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9월1일(수)비
아침 공양 후 봉암사 태고선원을 뜨락을 돌면서 포행하다.
從晨軟雨彈金地, 종신연후탄금지
雲霧飛騰過前山; 운무비등과전산
忽登大方太古臺, 홀등대방태고대
周繞三匝世界安. 주요삼잡세계안
새벽부터 내리는 보슬비
금빛 땅을 두드리고
운무가 피어올라 앞산을 지난다
문득 태고의 넓은 누대에 올라
세 바퀴를 맴도니 세계가 편안하다.
문경 일월암 암주가 찾아와 함께 원로선원을 방문하여 노스님들께 인사드리고 차담을 나누다. 다시 암주의 차를 타고 일월암을 방문하다. 암주의 차대접을 받고 봉암사로 돌아오다. 고우스님의 복덕이 원만하였던지 조실, 방장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수좌들이 우천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조문오신다. 봉암사 주지는 진범스님(통도사), 성적당에는 혜담스님(범어사).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를 읽다.
오래된 것들은 새로운 것들의 그림자-아바타avatar-였다. -그로텐디크
접근가능한 개념들은 우리가 파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접근불가능한 개념들의 아바타인 것으로 해석된다. -마이클 해리스
철학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현대수학의 단 한 가지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굳건한 토대를 찾으라고 하기보다는 범주론적 아바타 사다리를 올라가서 의미를 찾으라고 조언하겠다. -마이클 해리스
사다리의 꼭대기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해리스가 장난스러운 듯, 진지한 듯, 제안한 대로, 수학의 모든 내용이 궁극적으로 흘러나오는 원천인 ‘하나의 거대한 정리 One Big Theorem’-‘윤회=열반의 경지의 어떤 것-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올라야 할 사다리의 칸이 무한히 많기에 그곳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여기에 수학의 비애가 있다. 우주의 모든 힘과 입자를 설명할 ’최종 이론‘을 갈망할 수 있는 이론물리학과 달리, 순수수학은 궁극의 진리를 향한 탐구의 무용함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든 베일을 걷어도 다만 그 다음의 베일이 나타날 뿐이다.” -마이클 해리스
지식과 무관심의 영원한 사이클을 돌고 도는 운명일지니.
수학은 자신의 무모순성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
진리와 비진리(거짓) 사이의 구별은 허물어지고, 아바타의 사다리는 무너져내리며, 하나의 거대한 정리는 정말로 끔찍한 형태, 가령 0=1과 같은 형태를 취할 것이다.
2021년9월2일(목)흐린 후 맑아짐
어젯밤 비가 줄기차게 내리더니 새벽부터 점차로 맑아져 영결식과 다비식이 원만히 치러질 거라고 기대하게 된다. 오전 7시부터 대중 울력에 나가 좌석 배치를 도와주다. 10:30 영결식 거행하다. BTN, BBS에서 방송을 취재한다. 11:30 무렵 영결식 끝나다. 스님들이 유체를 운구하여 다비장으로 향하다. 만장을 들고 따라간다. 동초스님의 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 진주로 돌아오다. 오는 길에 수행담을 서로 이야기하여 상통하다. 긴 외출이었다. 일기를 옮겨 적고 쉬다.
2021년9월3일(금)맑음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
~ Albert Camus
가을이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계절이다. -알베르 까뮈
문학가들은 어찌 이렇게도 멋진 말을 할 수 있는가?
<살불살조의 원형은 초기경전에 나온다>
선불교에 ’살불살조‘가 있다. 이 말은 임제록에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라. 그리하면 비로소 해탈을 얻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원형이 법구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법구경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 없이 지낸다.”(Dhp.294)라는 게송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게송은 주석을 보아야 한다. 어머니는 갈애를 상징하고 아버지는 자만을 상징한다. 게송에서 어머니를 죽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가 사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갈애가 세 가지 세계[三界: tiloka]의 존재를 낳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아버지를 죽이라고 한 것은 “ ‘내가 있다는 자만’은 ‘나는 이러이러한 왕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DhpA.III.454)라고 했다.
-진흙 속의 연꽃님 글(2021.9.1.)
죽음은 신념의 영역에 속한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가?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굳건한 확신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버텨낼 수 있는가, 이생의 삶을!
-자끄 라깡, Louvain 강연 1972
요가하고 점심 공양하다.
2021년9월5(일)흐림
‘나’는 없다. 아니 진짜 없다. 있는 데 없다고 하는 게 아니고 본래 없다. 지금 여기 이대로 무아이다. 무아인 채 생생히 살아있다. 그런데 이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無我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겠는가? 이해한다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무아로 살아간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 확신이 자다 일어나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아니 지금 죽는다 해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확신은 수행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많이 배워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법문 듣다가 그냥 가슴에 훅 다가오든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가운데 홀연히 ‘아하, 그렇구나!’라고 마음이 확 열리든지 해야 한다. 그렇다고 삶이 단번에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점의 변화가 저절로 삶을 바꾼다.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난다. 무아로 살면 어떠한가? 일체에 괴로울 일이 없다. 자유와 안심이다. 자비와 지혜로 산다.
2021년9월6일(월)흐림 오후에 이슬비
허공의 온도를 재어보라. 몇 도인가?
허공의 숨결을 느껴보라.
대나무가 손가락을 펼쳐 허공을 짚고 하늘산을 올라간다.
허공에서 나온 손가락이 자판을 두들기니 빈 공간에 글자가 나타난다. 空卽是色
글자를 썼다 지웠다 마음대로 한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色空變換自在
허공을 두드려 골수를 뽑아 쥐어짜니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저녁에 강의하다. 8명 참석
2021년9월7일(화)흐림
보름 독경법회하다. 9명 참석. 오후에 지월거사 오다. 불면증의 조짐이 보인다고 명상으로 불안을 가라 앉히다.
2021년9월8일(수)맑음
보살님들과 지월거사 요가하고 공양하다. 오후에 진주성 산책하다. 청명한 가을 날씨, 아름다운 날.
데카르트 철학에서 말하는 res cogitans, res extensa
스피노자 철학에서 말하는 능산적 자연 소산적 자연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見分 相分
신심명에서 말하는 能 境, 所
2021년9월9일(목)맑은 후 흐려짐
봉일암 방문하여 죽로다실에서 동초스님 모시고 차회를 열다. 차시를 짓기를,
曉日雲影囱, 효일운영창
一向秋色濃; 일향추색농
駕走訪初師, 가주방초사
一茶天下平. 일차천하평
날이 밝자 구름이 창에 비추고
갈수록 가을 색 짙어가는군
차를 달려 동초스님 찾아뵈니
차 한 잔 마심에 천하가 평화로워라
오후에 마하보리사 자명스님과 zoom으로 대화 나누다.
2021년9월10일(금)보슬비, 흐림
확신과 진리의 벌어진 틈은 자신이 가장 확신한다고 여기는 판단일 때 가장 큰 듯하다. 누가 알겠는가? 역사상 가장 과도한 확신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될는지.
오후에 일진스님 와서 대화 나누고 돌아가다.
2021년9월11일(토)맑음
전성태 작가의 <늑대>을 읽다.
“몽골인에게 길을 가르쳐주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면 그는 이후 영원히 그 길로만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매 순간이 그런 기로이지 싶다. 그러나 또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길안내를 받은 존재들이 아닐는지.”
일진스님께서 파자포아 화두에 대해 게송 짓기를 부탁하여 짓다.
巖頭搗棹至當處, 암두도도지당처
老婆抛兒叱知音; 노파포아질지음
切莫更疑渡邊事, 절막갱의도변사
貴童自在慈母心. 귀동자재자모심
암두화상은 지당한 자리를 노로 두드리고
노파는 아이를 던지며 지음(만나지 못함)을 탓한다
나루터에서 벌어진 일 다시 의심하지 말라
어여쁜 우리 아기 오나가나 늘 엄마 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