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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명학술원 원문보기 글쓴이: 혜명
의병활동사
1.개관
의병의 항일구국전쟁은 멀리는 왜란․호란때의 반일․반청의병에서부터 시작하여 개항전후시기에는 위정척사운동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반일의병으로 나타나고, 을사조약과 군대해산을 거치면서 한층 대규모 항일전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참가 주도층도 양반․유학자에서 점차 평민출신으로 바뀌어 갔으며, 유교적 충효사상에서 근대국가의 주권옹호를 위한 독립전쟁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이 일제시대의 항일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면서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2.계 보
성리학의 주리론 → 친명배청사상(존화주의-조선중화주의) → 60년대 위정척사운동 → 70년대 위정척사운동 → 80년대 신사척사운동 → 90년대 을미의병 → 을사∙병오의병 → 정미의병전쟁 → 서울진공작전 → 국내진공작전 → 독립군
3. 1895년 초기의병(을미의병)은 척사론자인 유생들이 주도하고 농민들이 동참하였지만 1905년 병오의병(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으로 가면서(일본을 상대한 민족전쟁으로 전환되면서) 유생들을 대신해 민중층이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4.평민의병장(유생의병장과 구별!!)-신돌석(최초), 홍범도, 차도선, 김수민, 김백선
5.의병활동기록(매천야록<황연>, 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민족의 정화로 표현>)
6.대한매일신보는 자세히 보도했으나 독립신문은 폭도로 규정 의병활동 비판.
조선시대 의병
임진왜란 의병
①자발적으로 조직된 향토방위군 주축(농민), 의병장(전직관리, 유학자, 승려, 평민×), 작전(유격전술) 활발한 지역[경상도], 관군 편입[전투 능력 강화]
②곽재우[최초의 의병, 의령], 조헌[승병장 영규와 합세, 700의총], 김천일[나주→수원→진주 : 2차 패배], 정인홍(합천), 고경명(장흥), 홍언수․홍수남(수원), 정문부(경성, 길주), 김덕령(담양, 이몽학의 난에 관련 처형당함), 김면(고령), 임중량(중화), 이정암(황해도 연안, 연안대첩)
③승려 의병장-휴정[묘향산], 유정[금강산], 영규(호서지방), 처영(호남지방)
④금산전투 순절 의병장-조헌, 고경명, 영규 등 700명
⑤ 진주2차 대첩-93.6 일본군인 9만3천의 병력으로 진주성에 재침입하였다. 이때 악전고투하였으나 김천일, 최경희, 황진, 고종후 등 의병장이 전사하면서 진주성은 유린당하였다.
※영양의 인물-정담과 웅치 전투
1592년(선조 25) 4월 부산을 침입하고, 5월에 한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국 곳곳을 점령하고 분탕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산에 주둔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 중 일부는 용담·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서 전주에 들어가려 했으며 일본별군 1,000명은 진산을 치고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향했다. 당시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격문을 띄워 1,500명의 군사를 모아 훈련한 다음 북상하자 조정에서 그를 전라도절제사로 삼았다. 권율은 직접 부하를 지휘하여 이치를 막고, 김제군수 정담(鄭湛)에게는 웅치를 막게 했다. 그리하여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이 제1선, 의병장 황박(黃璞)이 제2선, 정담은 가장 높은 지역에서 제3선의 진지를 구축하여 적의 진격에 대비했다. 1592년 7월 7일 수천 명의 일본군 선봉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자 황박과 이복남은 많은 적을 죽였다. 이튿날 일본군이 전병력을 동원해 전면공격을 감행해, 제1·2선이 무너지고 황박과 이복남도 전사했다. 제3선을 지키던 정담도 화살이 다하도록 최후까지 싸운 다음 백병전(白兵戰)을 전개하다가 전사했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은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죽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놓고,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향했다. 전주성에서는 순찰사 이광(李洸)은 도망쳤으나 전전적(前典籍) 이정만(李廷鸞)이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킴에 따라 일본군은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웅치 전투는 1592년 7월7일과 7월8일에 일어난 전투이고, 이치전투는 7월8일에, 고경명의 눈벌 전투는 7월10일에, 조헌의 연곤평 전투는 8월18일에 일어난 전투이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은 충청도 의병장 조헌(1544-1592)과 의승장 영규대사 그리고 700명의 의병들이 1592년 8월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것을 기념한 곳인데 7백명 의사의 무덤과 종용사 사당이 있다. 종용사 사당에는 조헌 영규대사의 신위뿐만 아니라 1592년 7월10일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1533-1592)과 유팽로, 안영, 고인후등의 신위도 함께 모시어져 있다.
기념관에서 임진왜란 초기 전투 현황 지도와 금산 지역 전투 지도를 본다. 이 지도에는 웅치와 이치 전투, 고경명과 조헌의 전투 흔적이 표시되어 있다. 웅치 전투는 1592년 7월7일과 7월8일에 일어난 전투이고, 이치전투는 7월8일에, 고경명의 눈벌 전투는 7월10일에, 조헌의 연곤평 전투는 8월18일에 일어난 전투이다.
그러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개월 째 되는 1592년 6월말의 전쟁 상황을 살펴보자. 한양을 떠난 선조는 개성, 평양으로 피난을 간 후에 6월10일경 정주에 도착한다. 이 때 선조는 이덕형을 명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명군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세자 광해군을 임금권한 대행으로 임명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함경도마저 왜군에게 짓밟히자, 6월22일에 40명의 신하를 이끌고 초라한 모습으로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망명할 결심을 한다. 유성룡이 눈물로 요동행을 말렸다. 윤근수도 압록강을 건너는 것이 불가함을 읍소하였다. 아직은 전라도가 온전하니 그곳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다.
대신들의 읍소에 짜증이 난 선조는 통군정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오언시를 짓는다.
관산에 뜬 달 바라보며 통곡하노라
몰아치는 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도다.
조정 신하들아! 이 날 이후에도 또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나뉘어 싸울 것이냐
당쟁을 누가 조장하였는가? 임금 자신에 대한 반성은 없고 오직 이 모든 것이 당파 싸움 때문이라고 떠넘기는 선조 임금. 참으로 한심하다.
아무튼 조정은 명나라의 원군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명군은 쉽게 오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과 일본이 짜고 명나라를 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왜군은 이순신과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도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때문에 전쟁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고 있었다. 경상도 바다에서 이순신에게 세 차례나 패배한 왜군은 감히 바다에서 싸울 생각을 못하였고, 곽재우와 정인홍, 김면 등이 이끄는 경상도 의병이 왜군을 괴롭혔다. 그리고 전라도의 김천일 의병은 수원에서 왜군와 대치중 이었고 ,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도 북상 중이었다.
한편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5월8일, 9일경에 전군 지휘관 회의를 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조선 팔도를 나누어 통치하기로 하고 평안도는 소서행장, 함경도는 가등청정, 전라도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소조천융경 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제6군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월13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장들에게 조선 8도를 각각 점령하도록 하고 군량을 할당하는 문서를 보내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징수하여야 할 군량은 총227만석으로 경상도의 289만석 다음인 두 번째 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전라도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전라도는 조선 8도중에 아직 왜군에게 침략당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었고 곡창지대이었다. 또한 후방에서 전라도 의병들이 왜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 입장에서는 전라도 점령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다.
고바야카와 군대 1만6천명은 당장에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운다. 이 보다 앞서 왜군은 별군을 편성하여 안코쿠지 에케이(안국사 安國寺 에케이)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 사람은 안국사를 창건한 승려인데 절 이름을 그의 성(姓)으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전라감사로 칭하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뿌려댔다.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 부대의 저지를 받았다. 이어서 거창에서 김면에게, 합천에서 정인홍의 의병에게 저지당하여 안코쿠지는 결국 지례로 올라가서 무주로 들어갔다.
안코쿠지의 상사인 일본 제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는 한양에서 안코쿠지의 진로에 차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지례·무주를 경유해 금산을 거쳐서 안코쿠지와 합류하였다.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진안에 있는 웅치를 넘어가거나, 금산의 이치를 넘어야 한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를 넘고 북군은 금산의 이치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있었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치를 지키고 있었다.
7월7일에 안코쿠지 부대가 이끄는 왜군 남군 3천명이 웅치를 넘는다. 조선군은 3중으로 방어진을 쳤는데 제1진은 황박, 제2진은 이복남, 제3진은 정담이 맡았다. 수 천 명의 왜군이 조총과 칼을 휘두르면서 공격해 오자 조선군은 화살을 날려 적의 선봉을 잘 막아냈다.
다음날인 7월8일 늦은 아침, 왜군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진격하였다. 깃발을 등에 지고 칼을 휘두르고 조총을 쏘며 쳐들어왔다. 제1진 의병장 황박의 군사 2백 명은 필사적으로 저지하였으나 밀려났다. 그러자 제2진 이복남 군이 나섰다. 그러나 왜적은 2진까지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제3진 정담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 붙이어도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얼마 뒤에 정담은 홀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추었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나중에 김제군수 정담의 시체는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어 찾게 되었다.
전투 후에 웅치의 긴 고갯길은 조선군의 시체로 즐비하였다. 승려 출신 왜장 안코쿠지는 아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국 충신, 의사의 간담을 조의하노라 (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나무 팻말을 세웠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 중에도 아름답게 피어난 이야기이다.
7월 9일 왜군은 웅치를 넘어서 전주성 밖까지 진출하자 전라감사 이광은 겁이나 도망쳐 버렸다. 정말 비겁하다. 그런데 왜군은 이광이 도망친 것을 그들의 배후를 공격하여 올 것으로 생각하여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한편 전 전적(前典籍) 이정란은 백성들과 함께 전주성을 사수할 것을 결심하고, 낮에는 전주성에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다. 왜적은 전주성 방위가 튼튼한 줄로 알고 감히 전주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정란의 기지가 호남을 살린 것이다.
그러면 금산성을 점령한 일본군의 북군은 어떠하였을까.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제6군 1만6천명은 이치(梨峙, 배티재)를 넘고 있었다. 그들은 이치를 넘어 전주에서 왜군 남군과 합류하려고 하였다. 이치는 금산에서 전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로서 경사가 70도 정도에 달하는 고개이다. 이곳은 지금의 충남 금산과 전북 완주의 경계 고갯길로서 근처에 대둔산이 있다.
이치에는 광주목사 권율, 동복 현감 황진, 부장 위대기와 공시억등 약 1천 5백 명의 전라도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권율은 이미 왜군이 이치를 넘을 것으로 생각하고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는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고갯길의 양편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권율의 대비는 철저했다. 복병은 물론이고 길 가운데와 길가 요소요소에 목책을 쌓고 함정을 파서 위장하였으며 마름쇠도 깔아놓았다. 화살과 돌멩이도 많이 준비하였다. 정상에는 5색 깃발을 세워 기세를 높이었고 검은 연기를 피워서 적이 우리의 병력을 알지 못하게 하였고 꽹과리, 북, 징, 세납 등 각종 악기를 울려 기세를 높이었다.
2.정묘호란 의병
①정봉수(용골 산성<철산>), 이립(의주), 김여기(가산)
3.병자호란 의병
①박철산(가산)이 이끈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완강하게 저항해 적산은 뒤에 의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을미의병(1895.10~1896.5)
.배 경
①갑오개혁에 의해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다.
②민비시해(을미사변), 특히 친일내각의 단발령의 강행이 큰 자극이 되었다.
2.조 직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양반유생이 지도하고 일반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가담하였다. 일본세력과 친일 개혁정권에 대한 무력항쟁을 목표로 하였다.
3.활 동
단위부대 중심의 분산적 전투로 주요도시를 공격하며 일본인과 친일관리를 처단하였다.
4.의병장의 활동
①문석봉의 봉기 : 최초로 충청도 보은에서 일어남
②유인석의 동문 및 제자들로 충청도 제천에서 호좌의병진을 구성하였다.(96.1) 제천과 충주에서 활동하고 의병항쟁을 확대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강원․충청일대의 의병과 연결되어 항쟁하다 서간도로 들어가게 되었다(강화도 조약때 반대, 13도 의군 총대장, 성명회 발표).
5.이소응 : 춘천에서 일어나 춘천부를 점령하고 관찰사를 처형하였다.
6.이춘영 : 원주와 제천에서 거병하고 유인석 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7.박준영 : 여주와 이천에서 활동하고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8.기타-김복한(홍주), 기우만(나주),민용호(원주, 강릉), 노응규(진주) 등이 활동하였다.
9.해 산-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붕괴되고, 단발령이 철회되었고 국왕의 해산권고 조칙이 내려 일단 해산하게 되었다.
※영양의 의병
영양은 11월 그믐날 단발의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먼저 창의를 모색한 인물은 벽산 김도현이다. 종제 김한현과 안동부에서 창의를 모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권한모와 논의했으나 실망한다. 12월 14일 김도현과 조영기는 안동과 선성의진을 둘러 보았다. 이후 17일 대향회에서 창의하기로 하였으나 유림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그 후 1896년 정월 초하루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류시연으로부터 청량산창의에 참여권유로 2월17일 아우와 종제 및 일가 등과 촌민 19명과 참가한다, 한편 영양에서는 정월 16일 주곡의 조승기를 창의장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의병은 시위의병에 가까운 형태였다. 2월부터 청량산을 출발하여 봉화,내성,영주,예안,안동에 입성하였다. 2월29일 영양에 입성하여 다시 진보와 청송의진과 합류하였으나 합진에 실패하고 다시 3월말 영덕,영해,영양을 거쳐 예안으로 가서 선성의진과 합세한다.
선성의진과 태봉전투
1차 선성의진은 이만도가 대장 부장은 이중린이었다. 2차 의진은 2월 16 청량산에서 결성되었다. 김도현은 선성의진의 중군장을 맡아 영덕군수 부자의 목을 베고 3월 26일 경 예천 회맹에 참여하였다. 이당시 선성의진은 대장에 이중린, 선봉장 이인화 전방장 이중언, 참모 이중화, 중군장 김도현이었다. 예천회맹은 3월20일 안동, 풍기, 순흥, 봉화, 선성등 7읍의 의병진이 함창의 태봉에 준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하기 위한 의병이었다. 3월29일 공격하여 일본군에 밀려 퇴각하였다.
강릉의진과 연합작전
방훈 허훈의 진보의진과 합류하였으나 다시 4월 하순경 강릉의 민용호부대에 합류하였다. 선봉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이후 대공산성, 보현산성전투를 치루고 삼척에 5월31일 관군과 대전투를 치루었다. 이 전투에서 피아가 큰 피해를 보았고, 김도현은 민용호와 결별하고 겨우 10여 명과 함께 6월 10일 경 영양으로 돌아와 소청의 검각산성에 본진을 두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6월16일 관군의 공격으로 본진은 소멸되었다. 이후 영양, 안동, 청송, 영덕,영해 둥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6월 22일 입암전투와 소청전투 에서 패하고 말았다. 정성첨을 비롯한 민명 30 여명이 사부령전투에서 패했다(사부령순국지사 합동기념비). 7월13일 영해읍으로 진군하였으나 김하락, 홍병태의 청송의진은 남천쑤에서 패하고 김하락과 홍병태는 전사하였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8월22이 류시연을 만나 합류했다. 선성의진은 9월20일 의병을 해산하고 안동 의진도 9월25일 해산하고 말았다. 결국 김도현도 10월 15일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2월17일부터 10월15일 까지 의병활동)
을사․병오의병(1905.4~1907.7)
1.일제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항쟁
①배경-러․일 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강압적인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②민족의 저항-조야의 인사들이 상호를 올려 조약 파기를 주장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언론으로는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조약무효를 주장하고 국민의 항쟁을 호소하였다. 나철․오기호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③국권회복운동-민족역량 배양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민족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의병의 구국항전이 진행되었다.
2.을사의병
①을사조약 반대, 친일내각 타도와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②양반유생이 지도하고 농민이 주축을 이루나 평민 의병장도 출현하여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③을사조약 체결 전 기병-1895년 7월 원용팔 부대가 원주 주천에서 에서 최초로 기병하였다. 단양에서는 정운경이, 9월경에 영양의 김도현이 봉기하였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박제순과 하야시 강제합의)이 체결되었다.
④민종식-홍주의 이세영, 안병찬 등이 합세하여 홍주성을 점거하였다. 일본군 대부대와 홍주성에서 대치하다가 패하였다.
⑤최익현-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거병하였다(1906.6). 순창에 입성하여 전주 진위대와 대치하다가 동족과 싸움을 중단하고 포로가 되어 쓰시마섬에서 순국하였다. 유생과 민중의 의병항쟁이 계속되는 계기를 만들었다(팔도사민포고 발표).
⑥신돌석-경상도 영해를 중심으로 활동한 평민 의병장이다(1906.4~1908년11월) 경상․강원도의 접경지대인 일월산을 거점으로 평해․울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정미의병때도 활약). 이들은 이강년의진과 산남의진과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
⑦정용기: 경상도 영천에서 산남창의진의 정용기, 정환직, 최세윤은 일어나 1906년부터 1908년 7월 까지 영천,청송,영일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신돌석 부대와 연결하여 활동하였다.
⑧고광순-⑨기타-안동의 백남규․ 이광열․유시연, 예천의 장윤던, 진보의 이하현, 김상태(소백산).박연백(의성)
정미의병(1907.8~09.10)
1.고종의 퇴위(7월19일)와 군대해산(7월 31일)을 계기로 8월1일부터 시작된 정미의병은 의병투쟁의 규모․성격이 전쟁형태로 발전되었다.
2.전투력 강화-해산군인이 의병에 합류하여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었다.
3.평민 출신, 군인출신 의병장 수가 양반유생 출신 의병장 수를 능가하였다.
4.유생,농민 외에 해산군인,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 등이 참여하였다.
5.의병 규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활발해졌다.
6.의병장-민긍호(강원,원주진위대), 유명규(황해,강화진위대), 허위(적성), 이인영(강원), 이강년(강북,강원,안동진위대), 전해산, 심남일, 임창모, 강무경(전라도의병)
※중․후기 의병과 영양
1905년 9월경 김도현이 봉기한 후 1906년 영양지역에서는 김도현, 이현규, 김대규 등이 봉기하였다. 1907년 9월 에는 수비면 심천동(기프내)출신의 김성운이 봉화출신의 권석규와 함께 기병하여 심천동 출신의 장문실,류건배 등과 함께 일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영해의 신돌석 부대는 1906년 4월 29일 영양읍 관아를 점령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탈취하였는데 이 내용은 대한매일신보 5월15일자 기사에 보도되었다. 이 당시 1907년 12월경 영해 신돌석,안동 류시연, 봉화의 소천면 이춘양(약 200여 명) 등이 일월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1908년 2월 경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각자 흩어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이강녕 부대는 5월 경 서벽, 내성, 재산 전투를 펼치면서 활동하다가 1908년 7월2일 작성전투에서 붙잡혀 10월 순국하고 부장들은 계속해서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 김도현 부대
1896년 10월 15일 의병해산 1903년 5도(영양,청송,진보, 영덕,영해)읍도집강을 위촉 1905년 상소문과 각국공관에 「포고서양각국문」포고문 발송, 1906년 1월27일 포군 50~60명을 인솔하고 거의(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10일자 기사, 2월14일자 기사와 황성신문 기사)했으나 벽산가와 소청동 일대 안동진위대의 공격으로 약탈과 피해를 당함, 1906년 가을 광무황제의 밀칙으로 「의격고삼남각군문」 발송, 1909년 영양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영흥학교 설립,
2, 이현규 뷰대
이현규(1874년 11월 16일~1917년)는 석보면 지경리 출신으로 재령이씨이다. 1905년 11월 김대규 등의 수십 명의 동지를 규합 거의, 12월 4군 의병대장으로 추대(500여 명)되었다. 이 당시 중군장 신형일, 류시연, 군량도감 김대규, 도포수 권대성, 집사 조완이 , 1906년 2월 입암 교동에서 의병진 편성 수십 회 전투, 1906년 4월 진보의 장수령전투와 오누지전투에서 헌병 오장 무등과 10여 명 일본군 사살, 1906년 5월 영양 북방의 일본군과 교전 중 부상당하고 김대규는 전사하여 해산되었다. 영일 청하면 모진리에 은거중 1917년 44세로 총상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받았다. 진보 오누저수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이현규는 어려서부터 기품이 늠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하였던 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부근의 동지들과 협의하며 각지로 연락을 취하여 11월 하순경에 청송(靑松)의 주왕사(周王寺)에서 동지 수십 명과 더불어 회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郡)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의 뜻을 전했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安東), 청송, 진보(眞 ), 영양 등의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중의(衆議)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무기, 군자금 등을 모집하니 500여명이 의병에 투신하여 왔으므로 이들을 주왕산(周王山)과 청량산(淸?山) 등에서 훈련시킨 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陣)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유시연(柳時淵)을 중군장(中軍將)에, 신형일(申衡一)을 소모장(召募將)에, 김대규(金大圭)를 도포장(都砲將)에, 권대성(權大聲)을 집사(執事)에 각각 임명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어 진격하여 일본군과 수십 차에 걸쳐 교전(交戰)하였다.
그 해 4월에 진보 근처 "오누지(池)"가에서 강원, 경상도 의병의 소탕책임자인 일본 헌병 오장(伍長) 무등(武藤)이 이끄는 헌병부대와 교전하였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패하여 달아나니 의병진을 이끌고 파천면(巴川面) 어천(漁川)까지 추격해서 대장 이하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인 이한규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의병을 정비한 수 5월에는 울진(蔚珍) 죽변에 있는 왜관(倭館)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의 북쪽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증원부대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악전고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포장을 비롯 많은 의병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진을 수습하여 후퇴한 후 재기(再起)를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이처럼 독립 의진으로서 활약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연합하여 그 돌격장으로 활약하여 영해(寧海) 성을 함락하는 크나큰 공헌을 세우기도 하였다.
즉 왜적이 한국 관병들을 움직여 강원도 평해(平海)를 진공하였으므로 의진은 평해를 철수한 후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해(寧海)를 수복하기 위해 진공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들어와 성에 총혈(銃穴)을 뚫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선봉장의 임무를 맡은 이현규는 서문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로써 의진은 과감하게 진격할 수 있었고 적은 궤주하였다. 그 후에는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牟津里)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1917년 2월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 김대규 부대
안동 예안 출신으로 입암 교동에 거주하였다. 1906년 2월 자택에서 이현규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군량도감이 되었다.
1906년 4월 진보 장수령전투와 오누치 전투에서 조완이가 전사하고 이현구는 부상을 입었다. 1906년 8월 대장으로 추대되어 11월 일월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일본군의 방화작전으로 11월 21일 순국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입암에 학남 김대규의사기념비가 후손과 유림에 의해 세워졌다)
4. 김성운 부대
수비면 심천동 출신이다. 이 곳은 잠문실과 유건배를 배출하였다. 1907년 9월 경 권석규등과 기병하였다. 1907년 12월 말 수비면으로 들어온 신돌석 부대와 합류, 1908년 2월경 신돌석, 류시연, 김성운, 이춘양 등과 월월산을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2월19일 수비면 대곡동에서 일본군과 교전 30 여명의 의병 가운데 9명이 잃는 가운데 올진방면으로 퇴각하여 그 이후 활동상은 보이지 않는다 걱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7.서울 진공작전
①이인영과 허위를 중심으로 1만여 명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군을 구성하였다.(1907.12) 13도 창의대장(이인영), 군사장(허위) 홍범도, 신돌석 제외
②서울 주재 각국 공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③13도 창의군 구성(24진)-이들은 1908.1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는데, 허위가 거느린 300명의선발군이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서울 동대문 밖 근교에서 패하고, 때마침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불효는 불충”이라고 하면서 귀가해 버려 결국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말았다.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한 뒤 창의군은 해산되고, 의병부대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허위부대는 임진강방면으로, 이강년 부대는 충북, 경북지방으로 ,이인영, 민긍호 부대는 강원도로 각각 진출하여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이과정에서 민긍호는 전사하고, 이인영․이강년은 붙잡혀 사형을 당했으며, 허위는 옥사하였다.
합병 전후기의 의병(1909.10~1914)
1.국내 진공작전 전개-홍범도 의병은 차도선과 함께 삼수․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37회의 전투를 벌이고 친일파세력을 응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경술국치후 대한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전투(1920)에서 대승을 거둔다. 기타 이범윤과 안중근도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2.일본군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1909.9~10)계획을 세우고, 교반적전을 세웠는데 특히 전라도지방의 진압이 심했다. 일본군의 악랄한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은 1909년 이후로 점차 약화되고, 국치이후에는 그 무대를 중국 동북(간도)․연해주 지방으로 옮겨가서 독립군으로 가담하였다. 통화․집안지방의 유인석 부대, 장백․임강 지방의 이진룡 부대, 환인지방의 조채준 부대, 장백현의 홍범도 부대 등은 대표적 무장투쟁세력이었다.(마지막 의병장-채응언은 1915년에 체포됨)
3.항일 의병전쟁의 의의와 한계
①의의-애국운동의 대표적 형태로 민족의 강인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보호국 체제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또한 식민지 체제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전개해서 20세기 초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②한계-무력적 열세 때문에 일본 정규군의 근대적 무력을 제압하지 못했다. 지도부의 사상적 제약 때문에 보수적 유생층의 존왕양이 사상에 의한 지도노선으로 결속이 강화되지 못하였다. 약육강식, 침략 경쟁의 국제사회와 의병의 국수적 성향으로 국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지방유생과 평민들의 항일의병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서울 및 지방도시의 자산가․지식인․관료, 그리고 개혁적 유학자들은 교육․언론 등 문화활동과 산업진흥을 통해 문화․경제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평화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계몽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당시 국제관계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보아서,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드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2.선실력 후독립 부류
변법개화사상을 계승한 인사들로서 서양의 자유, 평등, 민권사상을 선호하면서 서양식 근대시민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 부류의 인사들은 일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일본의 통감정치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우리나라를 문명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일본과 협력하는 길을 찾고, 의병전쟁을 나라를 망하게 하는 ‘비문명적인 폭력’으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될수록 친일파로 전락해갔다. 유신회․진보회․일진회가 그 대표적인 단체이다.
3.선독립 후실력 부류
혁신적 유학자 출신의 지식인들에게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면서 서양문물을 부분적으로 채용하여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동도개화파 계열의 사상가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의 폐단을 비판하면서도 유교문화를 새롭게 혁신하여 계승해야 한다고 믿었고, 우리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 규탄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퍼뜨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대체로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계열의 인사들이 이 부류에 속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이 부류의 인사들은 지하운동으로 숨어들었다가 1910년 이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는 그 대표적 단체이다.
1.애국개몽사상
애국계몽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박탈되고 식민지화 정지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의 양대 조류-의병노선․애국계몽노선-의 하나로, 갑신정병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자강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민족의 국권박탈은 우리의 ‘실력’과 ‘힘’이 일본제국주의의 그것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한 사람들이 한국민족의 실력과 힘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실력양성운동’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간 사상은 개화자강사상을 계승한 애국계몽사상이었다.
2.애국계몽운동의 분야
이 운동이 전개된 부분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언론․종교․문학․예술․학술․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짧은 기간에 다대한 성과를 내어 민족역량을 크게 향상시켜서 독립운동에 큰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이 같이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그 후의 국권회복과 독립쟁취의 실력을 공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 민중의 자각에 의한 애국적 분발을 들 수 있으며,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의 단체활동을 들 수 있다.
3.애국계몽운동의 시기(1904 보안회~1911 신민회해체)
을사조약을 강요하기 이전 일본은 1904.2 대로선전포고 후 군사적 압력으로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 조인케 하여 한국을 사실상 보호국화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위기를 느낀 인사들에 의해 몇 개의 단체들이 이미 설립되고 있었다. 보안회(1904.7.13)․국민교육회(1904.8.24)․공진회(1904.12)․헌정연구회(1905.5)등이 설립된 것이다.
그러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단체들이 등장하였다. 대한자강회(1906.4)가 그 대표적 단체였다. 그리고 이 단체가 해산한 후에는 대한협회(1907.11)가 설립되어 자강회의 형식적 후속단체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계몽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1907.4 설립된 신민회였다. 신민회는 무장항쟁에 대한 본격적 준비를 단행하여 계몽운동을 한차원 올려놓은 역할을 하였다.
1.교육단체의 활동
학회는 단순히 교육단체가 아니고 교육운동을 주요 내용으로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정치운동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단체였다.
2.언론 / 교육기관 활동
개항직후부터 일기 시작한 근대교육의 열기로 경향각지에서 사립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갑오개혁때는 교육입국의 조서가 발표되면서 서양식 근대교육제도가 도입되어 각종 관립학교가 세워졌다. 근대민족교육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였다. 나라를 되찾는 길은 교육을 통한 애국적 인재의 양성밖에 없다는 자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과 3~4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다.
3.종교운동
기독교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을 조직하여 시민들의 애국심과 근대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천도교는 동학을 계승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교계에서는 박은식이 유교구신론을 저술하였고,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이 불교유신론으로 불교의 개혁의도를 담았다. 나철은 5적암살단과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4.국학운동과 신문화 운동
구국계몽운동은 국사와 국어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운동으로도 나타났다. 이미 학교교육에서도 민족교육이 강조되었지만, 신문․잡지와 같은 언론기관도 국학에 관한 많은 글을 실어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문학분야에서는 ‘신소설’과 ‘신체시’가 나타났다. 그 내용은 자유․평등․미신타파 등 근대사상을 고취하면서 순국문으로 씌어져 형식면에서 근대적인 문학의 모습을 띠어갔다.
5.애국계몽운동의 의의와 한계
①의 의
⑴국권회복과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한 민족독립운동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⑵국내에서 실력양성과 국외의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전략을 제시하였다.
⑶인재를 야성하고 민족산업을 진흥하여 독립운동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여 장기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②한 계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문명개화론의 영향과 일제에 정치적․군사적으로 예속된 보호국 체제하에서 전개되어 소극적인 운동으로 한계성을 지녔다.
애국계몽단체
1.보안회
①원세성․송수만․심상진 등이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자극받아 조직하였다.(1904)
②연설회 등을 통해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반대운동을 벌여 저지시켰다.
③협동회-이상설을 회장으로 보안회를 계승하고 송병준이 조직한 친일적 유신회와 투쟁하다 일제의 탄압으로해산 되었다.
④농광회사의 설립
⑴이상재 등 민간실업인과 관리들이 조직하고(1904) 황무지를 우리 손으로 개간할 것을 주장하였다.
⑵해체-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와 교환조건으로 해체되었다.
2.헌정연구회
①공진회의 계승
⑴보부상들이 조직한 상민회가 진명회로, 다시 공진회로 개칭됨
⑵독립협회 인사가 참여함(회장 이준)
②윤효정․이준 등이 발기하였다.(1905)
③입헌의회제도 실시 주장
⑴일제에 대항하는 것 외에 근대적 정치체제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⑵‘왕실이나 정부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야 하고 국민은 법률에 규정된 권리를 자유로이 누려야 한다’
④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다 해산되었다.
⑤을사조약 체결후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대한자강회로 바뀌엇다.
3.대한자강회
①윤효정․장지연․윤치호 등이 헌정연구회를 모체로 결성하였다.(1906.4)
②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③활 동
⑴월보를 간행하고(대한자강회 월보) 정치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⑵전국에 25개의 지회를 설치하여 회원을 1500여 명을 확보하였다.
⑶고종 퇴위 반대운동을 벌였다.
⑷이완용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문 사옥을 파괴하였다.
⑸정부가 외국인 토지소유 억제법을 제정하도록 활동하였다.
④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1907.8).
4.대한협회
①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윤효정․권동진․오세창․장지연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1907)
②교육보급, 산업발전․민권보장․행정제도 개선 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③김가진을 회장으로 70여 개의 지회와 수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대한협회회보 발행).
④일제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반일적 성격이 약화되고 활동이 부진해졌다.
신민회의 활동사 (1907~1911)
5.신민회 (★★매우중요!!)
①신민회의 조직
⑴안창호․이동녕․양기탁․이승훈․신채호․이동휘 등 서북지방 지식인․실업가․종교인․언론인 등이 중심이 되어 평양에서 조직된 비밀단체로 해외로 망명하지 않은 국내 잔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망라되었다(800여명, 가장 큰단체). 동학당 출신 김구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독립협회 청년회원들이었다.
⑵독립국가의 정체로 군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공화정체를 내세웠다. ※ 최초로 공화정체 주장(최초 공화정체 채택은 상해임시정부)
※ 입헌군주제(갑신정변과 독립협회), 전제황권제(대한제국)
⑶대한매일신보(양기탁)가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⑷도총감․군감 등으로 구성된 전국적 조직․지방조직으로 구성되었다.
⑸철저한 비밀단체로 운영되었다. CF) 1927 신간회(합법단체)와 구별
② 신민회의 활동방향
⑴표면적으로 국미의 문화적․경제적 실력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⑵내면적으로 독립군 기지 건설, 군사력 양성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⑶민족교육을 실시하여 직접 평양에 대성학교(안창호), 정주에 오산학교(이승훈)를 세웠다.
⑷평양에 자기회사, 평양․대구에 잡지․서적 등을 출판하는 태극서관을 설립․운영하였다.
⑸최남선의 소년을 창간하고 조선광문회 활동을 지원하였다.
⑹인격수양단체로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였다.
⑺실력양성론 및 국내 비밀활동의 한계를 느끼고 서간도․연해주 등지에 무장독립운동 거점인 해외독립기지 설립을 추진하였다.
⑻서간도 집단이주 등을 추진하다 일경에 파악되어 105인사건으로 분화되었다.
③노선분화
⑴실력양성론을 고수한 안창호는 ‘105인 사건’ 이후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 흥사단을 만들어 무실역행의 문화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⑵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신채호와 이동휘를 대표로 하는 무력투쟁파는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와 허구성을 느끼고 독립전쟁론에 입각,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로 이주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④신민회의 해체
⑴안악(안명근) 사건
1910.12 안명근(안중근의 4촌동생)이 테라우치(寺內正毅)총독을 암살하려 하였다 하여 일제가 안명근․김구(신민회회원) 등 황해도애국지사 160명을 체포한 사건(안악사건, 안명근사건)이 일어났다,
⑵105인 사건
일제는 안악사건을 신민회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조작하여(확대 날조하여) 대대적인 신민회회원 체포작전에 돌입, 총 600여명을 검거하고 1911.9 이중 105인을 구속하였다. 이때 양기탁․윤치호․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들이 대거 구속됨으로써 신민회는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1.교육단체의 활동
①사회․정치 단체와 관련되어 을사조약 이후 설립되어 가장 광범위하게 전국적으로 민족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②학회들은 기관지를 발행하여 애국사상과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사립학교를 세워 애국지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름은 학술단체이었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정치․사회단체와 다름이 없었다.
③교육진흥에 의한 향토의 발전과 민족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이 목표였다.
④민중계몽과 신교육 보급에 힘을 썼다.
※ 대표적 학회
애국계몽운동단체 : 서우학회(西友學會)·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 뒤에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는 西北學會로 통합)·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관동학회(關東學會)·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호남학회·흥사단·대한흥학회(유학생 단체) 등 다수가 있었다.
언 론 기 관
.개 관
언론기관과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많은 신문이 발행되어 구국정신을 계몽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한국 언론의 구국계몽활동에 당황하여 ‘한성신보’, ‘국민신보’(일진회기관지), ‘경성일보’ 등 친일신문을 발행하여 대응하였으나 실효가 없자, 제도적으로 민족언론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통감부는 이른바 신문지법(1907.7)을 공포하고, 이어 출판법(1909.2)을 제정하여 모든 출판물의 원고를 사전에 검열하였다. 한말의 민족언론이 일으킨 구국계몽운동 가운데 한가지 특기할 것은 국채보상운동(1907)을 주도한 일이었다.
- 한국언론사-근·현대 -
[개화기]
1883년 9월 서울 저동(苧洞)에 박문국(博文局)이 설치되고 그 해 10월 30일 마침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창간되었다.
당시 개화파의 일원인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의 개화된 사회를 살피고 대한의 개화문명과 국민계몽을 실현하기 위하여 신문을 만들 것을 결심하고 유길준(兪吉濬)과 함께 신문발행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박영효가 좌천됨에 따라 계획이 좌절되었다가 온건한 개화파에 의하여 다시 추진되어 결국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신문은 창간사에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조속히 개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문은 우리의 전통에서 발전된 것이 아니라 활자와 인쇄기를 일본에서 도입하는 등 일본을 통하여 중역적(重譯的)으로 이식되었다는 점과, 순한문을 사용하였으며 조정에서 발행된 관보(官報)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 그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였지만, 체재와 내용은 근대 신문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고 수구파에 의해서 박문국 건물이 불타버림으로써 1년여 만에 폐간되고 말았다. 그 뒤 박문국이 다시 재건되고 일본으로 쫓겨갔던 일본인들이 다시 우리 나라로 돌아옴에 따라 전 ≪한성순보≫ 편집자들과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 등이 복간운동을 벌여 고종의 윤허를 얻게 되어 14개월 만인 1886년 1월 25일 최초의 주간신문으로 ≪한성주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한성순보≫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나 한글을 한자와 혼용하여 썼으며, 때로는 순한글 기사도 실었다는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찾고 대중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종래의 순간(旬刊)에서 주간으로 발행하였다는 것은 근대적 신문의 발전단계로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발행된 지 2년 반 만인 1888년 7월 7일 박문국 폐지와 함께 자취를 감추게 되어 다시 신문이 없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전혀 신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들은 모두 일본인 아니면 외국인에 의한 것이었다. 그 뒤 ≪한성주보≫가 폐간된 지 약 8년 만인 1896년 4월 7일에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탄생함으로써 비로소 민간신문시대가 시작되었다.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중이던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귀국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 구내에서 ≪독립신문≫을 주재, 발행하였다. 순한글로 격일간(주 3회) 평판중형(平版中型) 4면으로 1면에 논설, 2∼3면에 관보와 외신·잡보(雜報), 4면은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라는 제목 아래 영문으로 발행하였다.
창간사에서 엄정중립, 불편부당주의와 만민평등의 민주사상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대중의 대변자요, 정부에 대한 비판자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언문일치의 순한글을 사용함으로써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대중성을 높여 그 뒤의 신문들이 나아가야 할 언론의 정도를 밝혀 주었다.
그러나 외세에 항변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고취하는 필봉을 휘두르자 일본과 러시아는 서재필을 탄압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윤치호(尹致昊)가 운영권을 맡아 1898년 7월 1일부터는 일간으로 고치고 계속해서 혁신적인 논조를 폈다. 그 뒤 독립협회사건으로 윤치호·이상재(李商在) 등이 검거되자, 다시 친한(親韓) 외국인인 아펜젤러(Appenzeller,H.G.)와 엠벌리(Emberley) 등에게 운영권이 넘어가 계속 발행되다가 마침내 1899년 12월 만 3년 8개월 만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뒤 많은 신문들이 뒤이어 창간되었다. 1897년에는 ≪조선그리스도인 회보≫·≪그리스도신문≫, 1898년에는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와 그것을 개제, 발전시킨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 每日新聞≫, 윤치호·정해원(鄭海源) 등이 발간한 ≪경성신문 京城新聞≫, 그것이 발전한 ≪대한황성신문 大韓皇城新聞≫, 이종일(李鍾一)이 발간한 ≪제국신문 帝國新聞≫, 장지연(張志淵)·남궁 억(南宮檍) 등이 발간한 ≪황성신문 皇城新聞≫ 등이 나타났다.
한편, 이들에 대항해서 보수파에서는 ≪시사총보 時事叢報≫·≪상무시보 商務時報≫ 등을 발간하였다. 특히, 이러한 신문들 중에서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은 ≪독립신문≫과 뜻을 같이하여 1910년 국권이 상실될 때까지 민족지로서 활약하였다.
≪황성신문≫은 국한문체를 혼용, 주로 중류계급 이상의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여 숫[雄]신문으로 불렸고, ≪제국신문≫은 순한글판으로 중류 이하의 일반 대중과 부녀자층을 대상으로 하여 암[雌]신문으로 불리면서 우리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대중의 지식계발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외세에 대항할 힘을 기르는 데 노력을 경주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우리 나라의 국운은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의 언론은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는데 이때 선봉에 선 것이 ≪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만세보 萬歲報≫ 등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3년 이장훈(李章薰)에 의하여 창간된 ≪매일신보≫를 개제한 것으로 영국인 베델(Bethell,E.T., 한국명 裵說)을 사장으로 내세우고, 양기탁(梁起鐸)이 총무가 되어 한영합변사(韓英合辨社)라는 회사 이름으로 1905년 8월 1일부터 신문을 발간하였다.
이 신문은 고종을 비롯한 왕실과 민간 유지들이 비밀리에 출자한 것으로 영국인의 치외법권을 이용하기 위하여 영국인 명의로 발행하였다. 따라서, 검열도 피할 수 있었으며,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강경하고 거침 없는 비판·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신문은 1905년 8월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코리안 데일리 뉴스 The Korean Daily News≫를 따로 발행하여 외국의 여론에 호소하였고, 1907년 5월부터는 한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하여 순한글판을 발행함으로써 각 방면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북돋우고 대중계몽운동을 펼치며 민족신문으로서 과감하게 투쟁을 하였다.
한편, 1906년 6월 17일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의 발의로 창간된 ≪만세보≫도 항일구국의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 신문은 특히 한국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李人稙)의 <혈(血)의 누(淚)>를 연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많은 민족지들이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자 일본은 여기에 대항하는 정책으로 일본인으로 하여금 ≪대한일보 大韓日報≫·≪대동신문 大東新聞≫·≪동양신문 東洋新聞≫·≪조선일일신문 朝鮮日日新聞≫ 등을 발간하게 하여 기존의 ≪한성신문≫과 함께 민족지와 대항하게 하였다.
또한,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가 기관지로 1906년 1월 6일 창간한 ≪국민신보 國民新報≫와 이완용(李完用) 내각의 기관지 격으로 1907년 7월 18일 창간한 ≪대한신문 大韓新聞≫ 등도 일본인 신문들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열세에 몰린 통감부(統監府)는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1907년 7월 <신문지법 新聞紙法>을 제정, 공포하게 하여 우리의 민족지들을 탄압하게 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기소되고 양기탁이 구속되는 등 극심한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국권강탈이 강행되자, 굴하지 않고 계속 항일구국투쟁을 감행해 나가던 우리의 민족지들은 일제에 의하여 모조리 강제로 폐간되었고, 우리의 언론은 또다시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국권상실 이후 1945년 8·15광복에 이르는 36년간은 전반적으로 일제의 탄압 아래 우리의 언론이 시련을 겪던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는 다시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우리의 민간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일제 초기(1910∼1919)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 총독부의 무단정치(武斷政治)로 인하여 대부분의 신문들이 강제로 폐간당하고 흡수되어 그야말로 완전한 암흑기를 겪게 되었다.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는 압수당하여 총독부의 국문판 기관지로 전락하여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황성신문≫도 강제 매수되어 폐간당했고, 그 밖의 우리의 민간신문들도 강제로 몰수, 폐간당했다.
일본인계 신문인 ≪조선일일신문≫·≪경성신보≫·≪동양일보≫ 등도 폐간을 시켰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우리 민간신문과는 달리 보상해 주었다.
그리하여 서울에는 오직 그들의 기관지인 국문판 ≪매일신보≫와 일문판 ≪경성일보≫, 그리고 영문판 ≪서울 프레스 The Seoul Press≫ 등의 세 개의 신문만 존재하는 등 철저한 언론통제가 가해졌다.
지방의 경우 오직 경상남도 진주에서 장지연이 창간한 격일간지인 ≪경남일보≫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지방지로서 약 3,000부 미만의 발행부수를 가지고 존재했을 뿐이다. 반면에 일본인을 위한 일문지는 인천의 ≪조선신문≫을 비롯하여 부산·평양 등 지방의 대도시에 도합 15개나 되었다.
한편, 신문에 비해서 잡지는 비교적 여러 종류가 발행되어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모두 34종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그 중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지인 ≪여자계 女子界≫와 일반 종합지인 ≪청춘 靑春≫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잡지 역시 철저한 통제와 검열하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그리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1919년 거국적인 3·1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그들의 총독정치에 전환을 가하여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것을 표방하면서 우리 민족에 대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부터 두 번째 단계인 민간지의 재생기(1920∼1939)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회유책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3대 민간지의 발행을 허가함으로써 우리 언론은 10년간의 암흑기를 거쳐 다시 신문을 보유하게 되었다.
1920년 1월 총독부 경무국(警務局)은 민족주의 진영인 이상협(李相協) 등에게 ≪동아일보≫를,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의 예종석(芮宗錫)에게는 ≪조선일보≫를, 또 신일본주의를 내세우고 있던 국민협회의 민원식(閔元植)에게는 ≪시사신문 時事新聞≫의 발행을 각각 허가하였다. 이것은 각 방면의 세력균형이라는 총독부의 의도가 숨어 있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그 뒤를 이어 4월 1일에 ≪동아일보≫와 ≪시사신문≫이 창간을 보았다. 이들은 모두 타블로이드배판 4면의 국한문 혼용체를 채택하였다.
≪동아일보≫는 김성수(金性洙)를 중심으로 사장에 박영효, 주간에 장덕수(張德秀), 편집국장에 이상협 등이 참여하면서 처음부터 민족대변지로서 성격을 밝히고 일제의 수많은 탄압을 받으면서 굳건히 발전하였다.
≪조선일보≫는 사장에 조진태(趙鎭泰), 편집국장에 최강(崔崗) 등을 중심으로 신문명진보주의(新文明進步主義)를 표방하면서 실업신문(實業新聞)을 지향하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경영난에 부닥쳐 허덕이다가 거대한 재력의 방응모(方應謀)의 출자에 힘입어 1932년 6월 새로운 출발을 보았다.
한편, 총독부의 정책을 옹호하던 친일적 경향의 ≪시사신문≫은 민원식이 동경에서 암살당하자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1921년 2월에 휴간되었다.
이 밖에도 1924년 3월 또 하나의 민간 국문지인 ≪시대일보 時代日報≫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3·1독립선언문의 기초문 작성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출감한 최남선(崔南善)이 잡지 ≪동명 東明≫을 일간으로 바꿔 창간한 것으로, 곧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어 민족 대변지로 활약하였으나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26년 여름에 폐간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5일, 이상협이 ≪중외일보 中外日報≫를 창간함으로써 그 명맥을 이어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도 극심한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31년 9월에 해산되고, 같은 해 11월 25일 또 다른 일간지 ≪중앙일보≫가 노정일(盧正一) 등에 의해서 창간되었으나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휴간되었다가 최선익(崔善益)·윤희중(尹希重)이 출자하여 1932년 10월 30일부터 속간되었다.
그러다가 1933년 2월에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바꾸고 여운형(呂運亨)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계속되다가 1937년 11월 5일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발행권이 취소되어 폐간되고 말았다.
한편, 방송의 경우 1926년 11월 30일에 사단법인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이 발족되어 그 이듬해 2월 16일에 호출부호 JODK, 출력 1㎾로 우리 나라 최초의 방송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우리말과 일본어를 혼용하여 방송하는 단일방송체제였다. 프로그램은 주로 일본어로 된 뉴스·경제 소식, 한국어로 된 물가정보·일기예보에다 음악방송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29년 9월부터는 일본 동경방송국과 중계연락방송망을 구축하여 일본방송을 그대로 중계하면서 단지 우리 나라의 국악과 날씨예보·물가정보만 추가 편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는 별로 혜택을 주지 못하였다.
5년 뒤인 1933년 4월 26일 일제는 출력 10㎾로 증강하는 동시에 제2방송을 만들어 우리말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이중방송시대를 전개하였다. 또한, 부산을 비롯한 평양·청진·함흥·이리·대구·광주 등 여러 지역에 지방방송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업은 많은 한국인 청취자를 획득하여 경영난을 해소하고 동시에 그들의 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하에 실시된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잡지는 그 전보다 더욱 많이 발간되어 1919년부터 1930년 사이에는 250여 종이나 나타나 잡지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창조 創造≫(1919)·≪개벽 開闢≫(1920)·≪백조 白潮≫(1921)·≪조선지광 朝鮮之光≫(1921)·≪동광 東光≫(1924)·≪삼천리 三千里≫(1929) 등이 있다.
이것은 일제가 회유책으로 좀 완화된 정책을 쓴 탓도 있지만 그만큼 민족사상이 고취되어 민족문화를 수호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발휘된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는 잡지의 내용이나 체재·경영에 있어서 혁신이 이루어져 광범위한 대중의 확보, 경영의 기업화 등을 갖춘 잡지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동아≫(1931)·≪진단학보 震檀學報≫(1934)·≪조광 朝光≫(1935)·≪춘추 春秋≫(1937)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영화도 많이 제작되어 1923년 윤백남(尹白南)에 의하여 최초의 한국영화인 <월하(月下)의 맹서(盟誓)>가 만들어졌고, 1926년 나운규(羅雲奎)가 <아리랑>을 제작하고 계속해서 <풍운아 風雲兒>(1927)·<들쥐>(1927)·<금붕어>(1927)·<벙어리 삼용이>(1929) 등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영화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 이규환(李圭煥)이 1932년 <임자없는 나룻배>를, 1937년에는 발성영화(發聲映畫)인 <나그네>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각 방면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언론활동은 일제가 1939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에 휘말리면서 종지부를 찍고 우리의 언론은 다시 암흑기(1940∼1945)를 맞게 되었다.
일제는 전쟁이 본격화되자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창씨개명(創氏改名)·내선일체(內鮮一體) 등을 내세우면서 악랄하고 발악적인 식민지정책을 전개하면서 우리의 언론을 이전보다 더욱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에 들어와서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양대 민족지에게 자진 폐간할 것을 강요하면서 신문용지의 배급을 제한하는 등, 여러 형태로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1940년 8월 10일 두 신문사는 어쩔 수 없이 폐간서를 제출함으로써 우리의 민족언론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방송 또한 전쟁수행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여, 일제는 보도방송을 비롯하여 교양·연예 부문에 이르는 모든 프로그램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이용하였으며, 우리 국민들을 그들의 정책에 따르도록 선전하는 데 이용하였다. 잡지도 수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1940년에는 ≪업 業≫·≪태양 太陽≫ 단 두 권의 잡지만 나오더니 1944년부터 1945년간에는 단 한 권의 잡지도 나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땅의 근대적 언론현상은 완전히 짓밟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광복 이후]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현상은 결국 근대적 언론을 재건, 발전시켜 온 시기로 그 변모·발전 양상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실시한 미군정시기이다. 미군정 당국은 처음에 언론에 대해서 제한없는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수많은 신문들이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광복 후 서울에서 제일 먼저 창간된 신문은 김정도(金正道)가 발행한 ≪조선인민보 朝鮮人民報≫였다. 이어 ≪민중일보 民衆日報≫·≪자유신문 自由新聞≫·≪중앙신문 中央新聞≫·≪대동신문 大東新聞≫ 등이 창간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오히려 중앙보다 먼저 신문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들은 거의 좌익계열의 논조를 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항해 우익경향의 ≪민중일보≫·≪동신일보 東新日報≫·≪자유신문≫ 등이 나타났으나, 좌익계열의 신문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복간되고 11월 25일 극우지(極右紙)인 ≪대동신문≫ 등이 창간되면서 우익진영의 언론도 차차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 전국 각지에서 무수한 신문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좌우익으로 갈려 서로 극단적인 대립을 보임으로써 언론계는 혼란에 빠져 들었다[표 3]. 특히, 1945년 12일 28일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 그 대립은 더욱 극심해져 서로 테러까지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친일지․일본인 신문 (CF> 대한매일신보를 제외한 끝자가 신보로 끝나면 모두 친일지)
∙한성신보(한글과 일어로 된 일본인 신문, 을미사변 은폐기사를 실음)
∙대동신보(일본인신문) ∙서울프레스(영자신문) ∙법정신문(이완용이 간행)
∙대한신문(이완용 내각기관지로 대표는 이인직이다.)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국민신보(일진회 기관지로 대표는 이용구이다. 을사조약의 합당성을 선전하였다.)
∙경성일보(통감부와 총독부의 기관지다)
교 육 기 관
1.개 관
개항직후부터 일기 시작한 근대교육의 열기로 경향각지에서 사립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고, 갑오개혁때는 교육입국의 조서가 발표되면서 서양식 근대교육제도가 도입되어 각종 관립학교가 세워졌다. 근대민족교육이 절정에 이른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였다. 이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되찾는 길은 장기적으로 교육을 통한 애국적 인재의 양성밖에 없다는 자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선각적 지식인과 자산가들 사이에도 ‘배우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가 유행할 만큼 앞다투어 학교설립에 나섰다.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였지만 그 전통이 구국적 애국심과 연결되어 폭발적인 교육열기를 몰고 온 것이다. 그리하여 불과 3~4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천여 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는데, 대부분은 서울에 집중되었지만, 평안도의 평양․정주․선천 등지에 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진 것이 눈길을 끈다. 이것은 이 지방에 자산가층과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과 관련이 깊었다.
일본은 이러한 교육열이 항일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탄압하는 일에 나섰다. 1908년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통감부(학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고 교과서도 검정을 받은 것만 사용하도록 통제하였다.
2.근대교육의 발전
①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②관립학교
⑴동문학
1)1882년 묄렌도르프에 의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치되었다(주로 영어를 가르침).
⑵육영공원
1)1886년 9월 민영익의 건의로 설치되고 갑오개혁때 폐지된 최초의 근대적 관립학교이다.
2)미국인 교사로 헐버트와 길모어를 초빙하여 상류층 자제를 대상으로 근대학문을 가르쳤다.
⑶한성외국어학교 : 영어․노어․불어․일어 등 외국어를 교육하였다.(1894)
⑷기타 소학교(을미개혁)․중학교․의학교․상공학교․사범학교 등을 설립하였다.→광무개혁
③사립학교 :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을 계기로 세워지고 을사조약 이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⑴원산학사
1)원산상회소 회원과 지방민의 요청으로 덕원부사 정현석이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이다.(1883)
2)근대학문과 무술을 교육하였고,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 주민들이 자립으로 새웠다.
⑵선교사 설립 학교
1)배재학당 : 미북 감리회(아펜젤러, 1885)
2)이화여학교 : 미북 감리회(스크렌튼 부인, 1886), 여성교육기관의 시초
3)경신학교 : 미북 장로회(언더우드, 1886) 4)정신여학교 : 미북 장로회(1890)
5)숭실학교 : 미북 장로회(평양, 베어드, 1897) 6)배화여학교 : 미남 감리회(1898)
7)숭의여학교 : 미북 장로회(평양, 1903) 8)호수돈여숙 : 미남 감리회(개성, 1904)
④근대적 교육제도의 마련
⑴갑오개혁때 학무아문(학부)을 두어 교육문제를 전담케하였다.
⑵교육입국조서 반포(1895) : 신교육 실시를 천명한 국왕의 조서이다. CF) 고려(성종) 교육조서 반포
⑤민족주의 교육의 실시
⑴민족 운동가의 학교 설립 : 민족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였다.
※영양지역의 계몽운동
(1)선각자 조병희
주곡의 조병희(1855~1917)는 옥천 조덕린(1658~1737)의 6세손으로 1896년 조승기와 함께 창의한 보수유생으로 「척사청복원소」를 지은 위정척사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1899년 장조황제전례소를 직접짓고 상소하러 상경하여 조덕린의 신원을 해결하고 벼슬도 하사받았다. 서울에서 장지연과 신채호를 만나서 사상적인 변신을 하게 된다. 이후 낙향하여 처음으로 단발을 하게 된다. 조창용, 조술용, 조종기, 조인석, 조두석 등의 20대 청년과 같이 상경하여 개화 혁신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1906년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1908년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 활동을 하였다. 조인석은 대한협회 대구지회, 조창용은 대한협회 형성학교에 참여하였다.
조창용(1875년~1948)은 백부 조병희로부터 글을 배웠다. 1905년 국민교육회 안의 사립국민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사립법률전문학교와 관립일어야학교를 수료하고 양주의 일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07년 대구 협성확교와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장지연과 함께 블라디 보스톡의 한민학교 교사와 상해에서 대동회관의 서기로 대동보 발간에 참여하여하다가 일제 경찰에 검거 금고 3월형 처분을 받았다.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 입사하여 다시 북간도로 갔다. 대종교와 용정의 중국 관립학교 강의를 하다가 일본경찰의 체포와 고문으로 1914년경 정신착란증으로 일생을 불우하게 보낸다.
(2)영양의 신교육구국운동
1906년 6월 현재 경북 41개군에 설치된 학교는 370개이며 학생은 4500여명이다. 영양지역에서는 신교육기관으로 주곡리의 영진의숙, 영양읍의 영흥학교, 영명측량학교가 있었다. 조종기,조인석,조두석은 월록서당에 영진의숙을 설립하고 개화교육을 실시하였다. 영흥학교는 군수 윤필오의 협조로 김도현,주곡리의 조언찬,조인석이 설립하여 김도현이 교장으로 취임하 였다(황성신문 1909년 5월 30일자 신문 기사). 1911년 학제 개편으로 영양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영명측량학교는 감천동의 오현태가 설립하였다(대한매일신보 1909년 6월1일자 기사).
1910年代 抗日 獨立運動의 推進
국내의 독립운동
1.항일 결사의 조직
1909년 일본군의 대토벌로 대부분 간도․연해주로 이동하고 국내운동은 비밀결사를 통해 전개되었다.
2.활 동
①도시 중산층과 개화 지식인을 중심으로 학생, 유림까지 참여하였다.
②선언문․격문․고시문 등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학도 광복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심어주었다.
③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활동하며 1910년대 민족운동의 맥을 이어갔다.
3.성 격
교육․종교기관을 통해 교사․학생, 뜻있는 종교인과 연결하고 농민․노동자도 참여하였다.
독립의군부
1912 임병찬이 고종의 밀서를 받아 조직을 시작하였다.
∙1913 의병잔존 세력과 유생들을 호남지방에서 규합 조직하였고, 1914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일본의 총리대신과 조선 총독 등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일본 통치에 항거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5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국권회복운동이 실패하고 임병찬은 거문도에서 순국하였다.
대한광복군
(광복회)
1913 채기중 등이 경북 풍기에서 조직하였고(대한광복단), 1915 대한광복회로 개칭되었다.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후에 김좌진), 지휘장에 권영만을 두었다.
∙군대식 조직, 각 동에 지부장을 두고 만주지부도 결성하였다.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암살 등에서 활약하다 1918 이종국의 밀고로 활동이 중지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 중 앙 총 부
1915년 윤상태․송상일․이시영 등 경북지방 유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여 유생토론회를 가장하였다.
∙단군을 받들고 국권회복운동과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대 적극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나 일경에게 발각되어 활동이 끝났다.
조선국민회
1915 장일환 등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 청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애국계몽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권회복투쟁을 계획, 간도․중국과 연결해 무기를 수입하였다. ∙1918년까지 활동하였다.
조선산직장려회
1914년 서울에서 교사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경제 자립을 통한 국권회복을 도모하며 1917년까지 활동하였다.
자 립 단
1915 함남 단천에서 조직되었다.
∙단원의 입회비와 회비를 모아 실업을 경영하고 청년교육을 하며 1916년까지 활동하였다.
송 죽 회
1913 숭의여학교 여교사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해외 독립운동 기금모집과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까지 계속 활동하고 해외에까지 조직이 확대되었다.
민단조합(1915), 선명단(1915), 자진회(1918) 등 많은 비밀결사들이 활동하였다.
1.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①배 경
⑴일본군의 초토작전에 의해 국외에 근거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⑵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실력양성으로 노선이 전환되었다.
⑶만주․연해주는 국내 진공이 용이하고 일찍부터 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⑷신민회가 국외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②목 적
⑴집단적 거주지역을 마련하여 결정적 시기에 독립을 쟁취할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독립전쟁론)
⑵산업․경제․교육․군사 등을 강화하여 무장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대 영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