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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일 연중 제26주일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면
지하철에서 차를 기다릴 때는 무료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모이면 점점 밀려서 본의 아니게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눈에 띄는 작은 액자에 새겨진 명언 명귀들이 보입니다. 불교에서 수행지침으로 삼고 있는 글귀들이 많이 적혀져 있습니다.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자주 잊어버리지만 많이 대하다 보니까 기억나는 글귀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을 바꾸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세상에는 복도 화도 없다, 생각 하나에 달렸다.
이것을 또한 다르게 표현한 글도 있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이 쌓이면 습관을 형성하고,
습관은 성격을 형성하고,
성격은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세상에는 복도 화도 없다. 생각 하나에 달렸다.
세상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바뀔 수도 없고, 아무리 생각을 바르게 가졌다고 하여도 습관으로 옮겨지기는 또한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는 요즘 매일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할 일을 태산처럼 쌓아놓고,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몰두하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시간도 잘못된 습관으로 매일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세 시간이 가장 집중이 잘 됩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심장이 쉬어야 하는 시간이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11시부터는 잠자리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시간만 되면 오히려 더 초롱초롱해지는 것입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잘 고쳐지지 않아서 요즘은 아예 수면제를 먹지 않으려고 작정하였지만 밤이 되면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다시 수면제를 먹습니다. 그래야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격도 이상하게 바뀌고, 내 심성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올빼미 체질을 닮아서 그렇게 밤을 새운다고 말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고치기 힘듭니다. 그래서 내 인격도 이상하게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바로잡기 정말 어려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속담이 정말 실감 납니다. 세상에는 ‘길흉화복’(吉凶禍福)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 형성된 내 인격에 따라서 길흉화복이 결정되기 때문에 생각에 따라서 길흉화복이 없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상무념’(無想無念)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매일 수많은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 가슴을 쥐어뜯는 아픔으로 살기도 합니다. 그것을 득도한 사람처럼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믿음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이 바뀌고, 실천으로 습관을 만들고, 습관으로 성격과 인격을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전혀 다른 쪽으로 치달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 생각을 달리하는 데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믿음이 확고해지지 않습니다. 작은 노력으로 완벽한 믿음을 이룰 수는 없겠지요. 끊임없는 노력과 성령의 은총으로 확고한 믿음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축일10월 1일 성녀 데레사 (Teresa)
신분 : 수녀, 교회학자
활동 지역 : 리지외(Lisieux)
활동 연도 : 1873-1897년
같은 이름 : 성면의 데레사, 소화 데레사, 소화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예수 아기의 데레사, 테레사, 테레시아
성녀 테레사(Teresia, 또는 데레사)는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Basse-Normandie)의 알랑송(Alencon)에서 시계 제조업을 하던 성 루이 마르탱(Louis Martin, 7월 12일)과 성녀 마리아 젤리 게랭 마르탱(Maria-Zelie Guerin Martin, 7월 12일)의 아홉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마리 프랑수와즈 테레즈 마르탱(Marie Francoise-Therese Martin)으로, 보통은 ‘소화(小花) 테레사’로 많이 불린다. 그녀는 5살이 채 못 된 1877년 8월 28일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리지외로 옮겨 가서 살았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으로 내성적인 아이가 된 그녀는 둘째 언니인 마리 폴린느(Marie Pauline)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10살 무렵 둘째 언니마저 첫째 언니가 있는 리지외의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자 그 상실감으로 인해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심하게 앓았는데, 때로는 경련과 환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의식을 잃게도 했다. 어려서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특별했던 그녀는 1883년 5월 13일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후로 그 이상한 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 그녀는 집에 있는 ‘미소의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중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듬해 11살의 나이에 첫영성체를 하고 그 얼마 후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성녀 테레사는 1886년 성탄 전야 미사 직후, 훗날 “자서전”에서 ‘완전한 회개의 은혜’라고 부른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 안에 애덕이 깃드는 것을 체험했고, 또한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잊어야 하는 이타적 사랑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며칠 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그린 상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는 열망, 즉 다른 영혼들을 돕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머무르며 다른 이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성혈을 전해주겠다는 결심을 했다. 성탄절의 특별한 회심의 은총을 통해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자신의 소명으로 깨달아 갔다.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참아 받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성녀 테레사는 14살 때 리지외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를 신청했다.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는 이미 그녀의 두 언니, 즉 첫째인 마리 루이즈(Marie Louise)와 둘째인 마리 폴린느가 입회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수녀원에서는 그녀가 21살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통보하였다. 성녀 테레사와 그녀의 아버지는 교구의 주교에게 입회 허가를 청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일곱째 언니인 마리 셀린느(Marie Celine)와 함께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Leo XIII)를 알현할 기회가 생기자 교황의 품에 달려들어 수녀원 입회를 허락해 달라며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이때 교황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입회하겠지”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성녀 테레사는 15살 때인 1888년 4월 9일 리지외의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로마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리지외 교구의 주교가 그녀의 입회를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189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9년 반 동안 그녀의 수도 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였다. 그녀는 1889년 1월 10일 ‘아기 예수와 성면(聖面)의 테레사’라는 수도명을 선택하며 착의식을 거행했고, 이듬해 9월 24일에 첫 서원을 했다. 성녀 테레사는 다른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까다롭고 질투심 많은 곤자가의 마리(Marie de Gonzague) 원장 수녀로 인해 생긴 공동체의 내부 분열로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그녀는 수도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갈등을 멀리하고, 자신의 기도 생활에 열중하였다. 수도원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자신에게 부여된 작은 직무들을 성실히 이행하는 평범한 수녀였다. 그녀가 이룬 하느님과의 친밀감과 충실성은 그녀의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에는 그 어느 수녀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1893년 2월 20일 그녀는 수련장 보조자 발령을 받아 4년 동안 소임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작은 길’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갖고 살았다. 그녀의 ‘작은 길’에는 새롭거나 특별한 것은 없다. 오히려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 걸어야 하는 길일 뿐이었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법이 아니라 영혼이 하느님 앞에 서서 지니는 가장 순수한 태도를 의미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아버지가 선종한 후 아버지를 돌보던 다섯째 언니 마리 셀린느까지 카르멜 수녀원에 입회해 네 자매가 함께 수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86년 클라라 관상 수도회에 입회한 셋째 언니 마리 레오니(Marie Leonie)를 포함해 9남매 중 어릴 때 죽은 네 명을 뺀 다섯 자매가 모두 수녀가 되었다. 성녀 테레사는 1894년 10월 말 원장이 된 둘째 언니 폴린느(수도명 예수의 아녜스)의 명으로 “자서전”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다.
1896년 4월 처음으로 결핵 증세가 나타나면서 각혈을 시작하면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하지만 그해 7월 병실로 옮겨 생활할 때까지 그녀는 수녀원의 기본 의무들을 충실히 지켰다. 병실로 숙소를 옮기고 마지막까지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자서전”을 마무리해 나갔다. 이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작은 길’을 모든 이들에게 알려야 할 사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1897년 8월 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신 성녀 테레사는 9월 30일 저녁,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성녀 테레사가 선종하고 1년이 지나자 카르멜 수녀회는 통상적인 관습대로 그녀의 “자서전”을 비공식 출판해 여러 카르멜 수녀원으로 보냈다. 그런데 그녀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한 수녀와 신자들의 요구로 공식적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그녀의 글은 큰 관심을 받아 불과 10여 년 만에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수백만 권이 넘게 보급되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난 성녀 테레사에 대한 반응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이 반응을 ‘폭풍과 같은 열광’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는 적어도 사후 50년을 기다려야 하는 교회 관례를 무릅쓰고, 교황 비오 11세는 성녀 테레사가 선종한 지 26년만인 1923년 4월 29일 시복식을 거행하고, 곧이어 1925년 5월 17일 시성식을 갖고 ‘아기 예수의 성녀 테레사’로 선포하였다.
성녀 테레사는 아버지와 함께 로마를 순례했을 때 외에는 고향인 알랑송과 리지외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평생 다른 영혼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보속의 삶을 살았기에, 교황 비오 11세는 1927년 12월 14일 그녀를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 12월 3일)와 더불어 ‘선교 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12세는 1944년 5월 3일에 성녀 잔 다르크(Joanna Arcensis, 5월 30일)에 이어 프랑스 제2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는 성녀 테레사의 선종 100주년이 되는 1997년 6월 10일 그녀를 보편교회의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녀가 남긴 저서로는 “성녀 소화 테레사 자서전”, “성녀 소화 테레사의 마지막 남긴 말씀”이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아기 예수의 테레사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