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
외조부 진사 김 부군 묘갈명(外祖進士金府君碣銘) - 유성룡(柳成龍) 찬(撰)
공(公)의 휘(諱)는 광수(光粹)요, 자(字)는 국화(國華)이며, 김씨(金氏)는 본래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성(姓)이다. 고려(高麗) 때 휘 방경(方慶)이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큰 공훈(功勳)을 세상에 세웠는데, 공은 바로 그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함길도 감목관(咸吉道監牧官) 김자첨(金子瞻)이요, 조부(祖父)는 사직(司直) 김효온(金孝溫)이며, 고(考) 휘 극해(克諧)는 문과(文科)에 올라 벼슬이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이르렀다.
공은 천성이 욕심이 없고 맑았으며 풍채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부귀 영달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는데, 일찍이 친구 사이에 시(詩)에 능하다고 알려졌다. 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신유년(辛酉年, 1501, 연산 7)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의성(義城)의 북촌(北村)에 들어가 살면서 더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 뜻을 두지 않았다.
집 가에 왜송(矮松)이 한 그루 있었는데, 푸르고 울창하여 두어 이랑[畝]의 그늘을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를 사랑하였다. 이에 매일같이 술도 마시고 시도 읊으며 그 아래에서 한가히 지내며 스스로 송은 처사(松隱處士)라 불렀다.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衣食)을 잇대기 어려웠으나 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조금도 불평 없이 만족하게 지냈는데, 당시 이웃 마을에 사는 현우(賢愚)와 소장(少長)을 막론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즐겨 나아가 본을 뜨려 하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타고 나서 지례공(知禮公)이 일찍이 돌아가자 수십 년 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 받드는 일을 모두 다하였으며, 한 아우가 안동(安東)에 살면서 오기로 약조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며 날이 저물도록 먹지 않다가 반드시 더불어 같이 밥을 먹곤 하였다.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데 대한 말을 하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善行)을 노래로써 읊고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복(婢僕)들도 익히 듣고 능히 전하기까지 하였다. 아! 공은 독행 군자(篤行君子)라 할만하다. 비록 옛날의 곤궁(困窮)하면서도 고상(高尙)한 뜻을 기른 선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공의 선취(先娶) 남씨(南氏)는 아들 김당(金溏)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김순(金珣)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 순천 장씨(順天張氏)는 밀직 부사(密直副使) 장홍(張弘)의 후예(後裔)로서 첨정(僉正) 장일신(張日新)의 딸이다. 딸 다섯을 낳으니 맏이는 신택(申澤)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김처선(金處善)에게 출가하였는데 충순위(忠順衛)요,
다음은 김온(金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중영(柳仲郢)에게 출가하였는데 관찰사(觀察使)요, 다음은 이영(李苓)에게 출가하였는데 훈도(訓導)이다. 김당은 딸 하나를 낳으니 권덕린(權德麟)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김세우(金世佑)이다.
김순은 두 아들을 낳으니 김생하(金生河)ㆍ김생명(金生溟)이요, 사위는 강여개(康汝皆)이다. 신택은 두 아들을 낳으니, 신대년(申大年)ㆍ신대유(申大有)요, 세 사위는 김목(金牧)ㆍ문희정(文希禎)ㆍ조희조(趙希祖)이다. 충순위는 세 아들을 낳으니, 김응하(金應夏)ㆍ김응상(金應商)ㆍ김응주(金應周)요, 김온은 한 아들을 낳으니 김명견(金命堅)이다.
관찰사는 두 아들을 낳으니 유운용(柳雲龍)ㆍ유성룡(柳成龍)인데 관찰사이며, 세 사위는 이윤수(李潤壽)ㆍ김종무(金宗武)ㆍ정호인(鄭好人)이다. 훈도는 딸 하나를 낳으니 사위는 김탄(金坦)이다. 내외손(內外孫)은 남녀 백여 인이다. 장 부인(張夫人)은 어질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공과 더불어 곤궁하게 살면서 거친 음식을 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즐거워하며 고된 생활을 싫어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무자년(戊子年, 1468, 세조 14)에 태어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돌아가니 향년(享年) 96세이었다. 임종(臨終)에 목욕하고 궤(几)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기를, “족(足)하다.” 하고는 조금 뒤 홀연히 서거(逝去)하였는데, 피부는 살았을 때와 같았다.
장 부인은 공보다 몇 해 앞서 가정(嘉靖) 기미년(己未年, 1559, 명종 14)에 졸(卒)하니 88세였다. 대곡산(大谷山) 건좌 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서거한 뒤 그 산기슭에 나아가 같은 묘역(墓域)에 봉분(封墳)을 달리한 제도(制度)로 만들었다.
그 22년 후에 외손(外孫) 유성룡(柳成龍)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 관찰사로서 남쪽으로 내려와 공의 묘(墓)에 나아가 제(祭)를 올렸는데 그 묘도(墓道)에 비(碑)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德)과 빛[光]이 따라서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고 민멸될까 크게 두려워하여, 드디어 짧은 빗돌을 그 앞에 세우고 대략 이상과 같이 그 후면(後面)에 서술(敍述)하니, 아마도 백세(白歲) 뒤에도 이로 인하여 공의 대개(大槩)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
[原文]
金光粹 墓表[柳成龍]
公諱光粹, 字國華。 金氏本新羅宗姓, 而麗時諱方慶爲上洛府院君, 樹大勳于世, 公其後也。 曾祖咸吉道監牧官子瞻, 祖司直孝溫。 考諱克諧, 登文科, 官至知禮縣監。 公天性恬淡, 風神端潔, 於富貴利達, 泊然無所嗜。 早以能詩聞儕輩間, 中弘治辛酉進士, 旣以棄擧業, 屛居義城之北村, 不復有進取意。 宅邊有矮松一株, 靑翠蔥鬱, 蔭可數畝, 公愛之。 日飮酒哦詩, 偃仰於其下, 自號松隱處士。 家貧衣食不給, 而公曠不以爲意, 終日欣欣, 無一不適意, 時隣里賢愚少長莫不敬慕而樂就焉。 公孝友天至, 知禮公早世, 事先妣數十年, 所以承顔順旨者無不至。 一弟在安東, 每約來則倚門以待, 日晩不食, 必與同餐。 平生口不道營産, 惟古人嘉言善行, 詠歌稱道之不輟。 故婢僕亦習聞而能傳之。 嗚呼! 公可謂篤行君子矣。 雖古之處約養高之士, 何以加此?
公先娶南氏, 生子溏, 女一人適金珣。 後娶順天張氏密直副使弘之後僉正日新之女, 生五女: 長適申澤: 次適金處善, 忠順衛: 次適金溫: 次適柳仲郢, 觀察使: 次適李苓, 訓導。 溏生一女權德麟, 一子世佑。 金珣生二子: 生河, 生溟。 一女康汝皆。 申澤生二子: 大年, 大有。 三女: 金牧, 文希禎, 趙希祖。 忠順衛生三子: 應夏, 應商, 應周。 金溫生一子命堅。 觀察使生二子: 雲龍, 成龍。 觀察使三女: 李潤壽, 金宗武, 鄭好仁。 訓導生一女金坦。 內外孫男女百餘人。 張夫人賢有識慮, 與公窮居食淡, 而亦有以自樂無厭苦意。 公生於成化戊子, 終于嘉靖癸亥, 享年九十六。 臨終, 沐浴隱几, 屈指自語曰: “足矣。” 有頃, 倏然而逝, 肌膚如生。 張夫人先公數年於嘉靖己未卒, 八十八。 葬于大谷山乾坐巽向之原, 及公之歿, 就其麓爲同域異塋之制焉。 其後二十二年, 外孫柳成龍承朝命按節南來, 就省公墓而祭之, 傷其墓道無刻, 而大懼潛德幽光因至泯沒于後, 遂立短碣其前, 略敍于陰如右。 百歲之下, 必有因此而得公之大槪者矣。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