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구멍, 저기도 구멍
“무사하지 않다는 것으로 간신히 무사하다고 소식 전합니다”로 시작해서 “스웨터에 오래 매달리다 보면 동그란 보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로 마치는 김소연 시인의 시 ‘스웨터의 나날’이 요 며칠 많이 생각났습니다. 무사하지 않은 날을 보내는 이가 그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무사하다는 안부가 될 수 있음을 보면서, 걱정 있는 날들을 걱정하며 잘 보살피는 것도 걱정을 더는 일이겠다 싶습니다.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책 한가운데 구멍이 난 책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작가 어이빈드 토세테르가 그린 《HULLET[구멍]》이라는 그림책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사한 후, 이삿짐을 풀기 전에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계란 프라이를 해 먹던 중 이상한 구멍 하나를 발견합니다. 문 옆 벽에 있는 구멍을 보며 “이게 뭐지?” 하고 반대편으로 가서 확인하려는데 구멍이 세탁기로 옮겨져 있고, 돌아서려는데 발밑으로 옮겨져 있어 결국은 그 구멍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아직 짐도 풀지 못하고 허기도 채우지 못한 채 예기치 못한 일로 발까지 다치고 말았으니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닙니다. 이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이삿짐 상자를 비우고 간신히 그 안에 구멍을 집어넣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소로 향합니다.
그런데 구멍을 넣고 꽁꽁 테이프를 붙인 상자에 다시 구멍이 난 장면에 서 웃음이 나고, 상자를 들고 나선 거리에서 여기저기로 옮겨다니는 구멍을 보며 더 웃음이 납니다. 구멍은 우체부의 노래하는 입으로,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로, 머리 위 신호등으로, 무심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으로, 도로 위 공사 중인 맨홀로, 풍선 장수의 풍선으로, 귀여운 아이의 콧구멍으로… 계속해서 자유롭게 옮겨다닙니다. 사실 구멍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구멍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지만 그래도 구멍 때문에 골치가 아픈 이 사람은 구멍을 넣은 상자를 드디어 구멍연구소에 맡기게 됩니다. 연구원들은 아무리 연구해봐도 잘 모르겠으니 맡겨두고 가라고 했습니다. 사실 연구소도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구멍이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구멍 천지입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이 구멍은 하늘에 떠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발코니에 앉아 자연스럽게 구멍을 즐기는 모습으로 책은 끝이 납니다. 구멍은 애초 있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편안히 잠을 청합니다.
누구에게나 구멍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구멍이 있습니다. 구멍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구멍 때문에 골치가 아플 수 있지만, 구멍 없는 사람이 없고 구멍 없는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구멍이 있어야 살 수 있고, 구멍 때문에 즐거운 일이 많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구멍을 없애려 애쓰기보다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구멍 때문에 위안을 얻기도 하고, 구멍이 있어서 더 조심하며 안심하게 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물론 구멍이 있으면 안 될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해 구멍을 메워나가는 일도 필요하지만, 억지로 구멍을 메우려다 더 큰 구멍을 낼 수 있음을 아는 게 지혜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창작자들처럼 자신에게 있는 구멍을 잘 건사하다 보면 일상의 나날이 예술로 변하는 매혹적인 지점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없는 걱정은 있게 하지 말아요
프랑스 작가 아드리앵 파를랑주가 판화기법으로 그린 《곧 이 방으로 사자가 들어올 거야》(2021년 《누가 사자의 방에 들어왔지?》로 개정)라는 흥미로운 그림책이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소년이 사자의 방에 들어가면서 걱정하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자가 방을 비운 사이에 들어온 소년이 낸 소리에 놀란 생쥐가 달아나고, 조금 뒤 다른 소년이 들어왔는데 사자인 줄 알고 놀란 소년이 침대 아래 숨고, 두 번째 소년은 얼마 뒤 다른 소리를 듣고 사자인 줄 알고 놀라 천장에 숨고, 그때 들어온 소녀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사자인 줄 알고 양탄자 아래 숨고, 그렇게 들어온 개는 거울 뒤에 숨고, 한 무리의 새들은 커튼 뒤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사자가 들어왔습니다. 숨은 소년들과 소녀, 개와 새들까지 모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방에 들어온 사자도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방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고 천장과 양탄자가 약간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덜컥 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 숨었습니다. 바로 그때 생쥐가 들어와서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이불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실체가 없는 막연한 두려움과 선입견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사자는 이미 방을 비웠는데도 그 방이 사자의 방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미 무섭다고 생각하다 보니 모든 소리가 다 사자가 오는 소리로 들리게 된 것이지요. 아주 작은 소년 소녀의 발소리조차 사자의 무서운 발소리로 느낄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에 쉽게 휩싸이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맥락을 알고 있는 독자 눈에는 한없이 우스워 보일 만큼 무서움에 쩔쩔매는 그림 속 존재들이 어쩌면 오늘 우리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지레 겁먹고 호들갑을 떨며, 스쳐 지나가는 거짓말 하나에도 가슴 졸이며 아파하니까요.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는 스스로 만든 두려움의 세계에서 저마다 경계를 짓고 숨죽여 떠느라 잠 못 이루는 존재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경계선 밖에서 혼자 빛나는 생쥐 한 마리만 잠들어 있습니다. 조금만 틈을 내어 곁에 있는 존재들과 대화를 시도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보면 걱정은, 생각보다 훨씬 큰 존재의 무거움으로 내 삶을 옴짝달싹 못 하게 짓누를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방의 주인인 사자조차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자기가 만든 두려움에 스스로 갇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걱정 많은 나날을 보내는 때일수록 내 곁에 있는 존재들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더 큰 이야기의 맥락을 읽으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걱정이 있지만, 지낼 만해요
걱정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우리 주변에도 많지만 아나톨이라는 친구는 조금 특별한 것 같습니다. 이자벨 카리에가 지은 《…아나톨의 작은 냄비》에 나오는 주인공입니다. 아나톨은 언제 어디서나 작은 냄비 하나를 달그락달그락 끌고 다닙니다.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평범한 아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냄비를 달고 다니니 사람들이 불편해할 때도 있고요. 사실 아나톨은 그림도 잘 그리고 잘하는 게 아주 많은 아이지만 사람들은 아나톨의 냄비만 쳐다보고 이상하게 여깁니다. 냄비 때문에 너무 힘든 아나톨은 냄비를 없애버리고 싶지만, 냄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냄비로 얼굴을 가리고 숨어버립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숨은 존재로 있다가 아나톨처럼 작은 냄비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나톨에게 냄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나톨을 힘들게 했던 냄비가 때로는 웅덩이를 건너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지루한 시간을 날려버리는 놀이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이 사람이 아나톨에게 냄비를 넣을 수 있는 고운 가방을 만들어주는 장면은 코끝을 찡하게 해주었습니다. 작은 냄비는 여전히 달그락달그락하지만, 냄비를 잘 건사할 수 있는 이 가방 덕분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오히려 아나톨에게 창의적인 작품 활동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나톨의 작은 냄비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해볼 수 없는 걱정이 따라다니지만, 그래서 성가시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렵게 되지만 같이 잘 지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아나톨처럼 혼자서 이 걱정을 해결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그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크기만 좀 다를 뿐, 저마다 걱정냄비 하나씩은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까짓 것 벗어버리라고 쉬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좀처럼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일 수 있으니까요.
지금 걱정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는 걱정냄비에 대해 분석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걱정냄비를 같이 들고 놀아줄 수 있는 사람, 걱정이 있지만 잘 지내는 법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 걱정을 당장 버리라고 훈계하는 목소리보다 가만히 그것을 감싸줄 수 있는 가방을 내미는 사람, 그 한 사람입니다. 걱정이 있지만 이 걱정을 같이 들어주며 걱정하는 곁이 있어서 오늘도 꽤 지낼 만합니다.
HULLET[구멍]
어이빈드 토세테르 지음 / 황덕령 옮김 / A9Press 펴냄 / 2019년
책 전체를 구멍 하나로 관통하면서, 삶의 구석구석에 있을 법한 구멍에 대한 서사를 유쾌한 상상력과 함께 풀어가는 책이다.
누가 사자의 방에 들어왔지?
아드리앵 파를랑주 지음 / 이경혜 옮김 /봄볕 펴냄 / 2021년
사자의 방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장을 넘길 때마다 독특한 운율과 반전으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아나톨의 작은 냄비
이자벨 카리에 지음 / 권지현 옮김 / 씨드북 / 2014년
사람마다 지니고 있을 법한 단점이나 걱정, 콤플렉스에 대해 섬세한 언어로 그리고 있다. 평범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 어린 시선을 배운다.
첫댓글 구멍~~~~누구에게나 있지요^♡^
그래서 더 친근하고~♡
우리가 걱정하는 많은 것들이 실체가 없는 막연한 두려움과 선입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참으로 많지요..아나돌의 작은 냄비..우리도 걱정냄비 하나쯤 있지요. 걱정은 있지만 지낼 만해요~^^
모두 읽어보고 싶어용^♡^
걱정을 감싸줄 수 있는 가방을 가만히 내어주는 사람... 그분에 대한 상상으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