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적비(史蹟碑) 국역(國譯) 전문(全文)
우리 단군고국은 바다와 산이 크고 웅장할 뿐 아니라 고요한 산수의 경색 또한 뛰어나 자고로 신선이 사는 터라 인간의 복지(福地)로 알려졌다. 공자(孔子)도 이곳에 살기를 바랐고 고려에서 낳기를 원하는 시나 글이 천고에 빛나고 있음에 비추어 분명 만국의 선비들이 모두 부러워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 태종 12년에 방․위․홍․목․기․은․길․봉 등 8학사가 함께 동래하니 이때가 곧 신라 선덕여왕 7년이다. 8학사 제공은 도와 예를 쌓은 학자로서 동래하던 날 서로 7언 한 구씩을 읊어 일률을 이룬다. 위공은 ‘내 발걸음을 믿고 착실하게 바위층계를 거듭 올라 태양에 이르리라’ (信步層岩近太陽)고 읊었다.
위공의 휘는 경이요 본시 관서홍농의 사람으로 경기도 당항을 거쳐 입국한 후 신라에서 벼슬하여 대아찬에서 중시에 이르고 뒤에 다시 회주군에 봉해졌다. 회주는 즉 신라 때 지금 장흥의 고호(古號)였다. 이로서 공은 장흥 위씨의 시조가 된다. 그 후 약 280여년 동안 계보를 잃어 대수를 헤아리지 못했다.
신라 말엽 대각간(大角干)시중에 올랐던 창주로서 기일세하여 중조로 받들어 왔다. 그의 아들 달은 감찰어사에서 문하승선을 지냈고 3세 원보는 중랑장으로 자금어대를 받았다. 4세 기노는 고려 현종 9년 등과하여 상서문하시랑동평장사에서 문하시중에 올라 금자광록대부가 됐다. 그 아들 계정은 문종 때 등과한 이래 4임금을 섬겨 삼중대광문하시중 수태보(守太保)에 이르렀다.
노환으로 치사한 후 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예종임금 묘정에 배향됐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열전에 실려 있다. 6세 소(紹)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원개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와 추밀원부사로 있다가 출가하여 송광사 제6세조사가 됐다. 입적 후 원감국사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그 시집이 발간돼 세사에 널리 퍼졌다.
둘째 아들 문개 또한 문과에 장원하게 되자 형이 ‘월궁의 계수나무 윗가지를 거년과 금년에 우리 형제가 꺾었구나’ 하는 시를 읊어 기뻐했다. 그는 보궐과 평양(順天)군사를 거쳐 한림학사가 됐다. 이 사실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있다. 막내 신개도 문과에 급제하니 부민들이 ‘바위 아래 오두막집에서 여러 용을 길러 얻어낼지를 누가 알았으랴’ 하며 부러워했다.
3형제의 태생지는 장흥의 진산으로 3봉이 나란히 있다. 부민들은 이들 형제들의 급제 이후 첫 2봉을 장원봉이라 하고, 다음 봉을 거말봉이라 불렀는데 지금까지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마치 송나라 소순 3부자의 문명과 견줄 만하다 하여 이에 비겨 불러진 이름이다. 문개 아들 극겸은 우직간, 9세 경효는 문하평리, 10세 온은 수문전학사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자금어대를 받았는데 특히 동국사기를 편찬했다.
온의 아들 11세 인감은 호부상서, 12세 수는 간성군사, 13세 윤기는 용호장군, 14세 충은 여말 공민왕 때 상의직장에 이어 합문지후에 이르렀다. 공양왕 3년 전 시중 김종연․심덕부․조유․진무․장익 등과 함께 기울어가는 고려왕권의 회복운동을 하려다 서경천호 윤귀택(尹龜澤)의 고변으로 마침내 진도(珍島)에 장류됐다.
조선건국 이후 3세에 걸쳐 벼슬길이 막혔다. 15세 덕룡은 태조 때 지금 법조청사부지로 부청을 이전함에 따라 누대의 거소에서 평화로 이거했다. 자온․자량․자공․자검 4형제는 이후 각지에 분거하게 됐는데 맏아들은 능주, 둘째는 장흥에 머물고, 셋째는 차손을 데리고 함흥으로 이거해 자손이 전국으로 퍼졌다. 다만 넷째 아들은 4대 이후 손이 끊겼다.
이상은 장흥 위씨 상계 16세에 걸친 약 480여 년간의 성쇠의 역사이다. 앞서 광복 후 을묘년에 하산사를 이건하고 시조 회주군을 주향으로 충렬․지후 2공을 배향하고 있다. 금 정묘년은 회주군이 동래한지 꼭 1350년이 되는 해다. 후손 각파는 전국을 통해 회의를 갖고 성금을 모아 시조공의 사적을 새긴 큰비를 장흥의 고허에 결정하고 건립위원회 유사가 그 시말을 적어 한강 넘어 재주 없는 가원에게 비명을 청했다.
아! 참으로 당나라는 천하의 대국이었다. 어진 임금이 대를 이어서 홍복이 끊인 바 없었고 세상살이가 또한 더없이 평안하였다. 이토록 부조의 유업과 조상의 분묘가 여기에 있고 더구나 몸은 한림에 있어 훌륭한 환경과 좋은 벼슬로 아직 그 복록이 다하지 않았는데도 만리타국으로 홀연히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노릇이었으리라.
비록 평범한 사람이라도 결코 쉽게 여길 일이 아니었건만 위공은 결연 이 길을 택해 하늘 끝 땅에 가는 것을 이웃과 같이 했고 뱃길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겼다.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원대한 포부를 펼쳤으니 어찌 백세의 호걸이라 아니 하겠는가. 여기 공의 사적을 사실대로 가지런하게 쓰고 이어 명으로써 내 느낀 바를 적어 본다.
아! 학사의 높고 맑은 기상 뛰어 났구려
황농씨의 후예로 대당초엽에 문화는 성하고 웅려한데
한원에 우뚝 솟아 도예에 한가롭게 노닐어
부족함이 없었거늘 어찌 훌쩍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으리.
성현의 말씀에 이끌려 동녘하늘 운하를 바라보며 가슴조이다.
일곱 학사와 길을 같이 했던고 천풍에 기대어 시를 읊으며
이역 계림에 귀한 손으로 높이 앉아 의연하게 회주를 얻으니
산수는 맑고 푸르러 아름답기 그지없어라.
이에 또 노래 짓고 읊은 지 천년세월이 흘렀건만
그 유풍 오히려 오늘에 살아 초부목동도 그 남은 향기를 맡고
길가는 사람도 이를 가리켜 말하리니 하물며 착한 자손이
어찌 잊을까보냐 마침내 큰비를 깎아
여기 높이 세웠네 공의 새 고향에 대한 발자취를 더듬어
내 이글을 다듬음에 파고드는 감회 왜 이토록 길 단 말인가
단기 4320년 봄 <후손 민환 삼가 옮김>
(2) 사적비(史蹟碑)의 문제점(問題點)
첫째, 신라왕의 요청이 아니고 스스로 동래했다는 것은 역대기록과 후손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 둘째, 시조공의 관작에 대해 대동보는 신라의 아찬(阿湌)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적비에는 대아찬(大阿湌) 중시(中侍)로 기록하고 있다. 셋째, 회주군(懷州君)으로의 봉군(封君)에 대해 대동보는 고려 忠宣王 때 추증(追贈)됐다고 했으나 사적비에는 시조공 생존시에 신라에서 장흥의 고호(古號)인 회주군으로 봉군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넷째, 실계(失系) 연수를 대동보는 298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사적비에는 28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 14세 판사공의 사적에 대해 대동보면주에 원류(遠流), 가거이종(家居以終)으로 됐으나 사적비는 진도(珍島)로 귀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자의(自意) 동래는 신라왕의 요청에 따라 도예지사로 동래했다고 해야 맞다. 시조공이 638년 첫 상륙한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는 1971년 4월 15일 국가사적으로 지정됐고, 당성사적비에도 중국에서 학사들이 상륙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시조공의 관작은 기묘초보(1759년)는 대아찬, 대동보(1999년)는 아찬, 사적비(1987년)에는 대아찬 시중으로 기록돼 있으나 아찬으로 해야 한다. 봉군과 관련 고호(古號)라는 말도 지나친 짜맞추기라할 수 있으며, 대동보대로 고려 때 추봉했다고 함이 가장 무난하다고 본다. 실계연수도 보편적인 예에 따라 298년이 옳다. 판사공 관련 부분은 왕조실록대로 처리하는 게 맞다. 그러므로 자의 동래부분을 삭제하고 기타 사항을 수정하자면 음기부분을 전면적으로 삭제하고 새롭게 각자(刻字)해야 한다.
『維我神壇舊邦海山廖廓煙霞鏢緲自是神仙之窟宅允爲人間之福地孔子欲居言高麗願生之詩煇暎千古萬國之士所共艶羨者也粵在之唐太宗貞觀十有二載戊戌肆有房魏洪睦奇殷吉奉八學士東來時則新羅善德女王之七年也』
우리 단군고국은 바다와 산이 크고 웅장할 뿐 아니라 고요한 산수의 경색 또한 뛰어나 자고로 신선이 사는 터라 인간의 복지(福地)로 알려졌다. 공자(孔子)도 이곳에 살기를 바랐고 고려에서 낳기를 원하는 시나 글이 천고에 빛나고 있음에 비추어 분명 만국의 선비들이 모두 부러워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당 태종 12년에 방․위․홍․목․기․은․길․봉 등 8학사가 함께 동래하니 이때가 곧 신라 선덕여왕 7년이다.
몇몇가지 오류에도 불구하고 천관공의 글은 빼어나고 부드럽습니다. 위문의 역사를 서사시처럼 기록하고 있네요. 이제는 보의논쟁을 통해 바로잡혀 회주사 앞에 우뚝 솟은 시조공 사적비는 그 규모도 내용도 우리 모두의 성지라 해도 손색없습니다. 선대의 노고가 크셨습니다.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철없는 인생
어릴 때
어른들은 언제 철들래
나무라기 일쑤다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든다는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다
날마다 실언이 반복되고
수시로 실수가 계속된다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참아도 될 일을 한다
아차 또 실언했구나
어메 또 저질렀구나
인간은 백 살을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다
그게 신과 다르다
(2016. 9. 11)
圓山 위정철
(32세, 존재학연구소)
원산 시(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