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몰. 오디오의 버튼을 돌려 스피커의 볼륨을 조절할 때면 떠오르는 이름이다. 교사 발령장을 들고 섬에 들어갔을 때 울몰은 내게 아주 생소하게 다가왔다. 지금도 신지도와 명사십리 속에서 내게만 남아있는 이름, 울몰. 바람이 불면 모래가 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울몰을 떠올리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 있다. 내가 섬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들어간 때는 2월 초였다. 바람은 쌩하고 찼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몸을 움츠렸고, 어정쩡한 모습의 교사가 되었다. 3월, 새 학기가 되면서 교실의 스피커에서는 때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 직원회의가 있으니, 즉시 교무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방송이 나왔다. 회의는 일직선으로 진행됐고, 요구사항은 넘쳤다. 도대체 일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었고, 선과 후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전’의 위력은 나를 꽉 틀어쥐고 옥죄었다. 그런 속에서 나는 2층 교실 창가까지 뻗친 목련꽃에 몸을 떨었고, 멀리 보이는 바다에 피어오르는 안개에도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풋내기 교사의 심한 봄앓이였다. 새 학년의 분주함이 좀 가시자 선생들은 배구에 열을 올렸고, 거기에 회식은 늘 따라붙었다. 나이 든 선생은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 선생들과 서로 알고 지내는 데는 배구만 한 게 없고, 붙으면 이겨야 한다며 실수를 할 때마다 배구공을 들고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며 지적했다. 4월이 되자 배구 경기가 중학교에서 치러졌다. 중학교 초청 친선배구였다. 초청은 답례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배구는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이다. 배구가 끝나고 주연이 시작되었다. 교실의 책상 위에는 술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모두 자리를 잡아 앉자 중학교 교장이 환영 인사를 했고, 초등학교 교장이 답례 인사를 했다. 이어서 선생들이 자신을 소개했다. 시간이 흐르자 선생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며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겨 다녔고, 나도 고교 선배를 만나서 벌건 얼굴로 반갑게 손을 잡았다. 그런 혼잡 중에 중학교 교장 선생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학교에서 먼저 환영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그러자 여자 선생이 교실 앞쪽으로 나와서 다소곳이 섰다. 그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눈짓하자 다른 여자 선생이 나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소프라노의 맑은 노래가 교실에 꽉 찼다. 어떤 노래였는지는 생각나지 않고, 고음의 맑은 목소리만 기억된다. 다시 술잔이 오고 간 후, 노래는 초등학교로 넘어왔고, 내게로 왔다. 노래가 왜, 내게로 왔는지, 누가 나를 지목했는지 알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마치 배구공이 엉뚱하게 내게로 튀어 왔고, 내가 그 공을 엉겁결에 받아 올리는 형국과 같았다. 나는 소프라노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자리에 서서 노래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무반주로 부른 내 노래가 끝나자 우~하는 소리와 박수가 섞여서 쏟아졌다. 소프라노 선생과 뚜렷하게 차이나는 내 노래에 보내는 중학교 선생들의 예우였으리라. 봄이 오면 맨 먼저 내게 찾아오는 노래, 딱히 가슴에 그려지는 대상도 없는, 내 젊은 날의 쓸쓸함이 담긴 노래, 내 젊은 날의 봄앓이를 달래는 노래였다. 나는 청춘의 때에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언저리에서 심하게 몸서리를 쳤다. 겨울은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봄은 서둘러 겨울을 물리치려는 기세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애매한 존재였다. 그것은 내 청춘의 때에 딱 두 번 있었고, 내게 해마다 작은 상흔의 그리움으로 찾아온다. 한번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다시 진학을 준비하던 때였고, 또 한번은 교대를 졸업하고 고향의 향토방위군으로 복무하면서 교사 발령을 기다리던 때였다. 학생인듯하면서도 학생은 아니었고, 군인이면서도 군인이 아닌듯한 나는 겨울의 끝자락에 피어나는 안개 속에서 속앓이에 시달렸다.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2학기 시작을 앞둔 1980년 8월의 마지막 이틀을 태풍이 섬을 휩쓸었다. 학교의 나무가 쓰러지고, 창고가 무너지고, 사택의 지붕과 교실 유리창이 날아갔다. 태풍에 울몰은 크게 울었고, 그 울음은 내게도 깊은 아픔을 남겼다. 9월 1일, 한 군인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날은 임시 공휴일이 되었고, 학교는 쉬었다. 모든 교직원이 학교에 나와서 어질러진 것들을 수습했고, 나는 태풍 피해 보고 공문을 들고 읍에 있는 교육청에 갔다. 출장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서는데 멀리 저수지 둑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저수지에 무슨 일이 있나?’ 나는 하숙집에 잠깐 들렀다가 학교에 갈 참이었다. 하숙집에 들어서자 하숙집 안노인이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붙잡았다. “오 선생, 오 선생. 서 씨네 딸, 오 선생 반 민화가 저수지에 빠졌는디 아직 못 건지고 있다네.” “예? 민화가요?” “그래, 아직 못 건지고 있당게.” 나는 저수지를 향해 뛰었다. 저수지는 학교에서 바다로 가는 중간에 있었고, 하숙집에서는 오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학교 주변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갈 때면 꼭 저수지를 지나서 갔다. 쉬는 날에는 아이들도 바닷일을 하러 가는 어른들을 따라가거나 저희끼리 가서 넓은 모래밭에서 하루를 보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넓은 모래밭에는 고동을 캐는 사람들로 꽉 찼다. 아이들도 부모를 따라가거나 저희끼리 고동을 캐러 가기도 했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서 고동을 캐러 한 두 번 간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호미로 모래를 긁어서 캤고, 어른들은 갈퀴 끝에 망을 달아서 소가 쟁기질하듯이 끌어서 캤다. 망 밖으로 모래는 빠져나가고 고동만 남았다. 나도 따라서 해보았는데, 한 쉰 걸음만 걸어도 허리가 묵직할 정도로 망에 고동이 가득 찼다. 사람들은 그 고동을 모래고동이라고 했다. 나는 저수지 둑 위로 올라가서 무리의 뒤에 몇 발짝 떨어져 섰다. 잠시 후 저수지에서 마을 이장인 하숙집 젊은 주인이 둑 위로 나오고, 뒤이어서 사내 넷이 하얀 천에 덮인 아이의 주검을 올려놓은 널판때기를 들고 나왔다. 그 위에 민화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러지며 소리 질러 울었다.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도 그 두 사람을 둘러싸고 울음과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널판때기 위의 시체가 민화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쓰러져 흐느적대는 두 사람을 널판때기에서 간신히 떼어내고 나서 이장과 사내들이 마을을 향해 갔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 몇이 여자를 등에 업고 따랐고, 남자는 업혀 가는 아내 뒤에서 민화야, 민화야 하며 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건 사람의 소리가 아니었다. 아이들도 동네 사람들도 소리 내어 울며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억새가 밟혔다가 다시 일어났다. 태풍이 몰려갔던 하늘은 퍼렇게 눈이 부셨고, 누런 흙탕물로 가득 찬 저수지는 적막했다. 나는 무리의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엉거주춤하고 서 있었다. 그날 밤 하숙집 젊은 주인이 늦은 시간 나를 찾아왔다. “오 선생, 민화를 보내고 왔네. 쉽지는 않것지만 빨리 잊어 불소. 어디다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네, 오 선생한테도 민화네한테도 말할 수 없네.” 그는 이장이란 죄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마을에서는 아이가 죽으면 상노인이 젊은 장정 두셋을 데리고 밤에 아무도 모르게 묻고, 그 자리도 표가 안 나게 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사고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이들은 학교가 쉬는 날이어서 바다로 나가 고동을 캤다. 집으로 오던 길에 저수지에서 바닷물에 젖은 몸과 옷을 헹구고, 머리를 감았다. 그러던 중 물 위에서 허우적대는 친구를 끌어내려고 뛰어든 민화는 친구를 끌어내고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태풍으로 흙탕물이 가득 찬 저수지는 깊었고, 앞을 볼 수 없게 흐려서 사체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싸○○ 없는 놈 때문에 민화가 죽었다고 분을 터뜨렸다.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 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 후로 민화 아버지는 밤마다 내 하숙방을 찾아왔다. 좁은 하숙방은 술 냄새가 진동했고, 그는 웃다 울다가 밤늦게 돌아가곤 했다. 하숙집 바깥노인이 선생이 무슨 죄가 있냐면서 그를 달래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날은 하숙집 젊은 주인한테 내 딸 어디 두었냐고 대들기도 하고, 내 딸이 있는 곳을 알려 주면 더는 선생님을 찾아오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는 ‘선생님이 출장만 안 갔어도 내 딸은 죽지 않았을 것인디.’하며 울었다. 그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내가 출장을 가지 않았다면 그날도 아이들은 나랑 같이 있었을 것이고, 또 바다에 갔다고 해도 저수지에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쉬는 날은 여자애들 몇이 하숙집으로 몰려와서 나를 찾았다. 하숙집 딸과 민화는 같은 반이었고, 한패가 되어 늘 어울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학교에도 가고 바다에도 갔다. 민화 아버지는 내 하숙방을 계속 찾아왔다. 하숙집 식구들은 내게 그 시간을 피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딸을 잃은 그의 슬픔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말대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숙집을 나왔다. 저수지를 지나서 바다로 가는 길을 두고, 논둑길을 걸어서 갔다. 저녁을 먹고 하숙집을 나서서 바다에 이르면, 초가을의 바다는 일몰이 뿌리는 잔광으로 넘실댔다. 파도가 밀려왔다 내려갈 때 모래가 쓸어내는 소리로 바다는 무거운 적막 속에 잠겼다. 모래밭을 따라 길게 늘어선 솔숲에서는 새들이 깃을 퍼덕이며 분주하게 날았다. 나는 머지않아 이 섬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모래 위를 걸었다. 바다로 나오는 저녁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해가 짧아진 바다엔 붉은 노을 대신 어둠이 짙게 깔렸다. 검은 바다 때문인지 모래밭은 더 하얗고 넓어 보였다. 그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소프라노 선생과 피아노 선생이었다. 그들은 나와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퇴근 후 결석한 아이 집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내가 멈칫대고 있을 때, 피아노 선생이 걸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이곳에 자주 오시나 봐요. 지난번에도 멀리서 보았는데.”“네, 자주 옵니다.” “혼자 오시나 봐요.” 소프라노 선생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네, 혼자 오기도 하고, 동료 선생 몇이랑 같이 올 때도 있습니다.”“지난봄에 선생님 노래 부르셨잖아요. 그때 이 친구가 선생님이 정말 멋지다고 했어요.” 피아노 선생이 소프라노 선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아, 그때요? 창피해서 혼났습니다. 노랠 어떻게 불렀는지도 모르고요.” 소프라노 선생이 내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노래 듣고 깜짝 놀랐어요. 봄에 딱 어울리는 노래를 부르시는 감각도 멋졌고요. 선생님의 외로움도 느낄 수 있었어요.” 나는 내가 어떻게 노래를 시작하고 끝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평소에 부르던 대로, 전반부 ‘~노래 부른다’까지는 천천히 걷듯이 부르고, 후반부‘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부터는 경쾌하게 걸어가듯 노래하다 마지막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는 뚝 떨어뜨려 느릿하게 끝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이끌려 가던 길을 되돌렸고, 우리는 어느새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둑의 풀섶에서는 벌레들이 울어댔다. 마을로 들어서자 불빛도 없는 집에서 개들이 컹컹댔다. 그들은 학교 근처 농가에 방을 따로 얻어서 살았다. 나는 그들이 사는 집 앞까지 갔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들과 함께 걸으며 나눴던 이야기는, 그들이 섬 생활에 몹시 힘들어했다는 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소프라노 선생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아도 내가 왜, 소프라노 선생을 찾아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울몰 바닷가에서 만나 집에까지 오는 동안의 장면을 더듬어보아도 내가 그녀를 찾아가리라는 어떤 낌새도 없었다. 그렇다면 학교를 대표해서 부른 그녀와 내 노래 속에서 묻어나온 짙고 청량한 외로움이 울몰의 저녁 바다에 내린 일몰의 잔광처럼 우리 둘 사이에 맞닿아 있었던 걸까. 그녀의 자취방은 노인 내외가 사는 작은 별채에 있었다. 마당에서 문을 열면 부엌이고, 또 문을 열면 방이었다. 자취방은 단출했다. 방 위쪽 왼편에 지퍼가 달린 비닐 조립식 옷장과 요와 이불이 있었고, 그 오른쪽으로 좀 떨어져서 접이식 앉은뱅이 상위에 커피포트와 컵, 차가 담긴 병이 있었다. 내가 정작 놀란 것은 그 사이에 있는 정사각형의 스피커와 턴테이블, 작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LP였다. 내게는 꿈 같은 장면이었다. 그녀는 턴테이블 위의 천을 살며시 걷어내고 LP를 올려놓고 차를 끓였다. 음악은 방 안에 내린 무거운 침묵 사이로 흘렀다. 그날 밤, 그녀가 어떤 곡을 틀었는지, 그녀와 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내어준 차와 음악에 넋을 놓았을 것이고, 그녀는 나의 그런 모습이 좋았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중학교의 운동장 스피커에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해가 바뀌고 겨울방학이 끝난 후에도 음악은 계속되었다. 나는 아이들이 오기 전 아침, 학교 음악실 창가에 서서 울몰 모래밭과 논둑길을 나와 함께 걸었던 밤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소프라노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아침마다 그 환영에 설레었다. 봄방학이 끝나고 2월이 다 갈 때까지 나는 소프라노 선생을 보지 못했다. 그때 내게 한 번만이라도 소프라노 선생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왔다면, 나와 그녀는 넓게 뻗은 울몰 모래밭을 함께 오래오래 걷게 되었을까. 나는 3월에 뭍에 있는 학교로 나왔다.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거실 가득 음악이 흐르면, 나는 아득히 먼 그 젊은 날의 나와 커피를 마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