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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아낼 수 있겠느냐?”
노인은 깊은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며 질문했다. 여인은 노인의 질문에 즉각 답하지 않고 뚫어져라 서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탁에는 여러 장의 종이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 위에는 굵은 붓과 가는 붓으로 그려진 복잡한 궤적의 선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 휴...... 도저히.....”
여인은 마침내 고개를 흔들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언뜻 실망의 기색이 번져 나갔다.
“ 사제의 움직임은 초식에 연연하지 않아요. 중원의 무공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마지막 순간에는 너무 달라요.
하나로 섞여 있는 것 같지만 끝까지 따라 올라가 보면 완전히 다른 샘에서 솟아나온 물줄기처럼 달라요.”
여인은 지친 음성과 함께 뒤로 물러나 앉았다.
노인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중년 사내들도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 네가 풀어낼 수 없다면 우리 중 아무도 풀어낼 수 없겠지. 그만 쉬도록 하거라.”
노인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 오랜 금제... 그것은 여전히 우리 힘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인가?”
자리에 앉은 노인이 허공으로 시선을 두며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다.
“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일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관일엽이 희망을 잃지 않고 말했다.
“ 시간이야 예전에도 많았지. 하지만 사부의 품을 떠난 사제가 익힌 무공, 아니, 사제가 익힌 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무공과는 달라. 그러기에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야.”
노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 사숙께서 그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낸 것은.....?”
관일엽이 조심스럽게 노인을 쳐다보았다.
“ 사제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치밀한 안배를 해놓았든지, 아니면 어리석은 우리가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제자를 내려보낸 것이든지... 허허!”
노인의 눈빛이 깊은 회한으로 물들었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어쨌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리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그 아이, 아니, 사제가 나타났어요. 그건 사숙의 안배라고 봐요.”
한동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여인이 말했다.
“ 그렇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지.”
관일엽이 말을 받았다.
“ 어리석은 인간이 신인 같은 사제의 생각을 어찌 다 헤아리겠느냐. 우리의 증오심이 또 다른 비극을 낳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이제 그만 길을 재촉해 보자꾸나. 장안이 얼마 남지 않았어....”
노인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키며 객실 문을 열었다.
“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사백조님? 그리고 사고......”
객실 밖으로 나온 그들을 향해 을지소소가 상냥하게 인사했다 백화원을 떠날 때는 거동조차 불편했지만 이젠 많이 나아 가벼운 움직임에는 아무 지장을 받지 않았다.
“ 우리는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중년인 하나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농을 던졌다.
“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백. 여러 사백께서도 편히 주무셨는지요?”
을지소소는 서둘러 중년인들에게도 문안 인사를 여쭈었다.
“ 사제는..?”
중년 여인이 객점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 사제라시면? 진 공자.....”
“ 뭐라고 하였느냐?”
을지소소의 입에서 진 공자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사고의 눈이 매서워졌다.
“ 죄, 죄송합니다. 사고! 진 사숙께서는 아직..”
을지소소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진우청에 대한 호칭을 정정했다.
“ 아직?”
“ 아직 일어.. 아니,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을지소소가 최대한 경어로 대답했다.
“ 쯧쯧!”
중년인 하나가 혀를 찼다.
“ 깨우거라. 떠날 때가 되었다.”
노인이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한 권의 서책을 손에 쥔 낙화신검 조병무는 부르르 손을 떨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서책의 겉장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먼지로 오스러져 버릴 것 같았지만 웅혼한 필체로 적힌 제목은 뚜렷히 남아 있었다.
자하미리검법! 명대 초기에 분실된 화산의 상승 검법서였다.
그것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것이다. 조병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서책을 쳐다만 보았다.
이 비급이 어떻게 화산에서 사라졌는지는 최근에야 알았다.
자세한 장문인이나 몇몇 장로들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것인데, 이번 정파무림의 비밀 회동을 위해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장문인과 장로들의 부름을 받은 자리에서 자신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이번 회동에서 한 가지 약속을 지켜주고 그것을 회수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떻게 그게 자신에게 전해질 것인지 궁금했는데 회동 장소가 멀지 않은 이 객점에서 느닷업이 전해진 것이다.
자하미리검법은 이백여 년 전, 자하검군 강덕만에 의해 창안된 검법이었다. 그는 자하검군이란 별호보다 화산검치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검에 미쳐, 오로지 검에만 몰두한 그가 말년에 창안한 자하미리검법은 지극히 난해하여 상승의 무리를 이해한 사람이 아니면 익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검법이었다.
그 검법을 창안한 그는 그것을 문도에게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자하미리검법서를 만들었다.
이미 절정에 오른 고수가 수유의 순간 얻은 심득을 필설로 표현하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랐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에게 만져지지도 않는 무지개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천고의 기재가 아닌 범인이라면 그건 더욱 어려웠다.
자하검군 강덕만은 수년을 매진한 끝에 그 심득을 글로써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자하미리검법이었다.
그런데 그 검법은 세상에 태어난 지 한 달도 되기 전에 그 주인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화산은 수많은 문도들을 풀어 강덕민의 행적을 수색했지만 그의 종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기까지가 낙화신검 조병무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정파무림 비밀 회동 장소로 떠나기 직전, 장문인과 장로들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강덕만이 사문을 배신하고 백인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황실은 강덕민을 백인대로 끌어들이며 다시는 사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자하미러검법을 요구했고,
강덕민은 자신의 손으로 장경각에 보관한 자하미리검법서를 다시 훔쳐 백인대에 투신했다는 말이었다.
그런 극비 사항을 얘기하는 장문인과 장로들의 표정이 웬지 석연치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일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을 법도 했다.
어쩌면 강덕만이 사문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화산이 황실로부터 큰 대가를 받거나 협박을 받고 자하미리검법과 함께 강덕만을 백인대로 보내준 것일지도 모른다. 조병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은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얘기였다.
긴 세월의 먼지 속에 두텁게 덮여져서 확인할 수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화산의 최고 검법 중 하나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낙화신검 조병무는 조심스럽게 서책의 겉장을 넘겼다. 빛바랜 서책 속에서 화산의 숨결이 후욱 밀려 나왔다. 틀림없는 전서였다.
조병무는 손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급히 서책을 덮은 조병무는 자하미리검법 비급을 가져온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조금 마른 체구에 훌쩍 큰 키의 용모로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마주 친다면 아무런 특별함을 느낄 수 없는 사내였다.
특히 차분한 눈빛과 주변의 정물에 동화되어 있는 모습은 무공을 익힌 흔적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내는 오랫동안 강호의 신비 문파로 알려진 북제성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이 검법서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신비한 사람들!
북제성의 인물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병무는 불식간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 자하미리검법은 전반부와 후반부, 두 권으로 아는데 왜 한권뿐이오?”
조병무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 이번 회동에서 약속을 지켜주신다면 후반부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중년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휴우-”
조병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물론 지켜 드리지요. 어쩌면 이번 비밀 회동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그것이니까요.”
“ 그럼 이만.....”
조병무의 말이 끝나자마자 중년인은 신형을 일으켰다. 이내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허허!”
탈색된 조병무의 수염이 한차례 떨렸다. 바람처럼 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하더니, 방금 그 사내가 그랬다. 생각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빛과 추측조차 불가능한 무공!
오랜 세월 동안 모습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중원사패의 하나로 꼽힐 만한 사람들이었다.
석상처럼 자하미리검법을 쳐다보던 조병무는 풀어헤쳤던 보자기를 다시 쌌다.
“ 앞으로 어떻게 되려나.....?”
조병무는 낮게 중얼거렸다.
화산파에서 백인대에 몸을 담은 사람이 있는데 다른 문파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구파일방이나 무림세가 모두가 그런 식으로 백인대의 창설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번 회동에 참석하며 자신처럼 무언가를 돌려받았을지도......
그걸 돌려받는 대가로 이번 회동에 그들의 제의를 들어주기로 약조했다. 약조에 앞서 그건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다. 다른 곳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그 선택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껏 음지에서만 숨어 지내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북제성의 등장은 무림의 판도를 왕창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
장문 사형과 장로들은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패천과 서왕문, 동방회의 틈바구니에서 위상이 추락된 구파일방이었기에 지금의 판도를 왕창 뒤흔들어 버리고 싶은 것일지도......
상념에 빠졌던 조병무는 인기척을 느끼며 자하미리검법을 급히 가슴속에 갈무리했다.
“ 누가 왔다 갔나요, 사숙조님?”
사손 문영옥이 반짝이는 눈방울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친손녀 같은 문영옥을 보며 조병무는 얼굴에 드리워진 수심이 모조리 사라졌다.
“ 누가 들어왔다면 네가 보았을 것이 아니더냐?”
조병무는 의미심장한 눈빛과 함께 답했다. 북제성의 인물은 마주쳐오는 문영옥의 이목마저 떨쳐 버린 모양이었다.
“ 그렇기는 한데.... 무슨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문영옥은 의혹 어린 눈길로 실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창문들을 문고리가 채워져 있었고, 앞문은 방금 자신이 지나쳐 왔으므로 아무도 오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 왜 그러느냐? 내가 뒷문으로 옛 정인이라도 끌어들일까 싶어 그러느냐?”
“ 푸훗! 사숙조님도..... 무슨 그런 말씀을 다 하세요?”
조병무의 농담에 문영옥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참 그런데.... 사숙조님.”
문영옥이 깜박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왜 그러느냐?”
조병무가 수염을 잠잖게 쓰다듬으며 말을 받았다.
“ 저번 휘주현 참사 때 살아남은 유가검보의 장남 유화성 사형.....”
“ 그래! 그 아이가 어찌 되었다더냐?”
조병무는 와락 다가앉으며 고함을 질렀다.
“ 깜짝 놀랐잖아요. 사숙조님!”
문영옥이 가슴을 쓸며 목소리를 높였다.
“ 어서 말해보거라.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조병무는 거듭 재촉했다.
“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니, 정말 큰일을 벌였어요. 남패천의 혈랑대 대주가 되어 서왕문주의 큰 아들 목을 베고, 둘째 아들의 팔을 잘라 버렸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문영옥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과 함께 답했다.
“ 남패천의 혈랑대라니? 그 아이가 왜?”
조병무의 목소리에 혼란한 기운이 어렸다.
화산의 속가나 마찬가지인 유가검보가 단 하루 사이에 무너져 버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화산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동방회와 서왕문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옴짝달싹도 못하게 발목을 묶었다.
그것이 크나큰 한으로 남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그 자식들이 살아남아 그 장남은 남패천의 혈랑대주가 되어 서왕문의 아들 둘을 죽였단 말이다.
아직은 소문일 뿐이지만 그 아이가 화산과 전체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남패천의 혈랑대주라... 어쩌면 그 아이로서는 최상의 선택이었겠구나. 나약한 화산파보다는 남패천이 훨씬 낫지.”
노인의 눈에 안타까운 기운이 흘러내렸다.
“ 그 아이는 괜찮다더냐?”
잠시 후 조병무가 다시 질문했다.
“ 괜찮은 가 봐요. 하지만 앞으로가 문제에요. 아들 둘을 잃은 서왕문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문영옥은 걱정스런 음성으로 답했다.
“ 지금 그 아이는 어디 있느냐?”
“ 그건 모르겠어요. 서왕문도들과의 혈투 후 혈랑대를 이끌고 소리없이 사라졌다고 해요.
그러다가 어디에서 나타났다고 했는데 워낙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서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어릴 때 몇 번 보았을 땐 정말 멋졌는데.......”
문영옥의 눈이 아련해졌다.
“ 저곳이 회동 장소요?”
진우청은 초하이에게 질문했다. 질문을 받은 초하이는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 대답을 회피했다. 초하이와 타우도 이젠 진우청을 사숙으로 불러야 했다.
그동안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막내 동생 나이도 안 되는 사숙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진우청은 두 사람에게 전혀 사숙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숙과 사백들이 진우청을 사제로 대하고 이십구숙이라는 서열까지 매겨놓았으니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것이 이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웬만하면 못 알아듣는 척 딴전을 피웠고, 부득이할 때는 손짓으로 대답했다.
“ 저곳이 정파무림의 회동 장소요?”
진우청이 이번에는 타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타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흔들었다.
“ 그럼?”
“ 회동 장소는 반나절은 더 가야해요. 하지만 우린 여기서 여정을 풀 생각이에요.”
을지소소가 나서서 답해주었다.
“ 그럼..... 여기가 앞으로 우리가 기거할 곳이란 말이오?”
“ 그래요.”
을지소소는 흥분한 목소리와 함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청은 별다른 내색 없이 저 앞에 있는 장원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제법 부티가 나는 장원이었지만 백화원에 비한다면 훨씬 규모가 작았다.
워낙 백화원의 규모가 커서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웬지 초라해 보였다. 건물 내부 또한 잘 다듬어진 정원도 없이 삭막했다
곧이어 진우청과 북제성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무적대 서른 명도 같이 들어섰다.
그들로 인해 빈 건물에서 느끼는 썰렁한 기분은 많이 사라졌다. 이곳으로 오면서 그들은 속속 모이기 시작하여 이젠 교전 다치거나 죽은 대원들을 빼고는 모두 모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진우청과 북제성 사람들을 호위하는 서른 명의 인원들만 남기고 유화성을 따라 흩어졌다. 여러 개의 조로 나누어 넓게 퍼져 전위병과 후위병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작게만 느껴지던 장원은 안으로 들어서자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견고한 기둥과 짜임새 있는 구조, 그 옆으로 제법 넒은 연무장, 그리고 수십 마리의 말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마구간!
보통의 여염집이 아니라 작은 무도관이나 무가에 더 가까웠다.
“ 마음에 드는가?”
십오숙의 위치에 있는 주형반이 감회가 어린 눈빛과 함께 질문했다.
“ 이곳이 앞으로 우리의 터전이 될 것일세.”
주형반은 진우청의 대답도 듣지 않고 덧붙였다.
“ 터전이라면.....?”
진우청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형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말 그대로 양지로 나온 우리들의 집이 되는 것이지.”
주형반은 얼핏 격동이 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 이곳에 정착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당분간 기거할 거처일 줄 알았는데 이곳에 북제성의 터전이라는 주형반의 말에 진우청은 목소리를 높였다.
“ 그렇다네. 앞으로 이곳이 세상으로 나온 북제성의 총단이 될 것이네.”
주형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들은 을지소소는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주형반을 쳐다만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타우와 초하이도 마찬가지였다.
진우청만 적이 불만스런 표정을 하며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 너무 좁지 않습니까?”
잠시 뒤 진우청은 불쑥 말을 내뱉었다. 사패천 중의 하나인 남패천의 규모는 한마디로 어마어마했다.
그곳에 머무른 기간 동안 작정을 하고 돌아다녔더라도 다 구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조족지혈이라는 말도 과분할 만큼 초라했다.
“ 건물이야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기거하느냐가 아닌가?”
주형반이 빙그레 웃으며 공자처럼 말했다.
“ 사제 말대로 보기에는 좁은 곳이지만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지게 지은 곳이라네.
풍수지리적으로도 그렇고.... 또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한 명으로 천 명의 침입자를 막을 수 있는 구궁팔괘의 원리가 숨어 있다네.”
설명을 끝낸 주형반의 눈빛이 어느 순간 강력하게 빛났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무형이 기운이 은연중에 뻗어나왔다.
진우청은 눈을 끔벅이며 주형반을 쳐다보다가 그의 시선을 좇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형반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기운이 주변의 건물들과 어우러지자 초라하게만 느껴지던 건물이 서서히 다르게 느껴졌다.
기묘하게 배치된 여러 채의 건물과 그 건물들 사이에 있는 석등들.... 또한 건물과 벽 사이의 거리, 장원에 심어진 나무들!
주변 경관들과 물 흐르듯이 어울린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묘하게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건 처음 남패천의 내성 문을 들어섰을 때 그곳의 건물들이 주는 느낌과 흡사했다.
남패천은 그 건물들 사이에 귀혼마진이라는 기관진을 설치하여 그곳에 갇힌 진우청 형제와 원다영 모녀를 사지로 몰았었다.
이곳은 그런 기관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극강의 고수들이 존재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방금 주형반이 내뿜은 기운이 건물의 배치와 어우러지자 남패천의 귀혼마진보다 몇 배는 더 엄중한 그물이 처지는 기분이었다.
단 한 사람으로도 이런 느낌인데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자신의 위치를 지킨다면 남패천의 군사들이 모두 들이닥친다 해도 꿈쩍 않는 철옹성이 될 것 같았다.
진우청의 눈빛이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다.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주며 자신은 이 건물 어느 속에 가장 어울릴까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짧은 순간,
진우청의 몸에서도 주형반과 마찬가지로 은연중에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와 건물과 하나로 동화되어 갔다.
그 기운이 주형반의 몸에서 뻗어나온 기운과 어우러지며 건물과 조화되자 건물이 두 배는 더 넓고 견고해져 보였다.
“ 이해가 빠르구먼.”
이심전심으로 그것을 느낀 주형반이 빙그레 웃으며 진우청의 어깨를 두드렸다.
타우와 초하이, 을지소소도 감탄한 눈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 멋져요, 사숙!”
을지소소가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타우와 초하이도 진우청이 그들의 사숙이 된 이후 처음으로 진우청을 향해 옅은 미소를 흘렸다.
“ 피곤할 텐데 쉬도록 해. 사제. 금방 음식 준비할 테니.......”
을지소소의 사고도 가슴이 가득 차오르는 듯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비록 규모 면에서는 남패천이나 서왕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북제성의 총단이 될 이 장원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건물이었다.
벚꽃이 지고 매화꽃이 만개할 즈음 강호에는 때 아닌 폭풍이 몰아닥쳤다.
그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의 예측을 깨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순식간에 무림맹의 결성을 선포한 일이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커다란 폭풍이었다.
처음에는 극비리에 진행되었지만 나중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정파무림의 비밀 회동은 장안의 조씨세가에서 열렸다.
장안은 예로부터 여러 나라의 수도로 그 유서가 낙양만큼이나 깊은 곳이다.
주나라 무왕이 세운 수도 호경에서 비롯되어, 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천여 년 동안 여러 나라의 수도로 번성한 고도이다.
하남성 서부의 낙양에 비해 훨씬 서쪽에 있기 때문에 낙양을 동도, 장안을 서도라는 말로 일컫기도 한다.
유서 깊은 장안에서 정파무림의 회동이 열린다는 사실에는 별 의문점이 없었으나 그 구체적인 장소가 조씨세가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안에 있는 조씨세가는 무가가 아닌 상가였다.
한때는 장안 최대의 세가로서 위용이 하늘을 찔렀지만 대대로 손이 귀했고, 그나마 적자보다는 서자가 더 많아 어느 순간부터 균열의 전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선이 단 한순간에 침몰하지 않듯이 조씨세가는 그런 불안한 조짐 속에서도 수십 년을 더 버텨왔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젠 곧 침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정파무림의 비밀 회동이 그곳에서 열렸다.
강호의 모든 무인들은 그 회동 장소를 전해 듣고는 의혹에 사로잡혔지만 그 의혹을 길게 물고 늘어질 틈이 없었다.
회동이 열린 직후, 넓고 넓은 세가의 장원을 지키던 얼마 남지 않은 조씨 혈족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들의 마지막 재산이었던 장원 건물은 무림맹의 총단이 되어버렸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무림맹 결성과 총단의 설립이었다.
그것이 첫 번째 폭풍이었다.
두 번째 폭풍은 강호무림에 있어 훨씬 여파가 더 컸다.
무림맹의 결성과 때를 같이하여 오랜 세월 동안 강호의 신비문파로 음지에서만 움직이던 북제성이 황실과의 오랜 은원을 모두 청산한다는 선언과 함께 개파를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본단을 무림맹 총단에서 반나절 정도 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웠다
단 백명의 인원만으로 강호의 네 개 하늘 중 한개를 차지하고 있던 북제성!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들의 개파 선언은 순식간에 결성된 무림맹의 결성과 총단의 설립이라는 폭풍을 찻잔 속의 풍랑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폭풍은 계속 거세게 불어닥쳤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주축이 된 무림맹에 북제성이 그 한 축을 차지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파일방의 열 개 방파와 오대세가, 북제성! 그렇게 열여섯 개의 세력이 합쳐 무림맹을 이룬 것이다.
그 세가지의 소식에 강호무림은 온통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미 그들 자신만으로도 한 개의 하늘인 북제성이 뭐가 부족해서 구파일방과 손을 잡고 무림맹을 결성했을까?
또한 지금은 사패천의 힘에 밀려 숨을 죽이고 있지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구파일방은 또 왜 북제성을 무림맹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의혹은 가을바람 앞의 낙옆처럼 난무했지만 당사자들만 빼고는 그 깊은 내막은 알 수 없는 것이 강호의 생리였고, 더 나아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속성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무림맹은 결성되었고, 이젠 그 어떤 문파보다 강력한 힘을 내포하게 되었다.
뒤이어 껍질만 남은 채 허물어져 가던 조씨세가의 수많은 건물들은 새로 지어지거나 빠르게 수리되어 무림맹 총단으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갔다.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무림맹주가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인데, 그건 초미의 관심사였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북제성의 인물이 되겠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그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누가 무림맹주가 되는가 하는 것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떠나 강호무림 전체의 판도와 직결되었다.
그런 지대한 관심을 짐작하기라도 하듯이 새로이 결성된 정파무림맹은 맹주 추대에 대한 입장을 서둘러 선포했다.
무림맹 총단이 최소한의 모습을 갖추는 한 달 후,
임시로 내건 총단의 현판을 정식으로 내거는 무림맹 총단 창단식에서 각파의 후기지수들이 자웅을 겨루어 승리한 문파에서 맹주 직을 맡는다는 것이다.
아직 무공이 완성되지 않은 후기지수라면 아무리 북제성이라도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절대로 꺾일 수 없는 정파 무림의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 자존심은 결코 허세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제일 먼저 그것이 나타났다.
그동안 봉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신감이 충만한 눈에서 확연히 느껴졌다.
한 달이라면 지극히 짧은 시간일 수도 있었다. 서안에서 멀리 떨어진 문파는 지금 당장 대표를 출발시켜도 도저히 당도하지 못한다.
한데도 그런 결정이 순식간에 도출된 것을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물밑으로 많은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종이호랑이로 치부되어 왔던 구파일방은 그런 식으로 한순간에 포효를 터뜨리며 무림의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 도리어 뒤통수를 세차게 한 방 맞은 것인가? 허허!”
남패천주 구양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서왕문과 동방회의 합공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무공보다 강한 춤을 추는 사람이 나타나면 정파무림의 연합을 방관해 달라’는
북제성주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장로들을 움직여 그들의 연합을 부추기까지 한 것이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무림맹은 동방회와 서왕문을 합친 세력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남패천의 위상이 추락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참, 요지경속이로세!”
남패천 태상호법 나유백도 혼란스런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제껏 남패천은 정파무림의 힘을 적절히 분산시키고 억누르며 각종 사업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해왔다. 그러니 남패천에 대한 구파일방의 감정이 결코 좋을 리 없다.
그런 그들이 북제성과 연합하여 무림맹을 결성했으니 이제부터는 그간의 의분을 터뜨릴 것이다.
“ 신비 문파 사람들이라더니 정말 은밀하고도 빠르게 움직이는구먼.
황실의 추적에 자유롭지 못한 북제성과 우리 남패천이나 서왕문의 견제에 억눌린 구파일방은 서로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최상의 선택을 했군. 허허!”
나유백은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야합 같았지만 그들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젠 황실이나 남패천, 서왕문, 동방회 그 어느 곳도 정파무림맹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그동안의 판도가 바뀌고 많은 이권과 사업권들이 그들 손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서왕문과 동방회의 움직임은 어떠냐, 아가야?”
구양천은 비원각주 원다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무림맹과 북제성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트림없이 설명했던 원다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문을 열었다.
“ 이제까지 그들의 움직인은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점점 서진과 남진을 하며 남패천을 조여오는 형국이었지요.
그런데 무적대주가 서왕문주의 두 아들을 처치한 후부터는 그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일촉즉발의 위기감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원다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 그런데......?”
나유백이 참지 못하고 설명을 재촉했다.
“ 무림맹이 결성되고부터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러한 상태입니다.”
원다영은 긴장 속에서 짧은 안도감을 내비치며 답했다.
“ 살모사처럼 잔혹하지만 모비광, 그놈은 바보가 아니지, 이젠 남패천보다 더 큰힘을 지닌 무림맹이 탄생했으니 경거망동할 수 없겠지.
문제는 동방회야. 오히려 동방회주 임초건과 그 동생 임지건, 그놈들이 모비광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해.
그놈들은 우리가 제 아비의 재산을 뺏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다고 믿고 있으니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야. 그놈들의 움직임은 어떠하냐?”
남패천주 구양천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모습으로 질문했다
“ 그들의 움직임은 정말 오리무중입니다. 작년 이맘때 휘주에서 무적대주의 가문인 유가검보를 무너뜨린 후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도저히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곳으로 투입된 모든 인원들이 사라졌습니다.”
원다영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었다.
개방의 정보력을 무색케 하는 남패천 비원각의 능력으로도 그들의 음모를 아직 캐내지 못한 사실에 깊은 패배감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 자책하지 말거라. 아가야. 대륙의 돈을 반 넘게 움직이는 임초건과 그놈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 놈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못한다면 돈이란 것이 아무 쓸모가 없는 물건이 아니겠느냐?”
구양천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큰 며느리를 달랬다
“ 어쨌든 북제성의 등장으로 서왕문의 준동이 멈추었으니 북제성주가 약속을 지킨 게 되나?”
나유백이 조심스런 눈으로 구양천을 쳐다보았다.
“ 일단은 그렇지. 하지만 앞으로 북제성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미지수야. 그 아이는 또 그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구양천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 그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
구양천은 다시 원다영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 진 공자는 북제성 사람들과 함게 그들이 본단으로 선언한 곳에 있고, 무적대주는 모두 모인 무적대와 함께 검진을 수련하며 외곽을 방어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 잘 어울리는 친구들이군.”
구양천이 얼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예전의 자네와 나를 보는 것 같구먼. 하하!”
나유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구양천의 안위를 삶의 최대 의미로 삼으며 동분서주하던 젊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바람처럼 말을 달리며 강호를 질주하던 자신의 모습이 무적대주 유화성의 모습과 겹쳐졌다.
“ 이제야 말이지만 그때 자넨 내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도 했다네.”
구양천의 말에 나유백의 너털웃음이 심한 기침으로 바뀌었다.
북제성의 본단으로 마련된 건물은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첫 느낌은 비좁아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건 남패천이나, 얼마 전에 들렀던 백화원의 규모가 워낙 방대해서 상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내부를 둘러볼수록 협소하다는 기분은 사라지고 문짝 하나, 경첩 하나 예사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재질에, 최악의 경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침입하는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집을 만들 수도 없고,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 장원은 오직 북제성 사람들만을 위해 설계되고 축조된 집이었다.
자신들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지만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던 을지소소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선택하고 심혈을 기울여 이 건물들을 지었을 것이다.
또한 무림맹이 이곳에서 반나절 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설립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계획되었고, 그 계획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쩝! 다음에는 또 뭐가 어찌 되려는지.......’
무림맹이 결성되고 개파 선언을 한 북제성이 무림맹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일련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을 짓던 진우청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팠다.
침상에서 일어난 진우청은 밖으로 나왔다.
“ 기침하셨습니까, 사숙?”
을지소소가 과장스럽게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인사를 했다. 진우청은 두리번거리며 을지소소의 사고를 찾았다.
그녀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을지소소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과 동년배인 사숙에 대한 장난기의 발동이었다.
“ 웬일이시오. 아침부터?”
진우청은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 웬일이기는요. 사숙의 시중을 들려고 온 거지요.”
을지소소는 환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답했다.
진우청은 물끄러미 을지소소를 쳐다보았다. 남패천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얼음처럼 차갑고 표범처럼 사납던 그녀였다. 그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날 때부터 몽고의 초원과 온 중원을 쫓기다시피 떠돌던 그녀로서는 북제성이 떳떳한 문파로 개파를 하고, 더 나아가 안주할 수 있는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한없이 들떠 있었다.
도착한 그날부터 온 건물을 헤집고 다니며 하루 종일 쓸고 닦았다.
그래 봤자 바람 한 번 불고 나면 원래 상태 그대로 먼지가 뿌옇게 앉았지만 을지소소는 며칠 내내 그렇게 온 정성을 쏟았다.
보다 못한 사고도 몇 번 혀를 찼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을지소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들어가세요. 방 청소 하고, 차 한잔 맛있게 끓여드릴게요.”
“ 괜찮소. 내 방은 내가 치울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그리고.... 소 여물 끓인 것 같은 찻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저기 저 약수가 최고요.”
고개를 흔든 진우청은 정원 한쪽에 솟아오르는 약수를 한 바가지 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커다란 바가지에 가득 담긴 물이 순식간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광경을 을지소소는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사숙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어요.”
진우청이 물을 다 마시자 을지소소가 불쑥 말했다.
“ 무슨 말이오?”
진우청은 턱에 흐르는 물방울을 닦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 한 달 후 무림맹 후기지수들끼리 비무대회가 열리잖아요.”
“ 그런데 그게 내 어깨하고 무슨 상관이오?”
진우청은 눈동자를 디루룩 굴렸다. 을지소소의 말이 왠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어깨로 몰려와 멀쩡하던 어깨에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느껴졌다.
“ 정말 모르고 계시는 거예요. 아니면 딴청을 부리는 건가요?”
을지소소는 갈피를 못 잡겠다는 눈으로 진우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설마 내가 그 대회에 북제성의 대표로 참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잠시 동안 을지소소의 눈길을 받던 진우청은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을지소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내가....?”
어이없는 심정에 진우청은 질문을 다 내뱉지 못하고 을지소소의 대답을 기다렸다.
북제성과 무림맹, 그 사이에서 급박하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는데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 우리 쪽에서 그 대회에 나갈 만한 사람은 사숙밖에 없으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사숙에게 초점을 맞춰 계획된 일이었으니까요.”
을지소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설명했다.
진우청은 한 점도 수긍할 수 없다는 눈으로 을지소소를 쳐다보았다. 북제성이 개파를 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자신은 아직 이곳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사질이나 사제로 대해 주고 있었지만 자신은 사형이나 사백이란 호칭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이곳 대표로 그런 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 없긴 왜 없단 말이오? 소저도 있고, 타우와 초하이 그 사람도 있지 않소? 소저는 상처가 다 낫지 않아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타우와 초하이는.....”
“ 사형들이 무슨 후기지순가요 후기지수들 눈으로 보면 중늙은이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을지소소는 얼른 답했다.
“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니오? 설마 북제성의 젊은이들이 당신들이 전부는 아닐 텐데....”
진우청은 작정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궁금해도 꾹 참고 있던 것들을 이참에 물어볼 생각이었다.
“ 사숙 말이 맞아요.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그때까지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린...”
말을 이어가던 을지소소는 입을 다물었다.
항상 그랬지만 어느 정도 선 이상 넘어가면 이들은 언제나 천기누설을 두려워 하는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주어야 수긍을 할 게 아니오. 내가 무슨 소나 말도 아닌데 무조건 나가란다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잖소? 계속 이런 식이면 어느 날 밤 소리없이 사라지는 수도 있소!”
진우청은 목소리를 높이며 을지소소를 다그쳤다.
어쩌면 그녀의 사백들이나 사고가 그녀를 통해 넌지시 운을 떼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에 없이 싹싹한 태도로 자신의 거처를 찾아와 지나가는 말처럼 이런 설명을 하고 있을지도....
“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으로 오며 제가 실수로 우리에겐 금제가 있다고 언급했는데.....”
을지소소는 극히 조심스럽게 말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 이 부분의 설명까지는 자신의 영역 밖인 모양이었다.
“ 기억이 나는 것 같소.”
진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의 이목을 피하며 산길로 행군하는 도중, 자신을 북제성으로 데려가는 이유가 무슨 금제를 풀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다가 실수를 깨달은 듯 자신의 입을 때리던 일이 떠올랐다.
“ 그래요. 우리에겐 금제가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상처가 다 나았다 하더라도 우린 비무대회에 나설 수 없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예요. 성주님을 만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설명을 끝낸 을지소소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퍼졌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해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 무슨 사정들이 이렇게 많은지.....’
진우청은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 성주라는 노인은 어디 있는 것이오?”
한참 후 진우청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 잘은 모르지만 무림맹 비무대회 전에 만나 보실 수 있을 거예요.”
“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소? 백 명 정도의 인원으로 알고 잇는데. 백화원에서 만난 귀면랑 일행들은 죽었으니......”
진우청은 조심스럽게 질문하며 말끝을 흐렸다. 자칫 아픈 곳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혈전을 치렀던 귀면랑 일행들 역시 북제성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그들을 처치하고 나서 한동안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중원 곳곳으로 흩어져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좀 가 있고요. 성주님께서 나타날 때쯤이면 일부는 모일 거예요.”
“ 모두 모이면 얼마나 되오?”
“그건 정확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짐작하시는 대로 백 명은 절대로 되지 못해요. 흑궁의 인원들은 오지 않을 테니까요.”
을지소소는 씁쓸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 흑궁에 대해서도 아직 설명해 주지 않은 걸로 아는데.....”
“ 그것도 성주님께서 한꺼번에 설명하실 거예요. 더 이상은 아무것도 설명드릴 수 없어요. 더 아는 것도 없고요.”
을지소소는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 젠장!”
진우청은 약수를 한 바가지 더 떠서 벌컥 들이켰다. 감로주처럼 달큰하던 약수가 이제는 왠지 소태처럼 쓰게 느껴졌다.
“ 참석하실 거죠?”
약수 물을 한 바가지 더 들이키고 난 진우청을 보며 을지소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성주란 분을 만나보고 나서 결정하겠소. 무슨 사연들인지 원.......”
진우청은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 꼭 참석해야 해요!”
을지소소가 진우청의 등 뒤로 고함을 질렀다.
“ 혹시 상금 같은 것도 있답디까?”
자밋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진우청이 을지소소를 향해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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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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