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월 1일 새해 첫날, 워싱턴 D.C.의 한 장례식장에는 존 터너라는 이름의 남자가 관 속에 누워있었다. 마차꾼이었던 터너는 2.17m의 큰 키 때문에 특별 주문 제작한 관 속에 누워있다는 것과 38세에 세상을 떠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이제 장례식을 치르면 마차를 타고 무덤으로 가 편안한 안식을 취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고인의 안식을 방해할 괴한이 장례식장에 숨어들었다.
괴한은 장례를 주관할 성직자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식장 뒷방에 안치된 터너의 관에 다가갔다. 그리고 잘 차려입은 고인의 턱시도를 대충 벗긴 후 예리한 칼로 몸 여기저기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마치 고인의 몸속에 숨겨진 보물이라도 찾겠다는 듯 여기저기를 칼로 가르고 손을 집어넣어 피 묻은 것들을 꺼집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고인의 머리에 톱질을 시작했다.
그동안 유족과 친지들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성직자의 말만 믿고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미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친지들은 이윽고 뒷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의아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톱질 소리가 들리자 필시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다 여겨 뒷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보물 찾기(?)에 열중이던 괴한은 문밖의 소란한 소리에 깜짝 놀랐지만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머릿속에서 마지막 목표물까지 꺼집어낸 후 ‘보물들’을 챙겨 뒷문으로 줄행랑을 쳤다.
괴한의 정체는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병원(Johns Hopkins Hospital)의 외과 레지던트 윌리엄 샤프(William Sharpe)였다. 그는 근무 첫날에 외과 교수의 사주를 받아 이 해괴한 임무를 수행했다. 지친 몸으로 병원에 돌아온 그는 발굴한 것들을 냉장고에 넣고 피로에 지친 몸을 눕히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그는 자신을 거치게 흔드는 손에 놀라 잠을 깼다. 침대 맡에는 자신을 사주한 외과 교수가 서있었다.
교수는 샤프가 전날 겪은 천신만고의 모험담을 듣거나 노고를 치하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하나를 빼먹고 왔다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내기 레지던트를 해고해버렸다. 이 무지막지한 교수는 바로 쿠싱(Harvvey Cushing, 1869~1939)이었다.
쿠싱 ⓒ 위키백과
쿠싱은 존스홉킨스병원 외과에서 신경외과 수술을 도맡고 있었고, 나중에 미국신경외과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1909년에 말단비대증(손, 발, 턱, 코, 귀, 혀 등의 인체의 말단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병으로 거인증으로도 불린다) 환자의 뇌에서 뇌하수체에 생긴 종양을 잘라내는 수술을 했다. 이때부터 뇌 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뇌하수체가 인체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후로 미지의 영역이던 뇌하수체의 기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험동물의 뇌하수체를 잘라낸 후 관찰하거나(실험동물은 얼마 후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뇌하수체를 먹여보거나(효과는 없었다), 심지어는 뇌하수체 문제가 있는 성인 환자에게 사산된 태아의 뇌하수체를 이식하기도 했다(최초의 뇌하수체 이식이었지만 결과는 실패).
이런 연구를 진행하면서 쿠싱은 비정상적인 체형을 가진 사람들 이를테면, 키가 너무 큰 사람,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 기괴한 몰골을 지닌 사람들이 어쩌면 뇌하수체에 문제가 있는 환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은 남의 놀림감이 되기 쉬었고 서커스단에서는 이들을 고용해 아예 관중들의 구경거리로 삼기도 했다.
물론 쿠싱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의 뇌 수술을 하면서 뇌하수체의 이상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특이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뇌하수체를 얻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1911년 1월 1일에 일어난 장례식장 소동도 쿠싱이 비정상적인 뇌하수체와 다른 내분비샘을 탈취하려 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물론 취업 하루 만에 쫓겨난 새내기 레지던트가 탈취해온 터너의 뇌하수체는 정상인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진 것을 확인했다.
뇌하수체 ⓒ 위키백과
이런 집요함과 완벽주의로 무장한 그는 20여 년의 끈질긴 뇌하수체 연구를 통해 뇌하수체에 생긴 종양이 만들어서 내뿜는 ‘강력한 물질’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내분비샘을 자극해 이런저런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서커스단에서 웃음거리가 된 거인들이나 비만인들은 의사가 치료해 주어야 할 뇌하수체 종양 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료 의사들조차 뇌 속 깊숙한 곳에 있는 콩알만 한 뇌하수체가 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더구나 뇌하수체 종양이 내뿜어내는 그 ‘강력한 물질’도 발견하거나 입증하지 못한 상태였다. 쿠싱이 예견했던 그 강력한 물질들 중 부신피질을 자극하는 부신피질자극호르몬(ACTH)이나 부신피질에서 만드는 코르티솔(cortisol)은 1930년대나 되어서 발견된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선 연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비정상적인 체형을 가진 사람들은 서커스단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를 프릭쇼(freak show, 괴짜 쇼)라고 불렀다. ⓒ 위키백과
ACTH는 뇌하수체에서 만들어져 혈액으로 분비되면 부신피질을 찾아가 부신피질의 호르몬인 코르티솔 생산을 독려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일종인 코르티솔이 다량 생산되어 장기간 몸속을 돌아다니면 우리 몸은 지방을 축적하고 근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 ‘쿠싱증후군(Cushing’s syndrome)’으로 부른다.
쿠싱증후군의 원인은 많다. 부신피질 자체의 종양으로도 생길 수 있고, 코르티솔 호르몬과 같은 효과를 내는 스테로이드 치료제인 코르티손(cortisone)을 장기간 복용한 환자들에게도 생겼다. 관절염 등으로 스테로이드제를 장복해 생긴 경우는 의인성(醫因性, 치료 부작용으로 생긴) 쿠싱증후군이라 부른다. 뇌하수체의 종양으로 생긴 경우에는 특별히 ‘쿠싱병’으로 부른다. 평생을 뇌하수체 연구에 매달린 쿠싱을 기리는 의미다.
대한신경내분비연구회는 매년 4월 8일을 ‘쿠싱병의 날’로 정해 쿠싱병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드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쿠싱은 1869년 4월 8일에 태어났고, 2019년인 올해는 그의 탄생 150주년이자 사망 80주년이 되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