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 2:1~10)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만수무강하옵소서!
제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성이 폐허가 됐고
그 성문들이 불에 타 허물어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의 잃어버린 나라를 향한 근심과 기도가
마음에 깊숙히 들어온다.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공동체이고, 공동체는 국가이고,
국가가 이 지구의 열방과 연결된다.
한 영혼을 위한 것이 조직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한 영혼에 집중하는 일을 받아들이고
공동체의 일에 등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와 같이 양극화 되고 정치적으로 극명한 두 편으로
나뉘어 있는 형국에서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것이 중용의 미덕인가?
솔로몬이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엄마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마도 두 여인은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이 또 둘로 갈라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싸웠을 수 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제3의 부류가 나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규명되어지지 않는 사실에 지치고,
두 세력간의 싸움에 혐오와 피로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왜곡되면,
"두 여인 모두 잘못이다."라는 엉뚱한 결론을 주장하는
사람마저 생긴다.
이것이 맞는가?
내가 느끼는 피로감이나 싸움에 대한 혐오감과 관계 없이
두 여인 중, 하나는 진짜 엄마이고 나머지는 거짓을 말하는 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지쳐
무조건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나는 감히 '사탄이 원하는 선택'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누가 진실하고 누가 허구인지를 규명하였다.
우리나라가 35년간 일제 치하에서 참혹한 시기를 보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징용되고, 성적 범죄에 노출되고,
자유를 억압당했다.
1919년 3월 1일에 민초들이 모두 일어나
일제의 강제 찬탈이 불법이며 우리의 주권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고 외쳤다.
이어서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대한제국의 왕정에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으로 변혁하면서
이 결정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헌법으로 계승하였다.
그때의 외침에 참여했던 33인의 지도자 중에서
16인은 기독교 지도자였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세력이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리더 자리를 꿰차고
부끄러움 없이
일제의 찬탈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한다.
아쉽게도 기독교의 몸체, 주류는 이 일에 침묵하거나
말 없이 바라본다.
아마도 논리는, 양극화된 우리 사회 지형에서
이 모든 것이 피곤한 정치공세라는 것이다.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바른 기도를 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처럼,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과 선지자적 관점을 가진 이들이
앞장서는 역사가 필요하다.
오늘부터 교회에서 특새가 일주일간 있다.
오늘 새벽 설교에서 인상 깊었던 문귀가 있다.
'본질적인 것에는 강철같은 마음을, 비본질적인 것에는
갈대같은 유연성을 가지도록 지혜를 달라.'는 내용이다.
가슴 아프게도
비본질적인 것에 매여
정죄와 질타와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교회의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 감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랜동안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강한 관성이 붙고, 감각이 시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특히 젊은이들이 더욱 멀어져 간다.
"하나님! 도와 주소서.
저의 죄를 먼저 회개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
타자를 위해 베풀어야 할 사랑을 강철같이 붙들게 하소서.
저를 회복시켜 주시고,
성도를 회복시켜 주시고
한국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