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회] 미국에서 ‘아시아 반공지도자’로 부상
독재자 이승만 평전/[7장] 해방정국의 주역, 분단정부 수립론 제기 2012/03/29 08:00 김삼웅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 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 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 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 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 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 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주석 33)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승만은 12월 5일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하였다.
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 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주석 34)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 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주석 35)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 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 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 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 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 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하였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ㆍ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 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ㆍ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 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만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 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ㆍ반공주의가 ‘트루만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 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ㆍ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 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 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 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 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 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 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ㆍ장개석을 만났고, 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 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
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 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주석 37)
주석
33> 정용욱, <존 하지와 미군점령통치 3년>, 198쪽, 중심, 2003.
34> <하지가 굿펠로에게 보내는 서한>, 1947년 1월 28일.
35> 정용욱, 앞의 책, 202쪽.
36> 이원순, <세기를 넘어서>, 315쪽, 신태양사, 1989.
37> 정병준, 앞의 책, 6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