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가수 김현식이 서른 넷, 짧은 삶을 마치기 전에 日刊스포츠에서 연재한 자서전입니다.
1984년, 나는 제 2집의 준비에 들어갔다. 1집이 가수로서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 데 의미를 뒀다면, 2집은 한 명의 가수로서 이제 자신의 음악을 펼쳐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무척 신경이 쓰인다. 더구나 음반은 그때까지도 별반 방송에는 관심이 없었던 내가 가장 선호하는 팬과 만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타이틀은 자작곡 <사랑했어요>로 했고, <어둠 그 별빛>, 그리고 작사가 양인자 씨가 노랫말을 준 <바람인줄 알았는데>도 수록했다. 자작곡이 아닌 곡으로는 박두영 작사 작곡의 <그대 외로워지면>을 유일하게 수록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두 번째 앨범은 84년 10월부터 레코드 가게의 쇼윈도에 걸리게 됐다. 나는 무척 초조한 마음으로 만 4년 만의 앨범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를 기다렸다.
<사랑했어요>에 대한 반응은 다운타운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노래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나타날 줄은 나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도심 곳곳의 음악다방에서 "도대체 저 노래를 부르는 김현식이 누구냐?"라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라디오 음악프로에도 이 노래를 신청하는 엽서가 쏟아졌고 음반도 날개 돋친 듯이 나갔다. 이 노래 하나로 하루아침에 나는 대중적인 스타가 된 것이다.
이 노래가 유명해지자 이 노래를 둘러싼 얘기도 무성해졌다. 이 노래의 내용이 나의 진짜 사랑 이야기라는 얘기도 있었고, 그때까지도 내가 이 노래 속의 여주인공 격인 여자를 찾아다니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얘기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지나간 사랑의 대한 아픔과 그리움을 짙은 소울과 블루스풍의 멜로디에 실어 혼신의 힘으로 부른 노래였다.
<사랑했어요>의 히트 이후 나는 본격적으로 새 그룹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물론 이때까지 그룹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 선배이고 나중에 '들국화'라는 그룹을 조직한 전인권 선배와 '동방의 빛'이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한 적도 있었고, 재즈 연주자인 동시에 작곡가인 정성조씨가 리드하는 그룹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싱어를 맡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젊은 사람들과 함께 전혀 새로운 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며칠을 고심하다 일단 그룹의 이름은 나의 데뷔곡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인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사람도 없는 사애에서 일판 간판부터 내 건 격이었다.
평소부터 나와 같이 음악을 하고 싶어 하던 친구들이 찾아왔다. 김종진, 전태관 유재하… 다들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친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유재하다. 재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은 풍부한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다. 좀 약해 보이는 외모 속에서도 언제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비록 재하가 후배였지만 나는 그의 섬세한 감각과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배운 것도 많았다. 그러나 재하는 어느 날 우리 팀을 떠났다. '형, 미안해요. 하지만 형에게 암만 혼나더라도 이 그룹을 떠나야만 하겠어요.'라고 말하고 그는 악기를 챙겨서 연습장을 나갔다. 지금도 그때 그의 뒷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여름가을겨울>과 활동하면서 나는 3집 앨범의 준비에 들어갔다. 내가 소속한 동아기획에는 나와 비슷한 음악 방향을 가진 많은 선후배들이 몰려있어 음악 활동을 서로 도왔다. 신촌 블루스, 들국화, 한영애 등등 그때까지 언더그라운드로 일반에게 분류되던 우리는 그래도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뭉쳤다고 자부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수많은 밤들을 소주잔을 기울이며 얘기하고, 싸우고, 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좋은 글이네요.. 좋은 노래 더 많이 남길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ㅠㅠ
원래는 6집을 유작으로 준비하다가 결국 사후앨범이 되어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