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안에 있는 나 -
☆ 2014년 가해 4월5일 (자)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수원]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예레 11, 18 - 20
† 복음 : 요한 7, 40 - 53
★ 예레미야 예언자는 악행의 음모 한복판에서 무기력했던 자신의 신세를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과도 같았고,
음모자는 그를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만민의 주님의 심판에 의지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둘러싸고 사람들 사이에 여러 생각이 나타난다.
그분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감히 예수님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성전 경비병들마저
그분의 가르침에 감복했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악의 신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순 시기가
깊어 갈수록 우리가 듣는 주님의 말씀은 악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인하게
하느님의 사람들과 창조물들을 파괴하려고 하는지 실감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계획마저도 망가뜨리려고 애쓴다는 데 전율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나타난 예레미야 예언자의 고백이나 성주간에 들을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수난기의 유다의 배신과
민족의 지도층 세력의 모습에서 악의 신비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악의 신비가 육신의 모습을 지니고 나타난 것을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와 지금 이 시대의 사건들 속에서도 만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역사 속의 비극들과 오늘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은 악의 신비에 대한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는 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경림 시인은 최근 그의 시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신발을 보고서 이러한
시적인 단상을 적었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 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다./
크기도 모양도 재질도 제각각이다./ 양심이니 평화니 반전이니 우애니/
이 신발들은 이런 것들을 가르친다지만/ 어쩌면 이 신발들은 묻고 있을지
모른다/ 하느님은 지금/ 어데서 어떤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시는가."
악의 신비에 눈을 감지 않으려 하는 자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헤아릴 길 없는 신비의 문턱에서 먼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거듭 다짐해
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스승행세를 하지 마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요한 7,40-53)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스승행세를 하지마라.
어떤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 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고, 예언자로 메시아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이 보였습니다. 오늘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참여 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뭘 좀 안다고 스승행세를 하지 말고 행동으로 표양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나의 십자가가 제일 무겁지 않습니다.
종종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또 제가 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될 때에는
괜히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게 될 때에는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음에 큰 상처를 받기도 하지요.
사실 2001년부터 홈페이지(카페)를 운영하면서 그런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인터넷에 매일의 일상을 담은 묵상 글을
올리다보니 저의 많은 부분들이 공개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상처를 꽤
받게 됩니다.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제가
거짓말만 하고 있다는 글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형편없는 묵상 글을 이제
제발 올리지 말라는 얼굴 부끄러워지는 댓글을 본 적도 있지요. 또 어떤
사람을 스토킹하고 있다는 오해도 받았으며, 마치 이 세상을 전복하려는
잘못된 이념을 가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벽 묵상 글’의 시작을 아마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요.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할 때, 너무나 컴퓨터 앞에서만 살다보니 기도와 묵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매일 그날 복음에 대한
묵상이라도 해서 ‘사제’처럼 살자고 시작한 것이 바로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 글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에 무슨 사적인 감정이 있겠습니까?
그저 저를 위해서 그리고 묵상을 함께 나누기 위할 뿐인데, 앞서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분들로 인해 ‘그만둘까?’를 생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으로부터 오해의 말을 듣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마음을 품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저보다도 훨씬 더 억울하였겠구나
싶었거든요.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는 말로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를
내리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것도 모자라 죄인 취급을 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사람들의
잔인함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내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억울하다고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힘들다고 하소연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하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떠올리니, 이제까지 별 것 아닌 것으로 억울하고 힘들다고
징징 대었던 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이제는 사람들의 오해에 대해서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 혼자 억울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더 억울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 혼자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더 큰 고통과 시련으로
힘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가 제일 무겁지 않습니다. 제일 무거운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삶은 많은 조각으로 이뤄진 모자이크다. 습관적으로 몇 안 되는 큰 돌,
즉 중요한 것은 소중히 여기고 작은 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돌이 없다면 그림은 완전한 작품이 될 수 없다(폴커 초츠).
열어 보지 않은 선물(‘부름과 대답이 있는 삶’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좋은 글이 있어서 그 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 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사랑과 기쁨의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열어 보지 않은 선물을 받으시겠지요. 그 선물 상자를 어떤 마음으로
여시겠습니까?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곤궁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4월5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예레11,18-20 요한7,40-53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곤궁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
어둠과 절망, 고통의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기간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5년이 걸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년 혹은 20년이 걸린 사람도 있고
계속 어둠의 터널을 통과 중인 분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20년 이상 매주 금요일 동성학교의 철야기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저에겐 이 기도시간이 유일한 휴식시간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휴식처이자 피난처라는 어느 자매의 고백입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세월을 기도와 믿음으로 통과해 왔다는, 지금도 철야기도는
계속되고 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한 기간은 14년
이었습니다. 14년 동안은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일이 끝난 밤이면 수도원을,
성지를 찾아 기도하고 늘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정말 '살기위해' 하느님을
찾았던, 기도와 믿음으로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던 분들의 고백입니다.
오늘 1독서의 예레미야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사면초가의 어둠의 터널 안에 갇힌 모습입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주셨습니다.“ 곤궁 중에 있는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편에서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예레미야입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소서.“
심판은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만이 궁극의 피난처, 위로처, 안식처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곤궁 중에도 내적 평화입니다. 사실 곤궁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 중심에 머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바로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 역시 참으로 곤궁합니다.
'저분은 참으로 예언자시다.' 제대로 고백하는 이도 있고,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하고 호의적인 경비병들도 있고,
니코데모의 고마운 변호도 있습니다만 적대자들의 공격 앞에는
속수무책입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니코데모의 변호에 대한 적대자들의 반응이 참으로
완강합니다. 완전히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유연성과 신축성을 잃어버린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소리들은 요란한데 정작 주인공인 예수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대로 주님 안에 피신처를 택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곤궁의 깊이 안에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자 안식처인 하느님이 계십니다.
삶의 깊이에서 만나는 격려와 위로, 치유의 하느님이십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곤궁의 깊이에서 구원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여아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교회는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여야 합니다.'
2014년 가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요한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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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묵상하다 보면, 기쁨보다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악한 생각에 맞서서 고군분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사제들이 보이는 생각과 행동이 지난 어느
시대의 한 무리들만의 행태였다고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죄악과 그 피해의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대안이 확실히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답답함을 더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늘
그래왔듯이, 세상은 욕심 많고 약삭빠른 인간들이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움켜쥐고 휘두를 것이고, 마음 착하고 옳지 못한 것에 타협을 못하는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 지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보여주신 가르침이 옳다고 믿는 이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고의 세상을 만들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세상을
위해 애썼다는 말을 남길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재미없는 내용이지만, 작년 묵상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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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드라마를 보거나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었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즉 지나간 일에 대한 그림을 놓고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비교적 쉽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거의 이야기는 이미 멈춘 이야기고 현재의
이야기는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힘들이 늘 존재해 왔다.
그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신문이나 TV의 모든 이야기를 믿는가?
우리 모두는 언론매체가 진실을 보도하고 진실을 나누는데 그 기능을 다하고,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정반대의 역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언론의 특징은 ‘그럴 듯 하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야 믿고 동조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경제적 기반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거의 많은 독재자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이
언론이었다. 손에 쥔 언론을 가지고 그럴 듯한 이야기를 꾸며내어 사람들에게
쏟아내었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론매체는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 있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사람들을
움직일 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역기능을 할 수 없도록 우리의 역사는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고안해왔고 효과를 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악의 세력도 한층 단계가 높아진 수준으로
면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인다. 즉,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할 수 없게 만드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그 ‘그럴 듯 한 이야기’에 대한 진실여부를 식별하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만일 어떤 속임수와 거짓이 옳지 못한 세력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교회는 절대로 침묵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그르친 가르침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시며,
사람들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연히
교회가 권력이나 검은 돈이 오가는 더러운 정치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 즉 세상과 함께 해야만 한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할 의무가 있고, 세상 사람들이 올바른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투신해야 한다. 잘못된 구조에 의해 그늘진 곳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세상을 움직여야 한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이 표면적인 폭력보다 더 비겁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옳고 그름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설정된 그럴 듯 한 이야기를 통해서 언제든지
옳고 그름이 뒤바뀌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언론매체이던 어떤
종류의 대중매체이던 간에 빛과 그늘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예수님을 본
이들은 증언한다. 우리도 어떤 역경과 난관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허물을 되풀이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
2014년 가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복음 : 요한 7,40-53
< 하느님을 이용하는 사람들 >
결혼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낫지 않을 피멍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제발, 큰아버지 손잡고 들어가게 해 주세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빠한테 뺨을 맞았지만 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가뜩이나 집안이 기우는데 등이 굽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걸어
들어가기는 정말이지 싫었습니다.
“흠... 걱정 말그래이. 안 그래도 허리가 쑤셔서 그날은 식장에도 몬 간다.”
시집가는 딸 마음 상할까 봐 아버지는 거짓말까지 하셨습니다. 나는 그
아버지의 아픈 속을 알면서도 결국 결혼식장에 큰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하는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나도 자식인지라 골방에 틀어박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아버지 가슴속의 눈물 얼룩을 지워 드리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흘러 아이를
갖게 됐을 때, 시집살이에 입덧까지 하면서도 시어머니한테는 내색도 못하고,
하루하루가 고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에서 돌아오던 나는 동네 어귀에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작은 키에 굽은 등, 그리고
걸음걸이가 분명 칭정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아버지가 아닐 거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퇴근하던 남편이 큼직한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저 아래, 가게 아줌마가 주던데....?”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채취가
묻어 있는 보따리였습니다. 예감대로 보따리 속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청국장이고 하나는 겉절이대이. 배 곯지 말고 맛나게 묵으라.”
시어른들 볼까 봐 집에도 못 오시고 아버지는 청국장 보따리를 가겟집에
전하고 가신 것이었습니다. 청국장엔 아버지의 짜고 쓴 눈물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1, 아버지의 등]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에서 뚱뚱하고 못생긴 강한나가 목숨을 걸고
전신성형을 감행하게 된 이유가 화장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주진모의 말을
듣고 나서였습니다. 주진모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강한나의 목소리를 이용하기 위해 그에게 잘 해 주었고, 일부러 좋아하는 척
했던 것입니다.
‘이용당했다는 느낌’,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 매우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필요한 것만
취하고 필요가 없을 때는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위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도 딸에게 그런 느낌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필요할 때는 아버지이고
필요 없을 때는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어쩌면 우리 또한 하느님을
그렇게 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경비병들마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돌아왔습니다. 이에 화가 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을
야단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이에 몰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이면서 최고 의회 위원인 니코데모가 슬쩍
예수님을 편을 듭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 또한 성경 박사들이기에 니코데모가 반박할 수 없는 대꾸를
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만 보면 성경이 전혀 예수님을 증언해주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에는 예언자가 갈릴래아에서 나온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여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목적으로 썼던 것입니다. 성경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갈릴레아, 그리고 나자렛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나타나엘도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며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서에
쓰여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22-23)
그러나 구약 어디를 찾아봐도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예언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구약의 대표적인 나지르 인, 즉 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이란 뜻의 나지르인은 바로 판관 삼손입니다. 삼손이 정확히
예수님의 삶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께
바쳐졌지만 여자에게 빠져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아 장님이 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회개하고 불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동시에 자신도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비참한 죄인의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으로 당신이 짊어진 죄도 함께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지르인’이나 ‘나자렛사람’이나 당시엔 같은
말이었습니다. 당시엔 모음만 썼기 때문에, 여호수아나 예수나 같은 이름인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찾으려고만 하면 성경을 통해 얼마든지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지만
그럴 마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부정할 것만 찾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각 종교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며 각자의 종교에 유리하게 해석합니다. 말씀이
각자의 의도에 따라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선교라는 명목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는 민족을 침공하는가 하면, 그것으로 돈을 버는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는 그런
하느님이나 그분이 세우신 교회, 혹은 성경 등을 내가 편한 데로 이용하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분을 받아들인다면 나에게 유익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다 받아들여야합니다.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고, 남을 판단한다든지 십일조 등을 내지 않는
다든지 하며 내가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고 살아간다면 그것 또한 말씀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라면 오늘
복음의 성경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취사선택하여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려는 결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4월5일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한 달에 한 번씩 동성 고등학교 예비 신학생들과 미사를 합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 고등학생 때부터 준비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 대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학생들 모두를 신학교에 합격시켜 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년 많은 학생들이 성적 때문에 합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9명의 학생들이 재수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식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많은 영양분이 골고루 필요하듯이 사람은
삶을 살아가면서 지식 이외에도 필요한 것들을 채워야 합니다.
가끔씩 푸른 하늘을 보는 것,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는 것, 한편의 시를 읽는
것,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것, 자라나는 아이의 예쁜 눈망울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성적순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많이
배웠습니다. 율법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
볼 줄 아는 사랑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학력, 출신, 업적으로 판단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고 갈등이 생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밭에
잡초가 자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첫 번째는 ‘핑계’입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핑계를 댄 것처럼,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자녀들은 부모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핑계를 대면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 공동체는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갈등은 더욱 커져갑니다. 본당 안에서도 공동체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핑계를 대면 공동체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훼방꾼’입니다. 성서에는 이런 훼방꾼들이 많았습니다.
거짓예언자들, 예수님을 비방했던 율법학자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 권력의 입맛에 따라 옮겨가는 군중들이 훼방꾼입니다.
훼방꾼들 중에는 열심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성서를 공부했고, 율법을
알았지만 본인들은 그 성서의 말씀대로, 율법의 정신대로 살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공동체가 분열에 이르는 것은 방향성을 상실한 열심한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많이 알고, 많은 말을 하지만 ‘하느님 나라’라는
방향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3가지 독한 기운들이 나옵니다. ‘탐욕, 수치, 진노’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독한 기운들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밭이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밭에는 자갈도 있고, 뿌려놓은 거름도
있고, 잡초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 밭에서 보물을 캐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에는 모두가 착하고, 정직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분열과 갈등, 상처와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안에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 /
성 베네딕도 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2014년 가해 4월5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2014년 4월 5일)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마음 문을 여는 열쇠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같은 말로 했지만 듣는 것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다르게 알아듣습니다. 여기서 오해와 갈등의 싹이 틉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기 식대로 알아듣고 반응합니다. 서로
의견이 갈라집니다. 예언자이시다, 메시아이시다고 하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지만,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적대적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들에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른바 ‘영성 상품 순례’를 하는 분이 많은 듯 합니다.
상품을 구매하듯이 좋고 유명하다는 강좌가 있는 곳에는 우르르 몰려갑니다.
아무리 성경을 공부했어도, 아무리 영성 강좌를 들었어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거룩한 말씀도 그 사람의 귀에만 도달하지 마음 속까지는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여닫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혹시 내 자신이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살지는 않습니까?
내 방식대로 들으려고만 하지 않습니까?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규칙서 ‘겸손’에 관한 장에서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께 간구하자”(7,20).
‘참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만이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입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끌레멘스신부님 복음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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