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가 변하고자 했다면 1990년대 후반 변했어야 했어요. 그때 변화를 거부한 이들이 이제 와서 변할 거라는 판단은 오산일 겁니다."
주사파 운동권이었던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종철 씨가 <진보에서 진보하라>라는 책을 최근 출간했다.
가난한 농부의 머리 좋은 아들이 고려대에 진학해 사법시험 목표를 세웠지만 막상 주사파 운동권이 됐고, 막후 세력에 의해 총학생회장에 내세워졌고, 1년 8개월 수감생활을 했고, 출소해서는 어제의 동지였던 '주사파'와 싸우는 투사가 돼 있는 자신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의 젊은 날 변곡점이 된 사건은 소위 '한총련 사태'였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 1만여 명이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강행했어요. 그전까지 사라졌던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고, 경찰은 헬리콥터로 최루탄을 살포하는 등 '전쟁판' 같았지요. 학생들이 점거한 연세대 종합관은 박살이 났고요. 학생 5000여 명이 연행되고 이 중 460명쯤 구속됐어요.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어요. 저는 2년형을 선고받았어요."
―감옥에서 생각이 바뀐 건가요?
"감옥에서는 '혁명 승리의 그날까지 내 한 몸 바치며 살겠다'고 결심했어요. 다들 제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고요. 출감하자 후배들은 학교 정문에서 저를 무동태워 행진했어요."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당신이 전향(轉向)한 계기는?
"출감 후 저에 대한 '총화'가 있었어요. 수감 공백 기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주체사상과 '수령의 무오류성(無誤謬性)'에 대해 다시 학습한 거죠. 문제는 갑자기 늘어난 탈북자들의 존재였어요. 당시 북한의 대기근으로 대량 탈북사태가 있었습니다. 잡지나 기관지에서 탈북자 수기(手記)를 읽으면 뭔가 혼란스러웠어요."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운동권이 한낱 탈북자들의 말에 흔들릴 수 있나요?
"동료들은 '탈북자들이 발생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롭나. 한국에서도 이민 가는 사람이 한 해 얼마인 줄 아느냐? 10만 명이다. 이들도 나가면 한국에 대해 좋게 이야기할 리 없다'고 했어요. 저로서는 판단이 쉽지 않았어요. 검증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여러 경로를 통해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당신처럼 머리 좋은 사람은 탈북자 수기가 아니어도 북한 상황을 알려면 그전에 알 수 있었을 텐데.
"북한이 못산다는 것은 대략 알았어요. 제가 총학생회장 때인 1995년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수해를 겪은 북한에 쌀을 보내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운동권 내부에서 '쌀 주자는 얘기는 북한이 가난한 나라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었지요."
―그때 주위를 객관적으로 둘러봤다면 인생의 낭비를 많이 줄였을 텐데.
"하지만 '사탕이냐 민족 자존심이냐'라고 물으면 답이 어느 쪽이겠습니까.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미국과의 투쟁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고, 해방 공간에서 북한은 자주국가를 세웠고, 인민과 지도자들이 하나 되는 사회라는 걸 의심 없이 받아들였어요. 제가 갖고 있던 이런 인식이 탈북자 증언에서 깨진 것입니다."
―탈북자를 통해 무얼 새롭게 알게 됐나요?
"북한은 못사는 것만 아니라 인민을 억압하는 정권이라는 것, 인민과 지도자가 혼연일체 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 인민은 굶어 죽는데 코냑·캐비아 등 사치품을 수입하는 지도층 행태를 보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걸 알았지요."
―일반인에게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데.
"당시 제게는 이런 사실이 충격과도 같았지요."
―하지만 당신이 타도의 대상으로 여겨 투쟁해온 남한의 문제는 여전히 있었지 않나요?
"…북한 문제가 더 컸던 거죠. 운동의 초심(初心)에 비춰보면 정말 간단한 겁니다."
―운동의 초심이라면?
"가장 고통받는 민중 곁에서 사회 부조리에 투쟁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남한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본 것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남한이 여전히 미 제국주의에 수탈당하는 식민지인지,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는데도 '민주 대(對) 반민주'의 구도로만 보는 게 맞는지…."
―현대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대학 시절 학생회 주관으로 4·19, 5·18, 6·10 등을 꼭 기념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기념일은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적으로 인식시키는 매개체가 됐죠. 4·19는 이승만 대통령 부정(否定), 5·18은 반미(反美), 6·10은 군부 파쇼에 대한 민주화 투쟁의 승리를 내세웠지요."
―주사파 동료들과 이런 고민을 놓고 얘기해봤나요?
"너무 단단한 벽을 느꼈어요. 제가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우파나 국정원에 백기 투항하는 걸로 여겼어요. 의식의 견고함이 화석(化石)화될 때 얼마나 무서운지를 본 겁니다. 북한이 무너져도 북한 지도부는 사회주의 지상 낙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겠지요."
―주사파 운동권, 소위 종북 세력은 객관적 사실을 눈앞에 보여줘도 바뀌지 않는 집단이라는 뜻인가요?
"감옥에 가기 전만 해도 한총련 지도부의 교조주의에 내부 반발 기류가 있었어요. 주체사상을 기조로 하지만 실정에 맞게 유연하게 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출감하니 '한총련으로 무조건 단결해야 한다' '수령의 무오류성을 신봉해야 한다'는 말뿐이었어요. 왜 이렇게 됐나 의아했어요. 당시 김영환 씨(1980년대 중반 서울법대에 재학 중 '강철서신'으로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인물)가 스스로 민혁당을 해체하면서 지하운동이 흔들렸던 겁니다. 전향한 김영환 씨 등은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지요. 하지만 이석기씨처럼 잔류한 주사파들은 더욱 시대착오적인 종북 노선으로 갔어요."
―사상 전향은 단순히 어제의 동지들과 결별이 아니라 적(敵)이 되는 거죠.
"그냥 결별하고 다른 길을 간다고 생각했는데 궁극에는 그렇게 (적이) 되더군요. 저는 혼자 떨어져나왔기에 더 힘들었어요."
―동료·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과거를 팔아먹지 마라"며 모욕을 당했다면서요?
"저를 '변절자'로 받아들이니까요. 그런 자리가 있고 나면 정리가 돼요. 그쪽 세계와 단절이 됩니다."
―본인은 이제 좌우(左右) 어디에 있는가요?
"사람들은 저를 심지어 '극우'라고도 합니다. 보수로 분류되는 걸 객관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워요. 사실 저는 균형을 회복하자는 쪽이지요. 진보가 정통성을 회복하려면 북한과의 연계를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에 가졌던 우리 생각에 대해 성찰해보자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최근 활동을 보면 이념 투쟁에서 우파의 선봉에 서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역할에서 논리적으로 무장된 우파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통진당 해산과 관련해 헌법재판소 증인으로 나갔지요?
"과거 선배·동료들로부터 '이렇게 갈 데까지 가나', '같이 활동해온 동지들의 등에 칼을 꽂느냐'라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나선 것은 진보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진보가 어떠하든 변해야 한다, 진심으로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 한 명이라도 더 고민할 수 있게 한다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통진당은 해산해야 한다고 봅니까?
"안건으로 올라온 이상 해산해야 합니다. 사실은 통진당 문제를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것이 현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보 진영 안에서 통진당을 압박해 변화시켜야 했는데…."
―그건 무슨 뜻인가요?
"헌재에서 해산 판결이 나도 역작용이 있어요. 마치 통진당이 정권에 의해 탄압받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진당 해산은 중요한 가치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런 자유가 보장되는 마지노선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통진당원들은 자유 체제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뒤엎으려 하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세력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종북주의자들을 '시대착오적 소수 의견'으로 버려두는 게 자유민주체제의 관용이 아닐까요?
"종북 세력만큼 단결력이 높고 정치적 훈련이 많이 되어 있는 집단이 드뭅니다. 분절화된 사회에서 조직된 소수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가 소수 강경 세력에 의해 끌려가는 걸 봐왔지 않았습니까."
―통진당 해산이 결정되면, 우리 사회에서 종북 세력은 어떻게 될까요?
"일단 약화되고 고립될 겁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발을 못 붙일 것으로 봅니까?
"한반도 정세가 역동적입니다. 앞서 말한 '한총련 사태' 당시 '주사파 척결'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5000여 명쯤 연행되면서 '학생운동의 몰락'이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활했어요. 당시 민족 화해와 교류·협력 분위기가 확산되자 그런 식의 통일 논의를 주도해왔던 주사파가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거죠. 그 뒤로 주사파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진출해 합법 공간에 자리 잡았습니다."
―당신은 주사파에 대해 "감옥 갈 각오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더군요.
"제 경험으로 이들은 안락한 삶을 버리고 희생해왔습니다."
―이들이 어떤 확신에서 그런다고 봅니까?
"정의에 대한 확신이지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이들에게 모든 걸 희생해도 좋을 동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헌신은 북한 인민들을 위한 게 아니라 독재정권을 위한 것이 됐지요.
"바로 그게 역설입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는 울먹거렸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북한 주민들을 저렇게 둬야 합니까."
―이들이 과연 북한 현실을 모를 만큼 무지한 걸까요, 아니면…?
"알고도 외면하는 것이지요. '정치적 도덕성'을 잃은 겁니다. 혁명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 도덕적 양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