어 두면 도둑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어 두면 세상을 다 안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김회성 시인의 속 깊은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는 시편이다. 오래도록 정말 오래도록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거친 세상 사랑으로 다독이는 아내와 남편이기를 지켜보고 싶다.
시를 쓰는 이유는 딱히 많은 사람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쓰는 것만은 아니다. 김회성 시인의 시 105편의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참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가슴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시를 쓸 수 없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더 많은 시를 언급하고 싶었지만, 시를 많이 언급한다고 더 좋은 해설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그저 무작위로 10여 편을 골라 시인의 시 세계를 유영해 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부분보다 더 다양하고 더 감동을 주는 시가 많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관심거리인 고향과 그리움을 담은 시편들을 선보인다. 순수한 내면의 그리움이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두서없이 써 내려간 해설이 시인의 본마음을 훼손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더 깊이 천착하여 정말 아름답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시를 쓰시기를 기원한다.
이문걸 (예술부산 게재원고)
* 그리움의 언어로 빚은 시인의 순수
글 - 최철훈(시인)
이문걸 시인은 평생을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시인으로서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올해로 80세(傘壽)를 맞는 노시인이다. 이런 노시인老詩人의 궤적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영광된 일이다. 어떻게, 어떤 말과 글로 많은 분에게 노시인의 속살을 드러내 보일까. 휘적거리기를 벌써 일주일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다가 시인의 문자향文子香을 오래 바라본 사람으로서 어떤 마땅한 말을 어디에서 끌어올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중 언뜻 머리를 스치는 문구 하나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 그렇다. 인품이면 인품, 언행이면 언행, 어느 누구를 대하던지 미당未堂 서정주의 명문장 침향沈香의 은은함 속에 감춰진 완숙함처럼 올곧고 따뜻한 성품을 갖춘 선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주위에 시인은 많다. 하지만 정말 시인다운 시인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오월의 보리밭처럼 짙푸른 바다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을 노시인의 시편들 속에 묻어나는 그리움의 언어들이 많은 사람에게 회자 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김준오 평론가는 이문걸 시인의 시는 자연과 사물이, 사물과 사물이 서로 교감하고 온갖 감각마저 공감각적으로 조응하는 조화의 세계를 보인다. 강렬한 요구나 적대 감정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그의 여성적 부드러움의 상상력은 일상적 삶의 산문성과 사회 역사적 상황의 고압성에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유년 세계의 침잠, 사물과 사물의 감각적 재현, 이미지들의 환상적 연결 등으로 일상적이거나 사회적 현실을 배제하거나 초월하려 한다 했다.
채수영 평론가는 이문걸 시인의 시는 가을의 청아한 풍경과 같고, 우리네 옛 선비의 고담하고 넉넉한 그러면서 깐깐한 선비들의 마음 근처를 서성이듯 하다. 그 감각적 이미지는 청각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구사할 뿐 아니라, 시간문제를 인간의 운명으로 용해하면서 사유의 강을 건너간다 했다.
신진 시인은 이문걸 시인의 시는 순수시이다. 그의 시를 접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쉬이 느끼는 사실이다. 이문걸 시인만큼 사전적 정의에 가까운 순수시로 수십 년 초지일관해온 시인은 우리나라에서는 몇 분 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뭐니 뭐니 해도 이문걸 시의 특징은 세련된 언어적 감수성이다. 탁월한 음향 감각과 감각적 감성, 이들이 그의 순수지향성의 요체라 했다.
이외에도 많은 시인,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문걸 시의 특성을 순수함에 바탕을 두고 시적 대상과 서정적 자아가 서로 합일을 지향하는 서정적 인식에서 시를 빚는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저승에 두고 온 만연萬緣이
피멍으로 가라앉은 화덕에
한 아름
마른 솔가리를 지폈다.
태양도 목말라
돌아누운 대낮
진흙 밟고 승천昇天하는
욕진의 번뇌
네 아픔은
곧 내 아픔이려니
인과의 탁한 물속에서
혼절하는 꽃이여.
<연꽃>전문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말함이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어디쯤인가. 저승도 이승도 우리 곁에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인연因緣이다. 인因은 씨앗이고 연緣은 조건이다. 만 가지 인연 속에서 번뇌하고 아파해도 그것이 자신의 아픔이 아니냐는 시인의 마음에 비친 연꽃의 혼절, 시인과 연꽃을 동일 선상에 놓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팔십 평생을 숙명처럼 안고 달려온 세월, 이제는 함지咸池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저녁노을처럼 그림자를 끌고선 시인의 달관이 부럽다. 특히 속진에 물들지 않기 위해 혼절하는 연꽃이 아파 보인다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 아니겠는가?
* 이문걸 시인의 문학의 열정과 업적
이문걸 시인의 문학 인생은 고교시절인 1950년대 진주 개천 예술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개천 예술제 백일장에서 3회 연속 입상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각종 문예 콩쿠르에 당선되기도 하였으나 문단 진출에 대한 소극적인 생각에 등단은 조금 늦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내면의 성숙도를 더 깊이 익혀나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 김춘수 시인의 즉물시의 영향을 받아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를 선호, 함축미와 독특한 개성미를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7년 등단을 하고, 1979년 첫 시집 ‘내부로 흔들리는 꽃’ 제2 시집 ‘겨울의 언어’ 제3 시집 ‘즉흥 환상곡’ 제4 시집 ‘나의 시간 여행’ 제5 시집 ‘풀꽃 심상’과 제6 시집 ‘아름다운 새를 위한 축가’는 생태시집으로 분류되며, 시 선집으로 ‘시간의 무게’등 그 밖에 공동 시집과 그리고 각종 ‘시론서’를 발간 우리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남다른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열정이 시인으로 하여금 계속된 시집 발간과 문학 활동을 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인생의 무게를 추슬러 본다
가을의 둔덕에 서서
일몰 저 너머 타는 저녁놀
우리네 삶도 너처럼
그저 큰 욕심 없이
한껏 열심히 살다가 사위어지는
마음이고 싶다
스스로 나를 다스려
떠날 때는
훌훌 다 버리고도 아깝지 않을
- <억새>전문
시인의 시 ‘억새’를 읽으면서 ‘放下着’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온갖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원망 집착 등이 얽혀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져 버리라는 말이다. 누구나 젊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내 인생의 무게를 추슬러본다 // 스스로 나를 다스려/ 떠날 때는/ 훌훌 다 버리고도 아깝지 않을” 정말 그렇다. 세상을 다 가져도 결국 그것을 모두 버리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노시인의 짧은 시속에 담긴 ‘내려놓아라.’라는, 가진 것 그 무엇도 버려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시인의 마음이 건져 올린 ‘억새’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고쳐보게 한다.
문학의 저변 확대와 시의 순수화라는 기치 아래 창간된 《木馬》 시문학동인지 발간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1976년 2월 27일 부산에서 강남주, 원광, 이문걸, 이승하, 이아석, 임명수 등 30대 시인 6명이 창립했다. 그해 4월 5일에 창간호를 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木馬》와 더불어 생사고락을 함께한 덕분에 2017년에 이르러 창간 41주년을 맞은 국내 장수동인지의 반열에 서게 되었으며, 어떤 의미로 보나 한국동인지 사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 동인지로 기억될 만한 흔적을 남긴 셈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41년 동안 제47호(2017년)를 발간했다. 그동안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이 연간지를 내면서 이제 전국의 동인지 문단 권에 당당히 위업을 달성한 장수동인지로 굳건히 자리매김하였다는 《木馬》의 계속된 발간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들 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업적이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양식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사회가 더 밝고 건강해 진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이•문•걸
울산 출생,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의대학교 명예교수(문학 박사)
《시와 의식/’77년》신인상으로 등단
부산문인협회 회장 직무대행(전)
한국문예진흥원 백종연구기금 수혜작가 선정(’90)
이주홍 문학상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심사위원
장수 시동인지 《木馬》창간 동인(회장)
부산 시단 편집고문
한국 시인협회 중앙위원.
<수상> 개천예술인상(문학부문/’90),부산시문화상(문학부문/’99)
황조근정훈장(’05),고운 최치원문학상 대상(’13)
<시집> 『풀꽃심상』 등 7권
<시론서> 『한국 현대시 해석론』 등 3권
전자우편 : mailto:jasan0131@naver.com/연락처 : 010-5246-6148
블로그 : http://blog.naver.com/jasan0131. http://blog.daum.net/jasan39
(48080)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순환로 99번 길 6, 301동 1004호(좌동, 대림3차아파트)
최철훈 약력
* 동의대학교 대학원(현대문학 전공) 졸업/ 1990년 월간문학등단(64회)/ 한국해양문학상 수상(제3회 시 부문)/ 오륙도 문학상 수상(제5회)/ 부산문학상 대상 수상(22회)/ 시집-부산 아리랑 외 다수/계간 종합문예지 ‘문장21’ 발행인/부산남구문인 협회 회장
첫댓글 현종식님의 시조집 출간을 축하드리옵니다. 축하 축하~
축하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