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인류 최초의 추수 감사절(이겨레)/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창4:3-7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요약)
인류 최초의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담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많이 드렸을지도 모르고, 가인과 아벨도 이전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여러 번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는 이것이 처음 나타나는 것이기에 이렇게 제목을 정했습니다. 이전에는 가인이나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 받아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도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드렸다 하더라도 무엇을 제물로 삼았는지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므로, 모르는 이야기는 찾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 가지고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인간이 타락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죄가 없을 때에는 감사의 제사가 별로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에야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죄가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때에는 감사를 드릴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더욱 깊은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 생긴다”고 하신 말씀처럼, 사람은 언제 감사를 아느냐? 땀을 흘려서 일을 많이 한 다음에 소득을 얻게 될 때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없으면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늘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 역경이 있어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역경이 없으면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로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다가 결국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멸망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는지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통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가 무엇이며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누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이 실패한 이유는 첫째, 가인이 어리석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시편 14편 1절과 53편 1절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이며, 그런 사람은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지만,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감사의 대상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항상 그분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미련한 자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어리석은 자는 나발입니다. 다윗이 많은 은혜를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다윗을 모욕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자가 등장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풍년이 들어 많은 곡식을 쌓아놓고 스스로 만족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날 밤 그의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와 미련한 다섯 처녀 역시 감사할 줄 몰랐기에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평소에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편 6편 5절에서 "죽은 자는 감사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감사는 천국 백성들의 특권이며, 감사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짐승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짐승들은 거룩한 것의 가치를 모르듯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치를 모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독사의 자식들이라 하셨고,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이리들로 가득 차 있으며, 말세에는 배반과 사랑이 식어가는 일이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 선을 행하고 복을 나누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아벨이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실 것을 믿고 드리며, 찬송과 기도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결국 동생을 죽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선을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잡아 피로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을 귀하게 보셨기에, 그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첫 월급을 몽땅 하나님께 드리기도 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제사였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반면, 가인의 제사는 피 없는 제사였기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믿음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며, 항상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10. 예수님은 선한목자/설교: 나균용 목사님
(요약)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한 목자가 하는 일에 대해 다섯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양에게 양식을 주고, 둘째, 양을 인도하며, 셋째, 양을 알고, 넷째,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고, 다섯째, 양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양을 안다"는 것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안다'는 말은 매우 쉬운 표현이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지만,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볼 뿐 속마음까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내면을 감추며 살아가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이 그를 환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본성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다윗을 시기하며, 사무엘의 충고를 거부하는 등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서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이 될 만한 사람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비교적 나은 사람이 사울이었지만, 결국 그도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연약하고 불완전한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왕 대신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과거에는 왕이 직접 나라를 다스렸지만, 현대에는 왕이 형식적인 존재로 남고, 실제 통치는 선출된 지도자가 맡습니다. 이는 인간이 지도자들에게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할 때 기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인간 지도자는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이 참된 지도자이십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오셨고, 우리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항상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지만 결국 인간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악한 자들의 거짓말에 속고 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았고, 거짓 선지자들은 오히려 환영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바른 것을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거짓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며, 양들을 깊이 아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사정을 모두 아는 것이 어렵듯이,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목사와 신자들 간의 관계는 더욱 멀어질 수 있으며, 목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생각, 걸어가는 길을 다 아시며, 올바른 길을 가도록 채찍질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잘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겠다는 결단과 함께,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는 양 같아서 제각기 딴 길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길을 잃은 양들을 찾아 인도하십니다. 양들은 고집이 세고, 자신의 길을 가려 하지만, 목자는 인내하며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놓고 장난감을 보러 가듯이,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아시고,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지 않고 내 멋대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인도하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개념은 단순한 지식을 넘어 깊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부부도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첫째, 양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둘째, 양들을 인도하시고, 셋째, 양들을 아십니다. 넷째,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며, 다섯째, 양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러한 선한 목자의 역할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돌보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겉모습만 알 뿐, 진정한 내면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을 때, 사람들은 그의 외모와 겸손한 태도를 보고 환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본성이 드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 얼마나 제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완전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을 보여줍니다. 바른 것을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양들이 제각기 흩어지고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샅샅이 아시며, 우리의 걸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주님, 나를 인도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지식 가운데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발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바른 지식이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인간의 지식은 거짓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아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는 길을 아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상의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걱정을 멈추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길이며, 형통한 삶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선한 목자의 역할은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며, 그들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모든 교인의 형편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교회가 커질수록 목자와 성도 사이의 관계는 멀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생각, 걸어가는 길까지도 다 아시며,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아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많은 문제들, 즉 먹을 것, 입을 것, 전쟁과 기근 등의 걱정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 염려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 목마른 자, 병든 자, 나그네, 감옥에 갇힌 자, 외로운 자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연약한 이들을 돌보고 사랑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힘써 여호와를 알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곧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깊이 연구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분을 아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아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날이 오도록 우리는 더욱 주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알고 따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가 되어 예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1. 히스기야의 감사기도/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사 38:17-20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20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요약)
추수감사절에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려 이사야 선지자에게 곧 죽을 것이라고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자신이 선하게 살아왔음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을 더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1년 동안 농사를 지어 얻은 추수보다 생명을 15년 연장받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추수와 생명 연장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히스기야는 15년의 생명 연장 약속을 받은 후, 그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15년만 연장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삭막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죽음을 맞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얻은 물질적 추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을 수확하는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그를 미련한 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 부자가 지혜롭지 않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요? 부자는 대풍년을 맞아 창고를 크게 짓고, 그곳에 자신이 얻은 수확을 가득 쌓아두고, 이제는 편히 쉬겠다고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편히 쉬자"고 하며,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취해 가면 네가 쌓아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부자는 결국 얼마나 허무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쓰지 않는다면, 그 재물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재벌들이 불행하고, 가정이 불우하며, 자녀들끼리 싸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정말 요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부자된 것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릴 뻔한 생명을 다시 찾은 것, 즉 부활의 은총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감사하며, 음부에서나 죽은 자는 감사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동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그러한 삶을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감사할 일들을 주시고, 육신의 건강, 재물, 가정의 화목, 자녀들의 번영 등 모든 면에서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를 들어주신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첫째,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큰 고통과 죽음을 경험한 후, 그 속에서 건짐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합니다. 그의 감사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생명을 다시 주신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고난, 고통,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주시는 소망과 평안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고, 고난 속에서 희망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평안을 맛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고난은 처음에는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평안이라는 열매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감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죽은 자나 음부에 있는 자는 감사할 수 없으며, 육체적인 삶을 가진 동안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과 마음이 약해지고, 외로움과 낙심에 빠질 수 있지만, 그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희망과 사랑을 잃어버리면 죽은 자처럼 살게 되지만, 반대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산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명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적, 육체적 건강만을 위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영적인 추수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통해 더 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이 가득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12. 예수님은 누구신가?/설교: 나균용 목사님
본문: 요 11:25-27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약)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음 이후에도 부활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강조하시며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가 믿고 따를 때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단순히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과 생명의 삶을 의미합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음을 극복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가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며, 세상의 두려움이나 고통에 지배되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오늘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리셨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단순히 말로만 부활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능력을 보여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을 때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의 눈도 열어주셔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게 하시며,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나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심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사례로,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죽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젊은이들을 살리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젊은이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세우시고, 우리도 젊을 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언제든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고, 그 부활의 생명은 우리를 근심과 걱정,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며, 삶에서 감사와 기쁨을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부활의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활의 중요성과 예수님이 부활의 생명이심을 입증하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다"라는 선언을 단순히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서 예고하시며 그 진리를 확실히 증명하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선포하신 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실현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실 구속의 계획을 미리 알려주시며,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완성하실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구속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세 번째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시며, 그들의 대화 주제는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중요한 사건임을 확인시켜 주며,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로서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 있고 적용 가능한 진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며, 우리도 그 부활의 생명을 통해 근심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네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묻고, 둘째는 헤롯당이 세금 문제로 시험했으며, 셋째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며, 부활은 하늘의 세상에서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들은 죽은 자와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자로 새 사도를 뽑으려고 했습니다. 사도의 자격 중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동일시되며, 부활을 전하는 것이 사도의 기본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두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고, 부활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두 기둥이 무너지면 교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며, 특히 부활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부활을 빠뜨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는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기둥이 약해지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굳게 믿고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