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8차 효정천보 특별수련회가 11월8~9일에 진행되었고 시간을 내고 참석하였습니다. 수련회는 8일 저녁8시반부터 찬양역사와 천심원 철야정성이 진행되고, 9일은 아침8시반부터 간증시청, 전유상 국장님의 말씀과 축도 그리고 찬양역사와 조상해원식의 순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에 조상축복식도 거행되었지만, 나는 조상해원만 신청하여 10시반에는 일정이 끝났습니다.
7일 오후10시부터 천심원기도회를 교회서 참석하고, 그대로 교회에 숙박하여 8일 아침에 6시반에 교회를 떠나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수련원을 향하였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수련원에 오전 11시쯤 도착하였습니다. 수련회는 오후8시반부터 시작하니 그동안 성지순회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랑나무에서 축복나무까지 올라가 내려가면서 효정나무, 어머니의 길을 다녔습니다. 맑은 날씨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니 몸과 마음의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참석하기 전에 외삼촌과 외숙모님의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느낌이 와서 그분들을 해원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모친은 10형제자매 중 7번째입니다. 외삼촌은 맏아들이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모시면서 9명의 동생들과 30여명의 조카를 챙겨 오셨습니다.
동생들에게 경사가 있으면 축의금을 챙기고 여동생들이 출산할 때마다 친정에 귀성하니 알게 모르게 고생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삼촌보다 외숙모가 더욱 힘드셨을 것입니다. 시동생, 시누이를 일일이 챙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외삼촌에 대한 나의 인상이 그렇게 좋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통일교, 가정연합에 입교하다 부모님께서 심하게 반대를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종교박해로 개신교 목사님의 지시로 나를 아파트에 갇히고 개종하게 하셨는데, 그 때 우리 부모님을 도와서 함께 종교박해를 중심적으로 하셨던 분이 외삼촌이었습니다. 하늘의 뜻이 모르신 가운데 하셨다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심정적으로 용서가 못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뭔가 느낌이 와서 생각이 나는 이상, 방계해원을 해야 한다고 결의하여 접수하였습니다. 수련소에 도착하여 성지순례를 하면서 마음이 누그러지자 외삼촌과 즐거웠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외삼촌은 어머니의 오빠이지만, 외숙모님은 아버지의 이종 사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숙모님은 나와 아주 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30여명의 손자손녀 중, 나만이 외할아버지의 이름의 하나를 받았던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榮太郞, 나 榮子) 그러자 찬양역사나 조상해원식 때 정말 눈물이 나, 늦게 해원해서 죄송하다고 나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참어머님의 생애노정을 배우면, 홍순애 대모님과 조원모 외할머니만이 나옵니다. 참어머님은 한씨 집안에 태어나셨지만, 독생녀를 받아드리는 정성과 기반을 쌓여 양육하고 키우신 것은 외갓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심인물이 여성인 경우 영양을 주었던 쪽이 외갓집안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남편 쪽도 나의 쪽도 주로 부계를 중심으로 가계도를 연구하여 신경을 써왔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참부모님께 만나게 하는 것이 외갓집의 공로가 더욱 컸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가 지금까지 남성중심으로 이어왔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남성중심한 사고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어머님의 현현으로 우리는 섭리에 공헌해 왔던 여성을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외갓집을 더욱 연구하고 잘 모셔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