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39/0912] 땅콩을 캐면서
100여평의 텃밭, 비닐을 친 제법 긴 고랑 8곳에 땅콩 한 알씩을 일일이 눌러 심은 게 지난 4월말이었을 게다. 500개쯤 심었을까? 흰 비닐을 뚫고 나오지 못하는 무수한 풀들을 보면서 고소해 하기도 했다. 아주 독한 녀석들은 땅콩싹과 함께 비집고 나와 기어이 세상빛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땅콩은 아주 잘 자랐다. 굼벵이가 파먹을지 모른다하여 입제약을 한번 뿌렸을 뿐이다.
떼까치나 비둘기들이 밤마다 퍼질러 앉아 콕콕콕 파먹었다. 아버지가 허수아비(허새비는 전라도 방언일 듯)를 절묘하게 만들어 밀집모자까지 씌워 두 곳에 세워놓았건만 소용이 없었다. 조금 더 있다 캐도 될 것같았으나, 새들의 무허가 급식 때문에라도 캐야 했다. 비온 뒤 무른 땅이어서 포기를 손으로 잡아당기면 통째로 쑤욱 뽑혀나오는 게 그나마 노동의 수고를 덜어줬다. 굳은 땅의 땅콩을 캐려면 쇠시랑을 동원하는 등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정말로 신기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은, 땅콩 한 알을 심었을 뿐인데, 포기마다 줄줄줄 달려나오는 땅콩이 몇 가닥 몇 천 개나 된 듯했다. 어쩌면 이런 일이? 고구마 줄기가 그렇다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4개월 동안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심고 캐는 과정을 안해 본 사람은 알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 그 자체가 땅콩농사였다. 도대체 몇 개나 달렸을까? 50개, 100개? 동생은 한번 세어보자고 했다. 흙과 햇빛의 조화가 오묘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씨앗의 유전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직접 해보고 몇 달 유심히 들여다본 사람은 안다. 이게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지를. 힘은 무척 들었어도 ‘황홀한 순간’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맞게 온 큰동생(재수가 없었던 걸로 치자)과 아버지, 나, 3인이 그제부터 작업을 하는데,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이웃집 형수가 하루 반 동안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틀도 어림없을 뻔했다. 캐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땅콩을 일일이 따 마당으로 갖고 와 제대로 된 것들만 골라 씻고 말려야하는 작업은 더디고 또 더뎠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지겨운 비까지 오락오락했으니 한정없이 심란했다. 이 일의 끝은 어디인가? 과연 끝이 보이기는 할 것인가? 동생과 나는 요령을 피우며 천천히 하고 싶지만, 아흔을 훨씬 넘긴 아버지가 묵묵히 몇 시간째 조금도, 한번도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데 쉴 수가 없다.
마침내 폭발했다. “아버지, 새참 좀 먹고 합시다. 우리 ‘어린 삭신’들 생각해서라도 좀 쉬면서 해야지”“그리라” 그러자가 아니고 너그(너희)는 그리라이다. 융통성이라고는 ‘1도’없다. 당신이야 평생 농삿일로 단련되어 일이 뼈속 깊이 박혀 있으니, 이런 단순작업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빛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볼 기세로 언제나 충만하다. 아버지와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이것이다. 나 혼자 까닥까닥했으면 좋겠다. 참깨도, 땅콩도 그래서 혼자 심은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년엔 고추 한 포기도 심지 말아야지, 작정을 하고 있다. 동네사람에게 공짜로 밭을 지라고 해야겠다. 아버지와 같이 일하다간 내가 숨이 막혀 죽을 것같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아버지 꼬시기’에 났었다. “아버지, 이 땅콩 잘 말려 식구들과 친척들 노놔 먹겠요잉. 절대로 팔아서 돈 만들 생각말아요잉. 약속해세요잉. 글고(그리고) 오빠가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게 절대로 간섭하면 안돼요잉” 혹시라도 make money를 생각할 게 틀림없는 아버지의 농심農心에 쐐기를 박아놓으려 벌써 몇 번째 강조하는 말이다. 이럴 때에는 ‘그러자’라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아버지 속마음은 솔직히 이 많은 것을 공짜로 준다는 게 어떻게 내키겠는가? 다문(단) 얼마라도 영농비를 건져야 하지 않을까, 이해타산을 하고 계실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미 만만한 막내사위에게 판로販路를 부탁할 생각을 해놓은 것은 아닐까? 흐흐.
하지만, 이번만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되는 일은 안되는 일’로 오금을 박자고, 여동생과 나는 의기투합했다. 우체국에서 소포용 작은 상자를 구입, 마른 땅콩을 담아 보내리라. 이 농산물을 받은 이모와 숙모 그리고 십 수명의 지인들이 얼마나 고마워할 것인가? 그 장면을 그리며 아낌없이 드리리라. 보내는 비용은 제법 들겠지만, 그동안 사랑해준 후의厚意들을 생각하면 무엇인들 보내드리지 못하겠는가?
나는 얼른 11월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가을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시는가? 이런저런 과일도 많겠지만, 나는 언제나 단언코 두 주먹 합친 크기의 대봉시을 든다. 올해는 몇 년만에 처음으로 묵혀 놓은 감나무밭을 조금 관리했다. 농약도 주변의 힘을 빌러 네 번을 쳤으니, 제발제발 허벌나게 열려라.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대봉을 하나하나 따는 재미는 하늘을 따는 듯한 느낌으로 출렁이다. 벌써부터 대봉 딸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그까짓 목이, 고개가 좀 아프다한들, 이 기쁨과 즐거움에 비교하면 ‘가성비’가 완전 짱이다. 오죽했으면 퇴치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유명 중앙일간지에 그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를 ‘원고료’를 염두에 두고 투고를 했을까?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3/2010112301999.html 흐흐.
겨우 땅콩 조금 캐면서 너스레도, 과장도 지나치다고 흉을 볼 것인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무엇이든 해본 사람과 안해본 사람의 생각은 천양지차天壤之差. 팁 하나. 땅콩을 껍질째 옥수수 삶듯이 삶으면 껍질이 쉽게 까진다. 땅콩알 속껍질을 까지 않고 그대로 먹으면 고소롬한 맛이 “주긴다”. 후라이팬에 돌돌돌 볶아먹어도 좋고, 펑튀기 장사에게 튀겨달라고 해 먹어도 좋다. 땅콩은 한 알이라도 참 야무진 땅콩이다. 땅콩같은 삶이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그래도 농사중에 쉬운 농사가 땅콩이라던데
군대생활한 전곡 연천부근은 모래밭이 많아
땅콩농사를 많이 짓는데 가을철 수확하여 널어놓은 땅콩 다발을 훔쳐다 밤새 까먹은 기억
줄줄새어 ㅋㅋ 화장실을 쫓아다니던 전우들
그때부터 난 볶지않은 생땅콩을 좋아한다
비릿한 생땅콩맛이 훨맛있다.
아버님 건강하시어 소일거리 놓지않고
재미나게 잘지내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