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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말씀: 마22:37-39
제목:하나님을 아는 삶, (배타성, 배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의 임재를 말하며, 성령이 임재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의 삶을 위해 연단과 훈련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발산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경외하는 마음을 부여 주셔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교통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교제와 교통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새 길을 볼 수 있고 그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찾지 않은 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인데, 마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이것은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배타적신앙을 가져라 는 말입니다.
요즘 종교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잡족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리인데요, 이들은 신앙생활은 안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도하고요. 성도님들이 우리아들은요, 우리 남편은 요, 교회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어요, 급하거나 힘들 때 기도도하고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교회의 머리되시며 우리를 지체로 부르시고 교회로 세우신 그 놀라운 비밀과 신비함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런 사람들을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좀 알아듣기 쉽게 소극적 종교인과 적극적 종교인으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적극적인 종교인들은 교회에 나옵니다. 나와서 그냥 앉아 있다가 갑니다. 왜 그냥 앉아 있다가 간다고 표현하느냐하면 영적인 갈증이나 예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나 영광을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과 종교인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배타성입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이 무엇이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운행하시며 살아계신 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종교성을 가지고 먼저 교회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침례를 받고, 성찬식에 참여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이제 내 육신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결단과 그 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인해 한 몸이 된 것을 고백하는 신앙인, 즉 하나님을 찾고 그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 될 때, 비로소 종교성을 가진 것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배타성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현실에 적용하면, 하나님 외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배타성은 다른 종교와 타협이 불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원자다’라는 말은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신론 자들이며, 범신론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겠습니까? 그러면 왜 교회에 나오느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가족이 나오니까, 아니면 좀 고급한 종교인 것 같아서 교회 출석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출발은 종교성에서 하는 것이지요. 처음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없습니다. 예배에 참여함으로 인해, 말씀을 접함으로 인해 이제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삶을 통해, 친밀한 교제와 교통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배타적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삶을 설교를 새해 들어서 계속하고 있는데요, 이런 예배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앎으로 배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만이 유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합니까? 왜 배타성을 주장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신앙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가치의 종교가 아니라 은밀히 따져서 ‘사실’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대근동지역에서 신은 전능해야 된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신이 전능하면 됩니까?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왜 이들이 다신론자들이고 범신론자들이냐하면 신의 전능성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은 전능성이 크고 어떤 신은 다른 신에 비해 전능성이 적다는 것으로 신을 이해합니다. 바벨론 같은 경우는 일 년마다 한 번씩 신의 축제를 열 정도로 다신교를 믿습니다. 그런데도 바벨론에서 주신인 ‘엘 마르둑크’신을 가장 능력 있는 신으로 섬깁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전능하심은 이 땅을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능성이 이 땅을 다스리는 자로서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내용이 여러 군데 있지만, 열왕기하 19:24에서 한 본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이 장면은 산헤림 왕이 잘난 척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하수를 다 말렸다 이 말뜻은 ‘내가 애굽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여호와의 궤를 맨 제사장의 발바닥이 요단강물을 밟자 요단강물이 갈라지면서 마른땅이 드러나고 강물이 마른 것은 요단강을 마르게 하심으로 요단강에 있는 가나안땅의 주인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만방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알신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바알이 물의신인 ‘얌’을 이기고 승리하자 바알이 최고의 신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물신이 가장 능력이 있는 신인데 그 신을 이겼으니 최고의 신으로 추대를 받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아시아지역에는 물의 범람과 홍수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이런 근동아시아지역의 사람들이 혼돈의 물을 극복하고 정복하는 신이 살아있는 신이고 그 신이 온 땅의 주인이다 하는 애환을 담고 있는 신화이기 때문에 가나안 인들이 볼 때에 요단강을 제사장이 궤를 매고 요단강 물에 닿자마자 물이 갈라지고 마르고 하는 사건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온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여호수아 5:1절을 보면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요단강바닥의 12돌을 가져다가 길갈에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온 땅의 주인임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열방에 선포하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고대 근동아시아지역에서는 왕이 바깥에 땅을 정복하면 땅이 자기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돌이나 신상을 가져다가 세웠습니다. 따라서 요단강바닥에서 가져온 12개의 돌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요단 물을 말리심으로 온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백성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 과시하신 것입니다. 일종의 정복기념비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심을 ‘현실’서 그대로 드려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신앙의 삶을 살아가야는데, 그 배타적인 신앙의 기본자세를 이러해야합니다. 즉, 기독교를 설명할 때 기독교는 옳으냐, 가치가 있느냐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왜 도둑질 하지 말아야하느냐 이렇게 물으면 그것이 나쁜 일이니까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완벽한 대답이 아닙니다. 배타성을 가진 정확한 대답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도둑질 하는 것이 나쁜 일을 넘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 도둑질 하고 안 들키면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죄책감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도둑질하고 발각되지 않아도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차딱지를 때면 기분이 굉장히 상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자하지 말라는 곳에 주차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주차하면 안 되는 곳에 주차를 하고 발각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범죄는 발각되지 않으면 된다는 것에서 벗어나, 나쁜 짓이기 때문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그런 면에서 죄를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기준을 잡으면 온전한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에 기준이 되어 죄를 봐야 우리는 정확한 죄를 인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에 배타성을 적용해야하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자세입니다. 이렇게 성경기준에서 삶을 해석하지 못하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가 먼저인 것입니다. 이게 배타적 신앙관에서 나옵니다. 절대로 배타적 신앙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11:6절에 가면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판이하게 다른 것은 그 권위와 가치의 기준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종교로 불교와 비교하자면 불교는 인간 모두가 석가모니가 간 길을 걸어가서 도의 경지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신론입니다. 인간에게 신적인 성품이 있는데 그것을 계발 하고 그것으로부터 반대되는 것으로부터는 해탈하는 것이 불교라면,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선한 것과 가치와 권위와 질서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우리의 의와 거룩과 행복과 생명까지도 그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은 배타적일수밖에 없습니다. 배타적이어야 하고 이 배타성을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옵니다.
흔히 인간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반발합니다. ‘왜 너희는 배타적이냐,’는 것이지요. 불교인들도 스님도 성경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괜찮은 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왜 기독교는 불교를 인정하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포용력이 있다고 그러고 기독교는 편협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100+100=200이다, 이렇게 정답을 알면 201도 199도 틀린 답이라는 것을 알고 정답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에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정답을 모르는 사람들은 201도, 199도 정답일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만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반드시 배타적이어야 합니다. 타협의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가 융통성을 가지고 포용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은 정답을 모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겠지, 그것도 가치가 있겠지,’ 하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포용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어든지 모르고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답을 앏니다. 200이라는 정답을 아는데 199나 201이나 무슨 차이가 있냐고 따지는 것은 정답과 정답이 아니 것과의 차이를 모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갖는 신앙의 가장 기본은 ‘사실과 진리성’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배타적이고 기독교는 배타적일수밖에 없고 그 배타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할 때 나타납니다.
정리합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배타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배타성은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느냐 하는 해답이 마22:39절에 있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그러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배려의 삶입니다. 배려의 삶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즉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 봅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이에서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 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네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배타적인 신앙으로 나타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배려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배려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통일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통일성을 깨는 일들이 용납될 수없는 곳이 교회인데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지체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세우고 배려하는데 그 지체의 존재의 특징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교회의 통일성을 깨지는 것이지요. 교회는 지체로서 배려를 배우고 연단 받아 삶속에서 배려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라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겸손하며 섬기는 마음, 이해와 용서의 마음은 배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고전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린도 교인들이 서신이나 구전을 통하여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를 바울에게 제기했습니다. 당시의 고대 도시들에서는 종교적 제사(祭衣)에 사용된 음식물들을 사제들이 처분하였으나 다 처분하지 못하고 남은 제물들은 시장에서 판매하였습니다. 제사에 사용되지 아니한 고기도 있었으므로 교인 들이 거리낌 없이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을 수 있었는데 사실 제물과 순수한 음식을 구별하기란 쉽지가 않지요. 고린도 교회에서 우상의 제물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견해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로 인하여 오염된 음식을 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다른 무리들은 영지 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도살이나 우상 제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들 두 주장에 의하여 발생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먼저 그들의 지식이 편견이나 교만에 빠져 분쟁을 유발시키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지적하고 성숙한 인격과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요, 결국 그들의 문제는 사랑이 없는 지식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었습니다. 13절 이 말씀이 결국 옳음이 무엇이냐 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우선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다음과 같은 차원까지 구체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까지입니다. 사실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5:43-44‘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내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무엇 때문에 넘어지는가 하면 ‘무엇이 옳은가’라는 것 때문에 넘어집니다. 이것은 사실 어려운 기준일 수 있습니다. ‘옳다 그러다 하는 것. 옳기 때문에 화를 내도된다, 옳기 때문에 심판을 해도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엇이 옳으냐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옳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이런 사건도 있었습니다. 고전11:17절부터 보면 성만찬의 제정에 대해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피 흘리신 그 공로로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세상에서 차별이 없고 하나 됨을 인식하지 하지 못하면 그것이야 말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죽으셔야 되었는지, 죽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모르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됩니다.
초대교회 성찬식은 매일 행한 것 같은데요, 성찬식은 예식과 식사를 겸해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상황은 교회를 따로 짓지 않아서 부자 집에서 자기 집과 마당을 제공하면 함께 모였습니다. 부자 집 사람들은 올 때 자기 음식을 좀 가지고 왔습니다. 때문에 음식을 갖고 온 부류와 가지고 오지 못한 부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유한 사람들이 거실에서 모여 가지고 온 음식을 먼저 먹는 것입니다. 음식을 가지고 오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낄 수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성찬이 끝나고 나면 음식이 나오는데 그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온 음식으로 이미 배부르고 취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두부류 간에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같이 먹어야지,’ ‘아니 어차피 나눠줄 것인데 먼저 먹는 것이 문제가 되냐?’이런 일 때문에 성찬식을 행할 때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고 결국 부유한 층과 빈민 층 사이에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이 문제를 바울은 어떻게 접근을 하느냐하면 무엇이 옳으냐 로 접근하지 않고 무엇이 덕이냐 무엇이 유익이냐 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이것에 초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성찬식이 실패했다고 노하지요. 성찬식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물론 겸해서 식사도 합니다,
성찬식이란? 부자나 가난한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똑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성찬예식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주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성찬식의 개념이며, 목적이며,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에 신자는 있다, 없다 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차별이 있었어도 안 되며, 결국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된 특별한 집단이요, 동료라는 사실에 결론을 내려야합니다. 이 중요한 의미마저 자기가 옳음으로 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음식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배려해서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려는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고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발산하는 귀한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보신탕을 먹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이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원리 애완견과 식용견으로 나누어야 됩니다. 돼지도 애완돼지가 있습니다. 그 애완돼지는 먹지 않습니다. 애완돼지 키우는 수요가 적어서 그렇지 애완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돼지고기 먹으면 안 된다고 데모할 수 없습니다. 물고기도 잉어는 안 먹습니다. 먹어도 되지만 안 먹습니다. 닭도 관상용 닭이 있습니다. 그 종류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식용으로 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개도 애완용은 먹을 수 없지만 식용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도 목매죽인 짐승은 먹지 않는다고 대신에 삼계탕을 시키면 그것 또한 인정하지 무슨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인정하는 것이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고도기를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아도 상대방이 그것으로 인해 혐오감을 느끼면 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반드시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타나야합니다. 나 보다 상대방을 낫게 여기는 마음, 낮아지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갈 때,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배타적인 신앙으로 진리가운데 서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산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