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일주스가 1500원, 서울 강남 매장에 5000원짜리 옷...
성장정체-> 底물가. 소비위축 악순환, 정부 대책 세워야
6일 서울 광진구 건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한 생과일주스 전문점 '쥬씨'. 14평방미터(약4평) 남짓한 매장에서 주문을 받은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이곳에선 생과일주스 한 잔(약 500ml)이 1500원이다. 일반 점포의 4분의 1수준이다. 회사원 전민호(32)씨는 "너무 싸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마셔봤는에 맛을 보고 나선 10분씩 줄을 서서도 사먹는다"고 말했다.
2009년에 이 매장을 연 윤석제(31)대표는 올 5월부터 가맹점 사업을 시작했는데, 반년 만에 매장수가 92개로 늘었고, 개점 앞둔 매장까지 포함하면 240군데가 넘을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윤씨는 "과일을 직접 수입하거나 경매로 한번에 10t이상씩 구매해 1000평 규모 창고에 보관해놓고 자체 배송하며, 주스컵도 공장에서 직접 떼어와 가격을 낮췄다"고 말했다.
크고 작은 옷가게 100여 곳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 하루 유동인구가 10만명이 넘는 쇼핑의 메카다. 요즘 이곳엔 커피 한 잔 값보다도 싼 5000원짜리 옷들이 즐비하다. 대학생 김모씨는 "가격이 싸면 품질도 나쁠 것 같아 꺼렸는데 치마랑 키셔츠를 사서 입어보니 나쁘지 않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이곳에서 3년째 장사하고 있다는 자영업자 A씨는 "예전엔 초저가 상품이라도 1만원이 하한선이었는데 요즘은 5000원으로 가격 질서가 잡혀나가는 느낌 "이라며 "손님을 끌려면 마진을 대폭 줄여서라도 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소비재와 서비스 시장을 중심으로 '가격 파괴'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들어 나타나는 가격 파괴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저물가'와 맞물리면서 일본형 '장기 불황'으로 가는 전조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주거비 급등 따라 소비 여력 더욱 줄어
-늘어나는 가격파괴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내구성이 강한 물건들은 아예 구입을 안 하기 때문에 가격 파괴가 없고, 음식료 등 그래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여는 제품을 중심으로 가격 파괴 현상이 나타난다"며 "당장은 소비자 부담을 덜어주는 것 같지만 가격 파괴가 소비 전반으로 확산된ㄴ다면 오히려 경기가 계속 가라앉으면서 투자. 고용이 위축되고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소비자 물가는 11개월째 0%대에 머무르고 있다. 1965년 1월 이후 사상 최장 기간 0%대 기록이다. 일시적으로 야채. 과일값이 급등해 장바구니 물가는 비싸다는 불평도 있지만, 현장에서는 '가격 파괴'가 세를 확장하고 있다.
외식업계의 스타로 떠오른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운영하는 '빽다방'은 1500원짜리 커피를 앞세워 올해 200개 이상 점포를 열었다. 1만원을 훌쩍 넘던 수제 버거는 3000~4000원대로 내려앉았고, 고습 식당에서나 맛볼 법한 도톰한 스테이크를 7000원대에 판매하는 식당도 등장했다. 수도권 골프장의 주중 18홀 그린티는 18만~20만원이지만, 제주도 골프장에선 3만~4만원대로 낮춰 폭탄 세일도 하고 있다.
가격 파괴는 불황기에 지갑 열기를 꺼리는 소비자들을 붙잡기 위한 전형적인 마케팅 전략이다.
하지만 최근엔 가격 파괴가 저성장 추세와 맞물리면서 경제에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 경제는 2011년 이후 2~3%대 . 저성장 트랩에 갇히면서 실질 임금 상승률이 1%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서 주거비가 급등하는 바람에 중산층과 서민층의 소비 여력은 더욱 줄었다.
◇"가격 파괴가 日처럼 불황을 장기화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가격 파괴 현상은 1990년대 중반 일본이 '20년 불황'에 진입하기 직전에도 일어났다. 1990년대 들어 일본에선 소비사 침체하고 물가 상승률이 떨어지는 일이 벌어지자 소비재 기업을 중심으로 고육지책으로 가격 파괴에 나섰다. 햄버거 가격은 59엔(550원)까지 떨어졌고 우유보다 싼 100엔(940원)짜리 맥주도 등장했다. 청바지는 한국 식당 냉면값에도 못 미치는 880엔에 팔렸고, 젊은이들은 380엔짜리 티셔츠를 사 입었다. 당시는 '좋은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이라고 환영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장기 불황에 빠지자 그런 목소리는 사라졌다. 기업이나 가계나 투자.소비를 줄이면서 결국 '성장정체->소득감소 -> 투자.소비위축'이란 악순환에 빠져들었다.
전문가들은 '가격 파괴 경쟁'이 소비 침체와 맞물리면 일본식 장기 불황의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가격을 내려도 판매가 늘지 않으면 투자와 고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소비자들이 일본처럼 물가가 떨어진다는 예측으로 소비를 줄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유가 하락으로 가격 하락 요인이 생긴 에너지 공공요금 인하 시기를 나중으로 미루는 등의 정책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