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미술관산책을 마치고/안성환/241006
울산향토사연구회에서 대구에 있는 간송미술관과 국립박물관을 다녀왔다. 유물 모두가 보물급이다. 하지만 오늘은 간송미술관의 세종대왕 ‘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윤복의 ‘미인도’에 대해서만 정리한다. 먼저 간송미술관에 대하여 소개한다. 간송은 전형필의 아호이고 간송이란 아호를 지어 준 사람은 당시 간송의 스승인 위창오세창 선생이다. 간송미술관은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인 사립미술관이다. 서울간송미술관은 1936년도에 설립하였다면 대구간송미술관은 2024년 9월 3일 개관했다, 전시장 입구에 여세동보(與世同寶:세상과 함께 보배 삼고 영원히 보존하자)가 한눈에 들어 온다. 일찍 깨달지 못해든 새로운 감동이다. 만약에 간송미술관에 전체 보물 중 한 점을 찍어라면 필자는 단연코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그 다음이 혜원의 ‘미인도’라 하겠다. 물론 사람마다 관점의 차이는 있다.
먼저 서울 성북구에 간송미술관이 있는데 대구분관 설립 목적이 뭔지 정리한다.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신 오세창선생의 주창인 ‘문화보국(문화로서 나라의 정신을 지킴)’의 일환으로 지방으로의 개관을 생각했으며 대구로 선택한 이유는 대구는 독립운동의 주체인 민족정신과 근대 미술의 발상지로서의 가치를 지닌곳이 대구라고 했다. 그리고 영남권의 지류문화유산 수리복원에도 목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서울간송미술관은 봄, 가을 짧게 전시하면서 연구목적으로 운영하며 대구 간송미술관은 상설미술관으로 항상 전시를 한다. 특히 문화재 교육, 소개, 홍보 등에 역점을 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구 간송미술관의 건축구도는
땅의 흐름에 맞게 천천히 아래와 내려가면서 경사진 자연환경을 살린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 지형에 맞게 건출물을 잘게 나눠서 지었다고 한다. 하나의 커다란 건물을 짖지 않는다는 것이 간송미술관의 특징이다. 자세이 보면 미술관의 건축물은 전시관 내의 보물들의 철저하게 배경역할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설계의 기본적인 착안은 도산서원이라고 한다. 여기에 나무 기둥이 12개가 아니고 11개 있는데 이유는 마지막 1개는 관람오는 관객이 12번째 기둥이라고 했다. 지극히 자연즉이다. 물론 자연을 그대 살린 건축들은 이뿐만 아니다. 창덕궁, 해인사 소쇄원 등 우리나라 옛 건축들은 대부분 이러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간송미술관의 보물의 수는 몇점일까
작품수는 총4,600건(약 3만점)이라고 한다. 여기서 국가 보물은 40건(98점) 정도 된다. 이런 보물을 보관 관리 하기 위해 간송미술관 건축 비용은 약 400억원에 건축기기간은 9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간송미술관은 총 5전시관을 두고 있다. 제 1전시관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회화와 서적을 소개하고, 제 2전시관은 신윤복 미인도 한 점을 단독공간에 선보이며, 제 3전시관은 훈민정음 해례본 한 점만 있는 공간이다. 제 4전시관은 서예와 도자기, 불교미술이고 제5전시관은 실감영상전시를 하고 있다. 모두 진본이므로 어느 한 곳만 좋다는 말은 못한다. 모두 대단한 전시관이다.
먼저 제2전시관 혜원신윤복의 ‘미인도’이다. 어떤 작품 이기에 사람들이 인산인해 할까 궁금했다.
미인도를 보는 순간 전체적인 느낌은 에로틱한 느낌이 온다. 이유는 주인공이 이미 치마끈을 느슨하게 풀어 놓고 옷고름을 풀고 있기 때문이다. 옷을 벗고 있다는 뜻이다(아래 사진참조). 예전 양반들은 여자의 속고름이 드리워진 그림만 봐도 가슴이 쿵당쿵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혜원은 그림옆에 낙관글씨는 더 재미있게 써 놨다. 오주석선생의 해석을 옮겨본다. ‘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즉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르란히 옮겨 놓았느뇨? 하였다. 아마 혜원 자신이 그리워 했든 여인을 그린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말 200년 전에 그린 그림이지만 지금 봐도 미인이었다. 눈 빛은 초롱초롱하며 눈의 시선은 앞에 남정네가 앉아 있는 느낌이다.
다음 제 3전관 훈민정음 해례본’로 향했다. 어떤 보물이기에 관심이 높은가
훈민정음이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옛 이름이다. 그리고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기록한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총33자으로 이루어진 한권의 책으로 크게 ‘예의’ 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고, ‘해례’는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등 8명의 대학자들이 세종을 보필하며 만들은 글이다.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히 설명한 글이다. 이 책은 세종28년(1446년)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지금 광화문 거리에 세종대왕의 동상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특히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잠 잘때는 베개밑에 배고 잤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 할 때 서울이 수복되어 포탄이 떨어질 때 훈민정음 해례본 한권만 가슴에 품고 나왔다고 한다. 훈민정음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 1940년 일본이 한글사용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시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 된 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발견 되지 않았드라면 한글은 영원히 우리글이 아닌 몽골이나 중국에서 들어와 편집된 문자로 알려졌든지 아니면 세종이 화장실에서 창살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여 통시글이 될뻔 했다.
이렇게 많은 보물을 수집할수 있는 재력의 동기는
먼저 간송전영필(1906~1962)에 대하여 조금 알 필요가 있다. 그의 가계도를 보면 그 증보부는 정3품의 벼슬을 하였고 부친은 중추원의관인 무관출신이다. 형제는 형 전형설과 전형필이다. 간송은 작은아버지가 후손이 없어 양자를 갔다. 운명적으로 작은 아버지와 형이 졸지에 사망하므로 인하여 모든 재산을 간송전형필이 물려 받게 된다, 이때 나이 만23세, 조선 40대 기업속에 포함되면서 서열상으로 10대 재벌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는 휘문고 학생시절 은사인 춘곡고희동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선생(1861~1953)을 만나게 된다. 위창은 60대이고 간송은 20대이며, 운명적인 만남이다. 간송은 위창의 영향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일본으로 넘어간 문화재나 넘어갈뻔한 문화재수집에 사활을 건다. 가만히 있어도 자손만대 편안한 삶을 살것인데 선생은 문화독립운동가로 변신하다.
대구간송미술관에 수장중인 주요 골동품의 당시 구입가격은 얼마나 되었을까
먼저 화폐의 기준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고서가격은 500원이면 충분했다고 한다. 서울의 좋은 기와집 한 채가격은 1천원. 그래서 아주 귀한 책은 고급주택 반채값은 주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먼저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입과정을 살펴보자 간송은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태준으로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이 안동 진성이씨 문중 이용준씨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해례본 소장자 이용준씨는 김태준의 제자이다. 이때 책값은 서울에 좋은 기와집 한 채 값 1천원을 요구했다, 간송선생은 책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값의 10배 1만원을 주었고 해례본을 소개해주신 김태준에게 1천원을 주었다고 한다. 해례본을 바로 수집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제안을 하고 1년후에 샀다고 한다. 소장자와 소개자 수집자 모두가 대단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 만약에 소장자는 별것 아니라고 벽지로 쓴다든지 소개자는 일본인이나 전문도굴꾼에게 소개 했다면 영원히 사라질뻔 했든 것이다. 그 뒤로 일본의 세계적인 골동품상 야마나카상회를 찾아 고려청자를 2만원(한양의 기와집 20채)에 구입했으며, 고려백자를 1만4천5백8십원(현재싯가 140억원)구입 했다. 더 놀라운 일은 당시 일본에 ‘존 개츠비’라는 영국변호사가 문화재 수집취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분에게 고려청자 20점이 있어 구입하기 위해 간송은 충청도에 있는 제일 큰농장을 몽땅 팔았는데 그 돈이 자그마치 40만원(당시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그 돈을 개츠비씨에게 주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때 간송의 나이 31살이었다.
전시관 관람시에 가성비가 좋은 관람방법은?
전시된 작품수는 수천점이 되므로 한 점 한 점 꼼꼼히 감상하려고 덤벼 들면 몇 년 걸린다. 시간이 한정 되어 있다면 한 작품만 단독 전시된 전시관의 작품이라든지 아니면 전시관 중앙에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부터 차례로 감상하면 좋다.이렇게 감상하면 본전 뽑고 더 큰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다.
이번 전시장에 본 느낌은 신윤복의 미인도와 김홍도 풍속화, 정선의 산수화에는 줄을 매우 길게 섰다. 세종의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파리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모나리자(1506년경)’와 ‘훈민정음 해례본(1443년)’과 차이를 필자의 느낌에서 정리한다. 모나리자는 약 518년전 작품이며, 훈민정음 해례본은 581년전의 작품이다. 모나리자는 이탈리아출신 레오난드로 다빈치의 작품으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훈민정음은 세종이 만들었고 대구간송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 모나리자는 처음에는 그냥 서양 인물화 중의 하나였다. 도난으로 인한 언론플레이어에 의해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비하하지는 않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억지로 만들어낸 부분도 부정할 수 없다. 훈민정음은 그렇지 않다. 언어로서는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핸 문헌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그런데 루브르박물관에는 매년 1천만명 이상 방문객이 방문한다. 그 중 80%가 모나리자를 보려 온다는 이야기다. 루브르 박물과은 모나리자가 먹여 살린다고 할 수 있다. 모나리자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늘 필자가 찾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너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우리가 그를 알아 주지 않는데 누가 그를 알아 줄 까? 모나리자 처럼 머리를 비집고 보겠다는 날이 언제 쯤 올려나~
2024년 10월 6일 대구 간송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성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