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밍의 예술 - 구멍 뚫려 거래 취소됐던 피카소 1억달러 유화 '꿈'
경매價 신기록 뉴스 이후 7년 만에 같은 사람에게 훨씬 더 비싼 값에 팔려
전두환 컬렉션의 교훈 - 구매자 관심도 높을 때
믿을 만한 중개商 거치면 그림 값에 프리미엄 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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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비즈니스 격언 중에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이 실기(失機)'라는 말이 있다. 물론 미술 시장에서도 통하는 말이다.
지난 3월 서울옥션의 경매 낙찰률(전체 위탁작품 중 판매작품의 비율)이 82%로 메이저 경매(가장 값진 작품들을 모아 1년에 4번 정기적으로 하는 경매)로는 2007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국내 미술 시장은 2007년 정점을 찍은 뒤 7년째 불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낙찰률이 뛰어오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타이밍'이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국내 양대 경매 회사인 서울옥션과 K옥션에서 열렸던 '전두환 컬렉션 경매'가 끝난 직후였고, '전두환 효과'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 넉 달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수집한 미술 작품 640점이 72억여원에 팔렸다. 언론마다 대서특필했고, 미술품 컬렉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경매 회사들에 새 고객들도 생겼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직후에 열린 메이저 경매였으니 그 덕을 좀 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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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유화 '꿈(The Dream·1932년작)'
미술 작품은 구매자의 관여도가 매우 높은 전문품이기 때문에 구매자의 심리가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친다. 구매자의 심리에는 시기도 크게 영향을 준다. 마케터 입장에서는 전체적인 시장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특정 작가나 그 작가의 특정 스타일 작품이 뜨는 적기(適期)를 맞춰서 그림을 내놓는 것도 필요하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작년 가장 화제가 됐던 거래는 피카소의 유화 '꿈(The Dream·1932년작)'이 개인 거래에 의해 1억 5500만달러(약 1600억원)에 팔린 것이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28세 연하 애인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린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피카소는 만 45세 때 17세 소녀 마리-테레즈를 만났고, 이후 9년 동안 정신없이 사랑에 빠졌다. 당시 피카소는 중년이 됐고, 아내인 올가와 사이도 나빠지고 있었다. 마리-테레즈는 이런 피카소에게 현실 도피처였다.
잠꾸러기였던 어린 애인의 모습을 둥글둥글하고 아름답게 그린 피카소의 마리-테레즈 월터 초상화는 인기가 좋다. 이 중 '꿈'은 원래 2006년 한 번 팔릴 뻔했던 그림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 호텔 업계의 갑부인 스티브 윈(Wynn)이 갖고 있던 것인데, 뉴욕의 헤지펀드 사업가이자 유명 컬렉터인 스티븐 코헨(Cohen)에게 1억3900만달러에 팔기로 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윈이 지인들을 불러 놓고 마지막으로 이 그림을 보여주다가 흥분한 나머지 자기 팔 뒤꿈치로 그림을 쳐서 구멍이 뚫렸고, 복원을 했지만, 거래는 취소됐다. 그런데 그 그림이 7년 만에 같은 사람에게, 그것도 훨씬 더 비싼 가격에 팔린 것이다. 이 역시 타이밍과 관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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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
이 그림의 거래가 취소되고 4년 뒤, 이 그림과 얽힌 사연이 잊힐 즈음인 2010년에 뉴욕 크리스티 경매 회사에서는 피카소가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린 다른 그림인 '누드와 푸른 잎사귀와 흉상'이 1억650만달러에 낙찰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로선 미술 경매 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이후 피카소의 마리-테레즈 초상화를 가지고 있는 컬렉터들이 그 그림들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고, 예외 없이 비싸게 팔렸다. 2011, 2012, 2013년 초에 각각 마리-테레즈의 초상화가 뉴욕과 런던의 메이저 경매에 나와 4000만달러가 넘는 값에 팔렸다. 그렇게 인기가 치솟고 있었던 2013년 3월에 마침내 '꿈'이 팔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래 사기로 했던 스티븐 코헨이 2006년의 1억3900만달러보다 훨씬 비싼 1억5500만달러에 산 것이다.
피카소의 '꿈'이 비싸게 팔린 비결 중 또 하나는 유통 경로다. 이 그림의 거래를 중개한 사람은 윌리엄 아쿠아벨라(Acquavella)라는, 2대째 뉴욕에서 손꼽히는 거물 중개상이다. 고급 갤러리들이 모인 뉴욕 맨해튼의 '어퍼 이스트(Upper East)'에 자리 잡고 있는 대표적인 하이 엔드(high-end) 갤러리다. 그림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굳이 이런 비싼 유통 경로를 취하는 이유는, 물론 나중에 그만큼의 프리미엄이 그림 값에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은 이렇게 타이밍과 유통 경로에 따라 가격이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아주 복잡한 상품인 셈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