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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하고 무언가 구르는 소리가 고요하던 방안을 힘차게 울리더니, 잠깐의 정적 후, 붉은 머리의 소녀가 침대 밑에서 혹이 난 머리를 부여잡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때에 머리부터 떨어져서인지, 아니면 잠이 덜 깨서인지 그녀는 해롱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더니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분명히 내 방이지?"
핑크빛 프릴이 달린 푹신한 침대와 창밖으로 보이는 새벽하늘을 보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드레마의 성 안에 있는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렇지만 몸이 마치, 파도를 타고 위아래도 흔들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긴 마차 생활로 인한 후유증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 위의 이부자락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불이 그녀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쓸려 내려오는 통에 그녀는 바닥과 한 번 더 헤딩을 해야 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란듯한 시녀의 목소리와, 급히 달려오는 듯한 여기사의 갑옷 부딪치는 금속음도 들려왔다. 카린은 바닥에 뻗은 상태로 한쪽 팔을 간신히 들어 흔들어보이며 대답해주었다.
"아니, 그냥 넘어진 거야. 걱정하지 마!"
"예...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응. 괜찮아."
"다행입니다. 전하."
여기사들이 혹시나 싶어 그들의 여왕인 카린의 방을 돌아보며 꼼꼼히 점검하는 동안, 시녀는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제대로 누울 수 있도록 거들었다. 여왕이 무사히 잠자리에 돌아가고, 방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조용히 인사를 하고서 방을 나갔다.
"내가 민폐라니까..."
카린은 잠도 못자고 자리를 지키는 저들에게 미안한지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여왕이다. 비록 소국이지만, 드레마라는 나라의 여왕이다. 그리고 여왕이라는 자신 하나 때문에 최근에 많은 이가 죽었다. 여왕을 지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거워..."
카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허공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나 무거웠다. 전에도 충분히 무거웠거늘... 자신 때문에 죽는 사람까지 생기자 더욱더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뒤척거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베게 밑에 손을 넣고서 얼굴을 파묻어보기도 하고, 이불을 돌돌 말아 서커스의 곰이 공을 안듯이 안아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엉망으로 구겨진 잠자리 위로, 한 쪽 가슴이 반쯤 드러난 상의와 허벅지의 고운 살결이 드러날 정도로 흐트러진 잠옷이 보여주듯이, 한 번 헝클어진 수면은 다시 청하기가 쉬어보이질 않았다.
"에잇, 관두자!"
카린은 잠자리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어차피 창밖으로 여명의 빛이 조금씩 비치는 것으로 보아, 이제 와서 다시 자봐야 얼마못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된거,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평소에 세수조차 거를 만큼 게으르던 모습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이 시작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있어? 나, 세숫물 좀."
"...예? 예! 전하."
그녀의 말에 문 너머에서 졸던 시녀는 크게 놀라 늦게야 대답했다. 평소에는 아침 회의 직전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발버둥을 치던 어린 여왕이, 외국 한번 다녀오고서는 동전 뒤집듯 바뀌어 이렇듯 여왕다운 품새를 조금이나마 풍기기 시작하자, 감격한 시녀는 평소보다도 더욱 발빠르게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응, 고마워."
카린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작은 대야가 앞에 바쳐지자, 우선 손끝을 수면에 담가보았다. 느낌이 조금 뜨거운지라 그녀는 시녀에게 "찬 물 좀 넣어줘." 라 말하였고, 시녀는 따로 준비하고 있던 작은 통에 있던 물을 대야에 적당히 부었다.
"옷은 음... 그래, 이제부터라도 회의 때는 제대로 차려입자. 적당한 걸로 골라놔."
"예. 전하."
시녀가 옷장을 열고 옷을 고르는 동안, 그녀는 대야 위로 고개를 숙이고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아침 세수를 하였다. 머리도 감고 볼일을 끝마친 그녀는 수건을 내밀어오는 시녀에게 머리를 맡겼다.
'성 안 사람들은 이렇게 부지런하구나...'
시녀의 손에 머리를 말리는 일을 맡기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 저 세숫물만 해도 그렇다. 자신이 언제 일어날 줄 알고, 저 뜨거운 물을 준비해 놓았을까? 여왕이 아침에... 그것도 평소에는 거르는 게 일수인 세숫물을 준비하고자 성 끝에서 끓인 물을 날라와, 여왕의 방 옆에서 밤새도록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여왕이 발소리에 깨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물이 식지 않게 계속 물을 데워오면서... 밤새도록 말이다.
"끝났습니다."
"응."
생각에 잠겨있던 카린의 정신은 시녀의 목소리에 현실로 귀환했다. 그녀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보고는 거울에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는 전혀 여왕처럼 보이지가 않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소녀가 헝클어진 잠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어깨 밑까지 자란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물기가 남아 촉촉했지만, 고귀한 육신을 지녀야 할 여왕다운 신성한 느낌은 보이질 않았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어제까지 긴 마차생활을 해왔던 덕에 그녀의 얼굴과 몸은 그 전보다 더욱 말라보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오른뺨에 남은 세 손가락을 합친 크기의 화상자국이 아직도 흉하게 남아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아직 아무는 기간이라 나중에는 좀 나아지긴 하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 흉터는 감수성 예민할 시기의 소녀에게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인 것이리라.
"하아... 내가 봐도 나는 참 여왕처럼 보이질 않는단 말야..."
위엄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뒤에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시녀에게 돌아가, 잠옷을 벗어 내밀었다. 속옷차림인 자신의 모습은 예전만해도 알맞게 통통한 몸뚱이였는데 최근에는 고생을 해서 그런지 좀 마른 것 같았다. 여자의 매력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모습에 심숭맹숭한 기분이 들어 우울해져갔지만, 시녀가 해주는 위로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전보다 많이 여성스러워 지셨네요. 허리도 가늘어지셨고... 허벅지도 좀 얇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예, 좋은 옷만 입고 나가시면 남자들이 줄을 서겠는데요. 호호."
"재상도 그렇게 생각할까?"
"물론... 그건 아니죠. 재상님이 아무에게나 눈 돌릴 분이신가요."
마지막 말이 뭔가 앙심이 가득한 말투였지만, 카린이 따지기도 전에 시녀는 휘릭 몸을 돌려 옷을 고르는 시늉을 하였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카린이 불만스런 얼굴로 양 손을 허리에 대고 발을 탁탁 튀기는 동안, 그 사이 옷을 골라내었는지 시녀는 옷장에서 옷을 한 벌 새로 꺼내 그녀에게 내밀어보였다.
짧지만 둥글게 부푼 흰 소매에 아슬아슬하게 짧은 분홍빛 치맛자락, 그리고 가슴에는 꽃을 연상시키는 큰 장식이 붙은 예쁜 옷이었다. 확실히 괜찮은 옷이기는 했지만 그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던 카린은 그중에도 짧은 치마가 가장 어색했다.
"괜찮기는 한데... 너무 어려보이지 않을까? 좀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데..."
"그렇습니까... 그치만..."
카린의 말에 시녀는 옷장을 한 번 돌아보고는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였다. 옷장에는 죄다 그런 옷들 뿐, 어른스러운 옷이라고는 단 한 벌도 보이질 않았다.
"베르제바브 대공님이 전하께서 입으실 옷을 주시기 때문에... 아무래도..."
"아우... 결국 할아버지가 문제잖아... 왜 저런 옷만 사주고선 감감무소식이냐고..."
금이 간 댐의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물줄기가 금을 더욱 갈라놓듯이, 카린은 자신의 친할아버지 베르제바브 대공에 대한 불만이 떠오르자 눈앞이 시녀에게 지금껏 쌓인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난 여왕인데... 왜 내가 갖고 싶은 것 하나 못가지게 하냐고, 옷도 내가 원하는 걸로 사주면 안 되냐고? 아니 그전에 적어도 내가 골라 입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옷 좀 사달라고 하면 때리기만 하고... 있는 옷 고쳐 입으라니, 옷이 저렇게 쌓였는데 뭘 또 사 달라 하니 하질 않나. 완전 노랭이에 왕 짠돌이잖아. 거기다가 먹는 거, 입는 거 죄다 할아버지가 허락해줄 때까지 눈치나 살살 봐야하고... 정말이지 치사하잖아? 안 그래...?"
"예? 예... 전하... 그게..."
"응?"
시녀가 자신의 뒤쪽에 시선을 두고서 불안 불안한 얼굴을 하자, 카린은 무언가의 불길한 직감에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설마... 설마... 할아버지가 뒤에 와있는게 아닌가 싶어,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인물이 베르제바브 대공이 아님에 안도했다.
"뭐야... 리프 공작이야? 할아버지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카린의 말에 문지방에 기대 서있던 여성, 리프 공작이라 불린 그녀는 속옷차림인 여왕의 정면에서 짧은 녹색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는 술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들었어요... 전하. 쿠쿡."
"...응? 뭐가?"
"전부 다~ 들었다고요. 전.하. 짠돌이에 노랭이에 툭하면 때린다니, 눈치나 봐야한다니, 치사하다니... 쿠쿠."
"...저기... 리프 공작.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니 가지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원하는거 다 들어줄 테니까... 제발 할아버지 한테는..."
"아.니.요. 대공님께 일러바치는 쪽이 더 재밌을 거 같네요. 그럼 목 닦고 기다리세요... 이야, 간만에 재밌어지겠네."
공작은 그녀가 붙잡을 새도 없이 간접 키스를 날리고는 음흉한 웃음을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물론, 이대로 그냥 보낸다면 다음에 대면할 인물은 악마보다 악독한 할아버지일 것이 불 보듯 뻔 하기에 그녀는 그대로 공작의 뒤를 쫓아 달렸다.
"전하! 전하! 체통을..."
그녀의 뒤에서 시녀가 무언가를 소리쳐 말해왔지만, 목에 동아줄이 걸린 거나 마찬가지인 그녀에게는 앞서 빠르게 걷는 '교활한 이간질쟁이 마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방을 뛰쳐나가고, 이어 집무실을 한달음에 통과한 그녀는 뒤에서 방문을 지키던 여기사들의 비명소리를 무시하며 공작의 뒤를 쫓아 복도를 달렸다. 느긋하게 걷는 것 같은데 요리조리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는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질 않자, 카린은 머릿 속에 드는 잡생각은 싹 지워버리고 죽어라 달렸다. 누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라, 전하?"
갑작스런 목소리와 함께 자신을 가로막아 서는 키 큰 남자를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카린은 몸을 던지듯 그 남자의 품에 뛰어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십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주홍 머리와 특유의 자상한 미소를 보고서야 그가 디자엘 재상임을 알아본 그녀는 급한 일이 있는지라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째서인지 재상이 그녀를 놔주지 않고 오히려 양팔을 벌려 망토 안쪽으로 깊숙히 끌어안아버리는 통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재상! 재상! 이것 좀 놔줘! 나 지금..."
"그건 좀 곤란합니다. 전하."
품 안에서 날뛰는 그녀에게 디자엘 재상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몸에서 나는 씁쓸한 차 냄새 같은 것이 어째서인지 품속에서 몸을 빼기에는 아쉬운 미련이 자라났다. 거기다 너무나 가까이서 보이는 그의 미소와 매력적인 주홍빛 눈동자에 카린은 공작을 쫓아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잠시 동안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렇지만 목에 느껴지는 동아줄의 거친 촉감에 뒤늦게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다시 날뛰며 그 이유를 물었다.
"왜?"
"그야, 전하께서 스스로를 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
"이제 아시겠습니까?"
"응... 나... 지금 속옷차림이지?"
"예, 전하."
"그 상태로 뛰어다닌 거지? 사람들이 다 보는데...?"
"예."
"...옷 좀 빌려줄 수 있어?"
"제 망토라면은 충분히 가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비명 질러도 돼?"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전하."
가까이서 재상이 싱글싱글 웃어오는 가운데, 카린의 얼굴이 매운 고추를 삼킨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가더니 그녀는 성안 모두가 깨어날 정도로 창피함이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
.
.
"회의를 시작합니다."
"지랄하고 앉았네."
회의장 안, 상석에 앉은 카린이 위엄을 갖추어 회의 시작을 선언했지만, 이를 누군가가 빈정거렸다. 물론, 여왕에게 험담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드레마 안에서도 단 한 명 뿐이다.
"할아버지... 화나셨어요?"
카린은 양손을 양 볼에 대고서 고양이처럼 앙증맞은 얼굴을 지으며 애교를 떨었지만, 지팡이가 그녀의 머리 위로 작렬할 뿐이었다. 베르제바브 대공은 지팡이를 거두고서, 안 그래도 주름살투성이인 얼굴을 늙은 마귀처럼 험악하게 일그리며 소리질렀다.
"평소에는 회의에 참석하기 싫어서 온갖 짓거리를 다하더니, 여행 돌아온 첫날이라 모처럼 쉬게 해줬더니 왜 새벽부터 일어나서는 홀딱 벗어던지고 미친 짓거리야!"
"그건... 그건... 리프 공작이..."
더듬거리더 카린은 저편에서 재미있다는 얼굴로 구경하고 있는 리프 공작 쪽을 슬쩍 보았지만, 마주친 공작의 눈은 그녀에게 '정말 말해도 되요?' 라 묻고 있었다. 카린은 고개를 획획 저으며 입을 다물어 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대공이 그녀의 귀를 붙잡아 당기고서 물어왔다.
"공작이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회의나 계속 해!"
"네... 그러면... 어디보자..."
카린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어 가볍게 읽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긴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있는 회의장의 십여 명의 최고층 인사들로 구성된 모두는 그녀의 애교(?)에 웃음을 주체하질 못하고 있었다. 카린은 그들에게 애 취급당하는 것이 이미 한두 번 일이 아닌지라 그들의 시선도 피할 겸, 디자엘 재상에게 바통을 떠넘겼다.
"재상, 진행하세요."
"예."
재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회의장의 모두는 웃음을 지우고 그에게 진지하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의 집중이 된 재상은 전혀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 회의를 진행해 갔다.
"우선, 이베이드 왕국에 공식으로 항의하고자 사신을 보냈습니다. 전하의 신변을 위협했던 그들이 어떤 답변을 해오느냐에 따라 저희의 대응 역시 생각해 둬야 합니다."
카린은 그 말에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울퉁불퉁한 촉감이 그때의 그 뜨거운 고통을 되살려 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읽은 재상은 자세한 내용은 넘겨버리고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극단의 수로는 전쟁조차 감수해야 합니다."
그 말에도 회의장 안의 모두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크게 들썩일 것을 예상했던 카린은 그들의 조용한 반응이 의아스러웠지만, 재상은 작은 목소리로 '역시나'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미... 각오가 되어있으신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디자엘 재상."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가 모두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들의 존귀한 여왕이 호위군을 잃고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만이 자리잡았을 뿐이었다.
'분노'
그들에게 있어여 여왕은 친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다. 자식을 잃을 뻔 한 그들은 이미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 전쟁을 각오하고 있다. 재상은 그런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들의 눈빛부터가 이미 평소와는 달랐으니까...
"명분은 있습니다."
"이베이드는 내분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저희의 군세는 충분합니다."
"이미 여왕이 겪으신 고초에 대한 소식은 온 도시로 퍼지고 있습니다.."
"민중들은 하나같이 이베이드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회의장안의 이들은 각자 말해왔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전쟁을 원합니다.' 라고...
허나, 모두의 시선을 받는 카린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전쟁이 무서웠다. 그녀는 이미 전쟁터 한복판에서 끔찍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을 보았다. 원치 않던 그 광경을 보고난 그녀는 그런 경험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의 손으로 저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회의장 안의 무언의 압력을 느끼고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인 재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재상은 어떻게 생각해?"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이 아니군요."
재상은 빙긋 미소지으며 말했지만, 대답을 떠넘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그라면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이번의 선택은 너무나 무겁다. 너무나 무겁고 앞으로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한낱 신하일 뿐인 자신이 여왕을 무시하고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기에 그는 한 발짝 물러나 그녀에게 짊어지는 책임을 바라보기밖에 할 수 없다.
카린은 어깨를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를 느끼며 베르제바브 대공과 리프 공작 쪽을 슬쩍 보았지만, 그들 역시 카린에게 시선만을 집중한 채로 무언으로 그녀의 의사를 요구하기만 할 뿐이었다.
'무거워...'
카린은 자신의 가슴 속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천근만근 돌덩이보다 무거운 그것 때문에 그녀는 회의장 안의 보이지 않는 공기마저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회의장을 뛰쳐나가 속 안의 그것을 토해내고 싶었지만, 모두의 시선이 쇠사슬처럼 옭매어는 통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옴싹달싹 묶여 앉아있기만 하였다.
"전하."
누군가가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동시에 화상으로 흉진 그녀의 뺨이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그 때... 불더미에 깔렸을 때로 돌아간 듯 한 감각이 생생히 돌아왔다. 그 때의 전쟁터 한복판에 다시 서게 된 그녀는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불길이 가득한 그곳에서 무저항으로 붕 뜬 채로, 무력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내려다보이는 자신에게 소리 질렀다. 도와달라고... 그리고 도움을 청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디자엘 재상의 말이 들려왔다. 카린은 악몽을 꿈꾸다 갓 깨어난 사람처럼 큰 호흡을 들이마시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재상은 그녀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각 영지의 영주님들이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그 분들도 모이면 그 때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어서 빨리 결단을 내리고 싶었던 회의장의 모두는 결단을 미루는 재상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분위기는 전보다 더욱 침체되어 갔다. 기침소리 하나 나지 않는 묵직한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재상만이 그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이 나라의 실세, 베르제바브 대공이 재상의 말에 동의를 표하자, 회의장의 사람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린은 자신에게 시간을 벌어준 재상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질러 선언했다.
"일단 여기까지! 영주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회의를 무기한으로 중지합니다."
.
.
.
아침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대강 끝마친 카린은 성 안의 무거운 공기를 실감했다. 성 안의 하녀나 병사, 관리 등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지나쳐가는 그녀의 얼굴에 무거운 시선을 보내왔다. 정확히는 그녀의 얼굴에 남은 화상자국을 보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보기 흉해서 눈이 모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라..."
카린은 우울한 기분을 등에 업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회의 때의 누군가가 말했던, '민중들은 하나같이 이베이드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란 말을 그녀는 성 안의 모두의 시선을 통해 실감하고 있었다. 마음을 읽는 기술 따위 없어도, 성 안 사람들 모두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오고 있었다.
'전쟁을 원합니다!'
시선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차 무거워져 갔다. 겨우 자신의 얼굴에 난 흉터 하나 가지고 성 안 모두가... 아니 드레마 전체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하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뭐길래...'
지도자라서? 최고 권력자라서? 그들이 뼈 빠지게 일한 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거둬다가 아무런 고생 없이 흥청망청 쓰고 있는 여왕 따위가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까지 구는 것인지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민중뿐만 아니라 성 안의 관리들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전쟁을 원하는 데에 계산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정치적인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려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순수하게 자신들의 여왕이 고초를 겪고, 죽을 뻔 하였고, 몸에 영구적인 상처가 남았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친자식도 아니면서 말이다.
'내가 그렇게 중요한 거야?
자신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마저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어깨의 무거운 짐을 실었다. 생생히 느껴지는 그 무게와 함께, 성 안의 그 누구도 자신의 짐을 알아봐주는 이가 없음에 점차 실망해갔다. 정말로 없는 걸까? 하다못해 믿었던 디자엘 재상마저 그녀의 짐을 덜어주질 못하는데 그 누가 자신의 짐을 덜어줄수... 아니 최소한 알아보기라도 해 주지 못하는 걸까?
'아직 남은 사람이 있잖아...'
딱, 한 명 남아있다. 반복되기만 하는 왕궁의 삶 속인지라... 일기장의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말'로 시작해 '같은 말'로 끝나는 언제나의 나날처럼, 타인의 행동을 따라하는 피에로처럼 똑같이 반복하는 중이던 그녀는 이 허무한 일상속에 새로이 끼어든 인물이 이제서야 막 떠올랐다.
'라미엘.'
카린은 그를 떠올리자마자 성의 꼭대기를 향해 달렸다. 체통조차 잊고, 아니 원래 성 안에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계단을 반복해서 오르는지라 아무리 생기가 넘칠 어린 나이라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당장이라도 사라질 사람을 찾듯 조급하게 달렸다.
라미엘. 그 남자라면 지금 이 성의 꼭대기에 갇혀 조사를 받고 있다. 여왕인 자신이라면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카린은 마지막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랐다. 그 위로 보인 문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활짝 열려있었다. 절대 열려있어선 안될 문이 열려있자, 카린은 순간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혹시나 그가 이미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는 그 문을 지키고 있어야할 병사를 붙잡아 물었다.
"문이 왜 열려있어?"
"리프 공작님이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카린은 그가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공작이 들어갔던 것임에 안심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의아해 하는 병사들을 지나쳐 방 안에 들어선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흰 옷을 입은 푸른 장발의 미청년의 멱살을 두 손으로 쥐고서 으름장을 놓는 리프 공작의 모습이었다.
방 안은 귀빈실 겸 감금실답게 좋은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다만... 엉망으로 난장판이 된 상태이지만 말이다. 부서진 것이 없는 걸로 봐서 몸싸움을 벌였다기 보다는 리프 공작이 화풀이로 걷어찬 것처럼 보이기에 그녀는 여전히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는 리프공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공작, 왜 그래?"
"...이 남자, 사람 열 받게 하는 데에는 재능이 넘치네요."
"..."
알 것 같았다. 라미엘의 어두운 말귀는 도를 넘을 지경이라 그녀도 그와 이야기 해본 경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차라리 벽에 대고 소리치는 쪽이 백번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성질 급한 공작에게는 아마도 최악의 말상대일 것이다.
"어떤게?"
그녀의 물음에 공작은 멱살을 거칠게 놓고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말도 마세요. 몇 가지 좀 캐물었더니 '천사'가 어쩌구, '꿈'이 어쩌구... 완전히 미친놈보다 더 미친놈 같다니까요."
"그래...?"
카린은 보기 드물게 불편한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공작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로자리오 성자'... 리프 공작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던 분이었는데 전의 습격전으로 생사조차 불명해졌다. 물론, 지금 이 세상에 없다는 쪽이 거의 확실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 때 일의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공작의 모습에 카린은 그녀가 잘 벼려진 칼을 품은 것처럼 무섭게 보였다.
"공작, 일단 내려가서 좀 쉬어."
"..."
"어서. '명령'이야."
"...예, 전하."
명령이란 말을 붙이자 그녀는 마지못해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고는 나아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공작은 카린을 뒤돌아보고서 한 가지를 부탁해왔다.
"전하."
"응?"
"알아낸 것 있으시면... 제게 꼭 알려주세요."
"응."
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리프 공작은 미련이 남는 발걸음을 떼고서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린은 공작이 방을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라미엘을 돌아보았다. 그는 거친 일을 겪었음에도 그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감정이 전혀 비치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그녀는 '공작이 이러니 화를 낼만 하지.' 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라미엘..."
"..."
대답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아주 잠깐 반짝인 것이 계속 말하라는 것 같았다. 카린은 이 남자에게는 왠지 모르게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일단 자신은 여왕. 만인의 위에 군림한 고귀한 자인 이상, 존대어를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어?"
(끄덕)
그녀의 말에 라미엘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의 말을 대신했다. 카린은 한번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일단 공작이 궁금해 했을만한 것부터 물었다.
"전에... 성검을 강탈했던 흑기사라는 게... 라미엘, 당신...이...었지?"
존대어를 붙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녀의 혀는 자꾸 제멋대로 움직이려 하였다. 그래도 어찌어찌 평어로 묻는데에 성공한 그녀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하는 라미엘의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맞다."
"왜? 성검을 강탈한거야?"
이를 묻자 라미엘은 잠시라고 할 수 없는 시간동안 침묵만을 유지했다. 카린은 그가 이상하리만치 말을 끌자, 그의 여성미가 섞인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천사가 무어라 생각하나?"
"...에?"
대답은 커녕 엉뚱한 질문이 날아오자, 카린은 순간 생각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공작이 성질을 박박 내는 것이 이해될만큼 카린 역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왜 성검을..."
"..."
"..."
"..."
"알았어... 내가 먼저 대답하라 이거지?"
"그렇다."
카린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굴러다니는 의자를 집어 그 자리에 앉았다. 식사 이후의 디저트로 나왔는지 테이블 위에 있는 과일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한 번 '와삭' 하고 물자, 입 안에서 상큼한 사과즙이 맛이 상큼하게 와 닿았다. 그것으로 목을 적당히 축인 그녀는 자신이 상상하는 천사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생각나는 대로 입으로 읊조렸다.
"신성하고 지고한 존재."
"..."
"사람의 위에 존재하고, 신의 아래에 존재하여 신의 말씀을 전하는 전령."
"..."
"한낱 미물인 우리가 한없이 경배하고 숭배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
"..."
"사람을 유혹하는 악마를 신성한 불길로 타오르는 검으로 처단하고, 악인에게 천벌을 내리는 심판자."
"...그런가."
끝까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라미엘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기는 힘들었지만, 카린은 왠지 그가 자신이 한 말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무언가 그를 거슬리게 한 말이 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혹시 자신이 상상하는 천사의 이미지가 라미엘이 상상하는 이미지와 달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자, 그녀는 일부러 그에게 들리는 혼잣말을 하였다.
"내가 틀린건가?"
"사람이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면 그것이 진실이다."
"...사실과 진실은 뜻이 다르잖아?"
"관심 없다."
라미엘은 그 말만을 하고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카린은 그의 모습에 '슬슬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려나보다.' 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빗나가고 말았다. 라미엘이 그녀에게 또 다른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다.
"성검이란 뭐냐?"
"...내 질문에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거야?"
"..."
"..."
"..."
"알았어! 알았다고... 쳇...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한단 말이야..."
카린은 손안에 있는 사과에 남은 이빨자국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성검에 관한 이야기는 디자엘 재상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는 것을 말로 설명한다는 게 여간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이제야 알았다.
머릿속의 지식이 그림의 조각이라면, 설명은 그 조각을 맞추어 상대가 그림 속 부분 부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잘 풀어내야 한다. 카린은 머릿 속 한편으로 재상이 그녀에게 교육할 때에 얼마나 설명이란 것을 잘 해주어왔는지를 뒤늦게 깨닫고는 재상의 능력에 감탄했다.
"음, 그럼... 성검이란 게 말야..."
"..."
"아홉 신들을 모시는 열두 명의 천사가 내린 물건인데..."
"..."
"그 뭐시기 용도가 뭐냐하면은... 아니 내린 목적은..."
"자의로 내린거냐?"
"응? 어... 응. 천사들의 자의로야... 아 맞다. 신들의 이름과 권능을 세상에 알릴 목적으로 내린거야."
"어떻게 세상에 알린다는 것이지?"
"...엥? 그러고보니 어떻게 알리는거지?"
라미엘의 물음에 카린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재상에게 들은 부분은 여기까지... 신들의 이름과 권능을 성검으로 어떻게 알린다는 건지는 재상도 설명해 주질 않았다. 뭐, 어쩌면 재상이 이미 설명 해주었던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 귀찮음으로 한가득했던 자신이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었다.
"신이 알리는 건가? 천사가 알리는 건가? 성검이 알리는 건가? 아니면 사람이 알리는 건가?"
"에... 그러니깐... 그게..."
카린은 머리를 쥐어짜고 고민에 빠졌다. 뭐, 솔직히 신이나 천사를 실제로 본 사람이 있기나 할까?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야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주장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신을 만났고 신성한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세운 것이 현 대륙의 아홉 종교고, 그들 중 일곱 종교가 모여 세워진 것이 지금의 '종교 연합'이기는 하지만... 결국 신들의 이름과 권능을 알리는 자는...
"사람이야. 사람이 알리는 거야."
"그걸 사람들은 믿나? 스스로 '신의 자손이다, 후손이다.', '신의 반신이다, 현신이다.', '신이 지명했다, 의무를 내렸다.' 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종교 연합이 아니더라도 발에 채이도록 널렸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을 사람들 모두는 믿나?"
"당연히 아니지! 그러니깐... 그게, 아 맞다. 그 증거로 성검이란 게 있잖아. 천사들이 내렸다는 물건. 그 증거가 있으니깐 사람들이 믿는 거야."
"...그렇다면 성검에 어떠한 기적적인 힘이나 마법이 있는 건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 병든 자를 낫게 하고, 허공에 불을 만들어내고 번개를 부르는 능력이 있기에 사람들이 신성시하고 믿는 건가?"
"...에... 그게... 강한 신앙을 가진 성검의 기사에게는 적들의 칼과 화살조차 비껴나게 해 준다고... 하긴 하는데..."
"..."
솔직히, 카린 역시, 신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병으로 앓던 이의 병세가 호전되면 '신께서 내려주신 기적이다.', '신앙을 가지면 어떠한 병이나 상처도 치유된다.' 라 주장하다가도, 다른 신도가 병으로 앓다 쉬이 죽으면 '이자는 신앙이 부족해서 죽었다.' 라는 지들 끼워맞추기 편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가, 뭐 벽에 습기로 생긴 얼룩이나 형상이 천사나 신의 형상과 조금만 비슷하면 '기적' 어쩌구를 늘어놓으며 성물 취급하면서 요란을 떨어대는 것이 카린에게는 유치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종교에 대해 불신하게 된 것은 어떠한 계기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신이 그녀와 그녀의 소중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떼어놓았기 때문일지도...
"리프 공작이 말하긴 했어... 성검은 그냥 '장식품' 이라고..."
"..."
"...설마?"
카린은 순간 머리를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라미엘은 그 사람들의 신앙과 성검을 연관짓는 무언가를 노리고 성검을 탈환한 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들었다. 긴장한 눈으로 천천히 그를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는 라미엘이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검은 사람들이 '천사가 내린 성물'이라 믿기에 성검이다."
"...응."
"설사 내가 성검을 탈취한다 해도, 종교연합에서는 다른 성검을 '만들어' 내세우면 그만이다."
"그럼 의미 없는 범행이었잖아?"
"그 후에, 탈취된 진짜 성검이 다시 세상에 드러난다면...?"
"...그건...말도... 그게..."
카린은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마구잡이로 뒤엉키는 것처럼 보였다. 느껴오는 어지러움 증에 그녀는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의지했다. 그런 그녀에게 라미엘은 계속 말해왔다.
"천사는 존재한다. 아니, 사람들이 존재한다 여긴다."
"그게..."
"그렇다면 천사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너의 곁에 있는 [인연]고 [추억] 그 아이들이 바로 천사들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카린이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라미엘은 그녀를 무시하고 말은 계속했다.
"그리고 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마법 따위는 없고, 기적 따위도 없다. [인연], [추억] 그 아이들은 천사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아이들일 뿐이다."
"그럼, 왜! 대체! 라미엘! 당신에게 천사는 뭔데!"
"성검이 신성하게 여겨지는 성물인 한, '천사는 사람들에 의해 존재한다.' 그렇지만 천사를 도구로 보는 '그들' 손에 그 천사들이 '그들'에게 도구로서 휘둘러지고 있다. 나는 그들을 한시 빨리 모두를 구하고 싶지만, '그들'은 교활하게도 사람의 뒤에 숨는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서 사람의 뒤에 숨은 '그들'의 손에 있는 천사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강경한 수를 쓸 수밖에 없다."
"라미엘... 그게... 설마..."
"그렇다. 신성한 성물이 성검들 속에 가짜가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한다. 의심은 커지고 커져... 진짜, 가짜를 가릴 것 없이 '모든 것이 가짜라는 가능성'을 두고 신앙을 의심한다. 성검이 가짜인 이상, 그것을 근거로 존재할 신도... 천사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의 손에 있는 천사들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카린은 그의 말이 하나하나 귀에 못질하듯 박혀왔지만,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ps. - 위의 내용은 픽션이며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의미 역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