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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혁(沿革)
동학산(動鶴山) 경흥사(慶興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59년(신라 태종무열왕 6) 혜공(惠空)이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나 이후 조선 초까지의 연혁(沿革)은 문헌(文獻)으로 전하지 않는다.
1989년에 대웅전(大雄殿)을 해체 복원하면서 당시 목조삼존불상의 주불(主佛)인 석가모니불에 복장문(伏藏文)가 발견되면서 이 사찰은 1644년 이전에 영규(靈圭) 승 외 51명의 비구승(比丘僧)이 참여하여 기존의 사지를 복원하고, 그때부터 경흥사(慶興寺)라 하였고, 1897년(광무 1)에 이를 중수한 바 있다고 전승(傳承)된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칠성각(七星閣)·산신각(山神閣)·승당(僧堂)·요사(寮舍) 3동, 공양간(供養間), 종무소(宗務所), 해우소(解憂所) 등이나 사지의 규모로 보아 한때는 매우 큰 가람(伽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구전에는 조선말까지만 해도 수십 명의 학승(學僧)이 머물렀다 하며, 임란 직전에는 수많은 학승이 몰려들어 승병(僧兵)을 훈련하였던 사찰로 전승되고 있다.
현재 경흥사 대웅전의 목조 삼존불 좌상은 모두가 은행나무 단목(單木)으로 조성된 것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협시보살로 봉안(奉安)되어 있다.
2) 복장기문(腹藏記文)
1989년도에 주불의 복장에서 발견된 복장문는 길이 150, 폭 50cm에 이르는 두루마리 기문으로 재질은 닥종이를 활용하였다.
당시 이 기문은 참봉(參奉) 직을 지낸바 있는 서사선(徐思選)이란 유학자(儒學者)가 쓴 글로 군데군데 7자나 붓으로 오기(誤記)를 덮어가면서 써 내려간 기문(記文)으로 불상의 복장 속에 넣기로는 다소 정성이 부족한 듯하나 현존하는 경흥사(慶興寺)의 사기(寺記)로는 유일하다.
복장문에 기록된 기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歲在乙亥(1635년)有僧海雲輿義瓊惠寬學眞登卜施于動學山之南麓謀健新刹海雲斫聚禪僧兩堂之材未及赴役兩身病義瓊惠寬學眞登召匠創建義淡燔瓦盖之越三年丁丑眞寬爲法堂化主營建數年盖瓦修粧旣畢法尙爲丹靑及繪佛化主數年之間丹□照躍法界儼然號曰慶興寺衆衲推靈圭爲佛像化主諸處勸善三年之內凡具己備邀請全羅道金山寺畵員始役于草庵證師名雙信畵員名淸虛三闕月而佛像己成奉安于法堂衆僧膽拜歡聲雷動共命鳥三乙鳥爭飛於蓮花臺上鳴呼千萬古草莽空山今乃爲一境大鹿宮此非有數存焉拾其間耶於千萬年能不變谷不遷佛像其永無疆則普施衆生亦將福田無窮矣 甲申五月二十二日
前參奉徐思選誌
이를 요약하면, 서기 1635년에 해운, 의경, 혜관, 학진승 등이 동학산 남록(南麓)에 새로이 사찰(寺刹)을 짓기로 하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 기둥을 다듬었으나 갑작스럽게 신병(身病)을 얻어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전문 장인(匠人)에 맡겨 진각(眞覺)이 화주(化主)가 되어 1637년에 기와를 덮고 단청(丹靑)을 마치니 법계(法界)가 장엄(莊嚴)하여 이를 경흥사(慶興寺)라 하였다.
불상은 영규(靈圭) 승이 3년 동안 권선(勸善)으로 법구(法具)를 갖추었고, 이의 증명(證明) 선사(禪師)로 전라도 금산사(金山寺)의 쌍신(雙呻)과 청허(淸虛)가 참여하여 봉안식(奉安式)을 가졌다 하였다.
이 기문(記文)은 1644년 5월22일 참봉(參奉)을 지낸바 있는 당시 장산(지금의 경산시) 출신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이 적은 것으로, 비교적 신빙성을 두고 있다.
이 기문을 적은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은 본은 달성인으로, 임란 때는 의병(義兵)을 창의(倡義)하고 병자년(丙子年)에 학행으로 벼슬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에 천제(薦除)되었으며, 후대 지역 사림이 옥천서원에 봉양하였고 달성 십현지와 역대 명신록에 그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평소에도 지역 현감(縣監)과 친분을 유지하면서 현 남천면 동록의 백자산 기슭에 자리한 안흥사(安興寺)를 오르내리며 시작(詩作)을 펼쳐 왔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유학자(儒學者)의 신분으로 그의 문집(文集)에 단 한 번도 경흥사(慶興寺)와의 인연이 있었음을 논하지 않았음에도 문득 불상(佛像)의 복장(伏藏)에서 그의 이름과 함께 밝혀진 복장문은 이례적이지 않을 수 없다.
또 복장문을 맡아 기록하게 된 동기가 명시되지 않아 당시 유학자가 참여하게 된 구체적인 사연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시대에 경산시 관내에 불사를 번창하게 이루었던 용성면 용전리 소재 반룡사의 중창기를 보면 당시 자인현감 임선백(任善伯)이 1637년에 직접 허물어진 반룡사지를 찾아 이후 60년간에 걸쳐 27동의 대 가람을 복원하였다는 영남읍지의 기록을 미루어 보아 이때 경산현감을 대신한 필자 서사선이 경흥사(慶興寺)의 불상 점안식을 앞두고 복장기를 적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유학자 신분으로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기문을 작성하면서 오기 부분을 먹으로 문지르고 그 위에 고쳐 적었을까 하는 데는 여전히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2) 불상 조성기
불상 조성은 복장문의 기록에 의존할 따름이다.
본 기록에는 주지인 영규 승이 3년 동안 전국을 권선(勸善) 하면서 목조삼존불을 조성하였다는데, 불상의 원목은 중국의 흑룡강성(黑龍江城)에 있는 은행나무 원목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불상의 조각은 모두 삼존불로서 본래 주불을 석가모니(釋迦牟尼) 상으로 조성한 후 좌우에 문수보살(文殊菩薩) 상과 보현보살(普賢菩薩) 상을 각각 협시 불로 배치하였다.
불상의 조형은 가운데 주불은 크고 근엄하며, 좌우 협시 불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자비의 불상으로, 그 구성비도 세련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다.
본 불상의 시주는 이영(李榮), 이언량(李彦良), 오명수(吳命守) 등, 대 시주자와 다수의 지역 신도가 공동 참여한 신앙물로, 그 아래 좌대는 3단으로 수미산(須彌山)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동식물을 연꽃 줄기에 감산 모양은 다분히 해학적이고 설화적인 표현이라는 데서 경흥사(慶興寺) 만의 독창성(獨創性)이 아닐 수 없다.
3) 불상 부위별 세부 실측도
4) 불상의 조형성
표에서와 같이 중앙의 목조좌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있는 17세기 전반경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상이나 1990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처음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 상으로 분류되었다.
이 불상은 삼불(三佛) 상 중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감을 보인다. 육계(肉髻)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둥그스름해진 머리는 이마 위쪽과 머리 꼭대기에 중앙계주(髻珠)와 정상 계주가 표현된 나발형(螺髮形)으로, 둥글넓적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와 근엄함에서 자비심(慈悲心)이 엿보인다.
몇 가닥의 주름선만을 사용하여 간단하게 처리한 통견(通肩) 형식의 불의(佛衣)는 오른 어깨를 덮은 옷자락을 팔꿈치를 감아 왼쪽 겨드랑이로 흘러 들어가게 하여 팔이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17세기 전반경 이후 불상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착의법(着衣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적당한 크기에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조화로움은 물론 사실성이 돋보여 뛰어난 조형성을 느끼게 한다.
복장기 내용 중에 세재 을해년 해운(海雲), 의경(義瓊), 혜관(惠寬), 학진(學眞) 승 등이 동학산(動鶴山) 남록(南麓)에 새로이 사찰(寺刹)을 짓기로 하고 1637년에 이를 완성한 후 수년지 간에 단청(丹靑)을 마치고, 불상은 영규(靈圭)승이 3년 동안 권선(勸善) 끝에 법구(法具)를 갖추었으며, 이의 증명선사(證明禪師)로 전라도 금산사(金山寺)의 쌍신(雙呻)과 청허(淸虛)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상은 사적문에 명기된 1644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사찰의 건립은 의경(義瓊)외 51명의 비구(比丘)가 참여하였으나, 3기의 목조좌불상은 영규(靈圭) 승 단독 발원에 의한 조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좌 협시불인 목조문수보살좌상은 굽어보는 듯한 늘씬한 체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는 은행나무 단독상으로, 화려한 보관 아래에는 귀걸이 목걸이, 팔지 등이 늘어지듯 장식되어 있으며, 수인은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으로 실제 인물의 부드러움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인 세련미를 보여준다. 화려한 보관 속에는 가지런히 빗어 올린 머리카락을 금방 묶어 올린 듯 한 상투가 친근감이 있다. 또한 가슴아래 수평으로 가로 질러 결뉴(結紐)한 군의(裙衣)는 부드럽고 소박함이 있다.
목조문수보살상(木造文殊菩薩像)은 상투 머리에 별도 제작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지만, 양어깨를 덮은 천의(天衣)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준다.
또한 간단하고 단순 소박한 상(像)이지만 양감(量感)이 있으며,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표현미는 생동감(生動感)이 넘쳐난다.
우 협시불인 목조보현보살좌상(木造普賢菩薩坐像) 또한 목조문수보살상(木造文殊菩薩像)과 같이 둥그스름한 얼굴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상이다.
어깨에는 길 다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뻗어있으며 보관 아래 뿔처럼 솟아오른 상투는 생동감이 있다. 양어깨 아래로 내리쳐진 통견(通絹) 자락 사이에 양팔이 나와 있으며 수인(手印)은 중품중생이다. 양 팔뚝은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상 모두 별도로 깎아 끼우는 조각 기법을 활용하였으며, 그 조형미는 양손에 균형미를 이루고, 수인(手印)의 품생(品生)이 자연스럽고 손목에 낀 완천(腕釧)이 이와 조화를 이루고, 복부(腹部)에 결뉴(結紐)한 군의(裙衣)는 세련미(洗煉味)가 있다.
이 삼존불은 비례가 적당하며, 당당하고 균형 잡힌 형태로 상호는 풍만한 양감 속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우러져 자비롭고 단정 우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 주름은 직선의 선묘(線描)로 간략히 처리하여 여백을 많이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 있다.
무릎 아래에는 넓은 띠 모양의 주름이 좌우 대칭으로 펼쳐져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17세기 전반경의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흥사 목조석가여래삼존 좌상은 그 조성연대가 복장 기록을 통하여 명백하며 작가의 조소 기법 또한 이 시대에 본이 되고 있는바, 본 불상은 보물 제1378호로 지정된 쌍계사목조삼세불좌상및사보살입상과 더불어 동시대 목조 불의 조각기법과 불교미술사의 본이 되고 있다.
5) 본존불 명칭
경흥사의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삼불좌상은 1990년 이전까지 주불의 칭호를 석가여래상으로 호칭되었으나, 1990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되면서 아미타불로 개칭되었고, 이로서 좌우에 배치된 협시 불상의 호칭에 이르기까지 설왕설래가 있었다.
당시 미술전문가의 지정의견은 주존불(主尊佛)을 두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아미타불(阿彌陀佛)로서 두발(頭髮)은 나발형(螺髮形)이고, 둥그스럼한 작은 육계(肉계)가 있으며, 귀가 짧고, 딱딱하고 굳은 모습이기는 하나, 정련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삼도(三道)를 갖춘 상호(相好)는 온화한 표정(表情)을 짓고 있다하였으며, 양어깨에 걸쳐진 통미양식(通眉樣式)의 법의표현(法衣表現)과 가슴 아래에서 수평(水平)으로 가로질러 결뉴(結紐)한 군의(裙衣)는 두텁고, 또 주름도 판에 박은 듯 도식화(圖式化)한 표현(表現)은 조선중기(朝鮮中期) 조각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상에서 본 목조불을 일컬어 결가부좌한 아미타불리라 설명하였다. 하지만 본 불상은 어느 형태에서도 아미타불상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미타여래의 형상은 다른 여래상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다른 특색인 32상 80 종호를 모두 구비하고 있어 이로서 구분되지 않고 수인 즉 인상으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미타여래의 인상은 다른 여래에 비하여 인상(印相)의 종류가 많다. 그것은 왕생하는 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극락정토에 있어 각기 다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모습을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인의 종류는 상품상생인, 상품중생인, 상품하생인, 중품상생인, 중품중생인, 중품하생인, 하품상생인, 하품중생인, 하품하생인 등 9종류가 있다. 이같이 9품을 갖는 이유는 신앙인의 근기에 대응한 아홉 구분이라 하겠는데, 아미타여래는 아홉 가지 신앙인(信仰印)의 근기(根基)에 대응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석가모니불상은 대체로 탄생상, 고행상, 항마상, 성도상, 설법교화상, 열반상 등 6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중 수인으로서 여래상을 구분할 수 있는 경우는 항마상과 설법교화상이다.
여기서 설법교화상은 오른손을 펴서 들고 앞으로 내어 보이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왼손을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펴 보이는 여원인(輿願印)의 수인을 많이 묘사하고 있는데, 이에 반해 항마상은 석존의 깨달음과 수도를 방해하는 악마를 물리치는 상으로 32상 80종호 중 유일하게 다른 상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항마촉지인을 결한 수인에서 구분된다(앞의 책).
이처럼 여래로서의 구분은 엄연히 구분되고 있지만, 양식적인 면에서는 다 같이 32상 80종호를 지니고 있어 이로써 구분되지 않고 인상(印相)에 따라 구분할 수밖에 없다.
경흥사(慶興寺) 본존 불상도 예외일 수는 없다. 즉 상호(相好)는 둥그스름하고 머리는 나발형(螺髮形)이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얕은 묶음이 있다. 자세는 정좌(正坐)하였으며,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하고 삼도도 선명하다.
또한 상호는 온화하며 자비스럽고 통견은 양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에는 수평으로 입은 속옷이 군의(裙衣) 주름과 조화를 이룬다. 수인은 결가부좌한 자세에 좌인은 중품중생인을 따르고 있으나 우인은 항마촉지인이다.
이는 이미 보물로 지정된 동시대 전후[도판②]의 쌍계사 석가모니불(보물 제1378호)과 [도판③]의 수덕사 석가모니불(보물 제1381호), 이외 범어사 석가모니불(보물 제1526호)이 공히 [도판①]의 경흥사(慶興寺) 목조 주존불 좌상과 같은 유사 형태를 갖춘 석가모니(釋迦牟尼) 상이다.
[도판 ①~③]에 나타난 3점의 불상은 모두 17세기 중기에 달하는 목조 좌상으로, 수인의 모습이 동일하고 상호 또한 둥그스름하며, 통견(通肩)은 양어깨에 걸쳐져 있고 머리는 나발(螺髮)형으로 나지막한 육계(肉髻)를 묶어 놓았다. 군의(君衣의 문양(文樣)도 유사하며 3점은 동일한 수법이다. 오른팔 또한 모두가 조각하여 별도로 끼운 것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는 동일하며 옷 주름 또한 크게 다를 바 없다. 특히 [도판②] 쌍계사(雙溪寺) 석가모니(釋迦牟尼) 상의 경우 겉면에 표현된 색상만 서로 비교될 뿐, 불상의 크기나 인체의 비율, 이목구비의 배치 및 구도가 같다. 이는 육안(肉眼)으로 얼핏 식별하기로도 동일 작가의 작품이라는 오해 소지가 없지 않다.
이러한 점을 종합적으로 미루어 [도판①]의 경흥사 불상은 석가모니상이 당연하며, 이에 따르는 좌우 협시보살상도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돕기 위하여 일시적 권현(權現)으로서 보살 자리에 있는 전형적인 조선 중기의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에 나타난 문수(文殊)·보현보살(普賢菩薩)상임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6) 수미단(須彌壇)
경흥사 대웅전의 목조삼존불좌상이 좌정한 수미단은 본래 3~4단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횡포로 인하여 그 일부가 훼손 또는 도굴되고 현재는 1단에 10조각이 연결되어 수미단의 상단부를 장식하고 있다.
본 수미단(須彌壇)은 2000년대 당시 대웅전의 상담에 새로이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당시의 대웅전은 명부전(冥府殿)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신축 전각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상과 좌대만 이운(移運)하고 그 아래 수미단은 본래의 자리에 존치하고 그 단위에 압량면 압량리 삼룡사의 주불인 아마타불(토불)을 경흥사로 이운 본 단에 봉안하고, 이후 관음상과 지장보살을 좌우 협시불로 봉안하였다.
본 수미단은 도판에서와 같이, 연꽃과 그 줄기가 당초문양을 이룬 조선 중기의 전통적인 수미단의 양식으로 보아지나 그 조각 기법은 입체적이면서 설화적인 양식을 곁들여 놓은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단부의 여러 단이 분실되므로 구체적인 동식물의 등장을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남아있는 동식물의 구성만으로도 당시 이를 조각한 장인의 뛰어난 조각 기법과 불교적 상상력이 표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수미단의 특징은 연꽃을 하나의 생명력으로 상징한 것으로 줄기는 있으나 잎이 없는 당초 문양으로 연꽃의 상징성을 더욱 부각하고 있으며, 그 근원은 인도에 두었다. 즉 연꽃이 가진 연화의 환생을 강력히 시사하고, 이집트의 재생과 환생의 의미를 연꽃의 속성을 통하여 새로운 탄생의 의미를 강력히 시사하는 회화적 의미를 곁들이고 있다.
그림문양의 넝쿨은 끊임없는 영원성을 상징한 것으로, 한 개의 단을 모두 감싸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넝쿨에 얽매인 꽃은 연과 목단으로 당연성이 주장되고 있으며, 그 속의 동물의 배치도 다분히 해학적이다. 수미단 배치에 있어 좌 우단은 모두 연꽃의 화려함을 보이지만은 전면에 검은 대게가 연꽃 줄기에 기어오르고 그 옆에는 금방이라도 하늘을 가르고 승천하려는 황룡이 마주하는 용마와의 익살스러움이 있다. 그 주변에 빽빽이 펼쳐진 연 줄기는 마디마디 꽃봉오리를 붙이고, 동맥과 같은 찬란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연 줄기 속에 유유자적한 물고기의 모양새는 평온이 있으며, 권위와 공명, 그리고 부귀의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본 수미단의 동식물 배치는 연꽃과 모란, 흑게, 용, 용마, 용, 용마, 흑게, 물고기, 연꽃 등의 순으로 높이 18cm에 길이 560cm인데 10개의 판이 연결되어 있다. 조각의 기법은 연줄기와 동식물을 하나하나 단독상 형식으로 모두 각으로 파내는 방법으로 조각하여 입체감을 주었고 그 뒤에 단목 원판(原版)을 붙이는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본 작품은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경흥사의 수미단(須彌壇) 중 그 일부라 할 수 있지만, 그 조각 기법이 뛰어나며 특히 연꽃 줄기에 이어지는 당초문양의 형태가 신앙적이라기보다 이 시대의 불교 미술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서의 우수성이 인정되고 있다.
특히 본 사찰은 임란 당시 승병훈련지라 하여 일제로부터 갖은 탄압을 감당하여야만 했던 아픈 역사적 상황에서도 수미단만을 지켜왔던 선인들의 삶과 죽음의 메시지가 수미단 곳곳에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경흥사 본래의 대웅전 수미단은 불단의 의미로서도 그 화려함이 충분하며 미술사학적으로도 섬세하면서 독창성이 있으며, 불교설화적 입장에서도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윤회와 해학적 의미가 작가의 조각 기법을 통하여 잘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조선중기 불교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불교 미술학적으로도 수미단은 불법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연화는 불법의 경계와 깨달음의 존재로써 불교적 교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꽃으로 표현된다. 즉 수미단의 연화는 부처의 초월적 힘을 드러내며 불교적 세계의 형상화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시문되었다.
특히 연화의 상징은 고대에서부터 시대에 따라 다양한 개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연화가 그려진 공간에 대한 해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경흥사 수미단의 여러 문양들은 이러한 고대 문양의 의장이 가지는 독특한 생명력에 대한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연화가 가지고 있는 생명성의 창조적 에너지가 식물문, 동물문과 함께 잘 드러나 있으며, 조각의 수법과 채색에서도 봉정사(鳳停寺)의 수미단(須彌壇)과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의 수미단 (보물 제486호)과 더불어 고식의 수법을 보인다.
제작기법을 보면 조각은 고부조로 깊게 파내어 풍부한 양감과 입체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각수(刻手)의 솜씨가 세련되어 있어 사물의 특성에 맞는 높낮이를 잘 구사하고 있다.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게 둥글린 칼 솜씨는 이 수미단 조각이 주제의 선택에서부터 각수의 선정, 채색에 까지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색은 적색, 황색, 녹색의 백색, 흑색 등의 오채를 쓰고 있으며, 특히 게에 그려진 흑채는 채색의 연대를 올려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이다. 채색에 대해서는 보다 세심한 관찰이 요구된다. 여기에 사용된 채색은 석채로 보이며, 채색의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박락이 되고 있어 채색의 밑칠이 드러난 것을 볼 수 있다.
수미단의 장식 문양은 전면에는 수생물과 상상의 동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고, 양 옆면은 식물문으로 꾸몄다. 현재의 상태는 주제로 분류해 볼 때 서로 짝이 맞지 않는 조각이 끼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양의 주제를 분류해 보면 식물문으로는 연화와 당초넝쿨 이 있으며, 수생물로는 물고기, 게 등과 상상의 동물로는 용과 기린 (혹은 신마)이 보인다.
연화와 당초넝쿨이 결합하는 예는 고대 인도에서부터 보이며, 운강석굴 및 용문석굴, 돈황석굴 등 중국고대 벽화와 우리나라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걸쳐 이어져 내려오는 중요한 상징성을 지니는 문양이다. 현존하는 많은 장식문양의 대부분은 이러한 상징에 연원을 둔 연화 문양의 변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 경흥사 수미단의 연화당초에는 연화의 싹이 가지마다 돋아 나오는 모습이 함께 표현되어 있어서 연화의 강한 생명력과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의지를 확고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화의 창조적 생명력의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방편으로 당초넝쿨 뿐 아니라 동물에도 불법을 수호하는 용, 기린, 등과 함께 물고기, 게 등도 함께 그려 넣었다.
고대 인도에서는 영화의 강한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방편으로 코끼리,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 또는 방사상으로 같은 방향을 향하는 사두(蛇頭) 등 생명력 강한 동식물을 배치하여 중심의 연화가 지닌 창조력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낸 장식 문양이 많다.
이러한 고대의 전통이 중국의 용봉신화를 거쳐 우리나라에 정착한 형태로 보인다. 물고기 또한 사람이 아미타불을 부를 때면 나타난다는 ‘아미타어’ 이야기와 인도 이집트의 여러 설화에서 연화와 깊은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삼목어(三目魚)는 인도의 유적에서 부처의 발바닥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앞에서와 같이 경흥사 수미단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봉정사와 백흥암 등의 수미단과 더불어 또 다른 독자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산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는 2009년 8월 31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55호로 지정되었다.
7) 성보 문화재(비지정)
(1) 종각(鐘閣)
불기 2504년 주지 하종 비구가 신도들과 뜻을 모아 명부전 하단 우측에 종각을 건립하고 천관에 달하는 범종을 조성하였다.
이에 든 예산은 소요된 예산은 경산시의 지원으로, 범종 5천만원, 종각 1억 원이 지원되었고 이에 신도들도 각기 동참 시주하였다.
(2) 요사(寮舍)
요사 무외당(無畏堂)은 2007년 하종 비구가 2억 2천만 원의 국·도비 지원을 받아 88·92㎡에 달하는 5칸 요사를 승방으로 축조하였다.
(3) 산신각(山神閣)·삼성각(三聖閣)
대웅전(大雄殿) 상단에 조성된 산신각(山神閣)과 삼성각(三聖閣)은 1992년 대웅전을 현재의 자리로 이창할 당시 축조한 전각으로 산신각(山神閣)에는 산신 탱화가 봉안(奉安)되고, 삼성각(三聖閣)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 칠성신(七星神), 용왕신(龍王神)을 봉안(奉安)하였다.
(4) 요사 및 부도군
1993년 대웅전(大雄殿) 하단 명부전(冥府殿) 우측에 1600년대 축조한 요사(寮舍) 2동(심검당, 만학당)을 중수한 후 주변을 정비하였다.
부도(浮屠) 군은 동년에 사찰 아래 계곡 옆에 보존된 부도 7기를 수습하여 대웅전(大雄殿) 우측(右側)에 단을 쌓고 이를 이운(移運)하고, 동시기에 경내 진입로를 동학산록(動鶴山麓)에 개설하였다.
앞의 삼성각(三聖閣),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 축조 및 부도(浮屠) 정비는 주지 원재윤(元在閏) 비구(比丘)가 맡아 완성하였다.
(5) 해우소(解憂所)
해우소(解憂所)는 모두 3칸 맞배지붕으로 1993년 경내(境內)의 요사(寮舍) 중수(重修)와 같이 신창(新創)하였다.
(6) 종무소(宗務所)
종무소는 1960년대에 건립된 슬라브 건물이었으나, 1994년에 이를 보수하여 양기와를 올리고 내부 구조를 단장하였다.
(6) 종무소
8) 역대 주지 연보
(1) 혜공화상(慧空和尙, 686년 추정)
운제산(雲梯山)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던 혜공화상(慧空和尙)이 신라 삼국통일(三國統一) 이후 원효(元曉) 성사의 고향 경산을 찾아 동학산 산세를 보고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학의 기운을 그 자리에 안주시키기 위하여 사찰(寺刹)을 건립하였다 하나 당시 초창 시기와 사명(寺名)은 전하지 않는다.
(2) 고려시대(주석승 미상)
고려시대까지 사찰은 존치하였으나 가람사(伽藍寺)는 유전되지 않고, 다만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浮屠群) 일부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 기록은 없다.
(3) 조선 초기
조선 초기의 사기는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이 또한 현존하는 부도에서 당시 주석하였던 승려들의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4) 의경(義瓊)·해운(海運)·영규대사(靈圭大師)(1629~1644년)
1620년부터 의경 외 42인의 비구가 옛 사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권선하던 중 1629(숭정 2)년 정축 6월에 공양 시주로 조몽선 내외, 보시 대시주 장운선, 이민우. 김춘생 부부가 참여, 이외에도 17인이 시주, 대웅전을 원만히 신창, 1629년부터 대웅전을 신창하고, 1635년 주변 가람과 주불 조성을 위해 해운, 의경, 학진 등이 목재 다듬었으나, 병이나 목수를 불러 완공하고, 의담은 기와를 구웠다.
1637년 진담이 법당 화주가 되어 제처 권선(勸善)한 후 삼 년 만에 단청을 완수하고, 불상은 영규승이 권선 후 이로써 법계가 원만하니 사찰을 “경흥사”로 고쳤다.
여기에 증명 선사는 청허와 쌍신이 맡았고, 주불 복장기는 전 참봉 서사선이 적었다.
(5) 주석승 불명(1645~1900년)
이후 사기가 전하지 않아 사적(事蹟)을 알 수 없다.
(6) 상근 비구(相根比丘)(주석 년도 미상)
수덕사(修德寺)에서 경흥사(慶興寺)로 부임하였다. 재임 시 대웅전(大雄殿) 용마루에 장식된 청기와를 도난당했다. 그 후 개인 사정으로 토굴(土窟)을 마련 이거(移居)하였다.
(7) 명동 비구(미상 ~1983년)
재임 중 대웅전(大雄殿)의 신중(神衆) 및 후불탱화, 지옥도(地獄道), 업경대(業鏡臺), 지붕 청기와, 국태민안(國泰民安) 위패(位牌) 등을 도난(盜難)당했다.
(8) 재윤 비구(在閏比丘)(1983~2002)
1983년 자인 제석사(帝釋寺) 주지에서 경흥사(慶興寺) 주지로 동년에 부임하였다.
1990년 8월 7일 당시 경산군의 기축생 김종국의 대웅전 목조삼존불의 문화재 지정신청에 의하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하였다. 동년에 정부 지원 2,400원으로 대웅전을 해체 보수하였고, 압량면 압량리 소재 삼룡사(三龍寺) 불상의 이치와 함께 본래 대웅전은 명부전(冥府殿)이라 개칭한 후 그 자리에 삼룡사 소조(塑造) 불을 주불(主佛)로 이운(移運)하였다.
2002년에는 경내를 넓이고 승방(僧房) 2동을 개축하고 종무소를 신축하였다.
(9) 하종 비구(河宗比丘)(2003~2010년)
2005년에 종각(鐘閣)을 조성하고 좌단에 2009년 승방(僧房)을 건립하였다.
(10) 도오 비구(道悟比丘)(2012년~2023))
2009년 9월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된 목조삼존불(木造三尊佛)을 보물로 승격 신청, 2012년 2월 22일 보물 제175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로써 1980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46호로 지정 시 목조아미타불로 호칭된 본존불을 석가모니불로 추인받았다. 2013년에는 입구 진입로 확·포장과 경내 소방시설을 정부 지원으로 원만히 하였다.
(11) 도관 비구(道觀比丘)(2023~)
2023년 2월에 취임하였다.
본문의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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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및 편집 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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