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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화 시인의 시집 『말, 말, 말』은 전설적인 말과 (전설적이지만) 현존하는 다양한 종류의 말을 문학적 상상을 통해 언어로서의 말로 재해석·재창조한 '말' 창작백과이다. 『사막의 말』에 이어, 이 시집에서, 시인은 국내외의 다양한 말들을 역사적·신화적 관점(때로는 민담적·전설적 관점)에 비춰 추적하며, 말의 다양한 실체와 특징을 창작의 동력과 매개로서 재해석·재창조한다. 즉 시인은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의 비유적 공감대와 상호 문맥적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각각의 의미체계 사이에 내재 된 동음이의어적 경계를 해체하며, 둘 사이에서 교차되고 중복되는 의미체계를 자유로운 문학적 상상과 비유를 통해 형상화한다.
김규화 시인은 『말, 말, 말』을 통해 언어의 탁월한 조율 능력을 발휘하며, 언어를 달리는 말등 위에 얹어 거친 막말에 대한 꾸짖음과 정감 어린 말씀에 대한 그리움을 교차시킨다. 이때 시인은 언어를 과용하여 소모하기보다, 절제와 조율의 고삐를 단단히 쥔 채 언어의 효율을 극대화하여, 섬세하고 단아한 문맥과 문체 속에서 언어의 허구와 왜곡에 대한 비판은 물론, 진실과 정직에 대한 찬미와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1. 문학적 메신저로서 말
김규화 시인은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 사이에 내재 된 동음이의어적 경계를 해체하며, 둘 다를 창작적 동력과 수단의 메타포로 용해시킨다. 시인에게 서로 다른 의미체계를 하나의 의미체계로 재해석하도록 해체적 동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문학적 창의와 상상이다. 문학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창의력과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창의와 상상의 자유가 보장되면 될수록 문학의 표현 및 해석 영역은 넓어지고, 질은 풍요로워 진다. 이 같은 맥락에서, 언어로서 말과 동물로서 말 사이에 놓인 동음이의어적 경계에 대한 시인의 해체적 접근은 의미의 확장과 풍요를 담아내기 위한 시도이다.
김규화 시인에게 ‘시인’이란 언어의 전쟁터인 창작의 현장에서 감성과 주제를 전달하는 문학적 메신저로서 「파발마」의 말과 다름이 없다. 즉 시인에게 말은 감성과 주제를 전달하는 상상적 동력으로서의 말이자 표현수단으로서의 언어다.
얼굴이 긴 말이 나를 등에 태우고
젖 먹던 힘으로 달린다
말이 빨리 달리면 관모(冠帽)도 빨리 받아쓴다
(중략)
흰 고래가 바다 한가운데서 상어에 붙잡히고
한바다가 흰 피를 내며 출렁인다
나의 손끝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말이 뛰쳐나간다 (11)
시인의 말은 박진감이 넘친다. 시인의 감성을 태우는 말일 때는 역동적이고 진취적이며, 감성을 전달하는 언어일 때는 망설임 없이 적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시인을 태우고 젖 먹던 힘으로 달리고, 흰 고래가 상어에 붙잡히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흰 피가 출렁일 때 시인의 손끝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채 뛰쳐나간다.
하지만 시인의 말은 지극히 인간적인 말이다. 역동적 노동 뒤에 지쳐 뜀 발이 느려진 말, 즉 “달리는 말의 다리가” “손가락보다 짧다”고 느껴지는 말이다. 따라서 시인은 지친 말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역참에서 새로운 말로 갈아타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창작적 에너지를 소진한 시인에게 재충전하기 위한 휴식이 필요하듯, 지친 말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어머니로서 여성시인의 말
김규화 시인에게 말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투영하는 메타포이다. 시인은 출산과 양육의 어머니로서 말의 생식력과 풍요로움을 강조한다. 이때 말은 역동적인 말이지만, 관능적인 말이기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희생적인 말이다.
「칭기스칸의 말」과 「말의 전장에서, 김규화 시인은 시의 대부분을 역동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자연의 영웅적 말이거나 조작을 통해 대중적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천재적 말을 형상화하는 데에 할애하지만, 짧은 결말 부분을 할애하여 여성시인의 페미니즘적 심상을 여성적 언어로 형상화한다. 이와 관련, 「칭기스칸의 말」은 각각 양육의 어머니로서 여성의 삶을 말의 희생적 삶에 비춰 형상화한 시이며, 「말의 전장에서」는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를 여성적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시이다.
「칭기스칸의 말」에서 시인은 시적 공간을 집 밖으로부터 집 안으로 이동시키며, 말을 어머니로서 여성의 희생적 삶에 비춰 형상화한다. 즉 시인은 이 시의 시작과 함께 영웅적 어조로 칭기스칸 말의 역동성과 문명사회의 계산된 상업주의에 의해 천재로 조작된 말 한스의 수동적 삶을 묘사한 뒤, 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어머니로서의 말을 여성시인의 심상과 언어를 통해 형상화한다.
이 시에서, 칭기스칸의 말은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가는 유목민의 자유의지와 습성을 영웅적 신화로 만든 정복자의 말로, 몽골 대자연에서 태어나 대자연을 달리는 말, 대자연에서 길러진 힘으로 전쟁터를 누빈 정복자의 말, 그리고 대자연의 정복자와 함께 더 넓은 영토와 지배력의 꿈을 실현해가는 말이다. 반면, 오스텐의 말 한스는 평범한 퇴직 교사의 말로, 대자연의 환경과 힘을 상실한 채 인류의 문명적 환경 속에서 길들여지며 성장한 말, 대중적 영웅을 꿈꾸는 주인의 계산된 상업주의에 의해 천재적 동물로 조작되어 비운을 맞는 말이다.
칭기스칸의 말과 오스텐의 말은 생애에 이어 사후의 운명조차도 대조적으로 맞이한다. 칭기스칸의 말은 사후에도 몽고의 테를지에 우뚝 서서 징기스칸을 등에 태우고 긴긴 역사의 간극을 뛰어넘는 역동적 동작으로 비상한다. 반면, 오스텐의 말은 주인으로부터 배반당한 채 대중의 비난 받으며 짐 끄는 말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에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은 뒤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다.
시인은 말을 대자연의 초원을 달리는 영웅적인 말과 문명사회의 상업주의에 의해 농락당한 말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남성중심사회로부터 희생을 강요당하는 어머니의 모성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말은 집에 돌아가 귀족 자식들에게 젖을 준다,
살을 준다, 말이 귀족들의 엄마다 (33)
여성시인으로서 시인은 집밖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집안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일하는 여성의 희생적 삶을 통해 말의 삶을 환기시킨다. 시인의 말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하는 집 밖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노동을 강요당하는 여성의 희생적 삶을 가리키는 말이다. 집밖에서 남성들처럼 사회생활을 한 뒤, 귀가 후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이어가야 하는 워킹맘! 시인은 이 같은 말의 삶을 천착하며 자녀를 위해 젖을 내줘야 하는 양육의 어머니, 그리고 가족을 위해 살점을 내줘야 하는 가정부로서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칭기스칸의 말」에 이어, 「말의 전장에서」도 전장의 기동력으로서 말의 힘찬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여성시인의 페미니즘적 심상을 어머니의 이미지를 통해 환기시켜준다. 이 시에서 시인의 말은 「칭기스칸의 말」에서처럼 역동성이 고조된 시인의 문학적 감성과 언어적 기개를 등에 태우고 달리는 말이다.
말말말이 수천 개의 다리로 땅북을 두드리면서 평원을 달
린다 말발굽에서 차오른 먼지가 판을 친다 먼 데 능선이 누
워 있고 능선에는 그쪽 마을의 말말말이 수천 개의 다리를
세워 울타리치면서 기다린다
박차도 고삐도 내팽개치고 맨몸으로 땅북을 탁탁탁 치면
서 말말말이 달린다 말발굽 소리가 살아서 잠자는 평원을
깨운다
말말말이 기수들을 등에 태우고 능선을 향해 달린다 기수
들이 말에서 떨어지면 기수들을 짓밟으며 말이 달린다 (112)
달리는 말의 멈추지 않는 역동적 리듬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말말말”이란 반복적·연속적 리듬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침을 튀기며 내뿜는 벅찬 호흡소리, 그리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속도감은 시인의 역동적 심상과 언어를 깨우고 발휘하게 해주는 본능적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도 시인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를 통해 여성시인의 페미니즘적 언어와 의식을 형상화한다.
말말말이 기수들을 등에 태우고 능선을 향해 달린다 기수
들이 말에서 떨어지면서 기수들을 짓밟으며 말이 달린다
신라의 하늘에서 한줄기 영롱한 기운이 내려와 하나의 우
물을 비추고 있으니 흰 말 하나가 또 내려와서 네 다리 구부
려 절을 하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우물에는 자줏빛 알 하나가 놓아 있고 신라 사람들은 알을
둘러보며 한참을 기웃거리는데 드디어 흰 말의 알은 박혁거
세를 놓아 놓는다 (112)
이 시에서 말은 타고 달리는 말이다. 시인은 이 같은 말 등에 올라앉아 박차를 가한다. 이때 시인의 말은 언어의 힘과 가치, 그리고 미적 감각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시인이 창조와 재창조의 연장선상에서 구사해온 예술적 영혼을 태우고 달리는 말이다. 하지만 시인은 현실 속에서 재생되는 말의 역동적 이미지를 멈추게 하고, 이를 탄생의 신비주의적 이미지로 대체한다. 즉 기수들의 낙마가 말해주는 추락의 이미지는 역동적 현실 또는 역사의 잠정적 중단 또는 멈춤을 의미하고, 하늘에서 영롱한 기운에 내려와 우물을 비추는 장면과 백마가 내려와 절을 하는 장면은 박혁거세의 신비주의 탄생신화를 의미한다. 이때 우물을 비추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한줄기 영롱한 기운”은 남성적 심볼 또는 탄생의 신비를 알려주는 초현실적 메시지를, 그리고 “흰 말”은 탄생의 신비를 지상에 전달하는 천상의 메신저 또는 탄생을 축복하는 제사장을 연상하게 한다.
3. 영웅들의 운명적 공동체로서 말
김규화 시인의 말은 자유롭고 역동적이지만, 기수 또는 발화자와 한 몸이다. 둘 사이에는 운명적 필연과 같은 신뢰와 운명공동체적 의식이 존재한다. 국내외의 유명한 역사적 인물과 말의 운명적 관계를 인유한 「김유신의 말」, 「조조마」 「관우의 적토마」, 「유비의 말」, 그리고 「부장마」, 그리고 「칭기스칸의 말」에서의 말은, 결초보은의 은덕을 파괴할 수 없어서 파멸을 맞이하는 「결초보은의 말」의 말과 달리, 기수 또는 발화자와 운명공동체적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는 시인의 예술적 동력 또는 언어다.
「김유신의 말」에서 “숨가쁘지 않을 때는/입을 닫고 말을 한다”(20)고 밝히듯, 시인은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을 동일시한다. 시인은 이 같은 논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파스칼은 숨이 가빠 입을 열고 산다”(20)고 말한다. 이어, 시인은 4연과 5년에서 배가 고플 때 밥그릇을 물어뜯는 말과 목마를 때 입술을 핧는 동물로서 말의 본능적 행위 또는 습성을 통해 독창적 언어를 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창작적 행위를 환기시킨다. 하지만 시인이 이 시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말은 운명공동체로서의 말이다. 즉 결말부분에서 “말은 김유신의 묘에 오석(午石)으로 꽂힌다”(21)라고 언급하듯, 김유신의 말은 주인의 운명공동체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로서의 말로 치환하면, 시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글쓰기의 수단이므로, 시인의 운명공동체이다.
「조조마」에서 시인은 1800년의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조조의 흑혈마(黑血馬)처럼 검은 피를 쏟아낼 언어와 절영마(絶影馬)처럼 그림자 없는 언어를 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시인는 조조가 흑혈마를 타고 달려왔다고 말하며, 조조가 황건적의 난을 평정했던 역사를 재생한다. 이 시에서 조조의 말은 주인이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과 함께 주인을 향해 충정을 다 받친 뒤 주인과 운명을 함께 하는 주인의 운명공동체이다. 이와 관련, 시인은 조조의 말을 통해 시인과 언어의 운명공동체적 관계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조조가 죽으니 흑혈마와 절영마도
부상을 입고는 스스로 죽는다
한 나무에 달린 과일들처럼
말이 튼튼하게 주렁주렁 달려서
내가 달려가 하나씩 따 먹으면
말은 잘 달리리, 날개 돋듯이 소리치듯이 (22)
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시인은 언어로서의 말을 “과일들”로 형상화한다. 즉 “과일들”은 조조와의 운명공동체로서 흑혈마와 절영마의 ‘재탄생’ 또는 ‘재육화’다. 전쟁터에서 주인과 함께 승리와 패배의 고락을 같이하고, 주인과 함께 운명을 맞이한 충성과 신뢰의 메타포! 시인은 말의 이 같은 운명공동체적 이미지를 통해 언어로서 시인의 말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때 시인의 의식은 풍요롭다. 즉 시인이 흑혈마와 절영마의 재육화를 “주렁주렁”이란 의태어를 통해 결실의 계절에 맞이하는 풍요로움을 환기시키며, 시인의 언어는 풍요롭게 잘 익은 “과실들”이다. 시인은 이 과일들을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언어도 배불리 잘 먹은 말의 역동적 이미지처럼 상상력을 풍요롭게 전달해줄 것이라고 예견한다.
「관우의 적토마」에서도 시인은 운명공동체로서의 말을 강조한다. 관우의 적토마는 여포와 조조를 거쳐 관우에게로 전해진 말이다. 적토마가 관우의 말이 되기에 앞서 이처럼 두 명의 주인을 거친 것은 진정한 주인과의 운명적 만남을 위한 과정이다. 적토마는 관우와의 이 같은 만남을 통해 관우의 충성스러운 말이 되어 전쟁터의 명마로 이름을 날린다. “미염공 관우는 촉나라 무장,/붉은 땀을 흘리는 적토마 타고/중원 처리를 달린다”(24)는 시인의 회상이 말해주듯, 천하의 명마로서 적토마는 진정한 주인을 만난 기쁨을 주인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적토마는 관우와 운명을 함께한다. 시인은 관우와 적토마의 이 같은 운명공동체적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관우의 죽음 이후 적토마가 오나라의 마충손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밝힌다. 즉 적토마의 최종 주인은 관우다. 마충손에게 넘어간 적토마는 불사이군의 신념을 보여주듯 주인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먹는 것을 거부한다.
관우의 적토마를 향한 시인의 어조는 역사의 흔적을 대하는 현실과 마주할 때 비관적이다. 시인은 관우와 적토마의 사후에 대해 어두운 어조로 “관우와 적토마는 관광묘로 지금 산다”(24)고 말한 뒤 지난날의 적토마와 사후 재육화한 적토마에게 닥친 불행을 추적한다. 즉 「조조마」에서 조조의 운명공동체인 흑혈마와 절영마의 풍요를 상징하는 재육화와 달리, 실수로 살모사의 꼬리를 밟은 적토마는 날쎈 명마임에도 불구하고 살모사에게 가슴을 물어뜯기고, “적토색 달”이 말해주듯 달로 재육화한 적토마는 우주선이 모래바람을 일구며 자신의 영토를 침입하자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적토마는 화를 내며 귀를 뒤로 젖힌다
꼬리로 한쪽 엉덩이를 치고 또 친다
말은 탈진하고 목이 부러져버린다 (24)
적토마의 분노는 신비로움을 신비로움으로 간직하는 데에 실패해온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관우와의 운명적 공동체를 관광상품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그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탐욕을 억제하지 못한 채 과학적 탐사를 시도한 우리 시대의 오만과 횡포가 적토마의 분노를 자극하고 목을 부러트렸다. 시인의 언어로 치환하면, 언어의 독창성을 찾겠다는 각오를 뒤로 미룬 채 상업화에 눈독을 들일 때, 새로움을 위한 정화와 자정의 노력을 게을리한 채 먼지 묻은 언어를 쌓아갈 때, 그리고 닦아내고 갈아내지 않은 채 뒤섞어 앞뒤 뒤엉킨 문맥을 이어갈 때, 적토마의 최후처럼 시인의 언어 역시 생명을 멈춘다.
「조조마」와 「관우의 적토마」에 이어, 「부장마」에서 역시, 시인은 운명공동체로서의 말을 중국의 장례관습에 비춰 형상화한다. 이 시가 “주인님을 업고 죽을힘을 다해 싸움터에 나갔는데/또 같이 죽어라고 주인님 무덤 속에 집어넣고요”(30)라는 화두와 함께 시작하듯, 주인과 말은 운명공동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시인은 앞서의 시에서와 달리 주인과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말의 타율적 운명을 강조한다. 즉 이 시에서 말은 전쟁터에서 주인을 위해 갖은 고초를 다 겪어야 하는 노예의 삶을 살다가 주인의 불행한 운명까지도 함께해야 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시인의 어조는 앞서의 시들에서와 달리 비탄조이다.
말소리와 말소리가 모여 중원에 살고
무덤 속에서는 깜짝 울음소리 난다
말이 말을 입에 넣고 질겅거린다 (30)
타율적으로 강요된 운명은 긍정적이지 않다. 희생자는 저항의 몸부림을 칠 수 있지만, 그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경우, 슬픔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장마는 무덤 속에서도 울고 있다. 울음만이 타율이 지배하는 강요에 대한 부장마의 유일한 항거수단이다.
4. 달변가로서 말과 재갈 물린 말
김규화 시인의 말은 자유부터 분출하는 언어의 힘과 억압으로 인한 고통과 비운을 형상화한다. 「유비의 말」은 유비와 유비의 말을 달변가로 형상화하며, 달변의 힘을 강조한 시이다. 반면, 「나폴레옹의 말」은 언어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전쟁터의 노동만 강요당하는 말을 형상화한 시이다. 시인은 두 시의 결말부분에서 각각의 말들이 맞이하는 운명을 대조적으로 환기시키며, 언어로서 말의 자유를 강조한다.
「유비의 말」에서 유비의 말은 유비의 역사적 캐릭터처럼 유연하고 다정다감한 말이다. 시인은 유비의 말을 “젖먹이 망아지” 때부터 양육된 말이라고 소개하며, “말로 다듬어/황건적의 난”(26)에 투입할 “500명의 의병을 모았다”(26)고 말한다. 즉 유비의 말은 유비의 캐릭터처럼 흠잡을 데 없는 유창한 언어 또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설득력 있는 언어의 메타포다. 시인은 이를 위해 “말 많은 남자 유비가/ … /말 없는 남자들에게 번지르르 말한다”(26)고 밝힌다. 즉 유비의 달변은 난세의 지도자가 된 유비의 절대적인 힘이나 다름없다. 시인이 “몽골 초원에서 야생말을 다듬는 그가/삶처럼 따라다니는 죽음이 두려워/ 말에게 그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26)고 말하듯, 유비의 언어는 애마를 젖먹이 때부터 기른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갈고 닦은 소통수단으로, 유비에게 난세의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도록 만든 힘이자 유비를 난세의 지도자로 만든 힘이다.
이 시와 달리, 「나폴레옹의 말」에서 나폴레옹의 말은 언어가 중단된 말이다. 현현처럼 재생된 나폴레옹이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36)고 말하듯, 나폴레옹의 말은 언어의 발화가 금지된 채 전쟁터의 노동만 강요당하는 말이다.
시간을 꿰뚫어서 토막토막 들어올린다
말이 더 큰 힘으로 전차를 끌고 간다
말갈기는 목을 조여온다 (36)
나폴레옹의 말이 무거운 전차를 끌고 알프스를 넘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시행에서 시인이 “말소리는 무덤 안에 고여 있고/살아 있는 말소리는 무덤밖에서 듣는다”(36)고 밝히듯, 나폴레옹의 말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처럼 힘들게 느껴지는 전쟁터의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 영웅을 만들기 위한 노예의 고통과 절망이 느껴지게 하는 노동을 강용당하지만, 입을 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기에, 불평 한마디 할 수 없다.
나폴레옹의 말 역시 「부장마」의 말처럼 강요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운의 운명공동체이다. 시인이 “제나의 승자, 워터루의 패자/엘바의 유배자”(36)라고 언급하듯, 나폴레옹의 삶은 영웅적 삶으로부터 나락으로 추락하는 삶의 행보를 보인다. 나폴레옹의 말은 주인의 이 같은 삶과 함께 함께 운명을 맞이한다. 하지만 시인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무덤 속에서 깜짝 울음소리가 난다/말이 말을 입에 넣고 질겅거린다”(31)고 밝히듯, 나폴레옹의 말은 김유신의 말, 조조의 흑혈마, 관우의 적토마, 그리고 칭기스칸의 말과 달리 비운의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말이다.
5. 조화와 탄생의 매개로서 말
김규화 시인의 말은 탄생의 씨앗이고, 탄생을 매개하는 운반자이다. 시인은 여성시인이면서도 남성적 이미지로 투영되는 생명의 기원 씨앗의 중요성을 불편부당한 시각으로 형상화하는 한편, 탄생을 위한 결합을 ‘결혼’이란 의식적(ritual) 장면을 통해 형상화한다. 즉 「종마」에서 말은 씨앗의 메타포이며, 「혼례말」에서 말은 탄생의 메타포이다.
「종마」에서 종마는 “엉덩이가 가려워/여름이면 말들이 꼬리문지르기를 한다”(12)는 시인의 언급처럼, 종족보존의 왕성한 생식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즉 이 시의 종마는 종족보존의 왕성한 생식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말이다. 이와 관련, 시인은 우수한 종족보존 또는 대물림의 책임을 떠맡은 종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윤기 흐르는 말의 종자를 많이 받으려고/말을 자동차에 태우고/ 운전하는 법을 배운다”(12)고 말한다. 주인의 ‘종마 모시기’를 연상하게 해주는 시행이다. 종마는 오직 우수한 종자를 퍼트리기만 하면 된다. 주인을 등에 태우거나 마차를 끄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시에서도 동물로서의 말은 언어로서의 말이다. 우수한 종족보존을 위해 종마를 사랑하는 주인의 마음으로 언어를 끔찍이 사랑하는 시인의 언어다. 이를 말해주듯, 시인은 종마를 ‘모시기’ 수준의 환대를 받는 대상으로 형상화한 뒤, 이어지는 연에서 언어의 메타포로서 종마의 위상을 역사쓰기를 통해 견인한다.
세상의 역사는 말로써 쓴다
왕이 죽으면 왕의 말도 함께 죽는다 (12)
종마가 우수종을 대물림하듯, 고차원적 소통수단인 언어도 기록행위를 통해 과거를 대물림한다. 역사쓰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종자번식처럼 인간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삶의 여러 실체와 방식을 재생하고, 이어갈 수 있도록 대물림해주는 행위임과 동시에 보존해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시인에게 언어로서의 말은 삶과 죽음이란 인생조건의 잣대와 다름이 없다. 즉 언어가 있는 순간은 살아있음이고, 언어가 없는 순간은 죽음이다. 시인은 이를 역사쓰기를 통해 환기시킨다.
「혼례말」에서 의례적 형식 없이 진행되는 종마의 종족보존방법을 ‘혼례식’이란 인간사회의 결합방식으로 치환한다. 이때 말은 종마가 아니라 인간의 결합방식을 견인해주는 매개 또는 중개인으로서의 말이다. 혼례말은 신랑을 태워 신부집으로 데려다주고, 꽃가마 탄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온다. 시인은 말의 이 같은 역할을 언어로 치환하기 위해 앞서 인용한 「종마」의 시행을 다시 떠올린다.
말은 기호와 역사를 실어나르며
기수를 거느린 왕을 왕으로 만들어준다 (40)
이 시에서 시인은 동음이의어인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 사이에 놓인 기의의 차이를 문학적 상상과 언어를 통해 해체한다. 다름 아닌,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은 둘 다 주체와 타자 사이를 연결하는 전달수단이자 매개이다. 시인은 이중적 의미의 두 말을 이처럼 동일한 역할에 비춰 재해석하며, 기의와 기의 사이에 놓인 서로의 차이를 자동 소멸시킨다. 따라서 혼례말은 역사를 기록하는 말과 동일한 말이며, 혼례말을 탄 신랑과 신부는 언어로서의 말로 기록된 역사이며 왕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도 「종마」에서처럼 종족보존의 생식력과 언어의 생식력을 강조한다.
일 년 만에 새끼 한 마리를 낳고
유방이 부풀어 오르며 초유가 스며나온다 (41)
「종마」에서와 달리, 어머니로서 여성의 출산과 양육을 강조한다. 「종마」에서 동물로서 말의 생식력을 언어로서 말의 생식력으로 치환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시에서 시인은 말과 언어의 생식력을 어머니로서 여성의 출산과 양육으로 치환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즉 “일 년만에”가 말해주듯, 잉태와 출산은 미루거나 지연됨이 없이 이뤄진 생식력을 의미하며, “부풀어오르는 초유”는 양육에 필요한 풍요로운 생식력을 의미한다. 시인은 어머니로서 여성의 이 같은 생식력을 통해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 사이에 놓인 동음이의어적 차이를 재해석하고, 해체한다.
끝으로, 김규화 시인의 『말, 말, 말』은 ‘창작백과’란 이름이 어울릴 만큼 동물로서의 말과 언어로서의 말에 대한 시인의 다양하고 심층적인 심상과 언어를 담고 있다. 따라서 몇 편의 지면을 할애하여 그 넓고 깊은 창작의 세계를 추적하는 일은 무례한 일이 될 수 있고, 버거운 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막힘없이 전개되는 시인의 상상과 언어를 좀 더 풍요롭고 다양한 시각과 식견으로 읽기 위해 재충전은 필수다.
시간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약효를 가지고 있다. 시간에 기대어 훗날을 차례차례 기약하다 보면 끝을 향한 길이 열릴 것이란 믿음과 기대를 가져도 좋다는 생각이다. 다름 아닌, ‘다음다음으로, 또 다음다음으로’란 시공간의 지평을 열어가며, 읽고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은 독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하고, 쌓아갈 수 있을 테니까.(이영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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