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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군사령부는 소속 장병들에게 과거 걸프전에서 실시한 바 있던 탄저병 예방주사를 접종 중이라고 합니다. 8회에 걸쳐 실시하는 이 탄저병 예방주사 중 그들은 이미 5회 이상 접종을 마친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일손을 멈추고 TV의 볼륨을 높였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는 소, 돼지 같은 가축이나 식물들에 발병시키던 탄저균을 연구하여 대인 살상용 무기로 개발하였다고 하는데 이 균에 감염되면 초기에는 감기증세를 보이다가 2-3일 내에 사망하며 그 치사율이 100㎢ 반경내 100퍼센트라고 합니다. 미군당국은 이 접종이 끝나는 대로 이어서 주한 미국인들에게도 그 접종대상을 넓혀갈 것이라고 하는데 주한미군의 이러한 조치는 북한이 이 균의 배양에 성공한 뒤 대량생산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직 백신을 확보하지 못해 휴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에게조차 전혀 접종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나운서는 표정 없이 이어서 다른 뉴스로 초점을 옮겨갔다.
썩을. 나는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올라 아이들이 벗어 팽개쳐 놓은 옷들을 주섬주섬 걷어다 거칠게 세탁기 속에 처넣었다. 사망, 치사율, 탄저균. 북한에 억류됐다가 일주일 전에 풀려난 그 여자의 표정을 보던 느낌이었다. 나는 초췌하게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점점 마음이 바빠졌다.
사악한 놈들. 공화국의 법에 따라 엄벌해야 마땅하나 금강산을 사모하는 남조선 인민들을 위해 특별히 용서한다는 북측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직도 가슴에 서늘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관광객의 안전이 확실하게 보장되기 이전에는 배를 띄우지 않기로 했다는 우리측의 뒷북치는 발표를 얼마나 조롱했던가.
서해 교전 중에도 관광선을 띄우며 비료를 실어 나르는 장면을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아마 이런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정부 쪽 사람들만 느끼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경제위기가 표면화되기 훨씬 전부터 백화점에 산더미처럼 쌓인 외제품 앞에서, 공항을 통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해외여행 인파를 보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던 서민들보다 무딘 감각을 지닌 그들이 이제 이 탄저병 공포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는지….
하긴 북한이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릴 때부터 군사전문가들은 세균전을 우려하면서 그 파괴력을 소개했었다. 단지 설마 그러랴 하다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무서운 동족 살상용 균을 배양하여 생산하고 있는 놈들이나 남의 땅에서 생활하면서도 자기들만 살겠다고 몰래 예방접종을 하고 있는 놈들이나 (무엇이든 잘 잊고 사는)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겐 개 같은 기분만 들게 할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방과 거실을 오가며 이불을 개고 청소기를 돌리느라 종종걸음을 쳤다. 결국 이 맘 때가 되면 녹초가 되곤 했지만 아내의 병실에도 둘러보고 출근을 해야 하므로 마음은 더욱 부산했다. 아내가 없는 집안은 짓다만 건물처럼 엉성하고 썰렁했다. 이제 겨우 사흘인데 벌써 삼 개월쯤 홀아비로 살아온 듯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대강 설거지와 청소를 끝낸 뒤 방 창문과 현관문까지 꼼꼼히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엊저녁에 한바탕 소동을 피우며 소나기가 우중충한 대기를 몰아낸 뒤끝이라 하늘은 한없이 푸르렀지만 마른 장마 중에 내리쬐는 뙤약볕은 아침부터 온 거리를 달구고 있었다. 의식을 놓고 누워있는 아내나 한창 손길이 많이 가는 사내아이 둘의 뒷감당에 하루를 한 달처럼 살고 있는 내 처지는 이 뙤약볕의 습기찬 아침처럼 고약하기만 했다. 과연 이 고행에 끝이 있을 것인가.
나는 차를 몰고 거리로 나왔다. 주행거리 15만 킬로미터를 넘긴 고물차는 에어컨부터 시원찮았다. 나는 습관처럼 차창을 내렸다. 끌끌대는 엔진소리를 듣다가 동생의 능멸스런 웃음을 떠올리며 창 밖으로 침을 탁 내뱉었다.
사악한 놈. 동생이 내 전생의 업을 고스란히 훔쳐 태어났다고 해도 이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을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삶이 동생 찾기와 추억 만들기의 흔적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면 그날 이후론 동생의 억지와 협박에 쫓겨 혼이 빠질 만큼 헐떡이며 살았다. 어쩌면 동생을 포기하는 것이 재회를 위해 보낸 지난 25년간의 인고보다는 어려울지 모른다. 동생을 잃어버린 자책감을 견디지 못한 채 끝내 숨을 거둔 아버지나 동생의 손을 잡고 포만감으로 눈을 감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이젠 시커멓게 썩어 문드러진 내 가슴도 한번쯤 열어서 다독여야겠고 정상적으로 회복이 될는지 불투명한 아내의 병태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83년도였던가.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진행되던 내내 원귀처럼 여의도 주위를 맴돌던 어머니는 끝내 실신한 채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미 전국의 고아원이란 고아원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동생을 찾아 헤매고 있던 어머니였기에 이 방송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입대 전부터 어머니의 성화 때문에 휴일을 모두 동생 찾기에 허비해야 했고 군 복무 중의 휴가 역시 한번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에 나는 이 방송이 시작되자 부대 내에서 아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동생이 그런다고 살아나겠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6살 때 술 취한 아버지의 손을 놓쳐 실종된 이래 살아 있었다면 동생은 어머니가 12년에 걸쳐 전국에 펼쳐놓았던 저인망식 그물에 걸렸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 행사에서도 동생소식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또 내게다 한풀이, 화풀이를 해댈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황금 같은 제대휴가를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어머니의 가슴속에 새겨진 동생의 모습은 언제나 인간이 달할 수 있는 극점에 이르고 있었다. 고아원 순방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TV 연속극 남자 주인공을 빙자하기도 하고, 어떤 땐 음악이나 스포츠 영웅들의 멋진 모습을 그대로 옮겨와 늘 우리 곁에 동생의 환영을 풀어놓곤 했다. 두고보렴. 그 앤 꼭 저렇게 돌아올 테니.
이 추억 만들기가 뒤에는 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중되었지만 늘 그 도를 지나쳤다. 당신 가슴속의 둘째아들은 출생부터 6살까지를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만든 만능, 신동, 완벽한 겉옷을 입고 있었다. 결혼 후 3년만에 연년생으로 본 귀하다면 귀한 우리 아이들도 늘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랐다. '삼촌만 닮아라. 삼촌 같으면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게다.' 식이었던 할머니의 허황된 질책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비록 눈앞에 보이진 않았지만 할머니를 통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삼촌으로 인하여 늘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동생은 형인 나보다 더 좋고 많은 것을 갖고자 트집과 억지만 부리던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아이로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막 출근시간이 지난 거리에는 차량 통행도 한산하고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대로변 상가가 대부분 셔터를 내리고 있어선 지 거리 전체가 가면에 빠져든 듯 했다. 자로 잰 듯 쭉 뻗은 도로와 제법 뿌리를 내려 틀이 잡힌 가로수가 잘 조화를 이뤘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신록의 풍경은 번잡한 도시생활을 피해온 신도시 주민들에게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처럼 아늑함을 줄만 했다.
나는 서현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개천 길로 들어섰다. 탄천의 시원인 이 개천은 물이 맑고 폭이 넓어 엉성하게나마 강변로의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 부근은 서현역과 야탑역을 중심으로 역세권이 형성되고 있어 많은 상가가 집결해 있고 구색을 맞추듯 경찰서나 구청 같은 관공서와 종합병원도 제각기 적지를 골라 자리잡고 있었다.
아내는 야탑역 부근에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4층에 있는 입원실로 올라갔다. 천행이라곤 하지만 아내는 갈비뼈 두개가 부러지고 이마와 왼쪽 눈 언저리에 20여 바늘을 꿰는 중상을 입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담당의사 말처럼 아내는 외부적인 상처의 치료보다는 정신적 안정이 우선되어야 할만큼 사고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낸 지금까지도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늦게 식당으로 출근하던 아내는 발진을 위해 가속을 하다 그대로 4차선 도로로 뛰어들어 다른 차와 충돌한 후 개천으로 굴렀다. 아내와 충돌한 자동차의 운전자도 10주 이상의 중상을 입고 이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5년 무사고 운전자라며 으스대던 아내가 단번에 대형사고를 낸 것이었다.
사고 전날 저녁 아내는 동창회에 참석한 후 늦게 돌아왔기 때문에 주차장이 꽉 차 개천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주차를 했었다. 그곳은 부근에 학교가 있고 주민들의 통행이 빈번한 곳이었는데 뒤에 안 일이지만 개중에는 공간을 얻지 못하고 그곳까지 밀려나온 차량에다 고의로 흠집이나 타이어 펑크를 내어 심통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의 자동차에 대한 해코지는 그런 류의 심술이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브레이크가…. 신음과 함께 애타게 뭔가를 알리려는 아내의 입술모양을 유심히 보다가 나는 바로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고 차의 상태를 살펴보던 나는 엔진룸에서 유압 밸브 선이 끊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맙소사. 브레이크가 말을 들을 리 없었던 것이다. 머리칼이 곤두섰지만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 뭔가 흔적이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손상을 가했다면 분명 아내에게 원한이 있다는 것인데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엔진룸 바닥에서 선이 절단될 때 생긴 찌꺼기에 뒤섞여 있는 까만 물체 하나를 찾아냈다. 휴대용 전등이었다. 그것을 집어든 순간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극소형인 그 전등은 미국제품으로서 스웨덴제 칼과 함께 내 자동차의 비상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예쁘다며 가져간 것이었다.
아내는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마와 왼쪽 눈 주위가 붕대에 덮여 있어 잠을 자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좀 어때? 나는 아내의 오른 쪽 볼에 손바닥을 댔다. 여전히 체온이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아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좀 잤어? 사고 당일 검진과 외상 치료를 마치고 상체 전부를 깁스할 때까지 아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흐느끼기만 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어머니가 운명할 즈음 병원과 식당과 집을 오가며 숨을 헐떡이던 아내는 병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넋두리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아내가 자리에 눕고 난 뒤에야 나는 그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식당과 집안 일로 이어지는 아내의 공백은 너무 컸다. 나는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서 소개하는 간병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종업원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려다가 누군들 환자 치다꺼리를 좋아하겠는가 싶어 그만 두었다. 처가라고 해봐야 몸이 불편한 장인 장모만 있으니 사고소식을 알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는 아내를 부축하여 몸을 벽에 기대앉게 했다. 간병인은 옆방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갓 쉰을 넘었음직한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찾아서 하는 편이어서 병원에서 내가 할 일을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세면기로 가서 수건을 물에 적셔 아내의 얼굴과 목 부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희미한 핏자국을 닦아냈다. 지금까지 집안을 들쑤셨던 분란은 겉으로 보긴 동생과 아내 사이에서 벌어졌지만 실상 아내는 나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던 셈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부터 나는 동생의 발악에 제동을 제대로 걸 수가 없었다. 어떤 힘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한 듯 그렇게 무기력하게 동생의 억지주장을 듣고만 있었다. 결국 아내가 내 역할을 떠맡았지만 방어본능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애써 이룬 것을 모두 빼앗긴다는 위기의식 같은 거였다. 그렇지만 동생이 이처럼 잔인하고 야비하게 위해를 가해 온다면 나로서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뒷날 통증에서 풀려나 아내가 이 사고의 전말을 눈치챈다면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특례법 적용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입원 첫날부터 아내의 진술을 기다리던 경찰은 오늘 내게 경찰서로 출두해달라고 전갈을 보냈었다. 자동차 종합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불가항력만 인정받으면 <공소권 없음> 판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아주 결단을 내버려야지. 나는 퉁퉁 부어있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엔진룸에 떨어져 있던 손전등. 이것만 있으면 네놈은…. 청소원의 바쁜 몸놀림에 쫓긴 먼지들이 열린 창 햇살 속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게 누구야? 문민정부 말기에 어떤 방송국이 정부의 문제성 있는 정책 하나를 내걸고 찬반 토론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 수치를 뉴스시간에 소개하면서 시장거리를 찍은 화면을 방영했었다. 문제는 그 화면에서 비롯되었다. 뉴스를 보다말고 돌아보니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다른 뉴스로 바뀌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눈에 익은 것이었다. 군중 속에서 얼굴이 클로즈업된 한 사내가 씩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었는데 애매하고 희극적인 그 표정이 주제와 맞아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인지 벌써 며칠째 뉴스시간에 같은 화면을 띄우고 있는 중이었다.
보통 노인네처럼 어머니도 역시 뉴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연속극이나 이산가족의 재회를 다루는 아침의 토크쇼라면 몰라도 초저녁잠이 쏟아질 무렵에 방영하는 이 뉴스를 시청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큰 아이의 초등 학교 입학식 준비 때문에 아내가 일찍 집에 들어가자 노인성 질환에다 화병까지 겹쳐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손자들과 며느리가 북적대는 집안 분위기가 답답하다며 식당에 나와 앉았다가 이 뉴스를 보게된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내의 표정에서 20수년 긴 세월을 단박 건너뛰었다. 처음 나는 어머니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이 노인네가 이제 치매까지 겹치는구나싶어 짜증과 함께 걱정부터 앞섰다. 서른이 가까운 낯선 사내의 모습에서 어떻게 6살 때 잃어버린 아들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성화는 불같았다. 나는 그날부터 식당을 아내에게 맡겨놓고 방송국으로, 시장거리로 뛰어다니며 그 사내를 찾기 시작했다.
원래 아버지 때부터 우리 식당은 목장과 도축장으로 이어지는 유통과정에서 최고급 육질의 고기를 확보하고 있어서 단골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동생의 실종으로 인해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아버지가 술병으로 죽고 나자 어머니 마저 전국을 헤매고 다녔으므로 종업원들 손에서 좌지우지되던 식당은 자연 피폐해져 갔었다.
군 제대 후 폐업 상태였던 식당을 물려받은 나는 5년만에 남의 소유로 넘어간 땅과 건물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옛 거래선을 복원하면서 나는 강원도 산골에 목장 몇 곳을 확보해놓고 하루에 두 마리 꼴로 소를 잡아 우선 등심, 안심, 갈비를 추려 내 식당에서 쓰고 나머지는 각 부위별로 해당 거래처에 연결시켜 소비하는 체인망을 만들었다. 머리부분에서 마지막 내장까지 취급업소로 직접 연결되어 소 전체를 버릴 것 하나 없이 완전히 소비시켰기 때문에 목장주와 체인점 소속원들은 함께 득이 되었다. 비록 가장 먼저 고기를 고르기 때문에 가격 면에서는 불리한 입장이긴 했지만 선도와 맛으로는 일대에서 아무도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일찍부터 박리다매와 맛의 이치를 깨달은 셈이었다.
토지수용에 걸려 3대를 이어온 터전을 내주고 신도시로 장소를 이전한 이후에도 나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예전의 체계를 유지했다. 그날 팔리지 않은 고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묵히지 않고 싼값으로 다음 유통단계에 넘겼다. 이렇게 엄격한 품질관리 덕분에 어중쭝한 여건으로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이 먹거리 골목에서 나는 오래잖아 맛과 정갈함으로 이름을 얻었고 정예화된 종업원은 20여명으로 불어났다. 손님의 취향과 편의 위주로 운영되었으므로 한번 들렀던 손님은 반드시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이던 식당을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거의 보름동안 화면 속의 시장 주변을 훑고 다녔다. 단 한 번 지나가는 화면에 등장했던 사내를 찾는 일은 전국 고아원을 안방처럼 돌아 다녔던 지난 20여년에 걸친 동생 찾기보다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그 화면을 이용, 몇 천만 원을 들여 일간지와 방송에 광고를 내 보내고서야 서울 근교 건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던 사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사내의 어깻죽지와 오른쪽 발등에 난 상처자국으로 바로 그가 당신의 둘째 아들임을 확인해냈다. 어깻죽지의 상처는 다섯 살 때 높은 곳에서 놀다 떨어지면서 나뭇가지에 찢긴 자국이었고 오른쪽 발등의 상처는 실종되던 해에 나와 장난을 하다 굵은 철사에 찔려 생긴 것이었다. 당시 걷잡을 수 없이 피가 솟구쳐 다리전체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에 발등의 상처는 나도 확인할 수 있는 증표였다. 나는 토지수용 보상금 수령 때문에 실종선고를 받아 말소했던 동생의 호적을 회복하고 주민등록도 만들어 동생을 법률상 완전한 우리의 가족으로 만들어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아내의 맥박이 규칙적으로 전해왔다. 담당의사로부터 장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은 이후부터 눈에 띄게 아내의 기분이 호전되고 있었다. 저녁에 일찍 끝내고 올께. 나는 벽시계를 확인하고 일어섰다. 어느새 11시가 지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간병인이 간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주방 아줌마가 보내 주었던 밑반찬 꾸러미를 간병인에게 건네고 병실을 나섰다. 단골 고객 중에 이 병원 의사가 있어서 용케 아내를 특실에 입원시킬 수 있었지만 교통사고인데다 타인의 고의가 개입된 사고 개연성이 높아 보험적용여부가 유보된 채 지금까지 검사비와 입원비를 현금으로 납부하다보니 그 비용도 수월치 않았다. 아직은 아무 말이 없지만 옆방의 환자가 위자료 문제를 들고 나오면 또 한번 회오리에 휩싸이겠지. 그러잖아도 동생의 훼방과 더운 날씨 때문에 식당의 매상이 부쩍 떨어지고 있어 이 달은 종업원들 봉급준비 만으로도 자금압박을 받을 정돈데 사고까지 겹쳤으니 한참 쪼들릴 것이다. 이 모든 재앙이 어느 하나 동생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내 딴엔 투자를 한답시고 신탁통장을 해약하여 부동산을 장만하려하니 어머니는 그것을 당신 이름으로 등기해 달라고 졸랐다. 동생을 찾았을 때 제 몫이 없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평생동안 동생의 환영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가 측은해서 나는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어차피 동생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병세로 보아 그리 오래 견뎌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누구 이름으로 한들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아내는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걱정을 했지만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는 집 부근의 아파트 한 채와 강변이라 전망이 좋은 주거용 대지 두 군데를 사들였다. 어머니는 당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권리증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처럼 기뻐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어머니는 특히 땅에 애착을 보였다. 죽기 전에 동생을 위해 집을 한 채 지었으면 좋겠다며 몸의 상태가 좋을 때면 혼자서 현장에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수의를 준비하고 장례에 관한 절차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전혀 예기치 않게 동생을 찾은 것이었다.
동생이 나타나자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마치 동생이 먼길을 떠났다가 성공을 하고 돌아온 것처럼 자랑을 했다. 동생을 잃어버린 것이 내 탓인 양, 걸핏하면 '인정머리 없는 놈.' 하며 면박을 주곤 하던 내게도 공을 돌리며 모처럼 활짝 웃어 주었다. 앓고 있던 병조차 잊은 듯 활기를 찾은 어머니는 그날부터 두어 달 동안 평생에 못 다한 모정을 동생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제주도나 설악산 같은 휴양지를 예약해놓고 그렇게 동행을 권해도 고사하던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전국일주를 하면서 즐거워 했고 동생에게 술 따라 주는 재미에 겨워 식당에서 손을 뗀 후 한번도 입에 대지 않던 불고기 1인분을 거뜬하게 소화해 냈다.
어머니는 동생에게 당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자 했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패물과 젊었을 때부터 장만한 뒤 식당이 빚에 넘어가고 내가 운영자금이 모자라 쩔쩔 맬 때도 움켜쥐고 있었던 3개의 금궤는 물론 내가 매달 주는 용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은행에 넣었던 적금도 모두 동생의 몫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구입하여 어머니 이름으로 등기했던 부동산도 마치 당신이 직접 장만한 것처럼 그 권리증을 모두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이 당연한 듯 당신의 소유를 모두 물려받자 어머니는 어느 날 동생의 손을 꼭 잡고 꿈을 꾸듯 세상을 떠났다. 얼굴에 가득 만족한 미소를 지은 채.
거리는 그새 잠에서 깨어난 듯 제법 부산해지고 있었다. 가정 일을 마친 주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어선 지 신호를 기다리고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도 제법 길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했음에도 차안은 후텁지근했다. 나는 열었던 창을 닫고 에어컨 단추를 눌렀다. 텁텁한 바람 끝에 희미한 냉기가 묻어 나왔다. 신록에 묻힌 고층 아파트 지붕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갑자기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동생의 행패가 다시 시작된 얼마 전부터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고 남녀관계로 비화된 내분이라는 억측까지 한 몫 하면서 이젠 피크시간에도 파리를 날리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때에 맞춰 자리는 지켜왔다. 그건 생업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였다. 지배인도 이런 나의 자세를 좋아했다.
동생의 출현으로 퇴색되긴 했지만 평소 나는 인복이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 업소를 운영하는 주인으로서 종업원 문제로 애를 먹지 않는 것도 그랬고 특히 지난 5년 동안 곁에서 식당을 관리해주고 있는 지배인을 생각하면 인복에 관해서는 더욱 확신을 갖게 했다. 업소의 남자 주인과 여지배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색안경으로 들여다보면 금방 꼬투리가 잡히는 법인데 우리 두 사람은 주종 이상의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 지금 이웃으로 퍼지고 있는 억측의 근원이기도 한 이러한 분위기는 물론 지배인의 능력과 인격을 바탕으로 한 아내의 대범한 이해가 있어 가능했지만 그리 흔치 않은 일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종업원들의 상태 파악과 식당관리에 관하여 나와 아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세밀하게 점검을 해주었다. 특히 손님과 종업원간에 마찰이라도 생기면 그녀의 역할은 더욱 돋보였다. 분방한 요즘 젊은 종업원에게 간과 쓸개를 쏙 빼놓고 손님을 접대하라고 권유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극복하고 숙련된 종업원을 많이 확보하는 것도 영업상 귀중한 노하우였으므로 손님은 물론 종업원의 자존심까지 챙겨주는 그녀에게서 지금도 나는 많은 것을 배우는 중이었다.
이처럼 식당경영에 필수요인인 지배인을 자칫 놓칠 뻔한 일이 있었다. 물론 동생 때문이었는데 그 시작은 어머니로부터였다. 동생을 찾은 어머니의 눈에 서른이 넘도록 아직 미혼인 지배인이 참한 색싯감으로 비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잖아도 드라마 속에서 당신 맘에 드는 배역의 여자 탤런트를 보면 둘째 며느릿감으로 점찍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그 탤런트의 이름과 배역뿐만 아니라 어떻게 알아냈는지 연락처 전화번호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동생이 돌아오자 착하고 세련된 용모의 지배인을 그냥 둘 리는 없었다. 그러나 전혀 결혼의사가 없기도 했고 동생과는 여러 모로 격차가 났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를 말렸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는 동생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금쪽같은 당신의 아들일 뿐이었다. 내 아들과 맺어지기만 하면 호박을 넝쿨째 얻는 거라며 큰아들과 며느리에게 풀어놓던 예의 그 과장된 몸짓을 섞어 그녀를 회유하려 들었다. 지배인은 어머니가 실망하지 않도록 완곡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머니. 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예요. 삼촌 같은 분이면 저 보다 더 좋은 상대를 고를 수 있을 겁니다. 좀 더 찾아보세요. 그러나 어떤 무례한 손님도 설득되던 그녀의 언변이 어머니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경하게 거절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 오히려 동생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운명할 때까지 틈만 나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지배인을 난처하게 했었다.
그런데 정작 일은 어머니가 죽은 뒤 벌어졌다. 내일이 없는 생활 속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성에 젖어 있던 동생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패물과 금궤까지 야금야금 팔아서 정신없이 돈을 쓰고 다니더니 지배인에게 동업 제의를 했던 모양이었다. 등기권리증만 가지고 있으면 완전히 소유권을 취득한 것으로 알고 있던 동생은 그 부동산을 팔아서 나보다 더 큰 식당을 차리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지배인의 단호한 거절에도 전혀 단념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동생을 찾아냈을 때부터 나는 재산문제가 수월치 않으리라 걱정을 하긴 했지만 설마 이처럼 꼬이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었다. 당시 나로서는 그 부동산을 모두 넘겨줄 수 없었으므로 동생에게 차근차근 취득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미 파산지경이었던 가업을 일으키며 내 젊음을 송두리째 투자한 결실이다. 다만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건 네가 손댈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동생은 펄쩍 뛰었다. 형 몫으로 식당과 아파트가 있는데 무슨 소리야. 나는 어머니가 준 것을 받았어. 손 대지 말어. 동생은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등기권리증 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동생이 급기야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채 식당 문 앞에서 비틀거리며 고객들을 내쫓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고 너희들은 평생 호의호식하고 살았지만 나는 길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떨며 굶주렸다. 내 몫을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술 취한 동생의 행동은 개차반이었고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중에도 동생은 지배인을 미행하여 동네 망신을 시키곤 했다. 어쩌면 어머니의 과대망상과 그리도 닮았는지 내가 재산만 내놓으면 지배인은 자신에게 홀딱 반해서 달려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였다. 전혀 남의 입장을 배려할 줄 몰랐다. 지배인에게 며칠 휴가를 줘서 여행도 보내보고 거처를 옮겨도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지배인을 비슷한 업종을 경영하는 친구에게 피신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생 대하기가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내가 지쳐가고 있음을 눈치를 챘는지 아내가 나섰다. 당신은 물러서서 모른 척 하세요. 오긴지 저력인지 아내는 동생과 직접 담판을 지으려고 했다. 평소 속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던 아내였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좋아요. 법대로 합시다. 도련님도 호적에 올라 어엿한 상속인이 되었으니 절반의 권리는 있어요. 그걸 지분이라고 하데요. 그것을 처분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아내는 동생이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식당의 유리창을 박살내고 집기를 때려 부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경찰을 불렀으면 싶은데도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내는 동생과 대치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살벌한 냉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진 돈이 이미 바닥나 있던 동생은 어차피 오래 끌 수 없었던 싸움이었다.
등등한 아내의 기세에 밀려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던 동생은 며칠만에 어슬렁대며 나타났다. 아마 법적 상속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러 다닌 것 같았다. 동생은 밑바닥 생활을 통해 터득한 눈치로 꼬리 내릴 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아파트는 양보할 테니 강변의 땅이나 주시오. 동생은 땅과 아파트의 시세도 꿰고 있었다. 아내는 환가성이 높은 아파트를, 동생은 아파트의 시가보다 두 배나 되는 강변의 땅을 차지하고 다툼은 일단 막을 내렸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우리도 동생 못 찾은 셈 칠 테니. 아내는 완강한 태도를 조금씩 누그러뜨리더니 공연한 손해에 뼈저린 듯 눈물까지 훔치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동생은 염려 놓으라는 듯 호기를 부리며 사라졌다. 미친개에게 물린 것처럼 그 후유증은 오래갔지만 식당은 다시 문을 열었고 지배인도 돌아왔다. 우리는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았다.
육교를 지나 좌회전 신호를 받으며 나는 우리 식당 전경을 바라다 보았다. 제대하고 가업을 이은 이후 15년간의 결실이었다. 원래 근린생활시설 단지였긴 했지만 처음 우리가 이곳에 식당을 개업한 뒤 손해를 극복하고 터전을 잡자 주변에 유사 업소가 속속 들어와 어느새 일대는 먹거리 골목으로 틀이 잡혀갔다. 그런데 주변이 아파트 밀집 지역이어선지 대체로 이 골목은 점심시간이 잘 형성되지 않았다. 남편들이 서울 등지로 출근하고 텅빈 베드 타운에는 주부와 아이들만 남기 마련인데 이들은 대개 분식이나 가벼운 음식을 찾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기라든가 생선회와 같이 술과 곁들여 먹는 음식을 취급하는 곳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야 손님들이 찾아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 식당에는 점심시간에도 수도권 근교에 있는 각 관공서라든가 개인 기업체 직원들이 몰려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일대에서는 우리의 고기 공급체계를 따라갈 업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익금으로 직원들의 봉급, 집의 생활비와 적금, 보험금 순으로 우선 충당했다. 그리고 지배인의 건의에 따라 수익금을 봉급 비율로 나눠 일정한 수당을 지급했다. 수익에 대한 배당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단 식구가 된 종업원은 결혼이나 군 입대와 같은 신분상의 변동이 아니면 거의 식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치르는 격전도 끄덕하지 않고 견뎌냈는지도 몰랐다.
그 당시 점심시간은 한 바탕 치열한 전투에 비유할 수 있었다. 일정한 시간에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손님들은 종업원들에게 단 1초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어느 한 곳이라도 소홀히 하여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식당전체 운영에 리듬이 깨지게 마련이어서 특히 종업원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손님들 시중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의 호흡까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나로서는 카운트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긴장 상태가 되곤 했다. 아아, 다시 그런 시절이 올 수가 있을까.
점심시간이 지나자 나는 샤워실에서 몸을 씻은 뒤 손전등을 잘 챙겨 넣고 간단한 차림으로 식당을 나섰다. 경찰서까지 천천히 걸어서 갈 작정이었다. 이제 이 증거를 제출하면 동생을 구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엔 어떻게 되더라도 우선 동생이 눈에 띄지만 않아도 살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불쌍한 인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술 취한 아버지의 손을 놓쳐 혼자가 된 뒤 고아원으로, 소년원으로 끌려 다녔고 끝내 일정한 직업도 없이 닥치는 대로 목숨을 이어가던 동생이었다. 그러던 그가 늦게나마 정상궤도로 돌아와 가족의 대열에 합류했다. 비록 살붙이 행세를 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시간을 줄이도록 나도 동생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선 거처와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결혼도 시켜 가정의 즐거움을 찾아주려고 했다. 그게 바로 형의 도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말았다. 동생을 만난 뒤 운명할 때까지 두 달 동안 곁에 끼고 앉아 행여 당신 가진 것을 단 하나라도 빼앗길까봐 내겐 전혀 의논을 하지 않았다. 금궤와 패물은 물론 적금까지 모조리 건네주고도 모자라 등기권리증까지 안기면서 어머니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재산을 요구하고 제몫을 챙기려 들까.
어쨌든 동생은 행운과도 같은 그 기회를 스스로 짓이겨 버렸다. 가족이라고 찾고 보니 자신과는 전혀 별세계 사람들처럼 느껴졌을까. 그 때문에 되찾은 행운을 감사하기 보다 지난날의 상실감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까. 걷잡을 수 없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휩싸여 동생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를 깨부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좀체 채워지지 않는 그 허기 때문에.
동생은 자기 몫을 챙기고 간 뒤 처음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급하게 구는 깜냥으로 봐서 강변의 땅을 제값에 처분하지는 못했겠지만 얼마를 받았든 그 돈은 동생에게 엄청난 횡재인 셈이었다. 놀면서 통 크게 쓴다고 해도 10년은 족히 견딜 수 있을만한 액수였다. 그러나 욕심은 채울수록 커지고 돈은 쓸수록 헤픈 법이었다.
동생은 몇 달간 걸신 든 듯 돈을 쓰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런 부류가 돈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술과 여자였고 파리 떼 같은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줄어드는 통장의 액수에 반비례하는 초조감 때문이었던지 동생은 아파트 공사장의 함바식당을 인수했다고 한다. 대단위 공사장의 부속식당에서 제 딴엔 열심히 했다는 증표로 내세우며 침을 튀겼는데 규모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그건 보증금 천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동식 무허가 밥집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경제위기로 건설경기가 주저앉자 동생은 그것 마저 다 털어먹고 근 1년만에 다시 나타났다.
처음에는 근신하는 듯 하던 동생은 어느 날 히죽히죽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염산 병을 꺼내더니 식당 주변의 조경용 나무에 그 액을 묻혀 시커멓게 죽게 만들곤 하면서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그런 동생의 은근한 협박에 질려 나는 아내가 그토록 긴 싸움 끝에 확보한 아파트를 맥없이 넘겨주고 말았다. 이젠 더 줄 것도 없다고 쉽게 생각했고 다시는 동생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아파트를 가져간지 6개월만에 분신자살용이라며 석유가 가득 담긴 18리터 짜리 플라스틱 통을 들고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결혼 상대자라는 화사한 차림의 여자와 함께.
서울과 경기북부 일원에 이미 여러 차례 오존 주의보가 발령됐고 연일 32-3도의 폭염으로 푹푹 찌고 있었다. 남부지방에는 폭우로 인해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여긴 마른 장마가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어제 밤의 소나기 따위는 이런 이상기온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파트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공원의 나무그늘이나 벤치 같은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비료를 보낼까. 속과 골이 모두 텅 빈 인간들. 햇볕정책 좋아하네. 대부분 늙수그레했지만 젊은이 몇 명도 팔짱을 끼고 노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아직 약속시간이 30분 정도는 남아 있어 나는 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서해교전은 속수무책이 대책이었던 정부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어. 그러나 어쩌겠어. 우리가 껴안아야지. 동족인데. 웃기지 말아. 깡패들한테 돈 줘 버릇하면 끝이 읎어.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것도 몰러. 간간이 어떤 자동차회사의 운명과 함께 주가상승 문제도 끼어 들었지만 주로 서해교전 사태와 관광객 억류, 그리고 아침에 방송됐던 탄저병 문제들을 곱씹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오른쪽 길 중앙에 설치된 화분대 앞에 퍼지르고 앉은 노파를 바라보았다. 초라한 입성을 한 그 노파는 바닥에 놓인 소쿠리 속에다 열심히 완두콩을 까놓고 있었다. 하얗게 샌 머리칼과 꾸부정한 허리만으로도 상당히 노쇠해 보였다. 보자기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장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요즘 들어 동생이 행패를 부릴 때마다 종종 원망 섞어 어머니 생각이 났었다.
신앙처럼 동생 찾기에 몰두하던 어머니는 동생에게 죄 된다고 나의 대학진학도 만류했었다. 덕분에 일찍 가업을 이어받고 장사에 눈을 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꼴이람.
다시 나타난 동생은 처음에는 이제 마음 잡고 살 테니 아파트 한 채만 사달라고 사정 조로 늘어붙었다. 여편네 행세에 이력이 난 듯한 여자는 한술 더 떠 아주버님이 어떻고 형님이 어떻고 하며 평생 어머니 슬하에서 고생 모르고 복 받고 자랐으니 이젠 그 복을 좀 베푸시라고 능청을 떨었다. 아내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무슨 돈으로. 뭘 맡겨 뒀는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것들이 남 애면글면 장만한 재산에 눈독을 들여. 눈독을 들이긴. 아내는 게거품을 물었고 말 한 마디도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뻔뻔한 그들이지만 안주인의 독설에는 뜨끔한 듯 일단 주춤했다. 나를 상대하려던 그들은 반쯤 엉덩이를 뺐다. 그러면서 청하지도 않았음에도 식당 일에 빈대붙어 가장 힘든 숯불갈이도 마다 않고 아예 뿌리를 내릴 듯 설쳐댔다. 며칠 동안 그런 식으로 신경을 건드리던 동생은 여자만 남겨두고 이번에는 고기의 체인망에 엉겨붙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독야청청한 척 해도 털면 먼지 없을까. 어디서 배웠는지 문자까지 써가며 목장으로 도축장으로 헤매고 다니는가 했더니 배달 차의 차적까지 훑어가면서 식당의 약점을 캐내려 눈알을 굴렸다.
아내는 지난번과 달리 걸핏하면 경찰을 불러댔다. 동생은 몇 차례 즉결에 끌려가서 구류를 살고 나오더니 다시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만 사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형한테는 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잖우. 엄마를 봐서라도…. 어머니만 들먹이면 한없이 약해지는 나의 약점을 동생은 또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어야 말이지, 난 벌써 면역이 되어 있었다. 개 같은 새끼. 형 대접해줬더니…. 동생은 갑자기 표변하며 욕지거리를 쏟았다. 너희들 잘 사나 보자. 어디. 아 새끼들 배때기 간수나 잘 하라우. 공비들의 말투까지 흉내내며 동생은 품에서 식칼을 꺼내 허공에다 휘둘렀다. 뿐만 아니었다. 동생은 손님이 몰려들 시간만 되면 식당 앞에서 식칼이나 석유통을 들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런 싸가지 없는 집구석에서 무얼 처먹겠다고. 그러면서 허연 흰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손님들의 위아래를 부라렸다. 그러다가 신고를 받고 경찰관이 현장에 출동할 때쯤이면 동생은 양처럼 온순해져 있었다. 단골손님들은 하나 둘 발길을 돌렸다.
사실 우리로서는 더 양보하거나 건네줄 것도 없었다. 동생은 우리가 도깨비 방망이라도 가진 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살고 있는 집과 식당은 생활근거였고 그나마 저축했던 여유자금은 그 부동산 구입할 때 동이 났었다. 그래서 지난번 아내가 그토록 아파트에 집착을 했었는데 제 값 받고 팔려고 미루다 기회를 놓치고 결국 동생에게 빼앗겨버린 것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는 것이 없자 급기야 동생은 아내를 살상할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동생은 아내가 있는 한 더 이상 아무 것도 타낼 수 없다고 판단한 듯 했다. 현장에 손전등을 두고 온 것도 모를 만큼 다급했겠지만 이젠 나도 생존에 위협을 받을 만큼 다급해지고 있었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누? 느릿한 목소리에 놀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주름투성인 노파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노파의 손은 부지런했다. 연상작용처럼 나는 다시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제 분이 없으세요? 나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여든쯤 되었을까. 어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웬걸, 둘이나 있지. 심심해서 소일거리로 이 짓을 하고 있어. 노파는 누군가와 말이 하고 싶어 안달한 사람처럼 눈시울을 실룩이고 있었다. 때가 탄 연한 갈색 보자기 위에는 자루 3개가 놓여 있었는데 조그만 사발에 수북히 담긴 완두콩 자루, 하얗게 껍질을 벗긴 도라지 자루, 그리고 한 홉들이 유리컵을 세워놓은 찐쌀 자루였다. 하루 얼마나 버세요?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 대중읎어. 삼천 원도 벌구, 재수 좋으면 오천 원도 벌구. 돈만 생기면 주머니에 감춰 넣던 어머니의 몸짓이 떠올라 울컥 슬픔이 치밀었다. 아드님은 뭐하세요? 큰놈은 미국 갔고 작은놈은 사업해. 노파의 지친 눈빛이 쓸쓸해 보였다. 용돈 하라고 작은놈이 한 달에 10만원씩 주는데 별로 쓸데가 읎어. 모아뒀다가 큰 놈 나오면 줘버리지. 노파의 손가락 끝이 둥글고 거칠었다. 그럼 작은 아드님과 함께 사세요? 나는 무슨 사업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다. 나 혼자 사는 게 편해. 며느리가 함께 살자고 하는데 그만 두라고 그랬어. 즈이 동기끼리 싸우지나 말았으면 좋겠어. 노파의 말소리가 눅눅하게 들렸다. 매일 어디 봉사한다고 나 다니는 사람이 지 동기한테는 모질기 짝이 읎어. 노파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기간끼리 마주 앉는 것 좀 봤으면 원이 읎겠어. 자식들 화합하는 게 부모에게 적선하는 거야. 그보다 나은 효도가 어디 있어? 나는 가슴이 뜨끔해서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동생의 환영에 갇혀 살았던 어머니는 눈을 감을 때까지 내게 큰 정은 주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들어 더 측은해지는 것은 웬일일까. 동생의 행동이 거칠어질수록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났었다. 나는 노파에게 완두콩 한 봉지를 사고 만원을 내밀었다. 들어가실 때 맛있는 거 사 잡수세요. 자칫 나는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생전의 어머니한테 이런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했던가. 나는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빠져 나왔다.
멀리 경찰서가 보이는 건널목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생이 나타나고 어머니 장례를 치른 이후 주위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갈퀴가 되어 내 가슴을 긁었다. 나도 처자식을 간수할 책임이 있어. 식구에게 가해오는 동생의 음모와 위해를 막아야 해. 지금까지 큰 욕심부리지 않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해왔는데 왜 가진 것을 다 빼앗겨야 해. 나는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누군가를 붙잡고 내 행동을 변명하고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왔다.
나는 동생이 내뱉은 사악한 말과 행동들을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전부 죽여 버릴 테야. 칼을 휘두르고 염산 병을 꺼내들던 동생의 행태를 적개심으로 버물어봐도 좀체 개운하지 않았다. 붕대를 칭칭 감은 아내의 모습 역시 이런 망설임을 어쩌지 못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주눅이 드는 것인가. 북측에 대한 정부의 대책처럼 어쩌면 동생의 행동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 비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뀐 순간 나는 슬픈 얼굴을 한 노인의 환영을 봤다. 어머니인지 공원의 그 노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동기간이 마주 앉는 것 좀 봤으면 원이 읎겠어. 빠방, 신호에 묶여있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꾸물꾸물 면장갑 속에 감춰뒀던 손전등을 꺼내들었다. 안돼. 그 놈을 내쫓아야 돼. 그러나 나는 이미 대항할 기운을 거의 소진하고 있었다. 두고봐. 그 앤 꼭 저렇게 나타날 테니. 그새 차량들의 움직임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는 바스러지도록 힘껏 쥐고 있던 손전등을 차도를 향해 내던져버렸다. 허탈했다.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은 나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내 딛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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