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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란
의상(義湘, 625~702)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말이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는 말이다.
나고 죽는 것과 열반(涅槃)의 대도(大道)가 항상 같이하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다. 생사는 우리가 떠나고 싶은 자리이고,
열반은 이르고 싶은 자리인데, 떠나고 싶은 그 자리와 이르고 싶은 그 자리가
결국은 한 덩어리 자리라는 말이다.
생사에 윤회하는 진성(眞性)이나 열반대도(涅槃大道)에 있는
진여(眞如)나 근본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공화동성(共和同性―항상 같이, 같은 성질)이라는 말이다.
나고 죽는 깨달음의 바탕은 한 덩이이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은 항상 조화를 이룬다. 생사와 열반은 하나다.
생사를 떠나 따로 열반이 있지 않다.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누군가의 태어남이고,
누군가의 태어남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다.
무아(無我)의 세계이므로 연기(緣起)의 흐름만 있다.
그러므로 생사의 끊임없는 변화 곧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혜이며, 모든 불만족을 벗어나는 길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해서 태어나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죽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죽음과 삶은 중간에 문이 있는 양쪽 방과 같다.
중앙에 하나의 문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한중간 위에서 본다고 가정해 보면, 누군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가지만,
다른 방에서 보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가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죽음과 태어남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경전은 태어남과 죽음을 대부분 함께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시지중생 본래성불 생사열반 유여작몽
(始知衆生 本來成佛 生死涅槃 猶如昨夢)」이라고 했다.
비로소 알라. 중생은 본래 성불한 것이니
생사와 열반이 지난 밤 꿈과 같은 줄 알지니라고 했다.
모든 부처님 세계가 마치 허공 꽃이 어지럽게 일어나
어지럽게 멸하는 것과 같아서, 가까워지려 하지도 말고, 여의지도 말며,
얽매임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리니, 비로소 중생이 본래 성불한 존재이므로
생사와 열반이 어젯밤 꿈과 같음을 알 것이리라고 했다.
그러니 다들 알아야 한다. 지난밤 꿈과 같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은 일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음을 알지니라. 그렇게 증득 된다는 것은 얻을 바도 없고, 잃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사찰 대웅전의 불상을 보라,
부처의 모습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중생은 어리석어서 자기가 부처임을 모른다.
아니면, 살아가려고 애쓰느라 자기의 본성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본래성불을 모르므로 본래성불을 믿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중생의 근본이 본래 불성(佛性)이고, 그것을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하거나 찾으려 하지 말라. 본래 있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기가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깨치는 것, 본래성불을 깨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성, 본래성불, 불생불멸을 깨닫는 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 속의 중국 양(梁)나라 지공 화상(誌公和尙, 418~514)의
<십사과송(十四科頌)>에서도 열반과 생사가 하나라고 했다.
「정도사도불이(正道邪道不二) 요지범성동도(了知凡聖同途)
미오본무차별(迷悟本無差別) 열반생사일여(涅槃生死一如)
정도와 사도가 두 가지가 아니니 알고 보면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이라네.
미혹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이 없고 열반과 생사가 하나로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이어지면서 정도와 사도가 둘이 아니라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범부와 성인도 한 길이며 미혹함과 깨달음도 본래 차별이 없다.
나아가서 열반과 생사도 하나다. 그 모든 말의 기본에는 부처와 중생이 하나라는데 있다.
모든 부처와 중생은 오직 한 마음일 뿐이니, 다시 다른 법은 없다.
이렇게 진리는 간단하다. 불교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데,
사람들의 근기와 수준이 각각 다르므로 하는 수 없이
세존은 별별 말을 지어내고 별별 법을 만들어서 근기에 맞추고 수준에 맞추다가 보니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졌다.
불교는 이와 같이 혼란스러워진 사람들을 깨우치고 바로 세우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매 찰나마다 생멸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일어났다 금방 사라진다.
삶과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큰 바다에서 부침하고 있는 파도와 같다.
드넓은 바다에서 파도가 일고 스러지지만 그것 역시 바닷물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둘은 연결 돼있다.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한 몸이 생멸의 파도에 따라 삶으로 혹은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생과 사 사이에 선(線)은 분명히 존재한다.
선과 악, 나와 너, 몸과 마음 사이에도 그 둘 사이를 구별 짓는 선은 있다.
그러나 생과 사, 선과 악을 나누는 선은 동시에 생과 사, 선과 악이 만나고 통합하는 선이기도 하다.
생과 사는 그 둘 사이를 가르는 선을 통해 서로 만난다.
그래서 생과 사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만 생 속에서 사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삼라만상은 연기로서 서로 연결 돼있듯이
생과 사 또한 연기 관계에 놓여있다. 생과 사는 하나이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상호 침투한다.
생이 없으면 사 또한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생과 사를 나누고 둘 사이에 경계를 짓는 것은 환상이요 착각이다.
우리의 간계한 분별의식이 지어낸 관념의 산물이다.
따라서 죽었다고 해서 죽은 게 아니요 살았다고 해서 산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빛과 그림자처럼 그렇게 서로를 따라 다닌다.
삶도 죽음도 따로 따로 각기 절대적인 것이라 말한다.
“살아갈 때는 전력을 다해 살고, 죽을 때도 전력을 다해 죽는다.”
살아서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은 불안하고 두려워진다.
그것은 생이 끝나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죽음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선(禪)은 절대를 추구하는 일이기에 한순간 한순간이 절대적인 것이며,
그 앞도 그 뒤도 이어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도 각각 절대적인 것이다.
삶은 죽음에 이르기 전의 모습이 아니고, 죽음은 삶의 뒤에 따르는 모습이 아니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생과 사는 서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생과 사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생과 사, 둘 다를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아야 되며, 삶을 거부하고 죽음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거부하면 할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옥죄여 오며 삶을 거부하면 할수록
죽음에 대한 집착이 옥죄여 와서 고통스러운 상황이 전개된다.
그렇다면 언제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그래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은 맞이하는가?
그것은 분별의식이 깨지고 경계의 벽이 무너질 때이다.
헤아리고 비교하며 출렁거리는 마음작용이 멈추어 버리면 그러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물론 범부로서는 가당찮은 일이긴 하다.
이 자리에서 마음의 생사를 생각해 보자.
사실 육체적 생사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의 생사다.
마음의 생사란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어떤 좋거나 싫은 상황, 기쁘거나 슬픈 상황을 만나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이다.
마음이 요동치면 우리는 극도로 혼란 속에 빠지기도 하고
좌충우돌하며 아우성치고 고통 속을 헤매게 된다.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우리는 생사의 사이클을 돌고 돈다.
지옥과 천당은 물론 축생과 아귀의 삶이 오락가락하며 업장을 쌓는다.
(산행을 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당황하면 할수록 더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가 진이 빠져 변을 당한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되면 우리는 고요한 평화를 맛본다.
마음이 경계에 부딪혀 출렁거리지 않고 깊은 강물처럼 잔잔해지면 삶이 명징하고 평화롭다.
육체적 생사 또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리저리 요동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사일여의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과 사에 집착하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멀리서 생사를 바라본다고 하자. 우주 저편에서 생사를 관조한다고 하자.
생사 또한 물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사를 멀리서 바라보고 마음을 쉬면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생사일여의 경지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생사일여의 의미가 아닐까?
원래 생사는 없다. 본무생사(本無生死)다.」- 옮겨온 글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한 대혜 종고(大慧宗杲) 스님의 <서장(書狀)>에
향시랑 백공(向侍郎伯恭)에게 답하는 편지가 있다.
‘향시랑’이라는 사람은 당시(송대) 호부(戶部)에서 시랑 벼슬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서
이름이 향백공(向伯恭)이다.
거기에서, “궁극에 이른 사람은 꿈이 없다(無夢)."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없다’는 우리가 통상 쓰는 ‘있다, 없다’의 ‘없다’가 아니다.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뜻이다.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것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있어도 이 자리고, 없어도 이 자리로, 있음과 없음을 떠나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을 떠나라고 하는 것이고,
또 ‘꿈이 없다.’는 말도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닌 것이 하나일 뿐이다.”라고 하듯이
꿈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꿈도 이 자리요
꿈이 아닌 생시도 이 자리여서, 꿈이니 아니니 하고 나눌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일체가 오직 하나요, 한 법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는 말 역시
인간의 소견으로 우리의 삶을 볼 때 삶과 죽음이 없어서 ‘생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이 한 법이니 살아도 이 자리 이 법이요,
죽어도 이 자리인, 즉 삶과 죽음은 모양의 모양일 뿐이고
실제로는 끊임없는 이 한 법의 변화일 뿐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다.’고 하고,
또는 ‘생과 사가 하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涅槃)은 번뇌의 불을 꺼서 보리(菩提)를 증득한 것으로 이 한 법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한 법을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이 한 법이요,
또 이 한 법과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끊임없이 생사를 거듭하는 만법이 여전히 이 한 법이니,
나고 죽는 생사와 이 한 법을 깨달은 열반이 조금도 다름이 없는 하나이다.
그래서 생사가 바로 열반으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열반이요 한 법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를 세우면 상대가 서고, 하나가 사라지면 상대도 사라지는 것처럼,
결국 생각이 생사라는 모양을 지으니 열반이 있었지만, 생사가 없어지면 열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사를 벗어나서 열반에 이른다고 여기고 생사를 벗어나려고 온갖 애를 쓴다.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렇게 애를 쓰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이 한 법이요,
이 한 법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 이 한 법을 알지 못하기에 생사가 있다고 여기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이처럼 생사가 오직 생각의 착각임을 알지 못하는 이런 소견은
결국 생각 속에 갇히고 생각의 종이 된 것이어서, 그런 생각으로는 수억 겁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끝내 자신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있지도 않은 생사에 매여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있지도 않은 열반을 얻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떻게 살든, 어떤 곳에 있든,
우리는 이 한 법을 절대 떠날 수 없고 이 한 법과 하나인 성품으로
이 모습 이대로 바로 부처요, 진리요, 법이다. 우리의 본성과 정체가 바로 법 그 자체인데
어찌 법이 다시 법을 구하겠는가.
달마(達磨)조사께서도 혈맥론(血脈論)에서 말씀하셨다.
“만약 자신의 마음이 부처임을 알면 마음 밖으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요,
부처로 부처를 헤아리지도 않으리라.”고 하셨다.
“또한 부처로서 부처에게 예불할 수가 없고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생각할 수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이처럼 생과 사가 모두 생각이 지어낸 것이고, 생사와 열반 역시 이 생각이 우리를 속인 것이니,
오직 일체가 한 법이요, 자신이 법이요 부처임을 믿고,
법으로서 법을 구하지 말고 부처로서 부처를 찾지도 말라.
생사를 떠난 열반이 없고 열반을 떠난 생사는 없다.
그래서 생사도 열반도 모두 생각이 만들어낸 모양일 뿐,
깨달음 역시 깨닫고 나면 모두 생각의 속임수임을 알 뿐이니,
이 한 법에는 일체의 모양이 없음을 알라고 하셨다.
그러나 말하기는 쉽지만 미혹의 중생으로서는
실제로 생사공화(生死共和―생사가 같음)를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중생의 소견이 하열하니 아무리 애쓴들 생사를 극복하기가 힘든 것이다.
생사는 나고 죽고 하는 것을 말한다. 죽음이 있으니 괴로움이 있다.
열반은 괴로움이 없는 것, 불이 꺼져 시원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 생사가 있으면 열반일 수 없고, 열반이면 생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생사와 열반이 함께 하는가?
내가 지금 생사가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생사가 없는 열반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상공화(常共和)가 아니다. 상공화는 함께 있는 것이다.
언제쯤이나 이런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막막할 뿐이다.
여기서 호스피스 일에 종사하는 능행 스님의 글을 보자.
「길어야 백 년, 숨 한번 몰아쉬면 홀연히 지고 마는 우리네 인생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통로를 잘 지나는 것이다.
옛날 큰 스님들은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생과 사가 다른데 어찌 둘이 아니라는 걸까.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말과 찰나생 찰나멸이 같은 맥락인가.
그러나 호스피스 일을 할수록 정말 생사가 둘이 아님을 절감한다.
생이 바로 서야 죽음이 바로 서고 생이 청정해야 죽음이 청정하다는 연기론적 법칙에서 보면
정말로 생사는 둘이 아니다. 육체라는 한낱 현상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
우리의 본성에 어떻게 생사가 있겠는가. 영적 차원에선 죽고 살 일이 없다.
그저 하나의 현상이 태어나서 머물다 소멸할 뿐,
그 어디에다 생(生)이라 이름 붙이며 사(死)라고 이름 붙일 것인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오직 지금 이 순간이 존재할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 임종 직전에 나와 대화를 나누고 눈을 맞추며
마음을 주고받으며 마지막 온기를 나눴다고 생각해 보라.
바로 그 순간 오직 그 찰나에만 존재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이 모여 십 년이 되고, 오십 년이 되고, 팔십 년이 된다.
한순간의 찰나 그것밖에 없다. 찰나 생이고 찰나 멸이다.
순간순간 죽음 속에 삶이 존재하고, 삶 속에 죽음이 담겨 있다.
철로의 양쪽 레일을 달리는 기차처럼 삶과 죽음은 그렇게 매 순간 함께 달려간다.
매 순간 죽고 태어나는데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겠는가.」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