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남자 역도 69kg급에서 경기 도중 왼쪽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주저 앉았던 이배영. 메달을 따지 못한 그의 실격에 금메달보다 값진 찬사가 쏟아졌다. 다음날 한 인터넷 사이트엔 ‘이배영 선수에게 메달을 만들어 주세요’란 제안이 올라왔고 하룻만에 1066명의 네티즌이 서명했다.
◆한국은 1등 아니라도 박수, 패한 선수에도 아낌없는 박수 늘어
1등만을 기억하는 한국의 올림픽 응원문화가 패한 선수들에게도 찬사를 보내는 풍토로 바뀌고 있다. 이배영뿐 아니다. 지난 11일 남자 유도 73kg급 결승에서 13초 만에 한판으로 패한 왕기춘의 미니홈피는 이튿날 11만명의 네티즌이 찾아 그의 은메달을 축하했고, 같은 날 은메달을 따낸 남현희의 미니홈피에도 11만 명이 찾았다.
박상필 성공회대 교수는 "이번 올림픽에서 드러난 성숙한 응원문화는 시민의식이 전반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현상"이라며 "1등이나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막 벗어나고 있는 한국.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떨까?
◆‘노메달 캐나다’ 국민 반응은 의외로 담담
가장 주목해 볼 나라는 캐나다다. 캐나다는 올림픽이 개최된 지 8일째인 16일 현재 331명이라는 ‘매머드급’ 선수단을 파견했음에도 단 하나의 메달도 못 따는 ‘메달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고 캐나다 내 여론의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하다. 캐나다 토론토 지역신문 ‘더 스타’가 13일에 실시한 온라인 여론조사에 의하면 “캐나다가 메달을 따지 못해도 상관없는가”란 질문에 40%가 “상관없다”고 답했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13일 캐나다 일간지 ‘글로브 앤 메일’이 보도한 기사를 봐도 캐나다인의 무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신문은 ‘베이징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사상 처음으로 포상금 지급’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베이징올림픽부터 사상 처음으로 캐나다 운동선수들이 메달을 따면 돈을 지급받게 된다. 금메달리스트는 2만 달러, 은메달리스트는 1만5000달러, 동메달리스트는 1만달러다”라고 전했다. 이전 올림픽 때까지는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같은 신문이 같은 날 사설에서 “짐바브웨와 아제르바이잔 같은 나라들도 메달을 따는 마당에 차기 동계올림픽 개최국인 캐나다가 노메달 수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하자 네티즌 반응은 절반으로 갈렸다.
일부는 이 기사에 동의했으나 절반 가까운 댓글은 ‘메달을 따지 못하는 것이 왜 비판의 대상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ID ‘MIckey’씨는 “캐나다 정부는 우선순위를 의료복지와 교육에 둔 것”이라며 “세금을 스포츠 엘리트 교육에 쓰지 않고 의료복지와 교육 분야에 쓰는 게 잘못 된 것인가”라고 썼다.
또 한 네티즌은 “메달을 따려면 이기길 원해야 하고, 또 이기기 위해선 계획을 짜고 연습하고 희생해야 하는데, 캐나다인들은 승리와 경쟁과 공격성은 나쁘다고 배워왔다”며 캐나다인이 올림픽에 무관심한 것은 교육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메달이 곧 나라의 자랑…중국과 북한
한국 선수 3명을 연파하고 금메달 따낸 중국의 장 주안주안. /스포츠조선
올림픽 개최국 중국은 어떨까? 중국이 올림픽과 메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선수들의 메달 소감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14일 여자 양궁 개인전에서 한국 선수 3명을 연파하고 금메달을 따낸 중국의 장 쥐안쥐안(張娟娟)은 시상식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오늘 승리는 혼자 한 게 아니다. 이 승리는 중국인의 것이다.” 지난 12일 사격 남자 50m 권총에서 동메달을 따낸 탄종랑 역시 “13억 인구 중 나처럼 연속으로 올림픽에 나가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만약 내 조국이 더 하라고 하면 나는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올림픽과 메달 획득은 개막식에서도 잘 드러났듯 ‘위대한 중국’·‘중화주의’라는 키워드와 떼놓을 수 없다. 선수뿐 아니라 일반 중국인들도 올림픽을 보는 시각은 비슷하다. 국제선구도보(國際先軀導報)는 14일 올림픽으로 후끈 달아오는 중국의 애국주의를 소개하는 장문의 특집기사에서 "중국인이 공공장소에서 국가를 부르는 것에 갈수록 익숙해져 가고 있다"고 전했다.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나라의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
그만큼 중국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선수에겐 5억 원에 가까운 돈이 주어진다. 이미 아테네올림픽에서 20년 전에 비해 33배 증가한 20만 위안(약 3200만원)을 준 중국은 아테네 때보다 많은 포상금을 준비했다. 정부 포상금뿐 아니라 금메달리스트는 중국 본토 출신 홍콩 재벌이 운영 중인 ‘훠잉둥 재단’에서 주는 금 1㎏과 상금 8만 위안도 받게 돼 최소 150만 위안(약 2억원)을 챙기고 여기에 메달리스트가 속한 성(省)에서 포상금을 따로 받는다. 또 `고향을 빛낸 선수`라는 칭호로 포상금을 별도로 받는다.
◆중국 민족주의 열기에 외국인들 눈살
이같은 민족주의의 열기는 때로 올림픽에 참여한 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난 여자 양궁 개인전 때도 중국 응원단들은 한국 선수가 쏠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고 야유를 보냈다. 지난 10일 한국의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을 때도 기자회견장에서 진행자는 금메달을 딴 한국을 위해 단 한 번도 질문 기회를 주지 않고 중국 기자와 외신 기자에게만 질문을 하게 했다. 결국 금메달 선수가 질문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은 메달이 장군님 충성의 기본
‘메달이 곧 나라의 자랑’이란 점에서 북한은 중국과 비슷한 듯 다르다. 여자 역도 63kg급에 출전, 북한에 첫 금메달을 안겨 준 박현숙은 인터뷰에서 ‘장군님’을 연발했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이 경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 (역기를) 들어올렸다. 체육 선수로서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마음으로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장군님’은 곧 ‘나라’인 셈.
◆‘개인주의’ 일본
일본은 조금 다르다. 이번 올림픽에서 수영 2관왕을 달성한 기타지마 고스케는 “기록은 나의 힘과 노력, 열정 이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북한과 달리 나라를 언급하기보다 개인의 노력을 더 강조하는 것.
그만큼 다른 나라 선수의 선전에 찬사를 보내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박태환이 수영 4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던 10일 일본의 인터넷사이트 ‘2채널넷(www.2ch.net)’에선 박 선수를 격려하는 글이 대거 올라왔다. 아이디 ‘jEL63cwh0'는 “한국인 금메달 축하해” 라고 썼고 ‘f5TAihE’는 “스스로 레이스를 만들어 이기는 것을 보니 실력 넘버 1이 맞다”고 칭찬했다.
수영 200m 자유형 결승에 출전한 12일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역시 같은 사이트에선 '박도 많이 떨어지지 않았어. 강했다' '박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은메달 축하합니다’ 등 박태환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9일 남자유도 60kg급에서 최민호가 5연속 한판승으로 이겼을 때도 유도 종주국인 일본의 네티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네티즌 'tokorosan_1'은 "모조리 한판승.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벅찬 심정을 전했고 'ung3103'는 '최민호 선수가 쓰러져 우는 걸 보며 남편과 같이 울었다"며 감동을 전했다.
'ppheqemzg1uij6'는 "유도는 일본에서 나온 드믄 스포츠인데도 일본 유도는 승리에만 집착하고 있어 보다 보면 너무 지루하다"며 "최민호 선수처럼 다른 나라의 유도에 감동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가 '이것이 유도의 멋진 점이다'라는 걸 세계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