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아틀란타 마틴 루터 킹 박물관
아틀란타는 미국 내 흑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들 중 하나다. 마틴 루터 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흑인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다. 1929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침례교 목사 마이클 루터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에는 아버지 마이클 목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지만, 아버지가 1935년 마틴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마틴이 이름이 된다. 아버지는 침례교회 목사로, 증조부 때부터 침례교 목사였다. 3대째 교회 목사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 백인들에게 멸시와 폭행을 당했다. 루터 킹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하여 인종차별을 없애야 된다는 신념을 어릴 적부터 품게 되었다. 경찰의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부친의 모습은 어린이였던 루터 킹에게 옳지 않은 것을 보면 굴종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정당하게 항의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루터 킹 목사 부친도 암살당했다. 세계적 영웅이었다. 루터는 모어하우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크로저 신학교를 수료하였다. 대학 재학 중 넉넉한 가정환경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았지만 흑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신학교를 마친 뒤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신학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박사학위 재학 중 그는 주일 학교 때 학력이 낮은 교사들에게 배운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신앙에서 기독교적인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진보적 신앙으로 신앙성격이 바뀌게 된다. 한편 주일학교에 나가 흑인 및 빈민가의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몽고메리의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게 된다. 1955년 백인들은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고 하였고,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던 중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펼쳐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지도하고, 다른 흑인 및 양심적인 백인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하여 5만의 시민이 동참했다. 흑인 해방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56년에는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버스 내 인종 분리법의 위헌판결을 얻어낸다. 이후 아틀란타의 침례교회 목사로 있으며 미국 각지의 인권운동을 지도했다. 1957년 미국 남부의 흑인을 차별하지 않는 목사 및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의 조직,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와 동의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일부의 과격파는 흑인 이슬람 지도자를 지지하며 그의 비폭력 흑인운동에 반발했다. 그들에게 온건한 성격의 흑인인권운동은 백인들과의 타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 때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교 입학선물로 자동차를 선물 받을 만큼 부유한 집에서 자란 루터 킹 목사의 성장환경과 그의 온건민권운동은 일부 흑인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1963년 워싱턴 대행진 때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인종 차별의 철폐와 각 인종 간의 공존이라는 고매한 사상을 간결한 문체와 평이한 말로 호소해 넓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연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함께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명하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를 상대로 생존권을 요구하는 권리 투쟁 즉, 노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63년 워싱턴 시에서 열린 인종 차별 반대의 집회의 연사로 참여하여 이를 주관, 20만 명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를 계기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법안과 차별금지 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그의 활발한 사회운동은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자 외에도 미국의 우파와 정부 인사들까지 자극하였다. 당시 FBI 국장은 흑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마틴 루터 킹 2세를 위험인물이라고 규정하여 활동내역을 감시하였다. 한편 1963년 케네디의 장례식 장면 중 재클린 케네디가 무릎 꿇고 관의 중간 부분에 키스를 하는 부분을 본 뒤 그는 ‘음, 이 부분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지’라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이 재클린의 귀에 들어가게 됐다. 케네디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한 말실수가 재클린 케네디의 귀에 들어가면서 재클린은 그의 사생활에 대한 폭로와 위선자라는 기록과 녹음을 남기게 된다.
그는 1963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의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에도 동참했다. 1964년 미국 내의 인종 차별을 끝내기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그 후,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목소리를 냈다. 또한 베트남인들의 운명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겨야 된다며 미국의 개입은 부당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죄 없는 미국 청년들의 피를 헛되이 쏟는 것이라며 전쟁을 비판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전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1968년 흑인 청소미화원의 파업 데모를 지원하러 그해 4월 멤피스로 내려와 모텔에서 생활하며 흑인 미화원들의 데모에 동참하였다. 그는 ‘나는 내 양심을 죽이느니 차라리 앨라배마의 고속도로에서 죽겠다’며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협박이나 일부 백인 지도자들의 타협 주장 역시 거절하였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 되어가는 시기인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의 흑인 미화원 파업운동을 지원하러 내려갔다가 한 모텔 발코니에서 미리 잠입해 있던 백인 우월주의자이며 인종차별주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폭력노선과 흑인 분리 독립을 주장하던 다른 흑인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많은 지지자를 획득했고 흑인도 인간이라는 시각을 촉진시켰다. 1986년부터 미국에서는 그를 기려 그의 생일 1월 15일에 가까운 매년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2세의 날로 정하고 연방 정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온화한 분홍색 박물관 건물이 외객을 반긴다. 버스에서 내리자 KING이라는 글자가 화단에 놓여 있다. 조금 걸어서 올라가니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무덤이 물속에 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자유롭게 됐습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넓은 수영장 같은 물속에서 하얀 분수가 솟구쳐 오른다. 무덤 앞에는 꽃과 함께 성화가 피어오른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의전시물을 관람했다. 벽면에 루터와 간디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전시실 앞에는 그의 생애 동안 활동해온 족적을 사진자료와 같이 전시하고 있다. 간디의 물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간디의 유언장 발견으로 그의 유품을 여기 옮겨온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간디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다. 작은 길을 건너서 마틴 루터킹 국립 역사관으로 갔다. 그곳에는 흑인들의 활동 모습을 담은 대형 벽보가 걸려있다. 실내에는 자연과 함께 그의 생활상을 전시해 놓았다. 야외에는 간디 동상을 세워 놓았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그의 생생한 족적을 본 보람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