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국방부 6.25전쟁 60주년 사업단 제공)
화동사범대학 역사학과 선즈화(沈志华) 교수는 최근 경화주간(京华周刊)에 기고한 글에서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조선전쟁이 소련, 중국, 북한의 공모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스탈린과 모택동은 북한의 군사수단을 통한 조선의 통일 작전에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해서 제안한 무력방식을 통한 조선의 통일에 스탈린은 명확하게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4월말에는 김일성이 다시 사람을 파견해서 중국의 의사를 타진했는데 이때 모택동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방법에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조선이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 것과 현재 진행 중인 중국의 통일이 완성된 후에 군사적으로 조선을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철군한 후 김일성은 옹진반도 작전계획이라는 남침계획서를 작성하여 즉시 통일을 실현하고자 동년 9월 소련의 공산당중앙정치국 회의에 정식 의제로 상정하였으나 이 안이 부결되었다. 부결이유는 북한의 군사행동이 미국으로 하여금 다시 조선반도에 개입하게 되는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 10월 신중국 성립 후 김일성은 다시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이때에도 티벳문제와 대만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였기 때문에 모택동은 답을 주지 않았고 모스코바에 도움을 요청하라고만 했었다. 10월 26일 소련외무장관 모로토프가 스탈린이 초안한 답변서를 모택동에게 전보로 보냈는데 그 내용은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는 중국의 의견에 동의한다. 조선인민군은 지금 침공행동을 해서는 안되며 우리는 이것을 이미 조선에 통보하였다”라고 되어있었다. 다시 말해서 1949년 말 까지는 조선반도통일 실현에 관한 소련과 중국의 주장이 일치했었다. 그러나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돌연 소련 주재 북한대사를 불러 김일성의 한국침공계획을 승인한다고 통보하고 동시에 김일성이 비밀리에 모스코바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럼 왜 스탈린이 돌연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였나? 이에 관하여 중국 학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그 당시에 소련이 중국과 체결한 신조약이 발효되면 소련은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출구와 부동항을 얻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만일 소련이 조선반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3개의 부동항을 얻게 되고 소련 원동(遠東)의 전략적 이익을 보장받게 된다. 이런 사정 외에 소련이 조선전쟁 발발의 경우, 미국의 방어선은 일본해(한국의 동해)이며 미군은 조선반도 작전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군사전보를 획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매사에 신중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반복에서 강조한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한가지는 한국 침공계획은 반드시 중국의 동의를 받고 실시할 것. 왜냐하면 모택동은 동방문제에 관하여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만일 미군이 전쟁에 참전한다면 소련은 조선을 전면적으로 지원할 수 없다. 그때에는 중국의 지원에 의존하여야 한다. 모택동은 스탈린과 김일성이 공동으로 결정한 내용을 알고 난 후 동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선즈화(沈志华) 교수의 이 글은 최근 발행된 신주보(新周報) 2011년 제35호에도 계재되었는데 그는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한국무력적화통일 전쟁에 소련이 참전한 것은 소련의 오랜 숙원인 부동항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중국도 국익 즉 미국이 조선반도에 진주하는 경우 중국의 국익에 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당시 소련, 중국, 북한의 관계는 전쟁을 같이 치룰 만큼 상호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으나 다만 각자 자기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전쟁에 참전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선 교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한국전쟁은 전통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소,중,북한의 공모론이라는 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전쟁승인의 시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전에 동의했건, 안 했건 무슨 상관인가 북괴의 남침 후 그들도 참전하여 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