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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와 같은 뜻을 가진 중요한 사명(성령강림감사주일)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리스도인에게는 각자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각자의 사명에 맞게 은사, 재능, 재물을 각각 나눠주십니다.
제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써서 구원의 길을 걷는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셨으니
저의 사명과 직업은 ‘타자수(打字手), 말씀배달 심부름꾼’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명하심에 따라 14년째 무명으로 골방에서 계속 받아쓰기만 하고 있기에
세상적으로는 가난하여 천대와 조롱을 받고, 육신적으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설교준비를 한 편, 한 편 마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며
저의 순종에 기뻐해주시는 이 한 가지 행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14년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손가락에 꼽힐 만큼 적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죄와 유혹으로부터 보호해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이제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성령교회의 사명에 중보기도와 연보로 동역해주고 계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명은 각각 다르고,
한 가지만 맡은 사람 혹은 여러 가지를 많이 맡은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사명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 사람이든 다 용서하고,
풍성히 베풀고, 뭐든지 인내하면서 당해주는 것까지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복음을 빼놓고선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복음이 빠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체는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며,
죽음 이후에 시작되어 천국 혹은 지옥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그 인생이 바로 진정한 인생이기 때문에
복음 없이 육신만을 채워주는 사랑은 반쪽짜리도 아닌
큰 의미가 없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상대의 본체인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부디 상대가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가 되어 결국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하고도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길 바라기에 베푸는
일련의 선행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빠진 사랑,
즉 육신만(위장만) 채워주고, 일시적인 감정만 상하지 않도록 돌봐주는 사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박애주의자, 인본주의자들도 잘 하지만
그런 사랑은 아무리 많이 받는다 해도 죽음 이후 지옥에 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껍데기에 불과한 육신만을 사랑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 땅에서는 잠시 의미가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후회가 남게 될
미미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자로 모시고, 그 분의 제자가 되기 위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함’과
승천하실 때에 내려주신 명령인 ‘복음전파’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복음을 주변에 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으로 행해야만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전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복음은 동의어에 가까울 만큼 밀접하며,
또한 서로 상호보완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 없는 복음은 전달될 수 없고, 복음이 빠진 사랑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막 16:15-16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만 고수하여 사람을 만날 때마다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삶을 어서 청산하고, 예수님을 믿어 회개하라.”는 식의 말을 계속하면
억지로 강요만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싫어할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상대가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뻔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걸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에서 큰 소음을 유발하면서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는 역효과가 나타나듯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모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영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여 행함으로서
어느 때엔 직접적으로 복음에 대해 강하게, 훈계의 방법을 이용하여 전달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그를 위해 매일 중보기도를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상대에게 모질게 당해주면서 그저 인내로 기다려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누가 보더라도 괴로울만한 상황 속에 있다 해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간접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어? 저 사람은 저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웃고 있잖아? 뭐지?
나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불행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나도 예수님을 믿어볼까?‘)
우리가 그렇게 상황에 맞게 인도해주시는 지혜와 진리의 성령님께 순종하다보면
하나님의 때에(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그들이 비로소 동일한 한 믿음에 거하는 형제/자매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을 한 명 더 찾아 하나님께 올려드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갈 2:11-14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랑의 방법 중에는 때때로 책망하여 훈계하는 것,
심지어 크게 망신을 주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방금 함께 읽은 말씀에서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사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바 있으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오자
자신이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식사하는 장면을 들키기 싫어하여
즉시 식사를 멈추고 자리를 떠나는 외식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들 중의 한 명이자
이제는 초대교회의 공적인 위치에 있던 베드로의 이 위선적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하던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따라서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바나바도
베드로를 따라 위선적인 행위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 초대교회 성도들을 두루 사랑함으로서
크게 망신을 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확실하게 바로잡았습니다.
베드로에게 따로 조용히 책망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일 그렇게 했다면
베드로와 바나바로 인하여 이미 초대교회에 흩뿌려진 잘못된 외식,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가
힘을 얻고 깊이 뿌리를 내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파괴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바울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라는 의혹을 받으며,
뭇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시와 조롱을 당하던 입장이었습니다.
한때 사울이었던 바울의 과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했던 공개적 책망은
과거 예수님의 대적이었던 자가(자격의 의심을 받고 있던 자가)
감히 예수님의 직속제자이자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던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질타한 것으로서 매우 용기 있는 행위였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바울의 이 용기 있는 공개적 책망의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가르침을 가장 사랑했기에,
그리고 베드로와 바나바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사랑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무엇보다 율법주의 유대교인들의 적대적 시선과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의 싸늘한 시선을 신경 쓰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공개적 책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바울의 올바른 책망에 대항하지 않고 굴복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용기 있는 사랑과 베드로의 겸손한 인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도 계승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공개적인 책망, 혹은 개인적인 훈계로 크게 망신을 주어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입니다.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있을 때
조용히 입을 다물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사실상 훨씬 쉬우며, 마음도 편하지만
훈계를 하는 것, 특히 공개적인 책망은 용기가 필요하거나
여러 모로 피곤한 일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촌철살인과 같은 말 한마디,
하지만 마음속에는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그 한 마디의 말이
죽어가던 사람을 되살리는 사랑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되어 있듯 예수님께서도 많이 사용하시던 사랑의 방법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질 않거나, 상대가 듣기 좋아할 말만 골라서 하거나
말을 꺼내려다가도 나중에 피곤해질 일을 기피하여 말을 돌려버립니다.
혹은 처음부터 조롱만 하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말을 꺼낸 후
“아...너 이제 큰일 났어. 근데 차마 말을 못하겠다. 아니다. 됐다...”에서 그냥 멈추는
교활한 자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상대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다면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있기에, 관심이 있기에 상대가 올바른 구원의 길을 걷길 바라며
권유하고, 책망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만 하려는 증오의 마음이 있기에 책망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이 빠진 것이기에
듣는 자에게는 약이 될지라도 말하는 자는 죄를 쌓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영적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여 해결할 방법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자,
죄 가운데 계속해서 어두워져만 가는 자,
스스로 성경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돌이키는 자정능력을 잃은 자,
매우 어리석은 자 등에게 따끔한 훈계를 함으로서 그의 영혼이 살아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깊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히 12:6-8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계 3:19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성경말씀과 다르지 않은 내용을 가진 교훈의 말도 듣기 싫어하는 교만한 자,
자존심만 강한 어리석은 자는 도무지 변화되어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말씀의 책망을 싫어하며 분노만 하는 자들은
시간이 지난 후,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되어버린 그 날이 되면
땅을 치며 이를 갈면서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말씀을 묵상하거나 설교를 들었을 때나 책망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을 꼬집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지고, 분노가 일어난다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의 훈계가 바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이라는 사실,
바로 자신이 그런 모습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확실히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해당 부분을 해결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한 없이 분노만을 품고 있다면 끝까지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을
뿌리치는 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7:6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과 복음전파를 실천하기 위해
피곤해질 일을 감수하며, 용기를 내어 책망하는 부분에서도 예외는 있습니다.
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교훈과 책망의 말을 건네면
돌아오는 것이 오히려 끝없이 타오르기만 하는 증오와 멸시뿐이라면,
전해들은 복음을 가지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기복주의의 악한 열매뿐이라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지 말라고 말씀해주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때로는 입을 다문 채 선을 긋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즉 상대의 영혼을 살리기 위한 사랑과 책망의 말을 할 때
언제 돌입하고, 언제 빠져나와야 하는지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임재해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안타까워도 순종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그 가는 길이 뻔히 보여도
입을 다물라고 하셨으면 즉시 다물어야지
하나님은 잠깐 저쪽으로 가 계시라는 듯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무시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마음대로 앞서 나가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칠 뿐 아니라
화를 당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의 심각한 문제는 복음을 전해놓고도 결국 불순종으로 꾸중을 듣게 되는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자신이 여전히 죄 가운데에서 지옥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는데도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고난이나 징계도 없거나 주변의 그 누구도 책망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버림을 받은 상태일 수도 있다는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지경에 이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그런 상태인 것 같다면 즉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요 15:9-15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싶다면, 쉽게 말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계명을 지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오늘 설교의 주제,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입니다.
또한 사랑과 복음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의어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복음은 사랑 없이는 전달되지 않고,
복음이 빠진 육신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즉 사랑과 복음전파를 통하여 우리는 무려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시며,
성부 하나님께 들으신 진리를 우리에게 다 알려주셨습니다.
이 내용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기가 싫고,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고 누군가를 증오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선택을 하는 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친구도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가 된다는 두려운 사실입니다.
또한 복음이 빠진 육신적인 사랑만으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방도가 없으며,
사랑 없이 복음을 전하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기에
마지막에 후회만 남게 될 안타까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하고, 자신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이 오늘날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요일 2:3-11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오늘 주신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여
각자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진정한 복음의 사랑을 품고,
열매를 맺으면서 구원의 길을 걷는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진리의성령교회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새 계명, 사랑이란
상대가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베푸는 모든 것이며,
또한 사도 바울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구원의 길을 위한 책망과 교훈의 말을 서로 용기 있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서로의 영혼을 사랑하여 함께 중보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음을 전하며,
서로를 각성시켜 주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베풀고, 때로는 인내하며 당해주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바로 구원을 위한, 복음을 위한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때로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고, 힘들어 지칠 때도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다가 내가 먼저 죽을 것만 같아서
아예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해내려고 자신에게 집중만 할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만
결국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친히 강림해주셔서 우리 안에 거해주시며 인도해주고 계시는 성령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부단히 순종하십시다.
요 14:16-18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너희 힘으로 어디 한 번 해봐라. 쉽진 않을 거다.”하시지 않고,
먼저 솔선수범하여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과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어주시는, 우리 안에 거해주시면서 세밀하게 이끌어주시는
진리의 성령님께서 친히 주도해주시니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분명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1%의 순종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99%는 다 해주실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어도 일단 한 번 순종해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령강림감사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새기고 오늘 바로 삶에 적용함으로서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님보다 앞서 나아가지 않고,
잠잠히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언제 용기 있게 나아가고 언제 멈출지를 아는 지혜를 배우며,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함과
사랑과 동의어격인 복음전파를 지켜 이룸으로서
무려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진리를 바르게 깨달으며,
남은 시간 동안 각자 맡은 사명을 올바르게 감당하고,
마지막 결산의 그 날에 하나님께 올려드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이 1:4-8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진리의성령교회 윤경훈 목사 올림
진리의성령교회 2024.05.19. 성령강림감사주일 설교
감사와 다짐의 노래
175장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1. 성령이여 우리 찬송 부를 때 진심으로 찬양하게 합소서
2. 성령이여 우리 기도 드릴 때 우리 곁에 계셔 일러 주소서
3. 성령이여 우리 성경 읽을 때 그 속에서 빛을 보게 합소서
4. 성령이여 우리 전도할 때에 지혜로운 말씀 주시옵소서
5. 성령이여 우리 겸손해져서 우리 주와 같이 되게 합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사랑의 동기가 인본주의나 박애주의에서 비롯되지 않고
순수하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상대방의 구원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랑을 하게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앞으로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그 분의 사랑을 닮은 마음을 품고 복음을 전하시며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