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집값과 전월세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셋집에서 쫓겨난 일가족을 포함해서 17명이 자살하였다. 2023년, 전세 사기를 당한 2-30대 청년 4명, 40대 1명이 극단적 선택 또는 과로사로 사망했다. 부동산 문제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은 경우는 1990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사람이 죽어야만 정부는 움직이는 것일까? 미추홀구 전세 사기 피해 청년이 지난 3월 연이어 2명이 사망하니 정부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경매를 유예시키고,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전세 자금 대출을 저금리 대출로 전환하도록 하는 등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세 사기 피해를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가?
전세 사기 피해 구제 대책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전세 사기 피해 문제를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가란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전세 사기 피해 문제가 당근마켓 사기, 보이스피싱 사기와 비슷하다면, 정부는 예방에 집중할 일이지 피해 대책에 발 벗고 나설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전세 사기는 당근마켓 사기, 보이스피싱과는 사안의 무게감과 정부의 귀책 정도가 다른 사안이다.
전세 사기는 생존에 필수적인 재화인 주거와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세 보증금과 관련한 사기라는 점에서 여타 사기와는 무게감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전세 사기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정부의 방만한 전세 자금 대출과 전세 보증 보험 운영, 부실한 임대 사업자 관리 등 제도의 빈틈을 타고 깡통 전세가 만연하고 전세 사기꾼들이 득세한 것을 볼 때, 정부의 귀책사유가 적지 않다. 전세 사기를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재난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하지만 전세 사기는 사회적 재난이 아니며 모든 사기 피해는 평등하다는 원희룡 장관의 발언을 볼 때, 정부의 인식은 전세 사기 문제는 정부의 귀책으로 인한 책임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사기 사건이기에 정부가 수습해 준다는 시혜적 관점이 엿보인다.
전세 사기 특별법 내용과 쟁점
전세 사기 피해 주택 경매 유예, 전세 사기 피해자 전세 자금 대출 연장 및 저리 대환 대출 등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처한 당장의 시급한 상황을 완화해 주는 정책 외에 굵직한 전세 사기 피해 구제 대책은 크게 네 가지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피해 주택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공공이 전세 사기 피해 주택을 매입하여 피해자들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전세 보증금 채권을 공공이 매입하는 방안, 최우선 변제금 지원 방안 등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 중 피해 주택을 매입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대책으로는,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우선 매수권을 부여해 피해 주택이 경매 낙찰되었을 때 경매 낙찰가로 낙찰자보다 앞서 주택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주택 구입을 위해 저리로 경락 잔금1) 대출을 제공해 주는 대책을 마련하였다. 만약 전세 사기 피해자가 전세 주택을 매입하고 싶지 않다면, 정부가 우선 매수권을 통해 주택을 매입해 전세 사기 피해자에게 공공 임대 주택으로 제공한다. 여기까지는 여야 간에 이견이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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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전세 사기 특별법에 대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서 마지막까지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① 전세 사기 피해자 범위, ② 전세 보증금 채권을 공공이 매입하는 방안, ③ 최우선 변제금 지원 방안이었다. 25일 특별법 통과라는 데드라인을 정해 두고 여야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쟁점은 빠르게 좁혀져 22일 국토교통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여야 간의 최종 합의가 이루어져 25일 국회에서 전세 사기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전세 사기 특별법 대상이 되는 피해자 범위는 처음에 비해 상당히 넓어졌다. 정부의 초기 안은 주택의 면적‧전세 보증금‧소득 제한, 대항력‧우선 변제권 확보, 근생 빌라 제외 등 여러 제약이 많아 전세 사기를 당하고도 피해자 범위에 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특별법에서는 면적, 소득 제한 삭제, 전세 보증금 5억 이하, 임차권 등기, 무자본 갭투자 임대인의 피해자 등 전세 사기 피해자 범위를 상당히 넓혔다.
야당과 피해자들은 이사를 가고픈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이사를 갈 수 있도록 전세 보증금 채권을 정부가 먼저 매입하고 추후 경‧공매를 통해 정부가 회수하는 ‘선지원‧후회수’를 제안했고, 정부 여당은 공공의 재정을 투입해 전세 보증금 채권까지 매입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전세 보증금 채권 매입은 특별법에 담지 못했지만, 조세 채권 안분(임대인 세금 체납액 주택별로 배분), 주택도시공사 경‧공매 대행 등 전세 보증금 채권 매입 없이는 진퇴양난이었던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문제를 별도로 푸는 방안을 담았다.
여야 간 가장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전세 사기 피해 주택이 경‧공매로 넘어갔을 때 임차인이 받을 수 있는 최우선 변제금 지원 대상 확대 여부였다. 건물주, 중개사 등이 공모해 주택 가격을 속이고 선순위 근저당이 있는 주택에 전세 세입자로 들어간 이들 중에는 최우선 변제금도 전혀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전세 사기 피해자 중 세 번째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30대 여성도 재계약 시 보증금을 7,200만 원에서 9천만 원으로 올려 줬다가 최우선 변제금 2,700만 원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 경우이다.
결국 최우선 변제금을 받지 못하는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게 정부가 최우선 변제금을 지원해 주는 방안이 특별법에 담기지는 못했지만, 경‧공매 시점의 최우선 변제금만큼 최장 10년간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최우선 변제금을 넘는 금액은 최대 2억 4천만 원 한도에서 저리(연 1.2~2.1%)로 대출해 주기로 하였다. 전세 사기 피해로 전세 자금 대출을 상환하지 못해 신용 유의자2)가 될 위기에 처한 이들을 위해서는, 최장 20년간 전세 자금 대출 무이자 분할 상환과 20년간 연체 정보 등록‧연체금 부과를 면제해 준다. 정부의 금융 지원을 통해 최우선 변제금에 상응하는 이자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는 의도이다.
전세 사기 특별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 사기 피해자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부족한 법안이지만, 간만에 국회에서 대화와 타협의 의회주의가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마냥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특별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전세 사기 피해자의 사각지대가 존재하며, 피해자들에 대한 부채 중심의 지원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2021년 하반기, 22년 상반기가 전세 가격 정점이었던 때임을 감안한다면 하반기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전세 보증금 미반환 사기/사고가 터져 나올 것이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의 말처럼 ‘전세 사기 특별법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정부와 국회는 전세 사기 피해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전세 사기 피해 사각지대를 메워나가야 한다.
1) 경매 낙찰가에서 입찰금 제외한 나머지 금액(편집자 주).
2) 신용 상태가 위험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