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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모든 말씀이 상호간 짝이 있다고요?
(사 34:16)
성경은 ‘하나님 나라’라는 총체적 주제를 언약적 구속사라는 방식을 통해 계시하심으로 창세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한 작정으로서 구속의 경륜(엡 1:3-14)을 세상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전개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계시사(啓示史)이다. 성경을 달리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계시는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 기원을 두고 ‘선 계획(언약) 후 성취’라는 구조적인 맥락을 통해 세상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실체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원리에 근거해 하나님의 계시의 정체성은 구약시대에는 불가피하게 모형과 예표로서의 성격을 띠면서 나타나게 되고, 신약시대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총체적으로 실체화됨으로 마침내 성취의 절정에 이르게 된다(마 1:1, 고후 1:20).
이런 관점에서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에 소속된 백성들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예표적 소임을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 가시적으로 출현하게 된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참 하나님의 나라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인 새 이스라엘로 실체화되기에 이른다(갈 3:29, 6:16).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도구로서 한시적으로 방편적 역할과 기능을 담당했다. 스데반에 의해 확인된 대로 역사적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로 부르는 의미 또한 이런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행 7:38). 다시 말해 교회의 그림자로서 구약의 역사적 이스라엘은 신약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새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진정한 약속의 자녀들로 그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갈 3:7, 29, 6:16).
따라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속에 명시된 ‘아브라함의 씨’로서의 후손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적이고 육체적인 후손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었다(창 12:1-3, 22:18).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곧 교회공동체를 가리키는 언약의 이중적 의미를 처음부터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행 3:25-26, 갈 3:7, 29).
이처럼 언약적 구속사의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삼아 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성의 원리를 따라 진행되는바 모형과 실체 및 상징과 실상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는 모형과 상징을 통해 신정왕국에서의 구원의 삶을 선취적으로 경험함으로 천상적 삶의 실질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물론,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엡 1:4-6, 고전 10:31).
그렇다면 성경이 자증하는 언약적 구속사 진행과정에서 이런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서 확인되는 모형과 실체 및 상징과 실상의 계시적 상호 관계가 본문(사 34:16)에서 지적하고 있는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말씀의 상호 유기적이며 문맥 속에서의 연관을 통해 각 구절과 신학적 주제와 제반 사건들의 의미를 서로 보충하며 보완하는 가운데 그 본의를 보다 풍성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일까.
근래에 평소 가깝게 교제를 나누고 있는 어느 선배 목사님과 이런 말씀을 직접 나눈 적이 있다. 그 분이 한 번은 어느 과학 전시회를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전시회를 설명하는 주최 측의 한 직원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최초의 여자인 하와의 창조와 관련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라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남자의 갈비뼈는 당초 24개에서 23개가 돼야 하고 여자의 갈비뼈는 처음의 아담처럼 24개여야 할 텐데 의학적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실제로 남녀의 갈비뼈 숫자는 공히 24개씩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내용을 거짓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안내자가 아마도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 안내자는 당초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나를 취했으니 이후부터 남자의 갈비뼈는 23개씩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래의 유전인자는 아담의 ‘후천적인 장애’(?)와 무관하게 여전히 본래의 형질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잠시 오해했던 것 같았다. 자녀가 부모에게 장기 중 하나를 떼 내어 이식했다고 해서 그 자녀가 장성한 후 결혼해 자식을 낳게 될 때에 결코 해당 장기가 없는 자녀를 출산할 리 만무하다. 후천성 장애는 결코 유전되지 않는다. 유전 인자 자체가 변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배 목사님도 그 안내 직원의 얘기를 듣고는 한동안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후에 어떤 기회를 통해 몇 몇 의사에게 직접 확인해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녀 공히 갈비뼈의 수가 24개씩인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는 평소 본문의 말씀(사 34:16-17)을 성경 전체 속에서 모든 성경말씀은 다 짝이 있다는 내용으로 확대해석해 적용시켜 오셨던 선배목사님의 관점에서는 아담의 갈비뼈 문제와 관련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짝 된 말씀’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아담의 갈비뼈 중 하나를 취해 하와를 만드는 데 사용했으니 아담의 갈비뼈는 23개일 수밖에 없겠으나 그의 후손 중 남자들의 갈비뼈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24씩이란 사실에 대한 증거본문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얘기인가.
필자로서는 본문 말씀에 대한 선배목사님의 이런 해석과 관점을 단지 하나의 에피소드를 듣는 양 웃음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그 선배목사님의 태도가 진지했었다. 그래서 필자 또한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본문의 이사야서 말씀(34:16-17)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과 모든 주제와 모든 내용에 있어서 늘 짝된 말씀으로 상호 보완/보충해 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이사야서 34장 전체 내지는 가깝게는 34:8부터 언급하고 있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확실성과 필연성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 전해 드렸다. 다시 말해 전체의 문맥 속에서 해당 본문과 구절을 해석해야지 전체를 간과한 채 주어진 구절을 파편적으로만 취사선택해 해석하다 보면 자칫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주관적 해석으로 치우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자 그 선배목사님은 곧바로 역정을 내면서 모든 성경 구절은 서로를 보충하고 보증해 주는 짝이 있다는 자신의 해석적 관점은 본문에서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에 어떤 경우에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고 강변을 했다. 더 이상의 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그 선에서 대화를 중단해야만 했다.
과연 성경의 각 구절들과 사건들은 그것을 보완하고 보충해 주는 짝 된 다른 말씀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에 있어서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볼 때, 예표나 모형 및 이에 대응하는 실체와의 관계 속에서 상호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태면 구약의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예표적 사건이라든가, 그런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양은 본질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예표라든가, 구약의 성막이 의미하는 바가 임마누엘 계시의 실체로 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구절과 사건과 내용들이 한결 같이 그것에 상응하는 다른 말씀들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사야서 본문의 말씀은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의 신학적 상응성을 언급하고 있는 말씀도 아닐뿐더러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그에 상응하는 짝된 말씀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도 아니다. 적어도 34:8부터 언급하고 있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성 선언을 문맥을 따라 해석해 보면 금방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사야 34:16 말씀의 본의는 에돔에게 내려질 공의적인 심판에 대한 불가피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면서 심판의 결과로 에돔 지경이 폐허가 돼 사람의 인적은 끊기고 대신 짐승들의 처소로 변해질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폐허가 된 에돔 지경을 자신들의 처소로 삼아 살아가게 될 뭇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각기 종류대로 지으신 동물들이라는 지적이다. 본 절에서 특별히 ‘여호와의 책’이 의미하는 바는 다양한 견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맥적으로 볼 때,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각종 짐승들의 창조기사를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사 지은 바 된 각종 동물들의 처소가 돼 버린 에돔 지경은 회복 불가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철저히 멸망당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17절이 이를 명백히 증거 해 준다.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친수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주셨으니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사 34:17).
그러므로 이사야 34:16에 언급된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묵상해 보자.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표현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확대해석해 적용할 성질의 내용이 아니다. 문맥상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나오는 각종 들짐승과 각종 새들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이들을 각기 종류와 성별대로 지으신바 이제 이들을 인도해 에돔 지경에 영구히 살게 하심으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확실성 및 영속성을 확고하게 보증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성 예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특정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코끼리 다리는 통나무처럼 생겼다’라고 전체와 문맥 속에서 해당 본문을 해석해야지, ‘코끼리는 통나무처럼 생겼다’라고 부분을 전체로 확대 해석한다면 이는 소경의 자의적 해석일 뿐, 정당하고 바른 해석일 수는 없다. 21세기 한국 교회 현장에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란 말씀이나, 삼하 7:29의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등의 말씀들도 하나님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심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며 편의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말씀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해석은 바른 믿음에 따른 바른 순종력의 발휘를 유발시킴으로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첩경으로 작용한다
첫댓글 이글을 읽으면서 질문이 많이 생기네요^^
평생 배우고 들어도 성경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