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조語調와 기운氣韻
홍성란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루라도 시詩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는가. 화두話頭. 시라는 화두. 이 화두에 집중하여 나를 잊고 시라는 본질에 닿은 상태가 무아無我라고 보면, 연필심 닳는 소리를 들으며 시에 몰입하고 있는 순간이 무아지경이겠다. 이렇게 시를 쓰고 있을 때 우리는 진솔 겸허한 이가 되지 않던가. 참되고 애틋한 마음이 되지 않던가. 그러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것이 시라는 업業이다.
근엄한 체 난 체로는 성찰에 이를 수 없다. 하심下心. 세상을 공경하여 나를 내세우지 아니하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내려갈 데까지 내려가야 겨우 들리는 음성. 그 음성은 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우러나오는 말. 그냥 흘러나오듯 하는 그 쉬운 말을 받아 적을 수 있기까지 적지 않은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수행 아니고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일은 수행修行이요, 만행萬行이다. 수행이 시적詩的 수련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면, 수행의 공덕을 실천하는 만행의 결과물은 한 편의 명작名作 아닐까. 그러니 가끔 내 마음이 성소聖所요, 내 마음이 절간이라는 농담을 웃지도 않고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대도大道라 적어 본다. 대도는 평이平易 간명簡明이라. 큰 도리이며 위대한 진리는 쉽고 간단하고 분명하니 많이 배운 이의 어려운 말이 아니라, 아이가 노래하듯 꾸미지 않은 말에 인생의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말씀도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일정한 형식이 없으니 배우는 데 강제하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꾸밈없이 그냥 흘러나오는 마땅한 말을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화두가 익었다는 말씀이 있으니 내 마음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안다는 말이다. 시라는 화두를 깨치기 위해 오랜 수행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시상詩想을 종이 위에 받아 적을 수 있지 않던가. 벼락 치 듯 시가 오는 수도 있으나, 보통은 반복되는 받아쓰기 퇴고 끝에 겨우 시 한 편을 받들게 된다. 왜 이 시행착오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잘 쓰려는 욕망 때문이다. 이 죄 없는 욕망이 잠 못 이루게 하고 기혈순환을 막는 게 아닌가. 난망難望. 화두는 절로 익는 게 아니다. 이 헤아릴 수 없는 고뇌의 관문을 지나야 도통했다거나 문리가 트였다는 말을 넘볼 수 있지 않을까.
꼭 기혈순환을 좋게 하자고 걷는 것만은 아니다. 숲길 물길을 걷다 만나는 오랜 친구에게 손 흔들어주며 해찰하는 시간이 좋다. 오늘은 비 오고 꽃송이 다 보내버린 왕벚나무 가지에서 부리 노랗고 몸 까만 지빠귀 노래를 들은 운 좋은 날. 동영상 버튼을 누르면 이 멋진 친구는 알아채고 노래를 멈춘다. 야속할 것도 없다. 이들에게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사람이어서 미안하다. 나와 다른 목소리, 나와 다른 몸짓으로 그들이 드리운 그물에서 아직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언어를 건져 올린다. 그들만의 어조語調로 들려주는 우주의 기미氣味. 그 생생한 기운氣韻을 받아 안을 수 있기에 걷는 시간이 기쁘다. 엷은 미소로 걷다보면 훌쩍 만보萬步를 넘는다.
어조는 마음의 빛깔이다. 어떤 투로 말하는가. 어떤 말씨를 쓰는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다독다독’이라는 표현과 ‘다둑다둑’이라는 표현의 차이. 「설야」에서 나는 ‘다둑다둑’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외등 아래 숫눈길/ 숫눈길 위에 눈 그림자// 어디 앉을까 하는 사이 그림자도 길이 되고// 눈발은/ 곤한 세상을 다둑다둑 감싸네). 유성호 교수는 이 ‘다둑다둑’이라는 첩어가 ‘다독다독’보다 훨씬 ‘설야雪夜’의 품과 격을 크고 높게 만들어준다 했으니, 내 마음 잘 읽어주신 해설에 나 혼자 흐뭇하다.
매일 천변을 걷다가 스치는 이들에게 나도 온유한 눈빛을 보낸다. 세속의 짐을 잠시 벗고 누리는 유유자적은 얼마나 귀한가. 두 팔 들어 하늘을 경배하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정신의 자유와 편안이 좋다. 이 자유와 편안이 말 밖의 말을 가져오고 말 아닌 말을 내려놓는다. 명상冥想. 명상은 절제와 여백에 가깝다. 정확하여 군더더기 없으니 허술한 듯 넉넉하고 무심無心한 듯 우아한 기운氣韻. 어느 현자의 말씀처럼 강이 흐르듯 살고 싶다. 우주의 기운처럼 내가 펼쳐나가는 리듬에 스스로 이끌리는 경이驚異. 죄 없는 욕망의 아름다운 행로 아닌가.
첫댓글 어조는 마음의 빛깔.... 경황 없는 중에도 잠시 멈추었다 갑니다..
강진 그리고 진도... 무엇 덕분에 바쁜 것인지 ... 평안하길 바랍니다.
~자유와 편안이 말 밖의 말을 가져오고 말 아닌 말을 내려놓는다.~
극도로 정갈하게 천명을 다스리는 문체입니다.
거푸 읽을수록 자세를 곧추세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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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심 닳는 소리를 들으며 시에 몰입하고 있는 순간이 무아지경이겠다. "
아~
연필심 닳는 소리
정말 좋아하는 감입니다, 어릴 적 찬 연필심에 침 묻혀가며 쓰던 촉감까지 함께 느끼면서요~~
늘 홍성란교수님을 생각하면,
머언 발치의 거리로만 뵈었던 무산스님이 떠오릅니다.
말씀 한 번 나눈 적도 없는데도 그리 마음에 친근함으로 따뜻해지면서요,
어떠한 계기로 철원 심원사에 주지스님 계신곳에 지인들과 함께 차 대접을 받은 적이 있는데, 순간 깜짝 놀랐지요, 무산스님의 사진을 마주한 순간요, 큰 울림같은 에너지를 받고 온 적있답니다.
이리 댓길이 길어진 건. 오늘도 놀라움과 기쁨에 감사드리는 마음 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다른 평전을 찾던 중 무산선사송수시집을 만났어요 [고목나무 냄새를 맡다] 요
다른 책을 슬쩍 놓고 이시집을 모셔 왔답니다
읽는 내내 행복하고 감사하리라, 지금 부터 감사 감사 축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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