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장
“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심지어는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임문정을 보며 이여옥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갈수록 두려운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장호에게 지하 석실로 끌려갔을 때 나타난 인간도 요괴도 아닌 핏빛 형체의 혈유란 자가 이 사내의 수족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혈유란 요괴는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러 나타났다. 자신에겐 은신이 통하지 않음을 알고 결국 포기했지만 이자의 명령을 따랐음이 분명했다.
“ 그렇게 반가울 인간도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그렇게 혐오스런 인간도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가 틀린 것이오?”
임문정은 약간은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 기별, 아니, 기척이라도 내고 와야 할 것이 아닌가요?”
이여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이 들었지만 무리하게 움직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예전처럼 기우뚱하고 쓰러지지는 않았다.
“ 문을 열면서 기척을 했는데 이 소저가 너무 깊은 상념에 빠져 있어서 듣지 못한 것 같소. 어쨌든 미안하오. 그런데...... 다리는 좀 어떠시오. 걸음을 옮기는 데 불편함이 조금 덜어졌소?”
임문정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며 슬쩍 이여옥의 다리로 눈길을 주었다가는 시선을 돌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여옥은 임문정의 시선이 스쳐 지나간 다리 쪽이 얼음물 속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많이 좋아졌어요.”
이여옥은 짤막하게 답했다.
“ 다행이오. 앞으로는 좀더 강한 약재와 함께 본격적인 치료를 하게 할 생각이오. 그러면 집 안을 산책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 그건....”
“ 물론 예전과 마찬가지로 심한 고통이 동반될 것이오. 그것만큼은 우리도 어쩔 수없소. 하지만 그런 것에는 초연한 이 소저이니 잘 견디리라 생각하오.”
이여옥의 말을 가로채며 임문정이 자신있게 말했다.
집 주변을 산책까지 할 수 있다는 임문정의 말에 이여옥은 한가닥 희열과 함께 깊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뒤틀렸던 다리가 보통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임문정의 말대로 고통은 자신의 운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것을 견디는 것은 일상처럼 느껴졌다.
다리를 끊어내듯, 불로 지지듯 휘몰아쳐 오는 고통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참아냈다. 더 나아가 그것을 객관시하며 관조할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런 지독한 육체적 고통은 자신의 영혼을 한층 더 성숙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려운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음습하고 어두운 파멸의 냄새 때문이었다. 자신도 몰랐던 저주스런 능력!
그 능력이 높아질수록 파멸의 냄새는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그 파멸의 냄새가 앞으로 얼마나 큰 회오리를 몰고 올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비규환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졌다.
“ 그런데 요 며칠, 왜 치료를 중단한 것이오?”
이여옥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임문정은 본론을 끄집어냈다. 이여옥은 긴장으로 굳어지려는 전신의 근육을 억지로 이완시켰다. 모른 체 해야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이 사내는 지금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온 것이다.
“ 난 소나 돼지가 아니에요. 음식만 많이 준다고 해서 그만큼 일을 많이 할 수가 없어요. 이젠 이 자히실이 미치도록 갑갑해요.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요.
이곳 유가검보의 벚꽃은 아직 지지 않고 만발해 있겠지요?”
이여옥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이듯이 소리를 질렀다. 임문정은 약간은 당황한 눈으로 이여옥을 쳐다보았다.
예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사로운 것들에 무관심한 그녀였다.
타고난 운명이 너무 기구했기에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다리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되고 여느 여인들 못지않은 자태로 거듭나자 여인의 본능적인 욕망을 표출시키고 있었다.
“ 하하!”
임문정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차렸군요. 마음이 급하다 보니 그동안 이 소저를 혹사시킨 것 같소. 미안하오. 내일 하루는 모든 것을 잊고 바깥바람을 쐬게 해 주겠소.
이 소저의 짐작대로 이곳은 아직 벚꽃이 만발해 있소. 다리가 많이 회복되었으니 그 꽃들 사이로 한번 걸어보시오. 하하하.”
임문정은 과장된 웃음소리와 함께 이여옥의 요구를 수용했다.
“ 그런데.....”
만면 가득 미소를 짓던 임문정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가슴을 쓸던 이여옥은 덜컥 놀라 숨을 멈추었다.
“ 이곳이 유가검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질문과 함께 임문정은 이여옥의 수발을 들고 있는 소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소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그 아이 역시 눈이 가려진 채 이곳으로 왔고, 이곳에 온 뒤로도 나한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잊었나요?”
“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 소저가 어떻게 이곳이 유가검보라는 것을 알았는지 더 궁금해집니다 그려.”
소녀의 혼백을 얼릴 듯이 쳐다보던 임문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여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유가검보에는 사시사철 얼음처럼 차갑고 녹옥처럼 푸른색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마시는 이 푸른 색 물이 그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 물과 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도 이젠 알았어요.
제가 인근 백 리 이상 벗어나면 온몸이 푸른색으로 변하며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지는 것은 이 물과 불가분의 체질 때문이란 것도......”
이여옥은 석실 가운데에 있는 청옥수 샘을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청옥수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기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이 지방을 떠나지도 못했고 부모님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았다.
또한 그런 천형 같은 체질 때문에 다리가 뒤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 영물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지키는 영사가 있듯이 자신 또한 그런 신세였다.
“ 그것 때문에 그런 신비한 치료 능력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 말과 함께 임문정은 찌를 듯이 이여옥을 쳐다보았다.
“ 이젠 만사가 귀찮아요. 남들 치료하려다가 내가 먼저 죽겠어요. 하루라도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요.”
이여옥은 진저리 난다는 표정과 함께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임문정은 잠시 더 이여옥을 쳐다보았지만 염증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 알겠소. 내일은 기필코 벚꽃 향기 가득한 바깥바람을 쐬게 해주겠소.
내일 아침 일찌 모시러 올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시오. 덕분에 나도 내일 하루 벚꽃의 향취에 취할 수 있겠구려. 하하하!”
임문정은 유쾌한 웃음과 함께 석실을 빠져나갔다. 임문정이 나가자 이여옥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 아, 아가씨!”
소녀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와 이여옥을 부축했다.
“ 흑!”
바닥에 주저앉은 이여옥은 낮게 흐느꼈다.
“ 내 운명이 너무 저주스러워!”
이여옥은 절규하듯 중얼거렸다.
“ 왜 그러세요. 아가씨! 이젠 다리도 나아가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체질도 고쳐 집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아니,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온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며 살 수 있잖아요?”
소녀가 얼른 이여옥의 눈물을 닦으며 달랬다.
“ 정말 그럴까, 향아?”
“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세요. 그리고 내일을 벚꽃을 구경하며 마음껏 쉬도록 해요. 네, 아가씨?”
소녀는 내일 하루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 할아버지.....”
이여옥은 낮은 목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부모님을 대신해서 자신을 길러준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 뒤로 다른 한 사람의 모습도.....
‘ 공자님........’
이여옥의 마지막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동굴은 끝없이 길었다. 때로는 좁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가파르게 위로 뚫려 있기도 했다.
똑! 똑!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 이 길이 맞소?”
굵은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 맞소!”
칼로 자르듯 냉막한 목소리가 굵은 목소리에 화답했다.
“ 쩝!”
너무 메마르고 삭막한 대답에 질렸는지 굵은 목소리의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 말 많이 해서 돌아가신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왜 그렇게 무뚝뚝하시오. 그렇게 말없이 가다가 서로 딴 길로 빠지면 난 꼼짝없이 동굴 귀신 되는 거 아니오?”
여조명은 혀를 차며 떠들었지만 유화결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물방울 소리가 커다란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동굴 속에서 발자국 소리는 마차가 달려가는 굉음만큼 크게 울렸다.
그런 곳에서 말을 않는다고 서로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없다. 괜히 으스스한 분위기에 겁이 나니 하는 소리다.
곰 같은 덩치와는 달리, 밀폐된 곳과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뭔가에 대해서 무척 겁이 많은 사내였다. 그런 면은 진우청과 전혀 달랐다.
진우청은 이런 곳에서라도 틈이 나면 잠을 청할 것이다. 그러나 여조명은 혹시라도 자신과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끌어안을 듯이 뒤따라오고 있다.
‘ 곰탱이....’
진우청을 떠올린 유화결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말았다. 아직 남패천에 있을지, 아니면 자신의 길을 찾아 어디론가 떠났을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더 더욱, 어쩌면 이승에서 진 신세는 저승에서나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턱!
“ 어이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희미한 횃불이 다 밀어내지 못한 어둠 때문에, 그리고 큰 키 때문에 여조명은 천장의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 횃불 하나만 더 밝히면 안 되겠소?”
여조명은 여분으로 가져온 횃불 막대기를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 끝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소. 여기서 다 써버리면 그다음부터는......”
“ 그, 그냥 갑시다.”
여조명이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유화결은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옮기며 방향을 가늠했다.
지하에 나 있는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철무전의 비밀 탈출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은 철무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뚫려 있어 버려진 곳이다.
어린 시절, 호기심에 입구에 실타래 끝을 묶어놓고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혼쭐이 나곤 했다. 그 후로 선친께선 석회를 부어 이곳을 막아버렸다.
제대로 찾아간다면 검보 외곽의 마구간으로 나갈 수 있다. 오래전에 막혀 버린 곳이라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족히 이틀은 땅을 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검보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만행까지 저지르며 놈들이 차지한 청옥수 연못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 겨우 그것 때문에.....’
청옥수를 떠올리자 유화결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거간꾼 장 노인을 만나 확인한 것은 그것이었다. 수십 번을 거듭 생각해 보아도 놈들의 목적은 그곳이었다.
검보의 한 지하실 바닥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솟아오르는 녹옥색 청옥수!
사시사철 변함없는 온도 때문에 복잡한 일이 있을 때면 그곳에 몸을 담그고 머리를 식힌 적이 많았다. 아울러 여름에는 변하기 쉬운 음식과 술 단지를 담가놓고 작은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걸 마셔서 속이 좋아지거나 상처가 잘 낫거나 하는 효용은 없었다. 보기에만 특이할 뿐 아무 특별한 효용이 없는 연못!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동방회는 오랜 동안 온갖 방법으로 수작을 벌였고, 결국에는 유가검보를 무너뜨리는 참극을 벌였다.
‘ 대체 그것이 뭐기에.......’
유화결은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아무것도 아닌 연못!
그러나 그것이 유가검보의 터전 한가운데 있었기에 선친은 누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음모를 꾸며 가문을 쓸어버리고 놈들은 그것을 손에 넣었다. 이젠 자신이 그것을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유화결은 가슴속으로 손을 넣어 화탄을 만지작거렸다. 수백 명의 인명을 살상까지 하며 차지한 곳이니 놈들에겐 그만큼 중요한 곳이란 말이다.
그곳을 무너뜨려 버리면 최소한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한 유화결은 걸음을 멈추었다.
격한 감정이 사로잡혀 잠시 흥분하는 사이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 왜 그러시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유화결을 보며 여조명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 길을 잃은 것 같소!”
쿵!
여조명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터져 나온 육중한 진동음이 동굴 안을 울렸다.
퍽!
퍽!
호미 두 개가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조심스럽게 땅을 팠다.
땅은 굳을 대로 굳어 공력을 불어넣지 않고는 한치의 허물어짐도 허용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두텁게 막아버린 동굴 입구였다.
그동안 굳어버린 석회는 돌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화결은 비지땀을 흘리며 호미질을 했다.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지 하루 만에 천우신조를 이곳에 도달했다. 이젠 최대한 은밀하게 이곳을 뚫은 후 청옥수 샘으로 숨어들어야 한다.
유화결은 한층 더 바쁘게 호미를 움직였다.
“ 좀 쉬었다 합시다.”
여조명은 칠흙 같은 어둠이 갑갑한지 후욱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여 형은 좀 쉬시오. 난 이곳을 계속 파겠소.”
유화결은 여전히 일정한 속도로 호미를 움직였다.
그냥 기분대로 팠다가는 그 소리가 새어 나갈 수밖에 없어 누르듯이 호미를 쑤셔 넣고 석회암 더미를 떼어내다 보내 몇 배로 힘이 들었다.
그런데도 유화결은 여조명이 몇 번을 쉬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 이런 일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하는 법이오. 죽자고 입구만 뚫다가 햇빛이 스며드는 순간 기력이 다해 쓰러지면 꼼짝없이 놈들 손에 잡히는 신세가 되지 않겠소?”
여조명은 유화결의 손에 든 호미를 억지로 뺏으며 유화결을 쉬게 했다. 유화결은 그제야 마지못해 휴식을 취했다.
“ 혹시 몸에 문제가 있으시오?”
몇 번 숨을 돌리고 난 후 여조명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 무슨 말이오?”
유화결이 반문했다.
“ 호미질을 하는 손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서 하는 말이오. 그래서 쉬지도 않고 호미질을 하는 것이 아니오?”
여조명은 조심스럽게 질문하며 유화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이곳에 처음 왔던 날도 마찬가지였소. 내가 알기론 유 공자는 그들에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너무 쉽게 위기에 처해 있었소.”
여조명은 뭔가 확신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 탈출하다 등에 화살을 맞고 병신이 되어버렸소.”
유화결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속에 억눌려져 있는 감정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 멀쩡한데 무슨 병신이오?”
여조명은 딴 청을 피우며 말을 받았다.
“ 남은 생을 한순간도 쉬지 않고 휘둘러도 모자랄 인간이 혈맥 한 군데가 완전히 끊겨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처지가 되었는데 그게 병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병신이란 말도 과분하오. 산송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요.”
유화결의 목소리가 질겅질겅 씹혀 나오며 동굴 속을 울렸다.
“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소.”
유화결이 말한 산송장이란 표현이 이해가 된 여조명이 입맛을 다셨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유화결의 처지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말대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도 모자랄 것이다.
“ 예전처럼 검도 휘두르지 못하면서 어쩌려고 이곳으로 온 것이오?”
여조명은 조금 냉정하다 싶었지만 말을 돌리지 않고 질문했다. 이 사내에게는 그런 것이 더 어울렸다.
“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할 것이오. 그러니 여 형은 적당한 때를 보아.....”
유화결은 자신의 말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말끝을 흐렸다.
악마의 소굴이나 마찬가지가 된 이곳에서 발각된 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건 진우청이 가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은 이곳에서 뼈를 묻기로 작정했으니 상관없지만 여조명은 달랐다. 놈들이 이곳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만 알면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길을 잃었으니 그게 불가능했다.
“ 내 걱정은 마시오. 어딜 가든 내 살길은 마련해 놓고 다니는 인간이니까 말이오.”
여조명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떻게 말이오?”
유화결은 고개를 돌렸다. 돌린다고 해서 뭐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지만 길을 잃고 여분의 횃불마저 꺼졌을 때 난리를 치던 모습과는 다른 여조명의 기색에서 뭔가 의혹을 느낀 것이다.
“ 이곳까지 오며 동굴 곳곳에 추종향을 묻혀 놓았소.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입구를 찾아 나갈 수 있소.”
“ 그런데도 여태껏 아무 내색을 않았단 말이오?”
유화결은 기가 막힌 심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개들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무슨 가루를 뿌렸다.
그걸 미루어보면 용독술에도 조예가 있는 모양이었다.
“ 유 공자 고집에...... 길을 안다고 해서 되돌아 나갈 것도 아니잖소? 그렇다면 나 혼자 가야 하는데.... 으흐흐.... 그건 도저히 못하오. 그러니 죽든 살든 같이 온 것이지요.”
유화결은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덩치에 겁낼 게 따로 있지, 그런 걸 겁낸단 말인가?
‘ 곰도 여러 종류군.’
내심 중얼거린 유화결이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 그렇다면 내게 무슨 일이 생겨 혼자서 빠져나갈 경우엔 어쩌시려오? 추종향도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소?”
“ 혼자 빠져나가긴 왜 혼자 빠져나간단 말이오? 어떻게 해서라도 같이 빠져나가야지요. 그러니 제발 과격한 행동은 자제하시고 날 데리고 나갈......”
“ 호미질이나 계속합시다.”
말을 자른 유화결은 다시 입구를 파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온몸에 흠뻑 땀을 적시며 두 시진 정도 더 굴을 팠을 때 호미 끝에 부딪쳐 울리는 소리가 달라졌다.
입구를 막은 석회암층이 얇아졌다는 말이다. 아울러 입구가 뚫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유화결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이곳으로 마구간 한쪽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방회 놈들이 이곳을 차지하고 나서 어떻게 바꾸어놓았을지 모른다. 연무장 한복판이나 집무실 한가운데로 바꾸어놓았다면 구멍이 뚫리자마자 발각될 것이다.
“ 지금이 어느 때쯤 되었을 것 같소?”
유화결은 여조명에게 시각을 물었다. 여조명이라고 그걸 알 리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물어본 것이다.
“ 우선 손가락만한 구멍을 뚫어봅시다. 그럼 알 수 있지 않겠소?”
유화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 수밖에 없었다.
유화결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호미를 움직였다. 파내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호미 끝으로 석회암을 긁어가며 소리를 죽였다.
‘ 우웃!’ 짧은 비명을 삼키며 유화결은 급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송곳 같은 빛줄기 한 가닥이 망막 속으로 꽂혀 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 암흑에 적응되어 있었던 눈이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 젠장!” 유화결은 역정을 토했다. 눈동자 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았다.
“ 괜찮으시오?”
여조명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유화결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 뚫린 것이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유화결이 질문했다.
“ 그런 것 같소.”
여조명의 대답과 함께 역한 냄새가 구멍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건 가축의 배설물 냄새였다. 다행히 마구간은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훨씬 용이하게 숨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지금이 어느 때요?”
이번에는 여조명이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 햇빛이 강한 걸 보니 대낮인 것 같소.”
“ 그게 아니라 계절이 어느 때냔 말이오.”
여조명의 질문이 재차 이어지자 유화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한 시간의 추이야 망각해 버렸지만 계절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곳은 벚꽃이 모두 지고 새 잎만 무성하겠지만 이곳 유가검보는 지금 한창 벚꽃이 만개해 있을 것이다.
“ 봄이 무르익었음이 분명한데 왜 이리 으스스한 것이오?”
유화결이 대답을 하지 않자 여조명은 스스로 대답하고 다시 질문을 했다. 그제야 유화결도 등줄기 한복판으로 시린 냉기가 흐름을 느꼈다.
‘ 뭔가 이건?’
유화결은 잠시 의혹에 사로잡혔다. 외기의 유통이 거의 없는 동굴 속에서 갑자가 찬바람이 스며들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손가락만한 구멍으로 이런 찬바람이 들어올리도 없었다. 구멍이 뚫릴수록 오히려 따뜻한 봄바람이 스며들어야 한다.
“ 으아악-”
갑자기 지른 여조명의 고함 소리가 온 동굴 안을 진동시켰다.
뚫린 구멍 사이로 조심스럽게 눈을 갖다 대며 찬바람의 근원지를 찾던 유화결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 크크크!”
동굴 속의 습한 어둠보다 훨씬 더 음습한 웃음소리가 여조명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한 번 더 비명을 지른 여조명이 와락 유화결 옆으로 붙었다.
“ 대, 대체 저게 무엇이오?”
여조명은 기절초풍할 것 같은 목소리와 함께 동굴 한곳을 가리켰다. 동굴 한쪽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그곳은 호미로 뚫은 구멍에서 쏟아지는 가는 빛줄기조차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칠흙 같은 암흑만이 존재하는 곳인데 무언가가 보인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으으으.....”
여조명이 다시 신음을 토했다. 핏빛 형상이 사람의 형상으로 모여졌다. 그리고 주변보다 훨씬 더 짙은 색의 두 눈동자에서 혈광이 이글거렸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혈광이 짙은 암흑 속에서도 그 형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 대, 대체 저게 무엇.......”
파앗-
유화결은 대답 대신 수리검 하나를 날렸다.
“ 크크크-”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함께 수리검이 파고든 핏빛 인영의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생겼다.
구멍을 관통한 수리검은 그대로 벽에 부딪치며 작은 불꽃과 함께 튕겨졌다.
“ 으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괴한 존재에 여조명은 덜덜 떨며 부채를 손에 쥐었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조차 두려워 혼자서는 되돌아가지도 못한다는 그에게 있어서 지금은 기절초풍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 젠장!”
유화결은 역정을 토했다.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호의를 가지고 나타난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바탕 격전을 치러야할 텐데, 장력 한 방이라도 발출했다간 단박에 발각이 될 것이다. 피피핑-
세 개의 부챗살이 파공음과 함께 핏빛 인영을 향해 날아갔다. 핏빛 인영의 상체 세 곳에 구멍이 뻥 뚫리며 부챗살은 수리검과 마찬가지로 핏빛 괴물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파팍-
부챗살에서 불꽃이 튀자 핏빛 몸체가 일렁하고 움직였다.
“ 요괴......”
여조명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정체가 뭐냐?”
수리검과 부챗살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음을 느낀 유화결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 크크크-”
기괴한 웃음소리가 질문을 대신하며 울려 나왔다.
쉬이익-
웃음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핏빛 인영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동굴 천장에서 무너지듯 쏟아져 내렸다.
퍼억-
“ 으윽!”
파육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리며 여조명이 바닥을 굴렀다. “ 여 형!”
유화결은 고함을 치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만한 구멍이었지만 소리가 새어 나가기에는 충분했다. 어쩌면 벌써 새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이젠 이판사판이다.’
유화결은 양손에 한 개씩의 소도를 들고 괴물체를 향해 쏘아갔다.
퍼억-
가슴 어림에서 둔탁한 격타음과 함께 통증이 몰려왔다.
갑자기 사라진 후, 기척도 없이 나나탄 핏빛 인영의 공격은 심혼을 빨아먹는 듯했다. 통증과 함께 그만큼 공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망할!”
유화결은 이를 악물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혈광이 이글거리는 두 눈이 사라지자 괴인영의 형상은 다시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각이나 다른 감각으로도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서 있다가 맞고 쓰러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어느 쪽에 있는 것 같소?”
여조명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들려왔다. 내내 겁을 먹고 오금을 펴지 못하다가 한 대 맞고 나니 오기가 생긴 모양이었다.
“ 저쪽!”
어느 방향에서 한기를 느낀 유화결은 짧은 고함과 함께 수리검을 날렸다. 여조명도 쾌속하게 섭선을 흔들었다.
수리검 하나와 부챗살 두 개가 다시 벽에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그 불꽃 사이로 혈인의 형상이 스며들 듯 사라지고 있었다.
“ 조심하시오, 크윽!”
말을 끝맺지도 못한 유화결이 비명을 토했다. 이번에는 한기마저 느껴지지 않은 채 등 한복판으로 지독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만큼 기운이 빠져나갔다.
“ 하앗-”
여조명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유화결의 등에서 울리는 타격음을 향해 반사적으로 일격을 날린 것이다. 퍼퍽!
두 개의 이질적인 타격음이 울렸다. 하나는 여조명의 몸에서 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혈인의 몸에서 울린 것이었다.
“ 크크크-”
괴인의 웃음소리가 더욱 낮게 울려 나왔다.
‘ 으윽!’
유화결은 비명을 삼켰다. 이번에는 맞지도 않았는데 웃음소리와 함께 전신의 기운이 더욱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건 요괴의 수작이 분명했다. 여조명도 마찬가지인지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조절했다.
‘ 어쩔 수없다.’
유화결은 결심을 굳혔다.
퍼엉!
폭음과 함께 손가락만한 구멍이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 크크- 크윽!” 괴물체의 웃음소리가 짤막한 신음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쏟아져 들어온 빛이 괴물의 힘을 차단한 것이 분명했다.
수리검과 부챗살이 벽에 부딪치며 불꽃이 튀자 괴물체의 형상이 잠시 흔들렸다. 유화결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괴물체는 잠시 물리쳤지만 아직은 뚫리지 말아야 할 작은 구멍이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 사이로 여러 개의 발자국 소리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 돌아갑시다!”
여조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저놈의 밥이나 마찬가지요.”
유화결은 계속 괴물체의 흔적을 찾으며 답했다.
“ 무슨 일이냐?”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 형은 그만 돌아가시오!
유화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 혼자서는 못가오!”
여조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저놈은 아마도 날 따라올 것 같소. 그러니 여 형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시오.”
유화결은 동굴 밖의 동정을 살피며 소리쳤다.
“ 난 절대로...”
“ 어서 가! 이 곰 같은 새끼야!”
동굴 입구가 한 번 더 무너지고 그곳으로 사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며 유화결은 고함을 질렀다. 그 고함 소리에 여조명은 움찔 동굴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 여 형은 기필코 살아 나가서 언젠가 내 하나뿐인 친구를 만나거든 전해주시오. 내 피를 다 뽑아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유화결은 동굴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유, 유 공자..”
“ 어서, 어서 가시오!”
고함과 함께 유화결은 입구 쪽으로 화탄 하나를 던졌다. 폭음과 함께 아비규환의 비명이 울렸다.
휘익-
유화결은 여조명을 향해 수리검을 날렸다. 깜짝 놀란 여조명이 뒤로 몸을 날렸다.
유화결은 그쪽으로 화탄 하나를 더 던졌다. 여조명이 사라진 방향으로 핏빛 괴물이 쫓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폭발의 섬광과 함께 동굴이 무너지며 여조명이 몸을 옮긴 동굴이 막혀 버렸다. 저 괴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른 놈들은 여조명을 추적하기는 힘들 것이다.
“ 크크크!”
예상대로 괴물은 여조명을 쫓아가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휘익-
유화결은 화탄에 의해 크게 뚫린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슴 속에 남은 화탄은 한 개뿐이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질 때까지 싸우더라도 그것은 남겨두어 청옥수 샘을 파괴해야 한다.
동굴을 완전히 빠져나온 유화결은 청옥수 샘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오랜만이오, 유화결 공자!”
동방회주의 아들 임문정이 유화결이 신형을 날리려는 방향을 막고 서서 하얗게 웃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ㅈㄷㄳ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