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립미술관 ‘탄생 100주년’ 전시
|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展
| 20일간 베트남 머물며 전쟁화 스케치… “전쟁현장보다 꽃 통해 취향 드러내”
|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展
| 쿠스코 등 방문해 그린 기행회화 조명… 마거릿 미첼 생가서 직접 그린 작품도
전투 헬기와 탱크, 총성이 오가는 전장이지만 야자수 나무가 울창한 숲과 꽃이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던 1972년 정부는 화가 10명을 선발해 베트남으로 보내 전장을 기록하도록 했다. 그중 한 명이자 유일한 여성 작가였던 천경자(1924∼2015·사진)가 남긴 그림 ‘꽃과 병사와 포성’(1972년)이다. 국방부가 소장하고 있었던 이 작품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에서 8일 개막한 전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통해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 정부 의뢰로 베트남전 기록화 그려
천경자의 베트남전쟁 기록화 ‘꽃과 병사와 포성’(1972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꽃과 병사와 포성’은 폭 185cm, 높이 284cm로 천경자 작품 중에서 손꼽히는 대작이다. 독특한 것은 다소 낭만적으로 보이는 그림의 내용이다. 전시장에서 함께 볼 수 있는 ‘헬기 수송작전’ ‘매복작전’ 등의 스케치는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캔버스 회화는 풍경의 존재감이 더 크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작가가 전쟁 현장보다 ‘꽃’이라는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더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천경자가 베트남전쟁 현장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문화공보부가 1972년 6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이마동을 단장으로 김기창 등 10명에게 전쟁 기록화를 의뢰했기 때문이었다. 화가들은 약 20일간 베트남에 머물며 스케치했고 돌아온 뒤 전쟁을 기록한 작품을 남겼다. 천경자는 ‘꽃과 병사와 포성’과 ‘목적’ 등 두 점을 그려 200만 원을 받았다. 덕분에 당시 좋지 않았던 경제 사정이 나아져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옷감집을 구경하는 자신을 그린 ‘옷감집 나들이’(1950년대 초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 작품이 전시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여성 동양화가 23인의 작품 세계를 함께 조명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작품과 작가의 삶에 녹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 짚는다. 천경자가 1950년대에 옷감집을 구경하는 자신을 그린 ‘옷감집 나들이’도 이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다. 개인 소장가가 갖고 있던 작품으로 여러 옷감을 구경하는 작가의 옆모습이 보이고, 옆 검은 우산을 쓴 인물은 함께 나들이를 갔던 작가의 어머니라고 한다. 11월 17일까지.
● 중남미 등 풍경 담은 ‘기행 회화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는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가 6일 개막했다. 이곳에서는 1998년 천경자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작품을 2002년부터 선보여 왔다. ‘천경자의 혼’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에 이어 10년 만에 재단장한 전시로 회화, 드로잉 등 30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천경자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남긴 ‘기행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채색화와 여인상으로 구성한 ‘환상과 정한의 세계’, 기행 회화를 담은 ‘꿈과 바람의 여로’, 해외 문학과 공연 등 문화 예술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예술과 낭만’, 작가가 저술한 수필집을 정리한 ‘자유로운 여자’ 등 4개 부문으로 이뤄졌다.
중남미를 여행하며 잉카문명의 발상지인 쿠스코를 방문해서 라마를 그린 ‘구스코’(1979년), 1989년 카리브해 연안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났을 때 그린 ‘자마이카의 고약한 여인’(1989년) 등 이국적인 지역을 방문한 작품부터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배경인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저자 마거릿 미첼 생가에 직접 가서 그린 문학적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천경자, ‘조부상’, 1943년.
천경자, ‘생태’, 1951년.
천경자, ‘청춘의 문’, 1968년.
천경자, '사군도 원제목은 '‘향미사(響尾蛇)’, 1969년.
천경자, ‘초원 II’, 1978년, 105.5x130cm, 종이에 채색.
천경자, ‘이탈리아 기행’, 1973년.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년, 종이 위의 안료.
천경자, ‘그라나다의 도서관장’, 1993년.
천경자 화백 생전의 모습.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가는 전라 남도 고흥(高興)에서 태어났다. 호(號)는 옥사(玉史)이다. 일본 도쿄 여자 미술 전문 학교(東京女子美術專門學校)를 다니면서 1943년 제22회 조선 미술 전람회(鮮展)에 [조부상(祖父像)], 1944년 제23회에 [노부(老父)]를 출품하였고, 1944년 졸업하였다.
광복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교원(敎員) 생활을 하였다. 1955년 [정(靜)]으로 대한 미술원(大韓美術院) 협회전에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1954~1974년 홍익 대학교(弘益大學校) 교수를 지냈고, 1963년 도쿄 니시쿠라 화랑(西村畫廊)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65년 도쿄 이토 화랑(伊藤畫廊)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1969년 유럽과 남태평양을, 1974년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미술의 안목을 넓혔으며, 그 곳에서 얻은 이국 풍물을 소재로 독특한 색감과 형태미의 그림을 그렸다.
월남전(越南戰)에 종군(從軍)하여 기록화를 제작하였다. 1970년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연수하였고, 각종 초대전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1년 서울 특별시 문화상, 1975년 3⋅1 문화상, 은관(銀冠) 문화 훈장 등을 받았으며, 1993년 예술원(藝術院) 회원이 되었고, 대한 민국 미술 전람회(國展) 초대 작가⋅심사 위원⋅운영 위원, 대한 민국 미술 대전(美展) 운영 위원 등을 지냈다.
근대 한국화에서 대표적인 여성 화가의 한 사람으로, 꽃이나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으며, 시간을 초월하여 이국적이고 환상적(幻想的)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의식과 감각의 지층을 탐색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1950년대에는 뱀을 주제로 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상의 묘사를 넘어 생태적인 색채 감각의 순수 조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에서 벗어나 문학적⋅설화적(說話的)인 면을 강조하면서 여인의 한(恨)과 꿈, 고독⋅환희를 두껍고도 밝은 채색의 화풍(畫風)을 구사(驅使)한 색채 화가이다.
작품으로 [꽃과 병사(兵士)]⋅[꽃다발을 안은 여인]⋅[나비와 여인]⋅[생태]⋅[정(靜)]⋅[청춘의 문](1968년, 89×145cm, 경기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향미사(響尾蛇)]⋅[환(歡)](1962년, 경기도 용인 호암 미술관) 등 약 1,000여 점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여인 소묘(素描)]⋅[천경자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한(恨)] 등이 있다.
천경자,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1989년.
천경자, ‘화병이 된 마돈나’, 1990년, 종이에 채색, 38×45.5cm.
천경자, ‘애틀렌터 마가렛 밋첼 생가’, 1987년, 종이에 채색, 31.5×40cm.
천경자,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 1989년.
천경자, ‘미인도’, 1977년.
천경자, ‘모자를 쓴 여인’.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전시기간 : 2024.08.08.~2024.11.17
◦ 참여작가 :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86점)
◦ 전시 구성 : 23명의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미술제도가 작가의 삶과 작품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
-1전시실 : 격변의 시대
-2전시실 : 사회와 미술제도 I 일제강점기, 미술교육과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 미전)》(1922–1944) 청전화숙, 낙청헌, 여자미술전문대학(일본 도쿄) 연혁 《조선 미전》 연혁, 수상 작품
-3전시실 : 사회와 미술제도 II 광복 이후, 미술교육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1949–1981) 고암화숙,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대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수도여자사범대학 연혁 《국전》 연혁, 수상 작품 창경궁과 예술 기사로 보는 동양화의 흐름
-4전시실 : 동양화 단체
-5전시실 : 여성, 삶, 예술
-6복 도 : 작가 연보, 자료
◦ 관람료 : 무료
이숙자, ‘캠퍼스 훈련생’, 1982년
장상의, ‘다시래기’, 1988년.
출처: 동아일보 2024년 08월 13일(화) 김민 기자/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