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교회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기다림으로 시작하는 교회와 그 구성원인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끝을 볼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두 기다림과, 우리가 기다리는 것과 주님께서 기다리신 두 기다림의 끝은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지향하며 이 기다림을 늘상, 매년 보내는 대림시기로 보내기보다는, 회개와 보속으로 값지고 의미있게 보냈으면 합니다.
오늘 1독서인 예레미야에서 정의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저는 요즘같이 정의가 목마른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주님의 정의가 애타게 기다려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창피함 뿐이 없었습니다. 나라망신은 대통령이 하는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가면 갈수록 안하무인, 후안무치입니다. 검사시절 죄 지은 사람이 특검 거부한다던 대통령이 계속 특검을 거부합니다. 대통령 관저 공사 비리, 서울양평고속도로 종점 이전, 이태원 참사 책임회피, 채 해병 사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방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불기소, 김건희 명품백 수수 불기소, 대통령과 영부인의 공천개입 등등...
천주교 시국선언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단체, 서울대를 비롯한 40여군데 대학교수들도 시국선언을 하는데 서울대 교수들은 동문임이 부끄럽답니다. 11월 28일, 저를 포함한 1466명의 천주교 사제들은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냈지요. 정의는 어느 한 개인에게만 정의일 수는 없습니다. 공의로워야 정의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지금 이 시국이 안타까워 많은 종교인, 지식인들이 시국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가만히 있다고 해서 흠 없고 무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을 가르쳤고 이를 삶으로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은 가만히 있어서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데에 큰 흠이 됩니다. 일제 강점기에 애국지사들은 입이 있으니 말을 했고 말을 못하면 글을 썼습니다. 박해시대에 신앙이 있으니 섬기고자 했고 박해하니 피로 섬겼습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가마니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무서운 표현을 하십니다. 천체에 나타나는 표징들,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이고,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치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고, 심판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디 구석에 가서 숨어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으라 하십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죄 지은 자신을 숨길 수 없고 피하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보속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을 제대로 맞이하는 준비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보속의 대림시기입니다. 현재의 삶에 잠식하여 가만히 사는 사람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는 움직이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첫댓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보속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을 제대로 맞이하는 준비☆
☆현재의 삶에 잠식하여 가만히 사는 사람이 아니라 “늘 깨어 기도”하는 움직이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
아멘
감사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는 움직이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