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나드는 독서를 통해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신학자, 벽돌 쌓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해 오며 부지런한 습관이 몸에 밴 신학자,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10년 넘게 곁에서 돌보며 계속 해서 책을 읽으며 버터낸 신학자, 계속 해서 글을 쓰면서 믿고 있는 바를 표현한 신학자, 카톨릭과 기독교를 넘나들며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 세계적인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회고록, 에세이 형식의 자서전의 성격을 띤 책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수 세기에 걸친 유대인 박해를 통해 쇼아(홀로코스트)로 가는 길을 닦았을 뿐 아니라 유대인 살해에 공모했다는 사실을, 기독교가 진실성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였다.(109)
어떤 사상가들의 저작을 잘 '사용'하려면 매일 그들과 함께 살 필요가 있는데, 나는 키르케고르가 그런 사상가 중 한 명이라고 진즉에 결정을 내렸다. 그런 뒤에 키르케고르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로 결정했다. (113)
나는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있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30분만 주어지면 나는 뭔가를 끝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글을 썼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나는 조적 일에서 배운 대로 쓴다. 비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168)
내가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계속 읽었기 때문이다. 앤의 병 때문에 읽기는 내게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 애덤이 자러 가면 앤도 자기 세계로 들어갔다. 뭔가 일을 벌일 때도 있고 자러 가기도 했다. 그러면 내게 남는 것은 읽는 일뿐이었다.(249)
나의 글쓰기가 탐색적인 이유는, 내가 믿는 바를 글로 표현하기 전에는 나도 내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는 글을 쓰는 것이 믿음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나의 글쓰기가 주로 에세이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내 작업의 탐색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맡은 다른 책임들 때문에 에세이 정도가 늘 '적당해'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253)
'복음에 비추어'라는 말은 하나님 예배함을 배우는 것이 내 삶의 관건임을 말해 준다. 어떤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교회의 기도로 기도하는 법을 배운 친구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내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임을 안다.(292)
교회 앞에 놓인 많은 요구 사항을 고려할 때, 신학이 전문직의 학문으로 규정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344)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윤리'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중요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고려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을 제공한다. 이런 면에서 "예배 중 인사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하먼의 강의는 고전이라 할 만했다.(354)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다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내게 지독히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